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14절부터 시작된 바울의 자기 변론의 결론 단락이다.
-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을 변론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핵심은 사도의 기준이다.
-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외형에 대한 관점이 달랐다.
- 바울은 외형이 화려하지 않고 초라하더라도 복음을 바르게 전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했고,
- 고린도 교회는 바른 복음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외형까지 화려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차이로 바울에 대한 판단이 달랐다.
- 고린도 교회는 초라한 외형을 가진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 바른 복음을 가졌다면 저렇게 고난과 박해를 당할 리 없다는 것이다.
- 고난당하는 이유가 바울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바울을 거부했다.
반면에 바울은 초라한 외형과 상관없이 자신은 바른 복음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 오히려 초라한 외형이 바른 복음의 증거라고까지 말했다.
- 하나님은 죄 없는 자신에게 죄를 씌우셨다.
- 그것을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 즉, 자신의 고난은 하나님의 의를 전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며 수단이다.
- 따라서 초라한 바울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사도라는 것이다.
[고후 5:21]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후 6:8~10] ・・・・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인식 차이 - 일원론 vs 이원론
왜 이런 어긋남이 생겼을까?
-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 체계 차이 때문이다.
바울은 일원론에 기반한 수평 구조 인식 체계를 가졌다.
- 세상을 근원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했다.
- 각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차이를 옳고 그름, 상위나 하위로 구분하지 않았다.
- 그래서 모든 것을 동등하게 인식했다.
그로 인해 외형의 차이에 대해서도 구분하지 않았다.
- 화려함과 초라함을 옳거나 그름, 상위나 하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 외형 역시 있는 그대로 봤다.
- 그래서 외형을 투과하여 내면까지 볼 수 있었다.
- 대상의 본질을 보려 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원론에 기반한 수직 구조 인식 체계를 가졌다.
- 세상을 상위와 하위로 구분했다.
-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대상이 가진 가치와 지위로 인식했다.
그로 인해 외형의 차이에 대해서도 가치 평가를 했다.
- 화려함과 초라함을 옳고 그름, 상위와 하위로 구분했다.
- 그 결과 외형 안에 있는 내면까지 관심 갖지 못했다.
- 시선이 외형을 투과하지 못하여 내면을 볼 수 없었다.
- 대상의 본질을 볼 수 없었다.
- 대상이 가진 가치를 판단하는 데 매몰되었다.
이원론으로 인한 결과 - 옹졸함
게다가 이원론은 단순히 세상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 결국 이원론은 세상을 전부 부정하고 거부하고 만다.
예를 들어, 세상에 100명의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 그들을 이원론에 따라 키를 기준으로 둘로 구분했다.
- 평균보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으로 말이다.
- 그래서 작은 50명은 배제하고 큰 50명만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구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 50명을 또 구분한다.
- 큰 25명과 작은 25명으로 말이다.
이런 구분이 반복되면, 결국 가장 큰 사람 한 명만 남는다.
- 그 사람만 인정되고, 나머지 99명은 배제된다.
하지만 이 역시 끝이 아니다.
- 그 한 사람 역시 영원히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져 키가 줄거나, 사고로 장애가 생겨서 바로 설 수 없으면, 곧바로 배제된다.
- 그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키가 가장 큰 사람도 몸무게를 기준으로 하면 배제될 수 있다.
- 또한 키와 몸무게에서 모두 인정받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 상황이 바뀌어서 키가 작은 것을 상위에 두는 상황이 되면, 또 배제된다.
이렇게 이원론은 결국 모든 사람을 배제한다.
- 이원론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인정받는 순간은 잠깐이다.
그 결과 이원론을 가진 사람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인식이 좁을 수밖에 없다.
- 옳다고 여기고 존중하는 대상을 최대로 잡아도 세상의 반밖에 안 되고,
- 실제로는 아무도 없다.
- 모든 가치 기준에 전부 부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키가 크면서 동시에 키가 작은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을 거부한 것이다.
-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거부한 명백한 명분이 있다.
- 그것은 초라한 외형이었다.
- 바울이 워낙 고난과 박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초라한 외형은 말 그대로 명분일 뿐이다.
- 이원론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을 거부할 명분을 만들 수 있다.
- 그런데 그 상황에서 바울이 제시하는 복음이 거슬렸을 뿐이다.
- 바울이 불편했을 뿐이다.
- 그래서 바울을 거부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이원론을 가진 사람은 거부하고 싶은 사람을 언제나 거부할 수 있다.
- 명분을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사람을 거부하는 데 필요한 것은 의지뿐이다.
- 누군가를 거부하고 싶기만 하면, 누구든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원론이다.
-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옹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후 6: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을 가진 사람은 자기 우물 안에 점점 갇힐 수밖에 없다.
-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대상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자기 우물 안에 갇히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게다가 자기 우물에 갇히는 것도 끝이 아니다.
- 자기 우물조차 조금씩 배제해 나간다.
-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게 산 사람이 클리셰처럼 죽기 전에 하는 말이 있다.
- 지난 인생이 헛되다는 고백이다.
- 모든 것을 배제했기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이원론의 숙명이다.
인식 체계 전환 요구 - 옹졸한 마음을 넓히라!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권고한다.
- 이는 일차적으로 바울을 수용하고 인정하라는 뜻이다.
- 바울을 거부하는 마음을 거두라는 뜻이다.
- 바울과 화해하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뜻이다.
- 그래야 우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을 기회라도 생기기 때문이다.
- 그래야 마음이 변할 계기라도 생기기 때문이다.
[고후 6:13]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고후 7: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망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화해는 쉽지 않다.
- 단순히 바울과 잘 지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 갈등이 인격의 가장 깊은 인식 체계 차원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 일시적으로 마음을 먹어서 바울과 화해할 수 있지만,
-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다시 불편하게 만드는 순간 관계는 바로 깨질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요구는 근원적으로 인식 체계를 바꾸라는 뜻이다.
- 모든 것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이원론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 바울 자신과 같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일원론을 가지라는 뜻이다.
- 그렇게 구분에서 벗어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인식 체계를 가질 때만 바울까지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식 체계를 가질 때만 바울의 외형을 투과하여 내면까지 바라볼 수 있고,
- 그제야 바울의 초라한 외형에 숨겨진 내면을 볼 수 있다.
- 그래야 바울의 내면에 있는 진정한 복음까지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구분이 아닌 용납하는 인식 체계를 가질 때 세상과 자신까지 수용할 수 있다.
- 그래야 자기 우물조차 거부해 가는 과정을 멈추고,
- 자기 우물을 점차 확대하여 세상의 크기만큼 넓힐 수 있다.
- 그제야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 세상과 하나님까지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마음을 넓히라는 바울 권고에 담긴 뜻이다.
마음을 넓히는 방법 -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렇다면 인식 체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인식 체계는 평생의 경험이 응축되어 나타난 결과이다.
- 바울도 회심 이전에 이원론으로 세상을 구분했다.
- 그래서 예수님을 초라한 외형을 근거로 불의한 자로 판단하여 정죄했다.
- 즉, 고린도 교회와 같은 인식 체계를 가지고 판단하며 행동했다.
왜냐하면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 옳은 자와 그른 자, 화려한 자와 초라한 자가 있는데,
- 강자, 옳은 자, 화려한 자는 인정받고,
- 약자, 그른 자, 초라한 자는 무시당하는 것을 평생 봐왔기 때문이다.
- 그래서 강자, 옳은 자, 화려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노력했고,
- 그러한 노력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배웠다.
-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비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 게다가 자신조차 그런 노력을 통해 강자가 되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경험을 가졌다.
그 경험에 기반하여 바울은 이원론으로 세상을 봤고,
- 그래서 초라한 예수님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 초라한 존재는 의로울 수 없는데,
- 초라한 예수님이 자신을 의로운 그리스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는 전형적인 신성모독이다.
그런데 바울은 새로운 경험을 했다.
-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은 초라한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고, 기적으로 그것을 입증하셨다.
그 경험은 평생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인식 체계를 뒤흔들었다.
- 강자와 약자, 옳은 자와 그른 자, 화려한 자와 초라한 자가 명확히 구분된다고 믿었는데,
- 그래서 예수님은 약자, 그른 자, 초라한 자라고 믿었는데,
- 그러한 구분이 흔들렸다.
- 약하고 불의하며 초라한 예수님이 강하고 의로우며 화려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러한 구분을 초월하는 눈을 갖게 되었다.
- 이전에는 사람의 외형을 구분하는데 매몰되어, 사람의 내면을 보지 못했는데,
- 이제는 구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외형 이면에 있는 내면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바울은 비로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전에는 외형만 봤고, 그 외형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구분했다.
- 그런 상태에서 사랑은 서로 유익을 주고받는 거래의 한 모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면을 본다.
-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본다.
- 세상에서 교환 가치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가진 고유한 매력을 발견한다.
- 유익과 상관없이 그 매력에 순수하게 빠진다.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상징하는 것 - 구분 파괴
바울은 그렇게 고린도 교회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 그 시작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 강하며 동시에 약하고, 의로우며 동시에 불의하며, 화려한 동시에 초라한 예수님을 경험한 이후부터이다.
- 그 경험이 이전 경험을 전부 파괴했다.
- 세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에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원론으로 전환이 시작되었다.
물론 변화가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 성경은 이 전환을 다메섹 도상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것으로 표현하지만,
- 그것은 전환의 위대함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 실제로는 마음의 중심에서 일어난 전환이 삶의 모든 영역까지 확대되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전환이 확대되는 과정에 크고 작은 도전과 시련이 있었을 것이다.
- 예를 들어, 초라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까지 포괄한다는 것을 거부한다든지,
- 이방인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여전히 여성은 배제된다고 믿는다든지 말이다.
- 그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넓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환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계셨다.
- 십자가에 죽은 자가 그리스도라는 전환만큼 극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죽은 자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불의한 자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상징하는 바가 인간 세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 십자가에 죽은 자는 인간 세계를 넘어 영적인 세계에서조차 불의한 존재이다.
- 반면에 그리스도는 영적인 세계에서 의로운 존재 중의 가장 의로운 존재이다.
- 예수님을 통해 그런 전환이 일어났다.
- 인간 세계를 넘어서 영적이고 우주적인 범위에서 전환이 일어났다.
- 초월적인 영역에서까지 의와 불의의 균열이 일어났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진 것이다.
- 성전 휘장은 유일하게 거룩한 장소였던 지성소를 세속적인 세상과 구분하는 경계이다.
- 따라서 휘장의 파괴는 의와 불의의 구분 파괴를 상징한다.
- 즉,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 전환되었다는 뜻이다.
[막 15:37~38]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38)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이 구분 파괴를 기반하여 진정한 연합, 교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 의와 불의라는 가장 극단의 구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 사람 사이의 구분도 넘어설 수 있다.
- 그렇게 구분을 넘어설 때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마음, 목숨,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
[마 22:37~3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 그것에 기반하여 구분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구분을 넘어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의 구분을 넘어본 경험을 기반하여 사람과 사람의 구분도 넘어설 수 있었다.
- 그래서 사람 사이의 구분을 넘어서 하나 되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외형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이원론에서 벗어나 구분을 넘어서는 일원론으로 전환이다.
마음을 넓히라는 바울의 요구 - 인식 체계 전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바로 이것을 요구한다.
- 마음을 넓히라는 명령이 이것이다.
- 단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다.
- 단지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이 아니다.
인식 체계를 바꾸라는 뜻이다.
- 가치 구분 기준을 무너뜨리라는 뜻이다.
- 기존 경험을 전부 무시하라는 뜻이다.
-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에 기반하여 새로운 경험을 쌓으라는 뜻이다.
- 기존 인격을 전부 부정하고 새로운 인격을 가지라는 뜻이다.
그럴 때만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러한 극단적인 인식 체계 전환 없이는 화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단지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 오직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과연 고린도 교회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 과연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 바울의 불가능한 요구가 우리에게 가능할까?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가능함을 믿는 사람에게는 가능할 것이다.
- 그러나 안일하게 가능하다고 인식하고 믿음이 필요 없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3~10절: 바울의 하나님 일꾼 증명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고 증명하는데, 그 방법이 낯설다.
- 하지만 그 낯섦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제시한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자격을 입증하는 방법은 성과이다.
- 예를 들어, 자신이 얼마나 좋은 선생인지 입증하는 방법은 학생의 반응이다.
- 학생이 좋아하고 학생의 성적이 좋으면, 좋은 선생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 반대로 학생이 싫어하고 학생의 성적이 나쁘면, 선생의 자격은 의심받는다.
그런데 바울의 입증 방법은 다르다.
-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는 동시에 성과 없음도 자랑한다.
- 자신이 학생에게 얼마나 복음을 잘 전했는지 자랑한다.
[고후 6:6~7]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
-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학생에게 얼마나 가혹하게 거부당했는지도 자랑한다.
- 그것이 자신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고후 6:4~5] ・・・・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이는 8~10절에서도 계속된다.
- 영광과 칭찬을 받기도 하고, 수치와 비난을 받기도 한다.
[고후 6: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
- 속이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 죽는 사람, 징벌 받는 사람, 근심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난도 받는다.
- 그러나 유명하고, 살아 있고, 죽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고후 6:8~10] ・・・・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의 입증 방법 - 영광과 수치를 동시에 드러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상반된 모습을 동시에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격이 박탈될 수 있음에도 수치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 단지 전도를 잘해서 칭찬받은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한 때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 그것은 칭찬과 비난을 구분하는 이원론의 관점이다.
바울이 제시하고 싶은 것은 칭찬과 비난의 구분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은 칭찬은 좋은 것, 의로운 것, 성공한 것이고,
- 비난은 나쁜 것, 불의한 것, 실패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결국 사람도 구분하게 만든다.
- 자신을 칭찬한 사람만 좋은 사람이고, 비난한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구분하고,
- 나쁜 사람을 배제하게 한다.
- 이런 구분이 계속되면 관계의 폭은 계속 좁아진다.
그래서 바울은 일원론의 관점을 제시한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서 죽음과 생명의 구분을 파괴하셨다.
- 죽음과 생명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라는 것이다.
- 그래서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고 바울이 고백한 것이다.
[롬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복음에 헌신했다는 것이다.
- 그로 인해 죽음도 경험하고 생명도 경험했다. 영광과 수치를 동시에 당했다.
- 복음은 그런 것이다.
- 영광을 입을 때는 자랑스러워하고, 수치를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면,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없다.
- 영광과 수치의 구분이 사라진 사람,
- 적어도 구분하지 않으려는 사람만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는 영광과 수치 가운데 현혹되지 않고,
- 복음을 계속 바라볼 수 있다.
- 복음에는 영광과 수치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과 생명이 모두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영광과 수치가 모두 바울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증거이다.
- 바울은 수치를 드러냄으로 일원론의 관점을 제시한다.
- 물론 고린도 교회는 수치만을 부각하며 그것을 근거로 바울을 배척했지만 말이다.
바울은 배척당한 원인이 단지 수치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 그랬다면 수치 당하지 않고 칭찬받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 고린도 교회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을 수정했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배척당한 원인이 단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라고도 판단하지 않았다.
- 그랬다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배척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수정하지도, 고린도 교회를 배척하지도 않았다.
- 문제의 원인이 자신 혹은 고린도 교회에 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 이원론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을 수정하지도 않고, 고린도 교회를 배척하지도 않았다.
- 대신에 이원론에 빠진 고린도 교회에게 일원론을 알려준다.
- 고린도 교회가 일원론을 알기만 하면,
- 그래서 영광과 수치가 구분되지 않고,
- 죽음과 생명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깨달으면,
- 영광과 수치, 죽음과 생명이 뒤섞긴 바울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오히려 바울의 삶이 하나님의 일꾼답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화합하려 했다.
11~13절: 마음을 넓히라는 명령
마음을 넓히라는 권면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것과 다르다.
- 만약 그렇다면, 바울은 옹졸하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마음이 옹졸하다고 지적하며 넓히라고 권면하면서
- 고린도 교회를 포용하지 않는 옹졸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근거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비난했다.
- 고린도 교회는 오히려 바울이 옹졸하다고 했다.
- 왜냐하면 바울은 우상 숭배도 음행도 전부 정죄하며 배제하길 요구했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와 음행이 일상인 고린도 교회 입장에서 바울의 요구는 옹졸하게 들렸다.
[고후 6: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넓힌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 관점을 바꾼다는 뜻이다.
- 이원론에서 일원론으로의 전환이다.
- 그래서 선과 악, 의와 불의, 화려함과 초라함을 구분하여 악, 불의, 초라함을 배제하고,
- 선, 의, 화려함에 이르려고 발버둥 치는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구분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자신과 상대방을 용납하는 것이다.
[고후 6:13]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예수님이 죽음과 생명을 초월하셔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를 건져주신 것처럼 말이다.
- 죽음을 피하기 위한 노력은 헛수고이고,
- 죽음과 생명의 구분을 초월하여 죽음까지 수용할 때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마음 먹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는 사람만 죽음까지 수용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하신 것이다.
- 이를 통해 생명을 누리고 죽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 죽음을 수용하고 죽음 가운데 머물도록 말이다.
- 믿음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견디며 죽음 가운데 머무는 사람만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7:1절: 믿지 않는 자와 절교
마음을 넓히라는 바울의 권면은 언제나 도덕적 해이로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
- 우상 숭배나 음행까지 용납할 대상으로 말이다.
- 그래서 바울은 마음을 넓히라는 권면 바로 뒤에 우상 숭배를 단호하게 금지한다.
- 믿지 않는 자와 절교를 요구한다.
[고후 6:14]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정의와 불의가 어떻게 짝하며, 빛과 어둠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습니까?
[고후 7: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
그렇다면 모든 구분을 초월하는 일원론과 믿지 않는 자와 절교 요구는 어떻게 연결될까?
- 누가 봐도 이 둘은 상반되게 보이는데 말이다.
- 일원론이라면, 믿지 않는 자도 용납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우상 숭배와 음행 역시 허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먼저 예수님으로 설명을 시작하겠다.
-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부활로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허무셨다.
-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 왜냐하면 죽음과 생명의 구분을 허물어서 죽음까지 감당하는 사람은 진정한 삶을 회복하지만,
- 죽음과 생명을 구분하고 죽음을 배제하고 생명만 취하려는 자는 진정한 삶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까지 감당하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 우리도 죽음을 감당하여 진정한 삶을 회복하도록 말이다.
- 예수님도 죽음 부활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신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도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허무셨지만,
-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삶을 주신 것은 아니다.
-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죽음 가운데 머문 사람에게만 한정하여 회복시키셨다.
- 즉, 죽음 가운데 머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셨다.
- 다르게 말해서, 죽음과 생명을 일원론으로 보는 사람과 이원론으로 보는 사람을 이원론으로 구분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 예수님은 죽음과 생명의 구분을 파괴하셨다.
- 이는 예수님이 세상 모든 구분을 전부 파괴하고 초월하신다는 것을 상징한다.
-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의 구분을 초월하셨다.
- 이를 통해 모든 존재를 외형이 아니라 내면을 보신다는 뜻이다.
-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일원론이다.
그러나 예수님께도 구분의 기준이 있다.
- 그리스도 안과 밖을 구분하신다.
- 믿음과 믿지 않음을 구분하신다.
- 일원론으로 죽음과 생명의 구분을 초월한 자와 이원론으로 죽음과 생명의 구분에 매몰된 자를 구분하신다.
- 그래서 죽음 가운데서도 부활을 믿고 생명을 누리는 자와
-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살려고 발버둥 치는 자를 구분하신다.
-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이원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라면 일원론으로 누구나 받아들이신다.
- 혈통과 상관없이, 성별과 상관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어떤 것도 상관없이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라면 이원론으로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아무리 가말리엘 문하생이라도 말이다.
믿지 않는 자가 활개 치는 고린도 교회의 실상
고린도 교회에도 믿지 않는 자가 있었다.
-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존재와 죽음 부활을 믿지 않는 자가 아니다.
- 고린도 교회에서 자칭, 타칭 믿는 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추정하건대, 그들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 영적,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높은 지도자층일 가능성이 높다.
- 그런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악행을 합리화하는 자일 것이다.
- 그래서 우상 숭배와 음행을 지속하는 자일 것이다.
- 고린도 교회에는 그런 일이 지속되었다.
[고후 6:15~16]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떻게 화합하며,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더불어 함께 차지할 몫이 무엇이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믿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많은 고린도 교회 사람이 그들의 외형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와 음행을 범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상 숭배와 음행까지도 허용하는 신앙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와 음행 - 이원론의 결과
참고로, 우상 숭배와 음행은 전형적인 이원론이다.
- 우상 숭배를 하는 이유, 우상을 두려워하며 섬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 세상을 수직 구조로 인식하고 우상이 상층부로 올라가는 데 영향력을 가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 우상에게 밉보이면 추락하고, 우상에게 잘 보이면 상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세상을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하는 자에게 우상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음행 역시 그렇다.
- 음행은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성적 도구로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 이 역시 사람을 상층과 하층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층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이고,
- 도구이기 때문에 자기 욕망을 위해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괜찮다는 믿음 때문이다.
- 그래서 음행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상을 이원론으로 구분하지 않고, 상층과 하층을 동등하게 여긴다면,
- 그래서 굳이 상층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고, 하층으로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 상층으로 올라가는 데 도움을 주는 우상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
- 그러면 우상을 두려워하고 숭배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음행도 자연스럽게 억제된다.
- 성적인 본능 자체가 제거되지는 않는다.
- 그러나 아무리 욕망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분출하지 않는다.
- 계층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 그러면 누구도 성적 욕망 분출의 도구로 이용할 수 없다.
이렇게 일원론은 우상에 대한 두려움과 성적 욕망을 절제하도록 한다.
7:2~4절: 결론 - 우리를 받아주십시오.
결국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고후 7:2] 여러분은 마음을 넓혀서,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고, 아무도 망친 적이 없고, 아무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수많은 모함을 받았다.
- 부당한 일을 했고, 많은 것을 망쳤고, 속여서 빼앗았다고 말이다.
- 추정하던데, 부당한 일은 바울이 ‘엄중한 편지’를 써서 고린도 교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고,
- 망친 일은 바울이 우상 숭배와 음행을 행하는 자를 정죄한 것이며,
- 속여서 빼앗은 일은 겉으로 재정 지원을 사양하면서 다른 경로를 통해 지원받았다는 의심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거부하기 위해 억지로 만든 명분일 뿐이다.
- 그것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한다.
- ‘죽음과 생명을 초월한 연결’로 말이다.
- 그만큼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 고린도 교회의 삶뿐만 아니라 죽음에도 동참하겠다는 사랑 고백이다.
[고후 7:3] 여러분을 책망하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여러분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것입니다.
여기에도 일원론이 전제되어 있다.
- 죽음과 생명을 초월하는 일원론도 있고,
- 바울과 고리도 교회를 연결하는 일원론도 있다.
바울은 일원론을 기반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 고린도 교회도 일원론을 가져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믿지 않는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일원론이었던 것처럼,
-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근거도 일원론이고,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도 일원론이다.
결론 - 누구를 수용하고 누구를 배제해야 하는가?
바울이 말하는 일원론은 모든 구분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일원론이 맞지만,
- 일원론을 기준으로 세상을 나눈다는 점에서 이원론이다.
- 누구나 수용하는 일원론이지만, 아무나 수용하는 것은 아닌 이원론이다.
- 바울은 일원론을 가지고 모두를 수용했지만,
- 이원론으로 철저하게 배제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렇다면 수용하고 배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 결론적으로, 외형의 차이는 전부 수용한다.
- 혈통, 성별, 나이뿐만 아니라 죽음과 생명까지 구분하지 않는다.
- 외형에 대해 어떤 구분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완전한 일원론이다.
그러나 내면의 차이는 철저하게 구분한다.
-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조차 살았다고 하고,
- 믿음이 없으면 산 사람조차 죽었다고 한다.
-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어도 살고,
-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살아도 죽는다.
- 예수님을 믿고 죽음과 생명을 초월한 사람과 예수님을 알지 못해 여전히 죽음과 생명을 구분하는 사람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 그래서 일원론을 가진 사람만을 산 자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죽은 자로 구분한다.
복음과 일원론의 관계
그런데 과연 일원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 복음도 아닌 일원론이 구원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복음이 일원론 자체는 아니지만, 일원론은 복음의 일부이다.
- 복음 안에 일원론이 들어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다.
-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다.
-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순간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들에게 신과 인간은 하늘과 땅보다 더 엄격하게 구분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 그리고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신앙의 바른 태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구분이 모호해져서 인간이 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한 것이다.
-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신과 인간의 경계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경계를 흔드셔야만 했을까?
- 복음과 경계가 무슨 관련일까?
바리새인은 신과 인간의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 당연히 명목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 아무도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반응이 바로 율법이다.
-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철저하게 지키려 했다.
- 율법을 통해 높으신 하나님께 낮은 종으로서 철저하게 복종하고자 했다.
이러한 의도 자체는 비판할 수 없다.
-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온 마음일 수 있다.
율법을 악용한 바리새인
그러나 이 경계가 실제로 그렇게 사용되지 않았다.
- 율법을 자신을 낮추는 데 사용하지 않았다.
- 오히려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철저하게 구분된 경계를 그어놓고,
- 아무도 그 위로 올라갈 수 없다고 경고하면서
- 은밀하게 자신의 위치를 하나님 옆에 두었다.
-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인식시켰다.
-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다는 근거로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 당시 바리새인이 누렸던 명예와 권력을 보면 알 수 있다.
- 사람들은 바리새인을 누구보다 의로운 자로 여겼다.
- 바리새인은 그렇게 얻은 지위를 이용하여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유익을 얻었다.
- 특히 지위가 낮은 이방인, 장애인, 여성을 착취하는데 높은 지위를 이용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경계를 흔드신 이유이다.
- 신과 인간을 구분 짓는 이원론을 부정하시고,
- 신과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원론을 제시하신 이유이다.
신과 인간이 동등하다는 주장은 언뜻 보기에 신을 부정하는 말로 들린다.
- 그래서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다.
-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지키려는 시도이다.
- 원래 의도와 다르게 신과 인간의 경계가 신의 권위를 부정하게 사용하는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세운 경계가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일원론의 필요성
바로 이것 때문에 일원론이 필요한 것이다.
-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 바리새인이 누리던 권위도 함께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 동시에 착취의 가능성도 허물어진다.
게다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길이 열린다.
- 이전에는 하나님과 관계 맺기 위해 율법, 성전, 제사장 등이 필요했다.
- 그런 매개체는 하나님의 본질을 알리기 위한 좋은 수단이었다.
- 그런데 그런 매개체가 전부 부패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매개체 없이 하나님과 직접 관계 맺는 길이 열렸다.
- 성령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이 열렸다.
- 그 길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 예수님을 통해 신과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길이다.
이 때문에 일원론을 강조하는 것이다.
- 일원론이 복음의 상당한 부분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나타나셔야만 하는 당시의 부패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이원론이 악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알리고 높여야 할 이원론이 하나님을 악용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론은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다.
-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배제하신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일원론을 지켜야 한다.
- 일원론 자체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 일원론이 하나님을 악용하는 사람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 이를 통해 오염된 하나님을 몰아내고 참된 하나님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한 하나님에서 벗어나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 여전히 하나님과 사람의 경계를 세우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돌아보자.
- 수많은 선의 중에 분명히 악의가 숨어있을 것이다.
- 이는 이원론으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다.
- 일원론으로만 발굴할 수 있다.
지금은 하나님이 위대하다는 이원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동등하다는 일원론이다.
- 예수님을 통해 이전에 정죄하지 못했던 바리새인을 정죄할 수 있었다.
- 일원론을 깨달을 때만 이 시대의 약점을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x840LW0IOmSNGFC3u4MXEA
미양교회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 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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