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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

예레미야(68) 36:1-8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 오직 사랑하신다.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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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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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34장부터 시작된 큰 단락의 끝이다.

- 34장에서 이스라엘은 동족 노예를 풀어주기로 약속한 후 다시 노예로 삼았다.

- 그렇게 자신이 맺은 약속조차 거역하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줬다.

- 반면에 35장에서 레갑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켰다.

- 그에 반해 이스라엘이 셀수 없이 반복된 하나님의 말씀조차 거역하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줬다.

이제 마지막 36장 역시 이스라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 특징은 34, 35장에 비해 더 노골적이다.

- 본문에서 여호야김 왕은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잘라서 난롯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렘 36:23] 그런데 여후디가 그 두루마리에서 서너 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읽은 부분을 서기관의 칼로 잘라 내어서, 난로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왕은 온 두루마리를 다 난로 불에 태웠다.

-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간접적으로 보여줬던 34, 35장과 달리,

- 36장에서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김은 ‘직접 자기 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이전에 언급된 이스라엘의 대표 죄는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였다.

- 34장에 나오는 동족 노예 문제 역시 일종의 백성 착취이다.

- 그런데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가 심각한 죄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 이는 간접적인 죄이다.

-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를 거역한 죄이다.

- 이스라엘은 죄를 범하며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 적어도 겉으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인정했다.

-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와 백성 착취를 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하며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는 직접적이다.

-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가 아닌, 하나님 자체를 거부한다.

- 하나님을 거부하는 속 마음을 행위로 정확하게 표출한다.

 

이는 마치 결혼 관계에서 ‘외도’와 ’이혼‘의 차이이다.

- 물론 둘 다 마음 속에서 배우자를 부정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같다.

- 그러나 외도는 간접적이지만, 이혼은 직접적이다.

- 외도는 마음 속에서 배우자를 거부할지라도, 겉으로는 배우자를 여전히 사랑한다며 용서해달라고 고백할 수 있다.

- 단순한 실수였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 그래서 모든 외도가 반드시 관계 파괴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 드물지만 진정으로 사과하고 용서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혼한 후에는 관계를 돌이키기 힘들다.

- 배우자에 대한 속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 배우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말과 행동으로 표현했다면,

- 결혼 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 서류상의 결혼은 유지될지라도, 서로 신뢰하는 결혼 관계의 본질은 회복될 수 없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이 36장의 메시지이다.

- 이스라엘은 주체적, 자발적, 적극적,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잘라서 난로에 던져 불태워 버렸다.

그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 하나님을 장작더미처럼 하찮게 여겼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자명하다.

[렘 36:30~31]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두고서 나 주가 말한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 것이다. (31) 나는 이렇게,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내가 경고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내가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박차고 나갔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벗어나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지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다.

- 이전까지는 간접적으로 무시했지만, 이번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무시했다.

그래서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 없이 살아가야 한다.

- 가혹하고 치열한 세상에서 홀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힘이 없다.

- 그동안은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왔다.

- 그래서 가진 힘보다 풍요롭게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가진 힘만으로 살아야 한다.

- 그래서 지금 가진 풍요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이것이 멸망 심판에 담긴 복잡한 내막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는가?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떠난 것이니, 이스라엘이 자처한 것인가?

- 아니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멸망하도록 하셨으니, 하나님이 행하신 것인가?

신정론 논쟁에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이스라엘이 독립적, 주체적,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이다.

- 동시에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다시 하나님께 마음 속까지 돌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행하신 사랑의 선택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두 가지 상황이 생긴다.

- 첫째로, 이스라엘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국가가 멸망하여 사라진다.

- 둘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 회복의 토대를 마련하신다.

- 이스라엘이 멸망 속에서 과거를 성찰하여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를 회개하고,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다시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신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성취된다.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 심판과 회복은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 단순한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복음의 본질이다.

-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십자가’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서, 모든 인류를 심판하심과 동시에 믿는 자를 구원하셨다.

- 이렇게 십자가에서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일어난다.

또 다른 예로, 탕자 이야기가 있다.

-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죽음 직전까지 멸망하지만,

- 멸망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리고,

- 결국 아버지와 진정한 관계를 회복한다.

이렇게 멸망과 회복은 동시에 일어난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 가치이며, 동시에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임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 언제나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한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알아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 동시에 모든 것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도 알아서, 나머지 모든 가치가 파괴되는 것도 중요하다.

- 역시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만 믿으면,

-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만,

- 나머지 모든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 못하면,

-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게 된다.

-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결국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거나(기복주의),

- 하나님을 증거하는데 세상의 가치를 남용한다(세속주의).

- 그래서 결국 기복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져 신앙을 버린다.

반면에 모든 것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만 믿으면,

-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지만,

-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면,

-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낙담하고 좌절한다.

- 그러면서 세상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멀어진다.

 

오직 심판과 회복이 동시에 일어날 때만,

-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 가치이며, 동시에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믿을 때만,

- 그래서 온 인류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동시에 믿는 자를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을 믿을 때만,

-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세상이 얼마나 해로운지 알기에,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당당하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오직 세상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갈 때만

-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가 중요한 이유이다.

- 그런데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100%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했다.

- 반면 하나님은 100% 능동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이러한 대립이 이스라엘의 멸망 심판이 정당하다는 것을 더욱 증명한다.

- 이렇게까지 구애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 심판이 임하는 것은 자명하다.

이것이 34~36장의 핵심 메시지이다.

 

일반적인 오해 - 사랑과 공의 구분 비판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오해한다.

-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가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기 위해 적극적으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 사랑을 느낀다.

[렘 36:3]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서기를 절박하게 요청하신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평천하 유아독존 하셔도 될 것 같은 하나님께서

- 굳이 힘들게 예레미야를 불러서 자기 말을 듣고 기록하여 전하라고 하신다.

특히 하나님께 더욱 애절한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상태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여 벗어나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 너무 완벽해서 아무것도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도 아닌,

- 자신을 거부해서 자신에게 괴로움을 주는 대상에게

- 사랑을 고백하고, 사랑받기를 구걸하신다는 점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순수하다.

- 물질적 대가뿐만 아니라, 정신적 대가조차 기대하지 않으신다.

-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오직 이스라엘과 사랑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을 이런 관점에서만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해 보인다.

- 그러나 사랑 이면에 어두운 면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심스럽다.

- 조건적으로 보인다.

- 게다가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사랑을 거두시고 분노와 멸망 심판으로 되갚으시는 것으로 보인다.

쉬운 예를 들어, 데이트 상대 애인이 자신을 사랑하는데,

- 돈이 많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할 때만 사랑하고,

- 돈이 없으면, 화를 내며 떠날 것이라고 협박한다면, 

- 과연 애인의 사랑 고백을 진정성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다.

- 하나님의 ‘구애’와 구애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연결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 사랑하는 하나님은 심판하지 말아야 하고,

- 심판하는 사람의 사랑은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덧붙이는 말이 ‘공의’이다.

-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 이외에 ‘공의’를 추가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 사랑에 맞설 만큼 강한 공의가 있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 절대적인 의로움의 기준이 있고, 

-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나님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때로는 사랑을 억누를 만큼 공의가 강해서,

- 사랑하는 사람조차 기준에서 벗어나면 분노하시고,

- 분노가 쌓여 임계점을 넘어서면, 결국 멸망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스러워 보이지만,

-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사랑과 공의가 공존하고,

- 대부분 사랑이 공의를 올라서지만, 때로는 공의가 사랑을 올라선다고 한다.

- 그러니 사랑과 공의는 모두 하나님의 중요한 속성이라는 것이다.

 

공의롭지 않은 하나님

그러나 나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한다.

- 단언하건대,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

- 기준에 부합하고, 질서가 유지되며, 톱니바퀴처럼 공의롭게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고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만을 원하신다.

- 그러니까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멸망 심판을 내리시는 이유는 공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 그것조차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하나님이 정말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면, 어떻게 그렇게 참혹하게 파괴하실 수 있겠는가.

- 참혹한 파괴는 사랑에서 나올 수 없다.

- 파괴는 공의롭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결과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 심판하고 파괴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죄를 범하는 이스라엘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셨어야 했다.

- 이스라엘은 열왕기 시대 내내 죄를 범했다.

- 그러나 하나님은 경고만 하실 뿐, 심판하지 않으셨다.

- 오히려 용서하여 죄를 못 본 체하시려고 애쓰셨다.

게다가 그 이전에 사사 시대에도, 그 이전에 광야 시대에도, 그 이전에 노아 시대에도, 그 이전에 아담에게도

- 하나님은 죄에 대한 합당한 심판을 내린 적이 없다.

-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셨지만,

-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아담을 죽이지 않으셨다.

- 공의롭지 않게, 아담을 심판하지 않고 다시 기회를 주셨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공의롭지 않으셨다.

 

게다가 만약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심판받아 멸망한 이스라엘을 그대로 놔두셔야 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했고, 그 죄로 인해 멸망했다.

- 이스라엘은 죄에 따라 심판을 받아야 했고, 심판은 무를 수 없다.

- 그렇게 원칙을 철저히 지킬 때만 공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취소하셨다.

- 이스라엘의 멸망을 무르시고, 다시 국가를 세워주셨다.

-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지으셨고, 사라졌던 민족 이스라엘도 회복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신 것은 공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합당한 심판을 내리신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애초부터 공의롭게 원칙을 지킬 목적이 없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멸망과 공의를 연결하면,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 이스라엘이 이전에 수많은 죄를 범했을 때 심판받지 않은 것을 해석할 수 없고,

- 이스라엘이 멸망 이후에 다시 회복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온 것을 해석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멸망 이전에도, 이후에도 공의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은 왜 멸망한 것인가?

공의 때문에, 원칙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면,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 때문이다.

- 공의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셨지만,

-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자신을 사랑하길 바라셨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하나님도 기쁘지만,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부터 예레미야 시기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 그러나 전부 실패했다.

- 이스라엘은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딱 하나이다.

-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랑 없이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세상의 공격에 홀로 대항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일어난 일이 ‘멸망’이다.

- 세상은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았다.

- 평생 엄마 닭 품에 안겨 있던 병아리가 처음으로 엄마 닭과 떨어지자,

- 옆에서 보고 있던 고양이에게 단숨에 삼켜 먹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파괴된 이후에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 자신은 하나님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며,

- 그동안 자신이 존재했던 것은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셔서 행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거부했던 것을.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지난날을 후회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난다.

- 자기 인생이 이렇게 망가진 것은 결국 다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 때문이었구나.

- 그때 날 사랑했던 사람의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참혹하지는 않았을 텐데.

- 그때 그 사람이 날 정말로 사랑했었구나.

- 정말 미안하고 후회된다. 라는 말을 되뇌며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다.

- 그렇게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신다.

-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셔서, 사랑하는 마음을 삶으로 표출하는 기회를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하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성전, 민족, 영토를 회복하여,

-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으로 세우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예가 탕자 이야기이다.

- 탕자 아버지는 유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겠다는 탕자에게 유산을 준다.

- 그 결과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렇다면 과연 탕자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은 누구 때문인가?

-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탕자 때문인가?

- 아니면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아버지가 유산을 줘서 일어난 일이니, 아버지 때문인가?

 

당연히 알겠지만, 쉽게 답하기 어렵다.

-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탕자와 아버지의 마음이다.

- 탕자는 아버지를 거부하여, 아버지의 돌보심 없이 자기 혼자 멋대로 살고자 했다.

- 그런 자기 선택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반면 아버지가 유산을 준 선택이 비록 탕자를 죽을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 아버지가 탕자에게 유산을 준 이유는 탕자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풀어 말하면, 아버지는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다.

- 탕자에게 유산을 주면, 탕자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어떤 면에서 유산을 주지 않는 것이 탕자의 목숨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탕자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유산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 탕자의 존재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즉, 유산을 주지 않고 아버지가 탕자를 옆에 데리고 있다고 해도,

- 아버지는 탕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리하면, 유산을 주면, 탕자의 목숨을 위험해지지만, 관계 맺을 기회가 생기고,

- 유산을 주지 않으면, 탕자의 목숨을 지킬 수 있지만, 관계 맺을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합리적으로 선택한다.

- 아버지에게는 무엇보다 관계가 중요했다.

- 관계가 없다면, 목숨이 있어도 소용없고,

- 관계가 있다면, 목숨이 훼손되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아버지는 탕자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산을 주고 관계 맺을 기회를 얻는 선택을 한 것이다.

- 그 선택이 탕자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다 안다.

- 아버지의 기대대로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결국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다.

- 아버지는 탕자를 언제나 사랑했는데,

- 탕자마저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이것이 탕자 이야기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 진정한 사랑은 위기와 멸망을 통과해야만 맺어진다.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 죄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 아니다.

- 만약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우셨다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전혀 남기지 않고 전부 죽이셔야 했다.

- 그래서 회복 가능성을 박탈하셔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 마치 탕자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 아버지의 사랑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 탕자에게 유산을 줘서 죽을 위기에 처하도록 하는 것만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영원히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탕자를 멸망시킨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 공의로 정당하게 심판하여 이스라엘을 멸망한 것이 아니다.

- 하나님께 공의는 안중에도 없다.

- 하나님은 오직 사랑만 보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했고, 앞으로 영원토록 사랑의 관계를 맺고 싶은데,

- 그러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야 하는데,

-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없음 속에서 멸망을 경험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다.

- 바꿔 말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에서조차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의미와 정확하게 연결된다.

예수님은 왜 부활하셨는가?

-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했다.

[요 11:25~26]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그렇다면 반대로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 과연 하나님의 공의 때문인가?

- 하나님이 인류의 죄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셨는가?

- 만약 정말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인류를 죽이셨어야 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게, 죄가 있는 인류가 아니라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셨다.

왜?

- 사랑하니까.

-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 사랑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로운 원칙을 부정하시고,

-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셨다.

 

이에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 예수님의 죽음이 공의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라면,

- 하나님께 죄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고자 하는 공의로운 의도가 전혀 없었다면,

- 왜 굳이 예수님을 죽이셨나?

- 굳이 희생양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용서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 희생양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공의로운 의도가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 아닌가?

아니다.

- 예수님의 죽음에는 인류 죄에 합당하게 심판하는 공의로운 의도가 없다.

- 오직 사랑만 있다.

무슨 사랑이냐?

-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죽을 위기가 필요했다.

- 아버지의 사랑 없는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경험할 기회가 필요했다.

- 아버지의 사랑 없는 탕자의 실체가 얼마나 허약한지 자각한 기회가 필요했다.

- 그 기회가 아버지의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에게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한다.

- 하나님의 사랑 없이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착각은 결국 반드시 하나님을 죽이는 데까지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다.

- 하나님을 죽이는 잔인함으로 주변 사람을 죽일 뿐만 아니라, 

-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죽이며,

- 특히 자신이 자신을 죽일 만큼 어리석은 자신의 실체를 깨닫게 해준다.

- 한마디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해준다.

그래서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듯,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해준다.

-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깨닫고,

-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부터 한결같이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준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랑과 공의로 구분할 수 없다.

- 오직 사랑뿐이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본문 해석

그렇다면 본문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고 재앙을 내리겠다고 하셨다.

[렘 36:31] 나는 이렇게,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내가 경고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내가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실까?

- 하나님의 공의 때문일까?

- 죄에 합당한 심판을 내리길 원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의 목적은 언제나 사랑이다.

- 그 사랑이 본문의 시작부터 나타난다.

[렘 36:3]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 하나님의 목적은 처음부터 용서였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렘 36:7] 그러면, 그들이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드리면서, 저마다 악한 길에서 돌아올는지도 모르오. 주님께서 이 백성에게 쏟으시겠다고 말씀하신 진노와 노여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오.

- 하나님의 목적은 악한 길에 있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었다.

- 악한 길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었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론 - 누가 하나님을 처량하게 만들었는가?

이렇게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죄를 대비한다.

- 악한 길에 빠져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과 

-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실낱같은 소망을 기대하며 말씀을 전하시는 하나님이 대비된다.

이 대비는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 첫째로, 이스라엘의 죄를 강조한다.

-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여 심판받아 멸망하는 이스라엘의 실체를 전한다.

- 그런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 멸망 심판이 얼마나 합당한지 논증한다.

-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다.

- 자신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끝까지 용서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

- 하나님의 마음에는 애초부터 심판은 없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피하려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 하나님의 사랑은 그만큼 크다.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완벽하게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다.

- 이스라엘의 죄는 너무 심각했다.

- 그래서 ‘절대 오물’이었다.

-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컸다.

- 그래서 ‘절대 가치’였다.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아는 것과 나머지가 전부 절대 오물임을 아는 것이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듯이,

-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과 이스라엘의 죄를 아는 것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중에 나는 이번에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우리를 정말 사랑하셨다.

-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셀 수 없이 거부한다.

- 탕자가 아버지에게 죽으라며 유산을 달라듯이,

- 바리새인이 자신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이,

- 우리는 하나님을 못 죽여 안달이 난 ‘살신마’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놓지 못하신다.

- 포기하고 뒤돌아서면 그만인데,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다.

- 죽은 자녀 다리 만지듯이,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전무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매달리신다.

- 울며불며 우리에게 사랑을 구걸하신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쓸모 있어서 매달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애는 의미가 퇴색된다.

-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 하나님께 쓸모 있는 것은 없다.

- 하나님께서 사랑을 구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지라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하나님을 이렇게 처량하게 만들었는가.

- 왕위에 앉아 근엄하게 명령만 해도 시원찮은 분인데,

- 왜 하나님이 우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 사랑해달라고 구걸하고 계시는가.

- 왜 하나님은 우리가 듣지도 않을 말씀을 쉴 새 없이 떠들고 계시는가.

- 왜 하나님은 우리가 열어보지도 않을 편지를 쉴 새 없이 보내고 계시는가.

하나님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흙바닥에 쓰러뜨려 비굴하게 사랑을 구걸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이다.

- 하나님은 우리 손에 의해 무릎 꿀려졌다.

- 하나님은 우리 발에 의해 짓이겨졌다.

하나님은 그렇게 흙투성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 바로 우리 때문에.

-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