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락 구분
① 1-6절: 구제 문제로 인한 일곱 일꾼의 선발 - 스데반의 등장
② 7절: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확증 - 새로운 시작 암시
③ 8-15절: 유대인과 스데반의 논쟁 - 성전과 율법
1-6절: 구제 문제로 인한 일곱 일꾼의 선발 - 스데반의 등장
해석의 어려움은 분쟁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왜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히브리 유대인에게 소홀히 여김을 받았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 두 가지이다.
- 의도적이었느냐, 아니면 단순 실수였느냐이다.
그런데 아마도 단순 실수였을 것 같다.
- 왜냐하면 의도적이었다면, 이는 공동체를 파괴한 죄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 죄를 다루지 않고 넘어갔다는 것은 죄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따라서 단순 실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 아마도 말이 안통해서 일어난 일이지 않을까.
따라서 이 분쟁 사건은 자체적으로는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다.
- 분쟁 원인을 모르니까.
- 의미는 일곱 일꾼이 뽑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전부인 것 같다.
어쨋든 이 일을 계기로 일곱 일꾼이 뽑힌다.
- 참고로 사도행전에 '집사'라는 단어는 없다.
- 이들은 단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일꾼일 뿐이다.
- 아마도 밥 분배 일과 재정 일을 담당했을 것이다.
- 하지만 정확하게 이들이 뭘 했는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스데반과 빌립 외에는 누군지도 알 수 없다.
- 사도행전에 안나온다.
따라서 일곱 일꾼 선발 사건 역시 자체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위한 보조 사건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제부터 스데반 이야기가 7장 끝까지 나온다.
- 7장은 60절까지나 있다.
- 스데반이 유대인들과 논쟁하면서 장대한 설교를 한 후에 순교하는 장면이다.
- 앞의 본문은 스데반 이야기를 도입하기 위한 서론 역할이다.
7절: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확증 - 새로운 시작 암시
이 시점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 스데반이 죽임 당하여 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행 8:1]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사도들 이외에는 모두 유대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 그래서 예루살렘 안에 교회가 사라지고 주변 이방 지역에서 다시 모이게 된다.
그런데 그러한 파괴가 일어나기 직전에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의 최고점에 이른다.
[행 7:7]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제사장들은 믿음에 순종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다.
-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영적 지위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제사장들까지 믿었다는 것은 교회의 영향력이 예루살렘 안에서 막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점에 이르렀을 때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된다.
- 그 신호탄이 스데반의 죽음이다.
- 그리고 스데반 죽음의 과정이 바로 8절부터 시작된다.
8-15절: 유대인과 스데반의 논쟁 - 성전과 율법
결론부터 말해서, 스데반에 대한 유대인의 공격 포인트는 성전과 율법이다.
-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 성전과 율법이 유대인들의 영적, 민족적 기둥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그들이 스데반을 죽일만큼 혐오스러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스데반을 공격한 주동자 세력은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다.
- 리버디노는 '자유민'이라는 뜻으로, 종에서 자유를 얻는 유대인들이다.
-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종이었던 이유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끝까지 항거해서 싸운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율법과 성전을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스데반이 더욱 더 미웠던 것이다.
참고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이유도 스데반과 동일하다.
- 예수님도 율법주의의 헛점을 파헤치셨고,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자기 자신이 성전을 대체하심을 선포하셨다.
- 이 두 가지 때문에 율법을 대표하는 바리새인과 성전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예수님에 대한 살의가 극대화되었다.
그렇다먼 우리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도대체 율법과 성전이 뭐길래 이럴까?
-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왜 율법과 성전을 공격할까?
- 왜 애꿎은 율법과 성전을 못잡아먹어서 안달일까?
-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죽임까지 당할까?
- 율법과 성전을 공격하는 것이 목숨까지 걸만큼 중요한 것일까?
어쨋든 성경은 율법과 성전을 공격하는 것이 목숨까지 걸만큼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내 생각에, 복음의 반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면, 복음의 나머지 반은 율법과 성전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 그래서 만약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깊이 깨달았다고 해도, 율법과 성전의 문제점을 모르면 결국 또 다시 율법과 성전에 몰입하는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이 될 수 밖에 없다.
-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 하는 말이다.
율법과 성전은 상반되는 두 가지 성질을 갖는다.
- 첫째로,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두 가지이다.
- 둘째로, 하나님의 본질을 '가리는' 대표적인 두 가지이다.
- 만약 첫째 성질만 가진다면, 무조건 추구하면 되는 것이고, 둘째 성질만 가진다면, 무조건 배척하면 된다.
- 그러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가지기 때문에 오해가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 추구하긴 추구하되 일정 부분 배척해야 하고, 배척하긴 배척하되 완전히 배척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하나님을 드러내냐?
-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말씀이다.
- 성전은 하나님 말씀대로 지어지고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 둘 다 하나님의 성품이 잘 담겨있다.
- 율법과 성전의 바른 의미를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점이 하나님을 가리냐?
- 마치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꼴이다.
- 그 상황에서 달을 가리는 가장 강력한 방해 수단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된다.
- 즉, 하나님을 보려는 사람들이 율법과 성전 안에 갇혀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그렇게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율법과 성전을 봤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나님을 봤다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다.
-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을 봐야겠다는 마음 자체를 가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주신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잘 행하면,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흉내를 내면,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종속되어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과 성전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는 것이다.
- 하나님은 율법과 성전을 통해 사람과 사랑의 관계,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셨다.
- 그러나 사람은 율법과 성전을 통해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어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종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이는 인간 관계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 우리가 다른 사람을 칭찬할 때 같은 일이 일어난다.
- 상대방을 칭찬하고 높이는 이유가 정말 상대방에게 감탄했기 때문일 때는 적다.
-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한다.
- 상대방은 높이고 자신은 낮춰서 내가 상대방에게 복종하는듯 보여줘서, 결국 실질적으로 상대방을 지배하려 할 때 칭찬한다.
-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 이렇게 칭찬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지배하여 춤추게 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지배욕을 상징하는 것이 율법과 성전이다.
-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율법과 성전을 이렇게 공격하는 것이다.
- 목숨 걸고 공격하는 것이다.
- 이 안에 인간의 가장 심각한 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지배하려는 원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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