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46) 24:1-27 코로나와 같은 바울 - 공동체의 힘

안승준 2021. 7. 10. 02:37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로마 전복'을 의도했을까?

-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로마에 복음을 전해서 황제 숭배를 하나님 숭배로 전환하고픈 마음이 있었을까?

- 그렇게 로마를 전복시켜서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이 있었을까?

답하기가 어렵다.

-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에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렵다.

-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면서, 분명히 로마인들이 하나님을 숭배하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는 곧 황제 숭배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황제 숭배 포기는 로마 전복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바울에게는 로마 전복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 전복 의도가 있었다면, 과연 로마 황제에게까지 당당하게 항소할 수 있었을까?

- 자신의 무죄를 이렇게 당당하게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게다가 로마 당국이 바울의 죄를 충분히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로마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바울에게 정말 로마 전복 의도가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바울은 로마 전복에 기여했는가?

- 이 역시 어렵다.

- 바울은 성경에서 한 번도 로마에 대한 반역자로 판결받지 않는다.

- 예루살렘에서 루시아 천부장도,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총독도 바울을 무죄로 봤다.

[행 23:29] 나는 그가 유대 사람의 율법 문제로 고소를 당하였을 뿐이며, 사형을 당하거나 갇힐 만한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아무도 바울이 로마 전복에 기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바울은 로마 전복에 기여한 반역자로 죽는다.

- 네로 황제에게 로마 대화제의 누명을 쓴 동시에,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사형당한다.

- 게다기 그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박해를 당한다.

- 이는 명백한 로마에 대한 반역이다.

- 즉, 바울의 의식했건 하지 못했건, 바울 안에는 로마 전복 의지가 있었다.

 

이렇게 바울의 입장은 애매모호했다.

- 로마를 대적했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대적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 로마 황제의 권세를 인정하며 동시에, 로마 황제를 부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에서와 같은 공격을 당한다.

- 유대 사람들의 대표 더둘로는 다음과 같은 정죄한다.

- '염병 같은 자', '소란을 일으키는 자',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

[행 24:5]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 이는 한마디로, 로마의 평화를 훼손하여 로마에 반역한다는 뜻이다.

-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바울을 처벌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반박 포인트 역시, 자신에게 로마를 대적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물론 이러한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단지, 자신의 주장이 유대인을 거스르는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행 24:14] 그러나 나는 총독님께 이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 자신은 유대인의 율법과 예언서를 전적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적인 메시지가 전달하는 내면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 따라서 자신은 유대 민족에 소란을 일으켜서 로마의 평화를 훼손하지 않았으며, 

- 그렇기 때문에 로마를 대적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 즉, 자신에게는 로마에 대한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이다.

- 단순히 유대교 종교 활동이라는 것이다.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할 때나, 바울이 항변할 때 아무도 로마를 거론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곳은 로마 재판정이다.

- 로마법이 기준이다.

- 율법이나 성전은 기준이 아니다.

- 단지 율법이나 성전은 주장을 보완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병 같은 자'라는 정죄는, 로마 질서를 해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그리고 바울이 율법과 예언서를 거론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말하는 이유 역시 자신에게는 로마 질서를 해치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 바울 자신의 주장이 유대교 종교에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 그런 정죄와 항변만이 유효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염병 같은 자'라는 정죄를 당한 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다.

- 물론 이 시점에서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총독은 바울이 로마를 대적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 주장은 사실이 되었다.

-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후에 로마의 종교 의식과 황제 숭배를 거부하며 로마를 대적했다.

- 그래서 박해를 받았다.

따라서 뒤집어서 보면, 현시점에서 통찰력 있는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더둘로다.

- 바울은 실제로 로마 입장에서 '염병 같은 자'였던 것이다.

- 로마의 평화를 깨뜨릴 바이러스를 곳곳에 퍼뜨리고 있었다.

-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 마치 코로나를 퍼뜨리는 슈퍼 전파자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명목상 로마의 반역자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반역자였다.

 

이를 확장하여, 복음과 세상의 관계는 어떠한가?

복음은 세상을 대적하는가 아닌가?

- 답은, 알다시피, 복잡하다.

명목상 복음은 세상을 대적하지 않는다. 

- 세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 영의 세계에 대한 것이다.

-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 그것은 단순하게, 부활을 믿고, 부활의 주이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다.

[행 24:15]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 개인적이고, 정신적이며, 종교적이다.

- 세상에 영향을 줄 의도가 없다.

-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설명해서, 정죄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은 세상을 대적한다.

- 개인적, 정신적, 종교적이기만 하지 않다.

- 세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 로마라는 패권 국가를 전복시킬 만큼 말이다.

- '염병'처럼, '코로나'처럼 세상 전체를 변화시킨다.

- 따라서 지극히 육적이며, 인간적이다.

-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바울을 정죄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복음 전하는 자를 거부하며 박해한다.

- 세상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 세상이 세상 원리로 돌아가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 세상이 원하지 않는 변화를 복음이 가져오기 때문이다.

- 세상은 복음 전하는 우리를 코로나 보듯 거부한다.

- 세상은 복음을 '방역'한다.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 우리는 부활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것뿐이기 때문이다.

- 세상에 영향을 줄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으려 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박해 받는 것이 마땅하다.

-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세상에 영향을 줄 의도가 없었어도, 우리는 세상에 영향을 준다.

- 우리 존재 자체가 세상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 원리를 거스르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만으로도 세상 전체를 요동치게 하기 때문이다.

- 마치 커다란 모니터에 데드 픽셀 하나만 있어도 모니터는 안 보이고 그 점만 보이는 것처럼.

- 그래서 모니터 전체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그러니 세상은 우리를 없애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 예수님과 바울에게 세상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바른 복음은 전방위적으로 욕을 먹는다.

- 너무 개인적이고 사회 참여가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 동시에 종교가 너무 사회에 깊이 참여한다, 종교는 종교다워야지. 라는 비판도 받는다.
- 너무 영적이고 너무 세상을 등진 것 아냐? 라는 비판과, 너무 육적이고 너무 세상에 집착하는 것 아냐? 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다.

왜 이러냐?

- 복음과 세상의 관계가 본래 복잡하기 때문이다.
- 복음이 완전히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완전히 세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완전한 하나님임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것처럼.

-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헷갈리는 것처럼.

- 그래서 세상과 복음의 관계도 항상 헷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우리 공동체에 적용하면, 우리는 어떻게 신앙 생활해야 하는가?

단순하게, 다른 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만 생각하면 된다.

-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 성경에 나온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며,

- 동일한 부활이 나에게 있을 것을 소망하고,

- 그 소망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 창조주와 피조물이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마땅하다.

- 왜? 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

- 왜라고 묻는 것은, 마치 왜 사람은 살인을 하면 안 되냐고 묻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것이다.

당위론적으로, 피조물은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좋기 때문이다.

- 참모습을 찾아,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 사람으로서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이 개인적 경험이 개인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이 경험은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킨다.

- 하나님께 받은 궁극의 사랑에 취해서, 그 외의 모든 가치 기준과 쾌락이 하찮아진다.

- 마치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같은 사랑을 작게는 주변 사람들에게, 크게는 세상 전체에 주려고 든다.

- 세상의 돈, 명예, 권력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좋다고 떠들어댄다.

- 술 취한 사람이 술 권하며 고성방가 하듯이 말이다.

- 게다가 부활이라는 불멸의 스팀팩까지 맞았으니, 얼마나 열정적이겠는가.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교제'로 나타난다.

-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서로의 인격을 주고받는다.

-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오셔서, 

-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공감해주시고, 

- 아무도 모르는 소망을 격려해 주시며,

- 아무도 모르는 죄를 지적하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우리도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의 고통에 공감하며,

- 그 고통을 감수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며 찬양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이다.

- 누구에게는 교제가 사랑인데, 누구에게는 교제가 간섭 혹은 집착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공감, 격려, 위로는 사랑으로 느껴지지만, 지적, 교정, 통제는 간섭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사랑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물론 거짓 사랑도 있지만.

이렇게 복음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누구도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 않는다.

- 누구나 자신만 생각하며 시작한다.

- 나 잘되려고, 나 구원받으려고 시작한다.

그런데 구원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게 되면, 공동체에 눈이 돌아간다.

- 함께 신앙 생활하는 사람과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한다.

- 의도도, 계획도 없었지만, 사랑의 본능에 이끌린다.

그런데 이 본능이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킨다.

- 서로의 인생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매너, 예절, 사회적 규범 등으로 적절히 숨겨졌던 서로의 본모습이 여과 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 그러다 보니 숨기고 싶은 영역까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빈번해진다.

- 마치 결혼 전에 몰랐던 배우자의 본모습을 결혼 후에 알게 되는 것처럼.

서로의 인생에 '반려자'가 되기 위해 함께 모인 공동체인데, 실상은 서로의 인생에 '방해꾼'이 된다.

-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 맺는 평범한 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 그곳에서는 세상의 매너, 예절, 규범이 웬만한 갈등을 해결해준다.

- 하지만 참된 관계를 위해 애쓰면, 오히려 독이 되어 관계가 깨질 수 있다.

- 마치 적당히 신앙 생활하는 우리는 세상과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지만, 인생 걸고 신앙 생활하는 바울은 세상과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 - 그럼 이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교제로 인한 갈등 때문에 겪는 고통보다 공동체를 묶어주는 힘이 더 크면 된다.

- 그러면 갈등 속에서 서로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된다.

- 서로의 가장 은밀하며 가장 추한 모습을 알게 된다.

- 처음에 그것은 갈등의 원인이 되지만, 그것을 발판으로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시작된다.

- 그리고 그 이해는 결국 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교회는 한 몸이 되는 것이다.

- 그리고 한 몸이 된 교회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구현한다.

- 예수님의 본질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함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뭐냐?

- 두 가지이다.

- 첫째로,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서로의 인생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의지이다.

- 이것이 왜 중요한지는 이미 설명했다.

- 둘째로, 갈등이 분열로 치닫지 않을 수 있도록 막아주는 공동체의 힘이다.

- 분열의 힘보다 공동체의 힘이 조금이라도 크면 된다.

나는 이것을 부부 싸움할 때 많이 느낀다.

- 사랑으로 서로에게 개입하다 보면 갈등이 생긴다.

- 그런데 갈등이 싫어서 개입을 하지 않다 보면, 오히려 정이 떨어진다.

- 그래서 계속 개입하면, 갈등이 쌓이다가 폭발한다.

- 그러면 사정없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 그런데 그렇게 분열될 위기에 부부 관계의 힘이 발동한다.

- 머리끝까지 났던 화가 분열 생각에 뚝 떨어진다.

- 부부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 고민 끝에 양보와 해법이 나온다.

-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더 나은 방법이 나온다.

- 이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의 힘이다.

교회를 갈등으로부터 지켜줄 것도 이러한 공동체의 힘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공동체의 힘을 키우냐?

- 의미 없는 정답부터 말하면, '성령의 능력'과 '시간'이다.

- 성령님께서 인도를 받으며, 많은 시간 함께하며 좋은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하며, 함께 대화하고, 함께 여행 가는 것이다.

-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이 있을 텐데, 함께 고민해보자.

우리 각자가 절대로 헤어지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을 때,

-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에게 더 깊이 개입할 수 있고,

- 더 큰 갈등을 감수하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며,

- 그렇게 드러낼 때 서로 더 이해할 수 있고,

- 그럴 때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미양 교회는 더욱더 교회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