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바울이 하려는 말은 하나이다.
- 질그릇만 보물을 간직할 수 있다.
- 여기서 질그릇은 초라한 바울의 삶이고,
-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 복음, 진리, 영광은 반드시 초라하고 궁핍하며 처량해 보이는 사람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오히려 화려하고 풍요로우며 윤택한 삶을 사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본래의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후 4: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본문은 질그릇과 보배의 관계를 말한다.
- 질그릇에 담긴 보배만 온전히 보배의 역할을 할 수 있고,
- 동시에 보배를 담는 그릇은 반드시 초라한 질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바울은 두 가지를 전한다.
- 초라할 수밖에 없는 복음의 본질과
- 초라해야만 하는 복음 전도자의 삶에 대해 말이다.
-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은 승리와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고,
-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 역시 승리와 영광의 모습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결론을 들으면, 두 가지 질문이 생긴다.
- 첫째로,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는 뜻이 정말 그것이 맞아?‘
- 둘째로, ‘만약 정말 맞다면, 왜 보배는 질그릇에 담겨야 하지?’
- 이렇게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 해석된 뜻이 가진 참된 의미까지 분석해서,
- 그 의미가 본문의 맥락과 일치한다면,
- 해석의 뜻이 아무리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진실로 봐야 한다.
풀어 말하면, 질그릇과 보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 상식적으로, 보물은 귀하고 화려한 그릇에 담는다.
- 귀하고 화려한 그릇에 담을 때 보물의 가치가 더욱 부각된다.
- 화려한 보물 상자에 보관된 보석과 신문지에 마구 싼 보석 중에 어떤 것이 더 귀해 보이겠는가.
- 그래서 선물할 때도 내용물뿐만 아니라 포장까지 신경 쓴다.
- 따라서 복음 역시 길에서 노숙하는 초라한 거지가 전하는 것보다
- 학식과 지위를 가진 화려한 교수가 전할 때 더 가치 있어 보인다.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말한다.
- 상식에서 벗어난 말을 한다.
- 화려한 그릇의 교수보다 질그릇의 거지가 전할 때 복음이 더 온전히 전달된다는 것이다.
- 이 점이 본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고린도 교회의 실상
게다가 같은 문제를 고린도 교회도 겪고 있다.
- 고린도 교회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했다.
- 보물은 화려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복음은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 바울은 초라했다.
- 언제나 ‘사방에서 죄어들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다.’
- 그들의 관점에서 바울은 귀하고 영광스러운 복음을 담는 그릇으로 적당하지 않았다.
- 바울은 초라한 질그릇일 뿐이었다.
[고후 4:8~9]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거부한다.
- 바울이 정말 복음을 믿었다면, 고난, 박해, 초라함에 빠지지 않았을 텐데,
- 질그릇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텐데,
- 고난, 박해, 초라함에 빠져 질그릇과 같은 삶을 사는 이유는 바울이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 그러니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아무리 처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현대 교회의 실상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 여전히 많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이유는 하나이다.
- 현실의 고난, 박해, 초라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 복음이 가진 영광스러움이 자신에게 임하여 자신의 삶도 영광스럽게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할 때도 복음의 화려함을 내세운다.
- 예수님 믿으면 현실의 어려움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냐는 것이다.
- 예수님만 믿으면,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려한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전도하는 사람도 화려해야 한다.
- 자신도 복음 믿고 복음의 영광이 임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죽음만큼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 화려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 그러니 너희도 예수님 믿으면 자신처럼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세속적인 성공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 복음이 주는 영광은 단지 돈 많이 버는 성공이 아니라,
- 내면의 기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복음의 화려함을 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 외모의 화려함이냐, 감정의 화려함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복음은 초라하다.
- 복음은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는다.
- 복음은 돈을 많이 벌어서 화려한 삶을 살도록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없던 문제를 만든다.
- 멀쩡하게 살던 사람도 죽음과 가깝게 만든다.
- 사방에서 죄어들게 만들고, 답답한 일을 당하게 만들며, 박해를 당하게 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한다.
- 특히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게 만든다.
[고후 4:10]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도대체 복음은 왜 사람을 이렇게 만들까?
- 바울은 왜 복음을 이렇게 전했을까?
- 복음이 초라해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1~6절: 바울이 초라하다는 비난 세 가지
이 단락은 이번 본문에서 가장 잘못 해석하는 부분이다.
- 바울은 세 가지를 말한다.
- 첫째로, 2절에 ‘바울은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다.’
- 둘째로, 3절에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져 있다.’
- 셋째로, 5절에 ‘바울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많은 해설서가 이렇게 해석한다.
- 첫째로, 우리도 바울처럼 부끄러운 일을 배격해야 한다.
- 둘째로, 우리는 멸망하는 자들처럼 복음을 가리면 안 된다.
- 셋째로,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해석이다.
- 바울의 의도와 반대로 한 해석이다.
- 바울의 의도는 부끄러운 일을 하면 안 되고, 복음을 가리면 안 되고, 자신을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 부끄러운 일을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복음을 가린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며, 자신을 전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 바르게 복음을 전하면 이러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 그럼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반대로 해석해야 할까?
- 이 단락의 위치 때문이다.
- 4장은 바울을 거부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항변이 주제이다.
- 이는 2장부터 7장까지 이어진다.
- 자신이 진정한 사도가 맞다고 호소한다.
그것을 위해 7절부터 진정한 사도의 본질을 제시한다.
-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 그래서 바울은 생명을 위해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고,
-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맡긴다.
그런데 1~6절은 사도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
- 사도의 본질을 말하기 위한 서론 역할을 한다.
그것을 위해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의 공격 논리를 가져온다.
-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거부하며 했던 세 가지 비난을 언급한다.
- 바울은 그 비난을 통해 진정한 사도의 본질을 제시하는 방법을 쓴다.
바울이 대한 고린도 교회의 비난 세 가지
첫째 비난은, 바울이 고난받는 이유가 부끄러운 일을 숨어서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이는 전형적인 인과응보 논리이다.
- 바울이 고난받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그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가 너무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아무도 모르게 숨겼다.
- 그래서 그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모를 뿐이다.
- 따라서 죄를 범하고 그에 따라 심판 때문에 고난받는 바울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후 4: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둘째 비난은, 바울 때문에 복음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 이는 승리주의, 번영신학에 기반한다.
-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믿으면 승리하고 번영한다고 믿었다.
- 전도할 때도 복음을 믿으면 승리하고 번영한다고 말했다.
- 승리와 번영이 신앙의 목적이었으며, 전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난받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그들의 논리가 깨진다.
- 복음은 승리와 번영의 수단인데, 정작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고난받으면, 전도의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바울의 존재가 복음을 가린다는 것이다.
[고후 4: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셋째 비난은, 바울의 초라함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이는 수직 구조 인식 체계에 근거한다.
- 복음과 같이 귀한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전해야 효과적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난과 박해 때문에 행색이 초라할 뿐더러 지위까지 낮았다.
- 따라서 초라한 바울은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후 4: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이러한 인과응보, 승리주의, 수직 구조는 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 전도를 위해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한다거나,
- 예수님을 믿으면 반드시 승리와 성공을 이룬다거나,
-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전부 죄 때문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교회에 있다.
- 그래서 삶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 승리와 성공을 이뤄야만 바르게 믿는 것으로 생각하며,
- 성공에 대한 욕망을 전도를 위한 열정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언뜻 생각하기에, 예수님 믿어서 잘 되고, 잘 돼서 예수님 더 잘 전하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 잘 되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 아닌가.
- 뭐든지 잘 되려고 하는 일인데, 잘 되려고 예수님 믿고, 예수님 믿어서 잘 되라는 전도가 뭐 그리 나쁜가.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이 거부당한 것이다.
- 게다가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당한 것이다.
예수님 믿어서 바울은 잘 되기는커녕 고난과 박해에 찌들었다.
-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고, 초라함과 패배로 얼룩지며, 고난이 반복되었다.
바울이 고난받은 이유는 다양하다.
-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가신 죽음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왜 죽으셨을까?
- 근원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사람이 가진 욕망, 즉 한정된 재화를 독점하려는 욕망이 하나님의 뜻, 즉 부족한 재화를 서로 나누도록 하는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서로 나누고 사랑하길 원하셨다.
- 그로 인해 바리새인의 독점적 지위를 내려놓길 원하셨다.
-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예수님을 죽였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한마디로 하면, 순수하고 선한 잘 되려는 마음 때문이다.
- 그래서 잘 되려는 마음이 나쁜 것이다.
- 아무리 순수하다고 해도 말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응수한다.
비난에 대한 바울의 세 가지 변호
첫째로, 바울은 부끄러운 일을 배격하였다.
- 바울은 어떤 것도 숨어서 한 적이 없다.
- 하나님께 벌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
- 언제나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웠다.
- 따라서 자신의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 오히려 예수님을 잘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후 4: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둘째로, 바울은 복음을 가리지 않았다. 만약 가려졌다면, 그들이 멸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바울이 아무리 고난받아서 초라해졌어도, 바울의 초라함이 복음을 가릴 수 없다.
- 마치 예수님의 초라한 죽음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가려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
- 그들은 애초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을 이들이다.
- 태초부터 멸망하기로 예정된 이들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 단지 예수님의 초라한 죽음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의 초라함 때문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하기로 예정된 이들이다.
-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은 이유는 바울의 초라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다.
- 그러니 바울의 잘못이 아니다.
- 복음과 바울의 초라함은 아무 상관 없다.
[고후 4: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복음 전도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초라해도 상관없다.
- 오히려 초라해져야 한다. 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복음은 초라함과 상관없는 것뿐만 아니라, 초라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 삼는 종, 그리고 복음을 듣는 여러분의 종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초라하게 죽으신 것이다.
- 우리 죄를 위해 죽는 우리의 종 되셨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지만, 초라하게 종 되셨다.
그래서 바울도 초라해진 것이다.
- 죄가 있거나, 복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 복음을 바르게 믿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사도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진리를 바울은 깨달았다.
-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 즉,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었다가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을 떴을 때 말이다.
- 진리는 바리새인처럼 화려한 왕 되는 것이 아니라,
- 예수님처럼 초라한 종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후 4: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의 궁극적인 의도
따라서 본문은 거꾸로 해석해야 한다.
- 바울의 의도는 ‘부끄러움을 배격하라, 복음을 가리지 말라, 자신을 전하지 말라’가 아니다.
- 오히려 복음을 전하다 보면 바울처럼 ‘부끄러운 일을 했다, 복음을 가렸다, 자신을 전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 마치 하나님을 온전히 전하신 예수님이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받아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그렇게 오해받아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 오해받는 것이 당연하고 바른길이기 때문이다.
- 사도 직분을 받은 자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7~12절: 바울이 초라해진 근본 원인 - 복음을 담기 위해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난받았을까?
- 고난이 없었다면, 오해도 받지 않았을 것이고,
- 그랬다면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도 받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 그랬다면 고린도 교회와 여전히 좋은 관계를 맺고,
- 고린도 교회를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을 위해 애초부터 고난을 피할 수 없었을까?
- 고린도 교회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었을까?
- 화려한 모습과 명예로운 지위를 갖춘 상태로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까?
- 그랬다면 이런 갈등 없이 더 원활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그럴 수 없다.
- 복음을 믿고 전하는 과정에서 고난은 필수이다.
- 초라한 모습과 지위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복음에서 고난은 왜 필요할까?
- 핵심은 ‘구분’이다.
- 복음의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인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후 4: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사람의 한계
풀어 말해서, 엄청난 능력은 그것의 출처를 알기 어렵다.
-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을 때도 그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 반대로 바리새인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다닐 때도 그 의로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오해한 사람이 많았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이다.
- 사람은 일어난 현상을 보고 그 현상의 근원과 출처를 알지 못한다.
- 예수님 능력의 출처를 사탄이라고 오해하기도 하고,
- 바리새인이 의롭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현상의 출처를 어떻게 판단할까?
- 외형을 보고 판단한다.
-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믿고,
- 초라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 그래서 화려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믿었고,
- 초라하게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믿었다.
이를 비유로 말하면, 그릇 속에 물건이 들어 있을 때,
- 사람은 물건의 가치를 물건이 아닌 그릇을 보고 판단한다.
- 그래서 화려한 그릇에 담긴 물건은 그 물건이 보물이든 똥이든 전부 보물로 판단한다.
- 반대로 초라한 질그릇에 담긴 물건은 무조건 똥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교활하게도 이러한 사람의 한계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 사람이 현상의 근원과 출처를 알지 못하고 외형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을 역이용한다.
-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한 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이라고 속인다.
- 그러면 많은 사람이 그것을 믿는다.
- 마치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바리새인도 자신이 만든 율법을 자신이 지킨 것일 뿐이었지만,
- 자신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속였다.
- 그렇게 얻은 영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얻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난다.
- 쉬운 예로, 많은 목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받았다고 속인다.
- 그리고 그렇게 얻은 영적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조정하고 지배하여 돈과 권력을 얻는다.
이는 마치 똥을 보물이라고 속이기 위해 화려한 그릇에 담는 것과 같다.
- 그러면 많은 사람이 그릇만 보고 똥을 보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 능력의 출처를 아는 방법 - 질그릇
그렇다면 이런 속임수에 속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 화려한 그릇에 담긴 똥을 보물로 착각하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없다.
-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모든 제자가 예수님을 떠난 것이다.
- 예수님을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지켜본 제자조차 예수님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다.
- 성령이 임했을 때 비로소 베드로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 성령이 임했을 때 비로소 바울도 자신이 박해하는 교회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사람은 그릇 안의 물건이 보물인지 똥인지 구분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보물을 초라한 질그릇에 담으신다.
- 왜냐하면 사람의 능력으로는 보물을 찾을 수 없도록 말이다.
- 만약 보물이 화려한 그릇에 있으면, 모두가 보물을 찾을 것이고,
- 그 보물로 자기 욕망을 채우는 데 오용할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질그릇에 담으면,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찾을 수 없다.
- 사람은 초라한 질그릇에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오로지 성령을 받은 사람만 초라한 질그릇 내면에 있는 보물의 가치를 알아본다.
- 베드로와 바울조차 성령 임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반드시 보물은 질그릇에 담겨야 한다.
- 그래야만 성령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된다.
- 성령을 받은 사람은 질그릇에 담긴 보물을 알아보지만,
-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질그릇만 보고 똥으로 오판한다.
전도자의 숙명 - 초라한 질그릇
같은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초라한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 첫째로, 사람의 능력으로는 아무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복음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초라하게 만드셨다.
- 사방에서 죄어들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도록 말이다.
- 그래서 질그릇과 같은 바울의 모습을 보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말이다.
[고후 4:8~9]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언제나 죽음 가운데 있다.
- ‘언제나 예수의 죽음 당하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고’,
-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긴다.’
[고후 4:10~11]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보물을 담고 있었다.
- 그래서 움츠러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버림받지 않고, 망하지 않았다.
-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만 바울의 복음을 깨닫도록 말이다.
-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난다.
[고후 4:11]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생명이 나타나는 이유는 명확하다.
- 바울 자신만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 바울로 인해 복음을 듣는 사람, 특히 고린도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고후 4:12] 그리하여 죽음은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생명은 여러분에게서 작용합니다.
풀어 말하면, 복음은 초라하게 죽으신 예수님께 담겨 있었다.
- 이를 통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예수님이 보물(복음)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했다.
- 그래서 사람의 능력만 가졌을 때 바울은 예수님이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울은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바뀌었다.
- 바울이 예수님의 역할을 할 차례이다.
-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보물(복음)을 전해야 한다.
- 특히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보물을 깨닫게 해야 했다.
그래서 바울 역시 예수님처럼 초라한 죽음 가운데 머물게 된다.
- 아무도 사람의 능력으로는 복음을 깨달을 수 없도록.
-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복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때문에 바울은 반드시 죽음 가운데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만을 위한다면 굳이 죽음 가운데 머물 필요가 없다.
- 이미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질그릇에 담긴 물건이 똥이 아니라 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이제 바울은 화려한 삶을 살던, 초라한 삶을 살던 아무 상관 없다.
- 이미 구원과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초라한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 질그릇만 복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죽음 가운데 머무는 이유는 전적으로 세상, 특히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이다.
- 전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이다.
물론 은혜를 입는 고린도 교회는 그 사실을 모른다.
- 자신에게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바울이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견뎠는지 모른다.
- 오직 복음을 듣고 믿어 마냥 기쁘기만 하다.
- 그 고통은 바울과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도 알게 될 것이다.
- 복음을 듣는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입장이 될 때 말이다.
- 복음을 전하는 자는 질그릇이 되어야 하고,
- 질그릇이 되기 위해 셀 수 없는 죽음을 견뎌야 하며,
- 그로 인한 초라한 모습 때문에 자신의 헌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괴리와 간극이 전도자를 더욱 슬프게 한다.
- 복음 전하는 자가 괴로워하는 동안 복음을 듣는 자는 기뻐한다.
- 지금 바울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간극 때문에 전도자의 사랑이 더욱 빛난다.
-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듣는 자에게 아무런 보상도 돌려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 흔한 공감마저 받지 못한다.
- 그래서 전도자의 사랑이 더욱 순수해진다.
이것이 전도자의 숙명이며 영광이다.
13~15절: 바울이 초라해진 목적 - 여러분을 위해
바울이 이렇게 죽음까지 감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단순히 이타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 하나님에게서 난 능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서 난 능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 이번 단락에서는 그것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 무엇을 믿는 믿음이냐?
- 먼저는 부활의 믿음이다.
-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바울 자신도 살리실 것을 믿었다.
- 그 믿음 때문에 죽음 가운데서 머물 수 있었다.
- 믿음이 없었다면, 자신의 초라함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고후 4:14]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 함께 부활의 능력이 자신뿐만 아니라 여러분, 즉 고린도 교회에까지 미친다는 믿음이다.
- 바울은 이것을 믿었다.
- 그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고후 4:14] 주 예수를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세워주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고린도 교회 역시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왜냐하면 복음은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 초라한 바울의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까지 초라해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주변 사람으로부터 초라하고 어리석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고린도 교회 역시 부활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초라해질 것을 알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물론 고린도 교회가 초라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 다른 누구보다 그 사실을 바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 그 초라함이 너무 싫어서 누구보다 강하게 예수님을 거부했던 사람이다.
-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이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거부하는 마음을 잘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알았다.
- 복음이 주는 초라함보다 영광과 감사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 그래서 당장은 초라함 때문에 복음을 몸서리치며 거부할 수 있지만,
- 그것이 결국 고린도 교회에게 유익이라는 사실을.
[고후 4:15] 이 모든 일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서,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복음을 듣는 사람 모두에게 믿음이 필요하다.
-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죽음을 경험하게 할 믿음이 필요하다.
- 왜냐하면 복음은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복음 때문에 상대방이 겪을 고통을 잘 알기에 더 어렵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부활까지 믿어야 한다.
- 그럴 때만 당장 복음의 죽음 때문에 두려워하는 상대방에게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는 사람은 죽음을 감수할 믿음이 필요하다.
- 복음은 언제나 질그릇에 담겨있고,
- 주변 사람은 그 질그릇에 담긴 것을 똥으로 본다.
- 그래서 자신은 똥을 품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끄러움을 감수하는 믿음 없이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 믿음 없이는 질그릇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아무리 질그릇 안에 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도 말이다.
- 왜냐하면 주변 사람은 아무도 그것을 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 겪는 초라함만이 아니라,
- 초라함 이면에 있는 부활의 영광까지 함께 보는 믿음이 필요하다.
- 그런 사람만 복음을 받아들인다.
16~18절: 바울이 초라해진 결과 -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
이런 사실은 바울조차 낙심하게 만들었다.
-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복음을 듣는 사람도 죽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 자신이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버거운데,
- 상대방까지 죽음을 감수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 당장의 죽음 이면에 있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겉사람은 죽어가지만, 속사람은 더욱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 당장의 죽음은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이지만,
- 이면의 부활은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이라는 것을 믿었다.
[고후 4:17]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현실의 초라함보다 현실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광이 더 크다는 것을 믿었다.
[고후 4:18]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은 복음을 전하는 바울 자신과 복음을 듣는 고린도 교회 모두를 위한다.
- 바울 자신이 겪은 복음의 죽음을 상대방에게도 겪게 해야 한다는 고통이 상당했다.
-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 하지만 바울은 믿었다.
- 복음의 영광이 죽음보다 크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전한다.
- 복음 때문에 당장 겪는 초라함이 얼마나 끔찍한지 안다고.
- 하지만 그 초라함은 가볍고 일시적이다.
- 복음의 영광은 크고 영원하다.
- 그러니 죽음을 감수하고 함께 가자고 말한다.
- 초라함을 감수하고 바울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그 초라함과 죽음 안에서만 부활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 복음을 믿는 우리의 운명은?
바울의 상황을 정리하면,
- 바울은 지금 죽음 가운데 있다.
-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죽음을 감수하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며,
- 복음 자체가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바울은 복음 때문에 죽음과 가까이 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는 그런 바울을 거부한다.
- 이유는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 그들에게 죽음과 가깝다는 것은 복음과 멀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복음은 생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고린도 교회는 복음 때문에 바울을 거부한다.
그런데 본문을 통해 바울은 말한다.
- 복음이 생명을 주는 것은 맞다.
- 하지만 복음은 생명 이전에 먼저 죽음을 준다.
-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셨듯 말이다.
따라서 바울 자신이 죽음과 가까운 이유는 복음을 잘 믿기 때문이다.
-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게 복음을 잘 전하기 위해서이다.
- 그러니 바울 자신을 거부하지 말고,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따르라는 것이다.
물론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따르면, 고린도 교회 역시 죽음에 이른다.
- 바울처럼 고난과 박해를 당할 것이다.
- 그래서 당장은 복음의 유익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 줄 생명은 영원하고 크다.
- 일시적이고 가벼운 고난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도 낙심하지 말고 바울을 따라 죽음의 길로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같은 말을 우리에게도 한다.
- 복음은 보물이다.
- 귀하고 귀한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런데 복음은 질그릇에 담겨있다.
- 이유는 명확하다.
-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것이다.
- 사람의 능력으로는 찾지 못하도록 말이다.
- 사람은 그릇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물을 갖기 위해서는 질그릇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 즉, 복음은 초라한 죽음을 동반한다.
여기서 초라한 죽음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람 외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다.
- 빼앗기는 것에는 안락함, 명예, 지위, 돈, 건강 등이다.
- 삶의 중요한 것을 전부 빼앗긴 후에야 비로소 질그릇 안에 담긴 보물에 도달할 수 있다.
-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시는 영광이 이르신 것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만 남아 있다.
-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을 믿을지,
- 복음을 포기하고 나머지 모든 것을 얻을지 말이다.
답은 명확하다.
- 복음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쉽게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고,
- 복음도 소중히 여기지만, 다른 것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결국 복음을 포기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은 보물을 질그릇에 담으신 것이다.
- 이 두 부류의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 이렇게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보물에 대한 사람의 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은 보물을 갖기 위해 질그릇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 아니면 질그릇이 싫어서 보물까지 포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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