언제나 그랬듯, 본문을 다큐가 아니라 소설로 보겠다.
-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 구성, 편집된 기록이라는 뜻이다.
- 이렇게 쓰인 의도가 있고, 의도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없는 일을 거짓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 있었던 일을 부각하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하여, 일련의 사건 전개를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담았다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 세상에서 기록된 글 중에 진정한 의미의 다큐, 즉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없다.
- 하나도 없다.
- 일기조차도, 회의록조차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다.
- 실제 상황을 강조 혹은 축소, 부각 혹은 생략하여 편집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 그 안에 드러나는 혹은 드러나지 않은 의도와 메시지가 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기록된 사실>과 <기록되지 않은 의도>를 함께 읽는 것이다.
- 물론 전자보다 후자는 어렵다.
-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 하지만 숨은 의도를 읽지 못하면, 글을 읽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 왜냐하면 글을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글만 읽고 의도를 읽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런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바리새인이 그랬다.
- 성경을 수없이 읽었지만,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했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뜻의 정수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였다.
따라서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기록되지 않은 숨은 의도를 읽는 훈련이 더욱 필요하다.
-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지 않고 숨겨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숨은 의도를 읽지 못하면, 결국 바리새인이 되기 때문이다.
-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지만, 그 열심으로 예수님을 죽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사건이 있다.
- 이 사건의 사실 여부도 중요하다.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역사 속에 이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 일부는 드러나 있지만, 상당 부분은 숨겨져 있다.
- 십자가 사건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의도를 읽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보고 이렇게 오해한다.
-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듯, 하나님은 나에게도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주실 거야.
- 생명도 주셨으니, 돈, 명예, 권력, 건강 모두 주실 거야.
여전히 이런 생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 이런 신앙 생활을 직접 가르치고 조장하진 않아도, 눈감아주는 목사가 얼마나 많은가.
- 그래서 여전히 신앙을 욕망 분출 수단 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 이런 사람에게 십자가 죽음은 어리석은 것 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서론이 너무 긴데, 그래도 한 마디만 더하면,
- 신앙을 욕망 분출 수단 삼는 사람, 즉 하나님조차 거래 관계로 보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거래 대상으로 본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을 자신의 유익 여부만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 그래서 만약 자신에게 해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죽인다.
- 물론 육체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말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다.
- 이것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욕망 분출 수단 삼는 사람을 교회에서 용납하면 안 된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신앙을 욕망 분출 수단 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을 용납하면 안 된다.
-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죽인 후 나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 나도 죽인 후, 교회의 다른 사람들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 교회 밖의 사람들이 나쁜 생각 갖는 것은 당연하다.
- 그들은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 그들의 나쁜 생각을 통제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 그러나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
- 그런 사람은 정말로 우리와 교회를 죽일 수 있다.
우리와 교회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 우리와 교회는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 그러나 교회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죽임당하는 것이 문제이다.
- 죽은 교회를 통해 변질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와 우리 교회를 지켜야 할 필요는 없다.
- 하지만 예수님의 몸을 지킬 필요는 있다.
- 예수님의 몸을 통해 드러나는 복음을 지켜야만 한다.
- 그것이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역할이다.
- 바울이 이렇게 고군분투한 것도 예수님, 복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욕망 분출 수단 삼는 사람은 그리고 자신이 신앙을 수단 삼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있으면 안 된다.
- 이것이 성경에서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숨은 의도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어떤 <기록된 사실>과 <기록되지 않은 의도>가 있을까?
<기록된 사실>부터 보자.
-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 1-6절과 13-16절은 바울이 이동하는 이야기이다.
- 7-12절은 유두고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이다.
과연 바울 이동 이야기와 유두고 이야기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 이 둘을 연결시킬 때 본문의 핵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 이동 이야기는 복잡하다.
- 일단 경로가 복잡하다.
- 배를 타고 내리기도 여러 번, 걷기도 여러 번 한다.
- 너무 많아서 경로를 설명하는 것이 하찮아 보인다.
따라서 본문은 경로 자체를 설명하기보다, 복잡한 경로를 통해 다급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 게다가 '닷새만에(6)', '이레 동안(6)', '이튿날(15)', '다음날(15)', '그 다음 날(15)'이 다급함을 더 고조시킨다.
다급함을 통해 뭘 전하려 했을까?
-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려는 바울의 의지를 부각한다.
- 바울은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다.
[행 20:16]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 그렇게 될 때 복음이 가장 잘 전해질 수 있다고 바울은 생각했다.
그러면 왜 오순절까지 가야했을까?
- 바울은 지금 흉년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금을 가지고 있다.
[롬 15:25-26]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26)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오순절은 유대인의 3대 명절로 잔치를 위한 물질적 지원이 필요하다.
-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물질적 지원이 필요한 시기에 맞춰서 바울은 가려고 했다.
- 게다가 유월절에 더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 이방인 전도 결과를 보고하면 더 영향력 있는 결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복잡한 바울 이동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하는 것이 있다.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해치려는 음모이다.
[행 20:3] 바울은 배로 시리아로 가려고 하는데,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으므로, 그는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바울의 처음 이동 계획은 단순했다.
- 에베소에서 그리스로 갔다가 바로 시리아, 즉 베이스캠프인 안디옥에 들러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다.
- 아마 이렇게 갔으면 서두르지 않아도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여유 있게 도착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아직 무교절 전이고, 무교절에서 유월절까지는 50일 후이니, 그리스에서 시리아까지 두 달 이상의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유대 사람들의 위협으로 인해 경로가 꼬인다.
- 바울의 경로를 먼저 안 이들이 배에 숨어서 바울을 죽이려 했다.
- 그래서 바울은 즉시 배에서 내려서 최대한 육로로 이동한다.
- 배보다 육로가 살해 위협을 피하기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빌립보까지 걸어간다.
- 방금 지나온 지역이라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었으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다.
- 배 타면 금방인 거리를 어쩔 수 없이 오랜 시간 걷는다.
-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그런 후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드로아로 간다.
- 유대 사람들을 따돌리기 위한 것이고, 배 타는 거리를 최소로 한 선택이다.
같은 일이 13절에서 반복된다.
[행 20:13] 우리는 배에 먼저 가서, 배를 타고 앗소를 향하여 떠났다.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바울을 배에 태울 작정이었다. 바울이 앗소까지 걸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었다.
- 안 그래도 빠듯한 시간인데, 바울은 드로아에서 바로 배를 타지 않는다.
- 앗소까지 걸어간 후, 앗소에서 배를 탄다.
- 말하자면, 한 정거장을 걸어간 후 탄 것이다.
왜 그랬냐?
- 나오진 않지만, 유대 사람들의 위협 때문이다.
- 혹시라도 그리스에서처럼 드로아에서 출발하는 배에 숨어 있다가 죽이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일행을 먼저 배에 태워 아무 위협이 없는 것을 확인 한 후, 한 정거장 후인 앗소에서 탄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체된다.
- 여유 있던 일정이 빡빡해진다.
- 그래서 그토록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에 들를 수 없었다.
[행 20:16] 이런 행로를 취한 것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에베소에 들르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던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 이동 이야기는 세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 첫째로, 다급하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강력한 의지이다.
- 둘째로, 바울의 의지를 꺾으려는 유대 사람들의 살해 위협이다.
- 셋째로, 위협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바울의 의지이다.
이렇게만 정리하고 유두고 이야기로 넘어가겠다.
- 그래서 이 세 가지 메시지가 유두고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자.
유두고 이야기의 특징은 만연체라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설명을 자세히 하는데, 특히 다음 두 구절이 그렇다.
[행 20:9]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졸다가 삼 층에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일으켜 보니, 죽어 있었다.
- 창문에 걸터앉아 있던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었다. 라고 줄일 수 있다.
[행 20:11] 바울은 위층으로 올라가서, 빵을 떼어서 먹고 나서,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떠나갔다.
- 바울은 강론을 마치고 떠났다. 라고 줄일 수 있다.
- 빵을 떼어서 먹는다는 것,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했다는 것 모두 이전에 나왔다.
이 사건은 불필요하게 자세한 표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 결론부터 말해서, 세 가지이다.
- 첫째로, 밤새도록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강력한 의지이다.
- 둘째로, 사람들의 의지를 꺾으려는 졸음의 살해 위협이다.
- 셋째로, 위협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바울과 사람들의 의지이다.
- 즉, 바울 이동 이야기의 메시지와 같다.
복음을 전하고 듣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 7절: 강론이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 9절: 바울의 말이 오랫동안 계속되므로
졸음의 살해 위협을 표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 9절: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 9절: 몹시 졸다가
위협에도 꺾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 10절: 아직 목숨이 붙어 있습니다.
- 11절: 날이 새도록 오래 이야기하고
따라서 사도행전은 이 세 가지 메시지를 바울 이동 이야기와 유두고 이야기 모두에 담고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성경 전체에서도 중요하다.
- 첫째로, 예수님도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셨다.
- 둘째로,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결국 죽였다.
- 셋째로, 그러나 바리새인의 위협은 실패했고, 예수님의 의지는 꺾이지 않고 부활을 통해 계속해서 구원 의지를 보이신다.
- 이렇게 예수님 이야기도 크게 보면 본문의 흐름과 같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이런 구도를 반복해서 보여줄까?
이런 구도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로,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세력이 존재한다.
- 그래서 그 세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하고 좌절한다.
- 그들은 그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절대로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둘째로, 실패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
- 그래서 그 세력의 영향력이 제거되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그러니 언제나 주의하고, 만약에 실패하고 좌절했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 눈앞에는 그 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해 보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영향력은 미약해 보이지만, 이러한 전세는 반드시 역전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시고, 그 세력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성경은 이런 구도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록되지 않은 의도>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은 왜 이 시점에서 바울 이동 이야기와 유두고 이야기를 통해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할까?
- 왜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라고 권면하고,
- 왜 사람들에게 의지를 꺾으려는 위협이 있음을 경고하며,
- 왜 사람들에게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가지라고 권면할까?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 신앙에는 언제나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위협은 백신처럼 조금 앓고 지나가면 더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완전히 박살 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행 20:29~30]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 게다가 실제로 그 위협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 따라서 위협으로 신앙이 박살 날지라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 바울에게 앞으로 펼쳐질 신앙 생활이 그랬고, 바울에게 복음 들은 사람들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신앙 생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결론 - 박살 나도 유지되는 신앙은 무엇일까?
박살 나도 유지되는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이다.
- 왜 이렇게 말하냐면, 그만큼 신앙을 방해하는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 신앙을 떠나게 할 만큼 강하다.
- 동시에 하나님은 박살 난 신앙을 다시 회복하실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신앙을 떠난 사람을 회복시켜 돌아오게 하신다.
이러한 예는 너무 많다.
- 특히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제자들이 그랬다.
- 제자들의 신앙은 박살 났다.
- 그래서 신앙을 포기했다.
-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의 박살 난 신앙을 회복시키셨다.
만약 신앙이 박살 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세력을 과소평가한다면?
- 결국 우리의 신앙은 박살 난 줄도 모른 채 박살 날 것이다.
- 그래서 신앙에 회복이 필요한 줄도 모른 채 죽어갈 것이다.
- 바리새인처럼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상은 죽은 채로 살아갈 것이다.
반대로 만약 신앙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 우리의 신앙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한다면?
- 결국 박살 난 우리 신앙은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 회복될 가능성이 없으니, 포기해버릴 것이다.
- 세상에 굴복하여 세상에서의 돈, 명예, 권력, 안정만을 구하며 살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박살 나도 유지되는 신앙은 무엇인가?
먼저, 위협으로 인해 우리 신앙이 박살 날 가능성을 염두하고, 깨어있는 것이다.
-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서 언제나 위협을 조심하고, 경계하며, 위협에 대비하는 것이다.
- 그렇지 않으면 유두고처럼 죽는다.
동시에, 아무리 우리 신앙이 박살 나도 다시 회복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이다.
- 우리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더 강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에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의 강하심을 믿고 담대한 것이다.
- 그래야 바울처럼 유대 사람들의 위협에 살아남을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실제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 안타깝게도, 없다.
- 죽음의 위협이 오면, 우리는 모두 신앙을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죽음의 위협이 없는 변질된 신앙에 빠질 수 밖에 없을까?
- 그것도 아니다.
- 우리에게는 죽음을 감당할 용기는 없지만, 죽음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 죽음의 위협 속에 우리가 신앙을 버리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으셔서 신앙을 지켜주실 것이다.
-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다.
이 믿음이 박살 나도 유지되는 신앙 생활을 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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