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45) 23:12-35 복음의 두 가지 이중성

안승준 2021. 7. 3. 13:02

복음에는 두 가지 이중성이 있다.

- 첫째가 죽음과 부활이고, 둘째가 육과 영이다.

- 이를 이중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육과 영이 구분되기도 하고 구분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완전히 구분되는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구분할 수 없는 완전히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정말 여러 번 말했으니, 간단히 말하겠다.

- 그런데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죽음과 부활 그리고 육과 영을 한 번에 말한다는 것이다.

- 이 둘은 서로 전혀 상관없는 것인데, 모아놓고 같이 보면 근본 원리가 묘하게 비슷하다.

- 왜 그런지까지 사람은 알 수 없지만, 세상의 근원과 맞닿아있는 본질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상당한 공통점을 갖는다.

 

죽음과 부활은 구원에 관한 것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하셨다.

-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을 때 죄 용서를 받는다.

- 그리고 믿는 자는 남은 인생에서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서 경험함으로 예수님의 구원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증거한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은 소멸을, 부활은 회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완전히 구분된다.

- 죽음을 통해 이전까지의 인생 전체가 부정되고,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생이 재창조된다.

하지만 죽음과 부활은 나눌 수 없다.

- 죽음 없는 부활은 없고, 부활 없는 죽음은 의미 없다.

-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있고, 절대로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육과 영은 세상에 관한 것이다.

- 명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육은 보이는 세계, 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배타적이며 완전히 구분된다.

그러나 육과 영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 육이 범한 죄 때문에 영까지 심판을 받는다.

- 또 육의 믿음으로 영까지 구원을 받는다.

- 게다가 사탄과 같은 영에 의해 육이 죄를 짓는다.

그런데 육과 영의 구분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허물어졌다.

- 예수님은 영이시지만, 육의 세계 안에 침투하셨다.

- 그래서 육의 세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영적인 사건을 일으키셨다.

- 다른 말로, 육의 세계 안에 영의 세계,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다.

- 이로써 육과 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구분할 수 없는 하나가 되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본문에 죽음과 부활, 육과 영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 바울은 지금 유대 사람들에 의해 죽음의 위기 속에 있다.

- 그러나 그로 인해 로마군의 더 강력한 보호 속에서 회복된다.

- 그리고 바울은 결국 이러한 박해 끝에 로마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 그러나 그로 인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이루어 부활의 영광에 이른다.

- 즉, 바울은 한 사건 안에서 위기(죽음)와 회복(부활)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다.

육과 영의 관점에서,

- 육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유대 사람들의 살해 모의, 그로 인한 바울의 이송, 그 결과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로부터 벨릭스 총독에까지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의 황제까지 만나 재판을 받는다.

- 아무런 죄도 없는 바울 입장에서 계속 억울한 일이 반복된다.

- 그러나 동시에 영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천부장을 넘어, 가이사랴에서 로마 총독에게로, 그리고 결국 로마에서 황제에게 전해진다.

- 유대 사람들, 천부장, 벨릭스 총독 모두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움직인다.

- 그러나 그런 행위에 의해 복음이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된다.

- 즉, 복음과 전혀 상관없는 육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영의 세계가 확장된다.

이것이 실제 세계이다.

 

왜 실제 세계는 이렇게 뒤죽박죽이냐?

- 구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분이 없는 것도 아닌, 이중성 혹은 모순성으로 얼룩져있냐?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 이를 통해 세상에 있는 모든 구분과 기준보다 하나님이 우월하심을 드러난다.

- 하나님께서 구분과 기준을 만드셨지만, 그래서 그것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지만, 그래서 하나님조차 그 기준을 존중하시고 그 구분에 순응하시지만,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구분과 기준을 초월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 그래서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부활이라는 반전을 이루시고, 육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영의 세계의 전환을 이루신다.

- 평상시에는 죽음은 소멸로 귀결되고, 육과 영은 완전히 구분되는데도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현실이 뒤죽박죽으로 보이는 것이다.

- 이로써 하나님께서 얼마나 전능하신지를 세상에 보여주시는 것이다.

- 하나님만이 독보적인 주권을 가지신 유일한 존재라는 것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하냐?

복음의 이중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 완전히 구분하거나, 완전히 합쳐버린다.

죽음과 부활을 완전히 구분하여,

- 죽음은 나쁜 것으로, 빨리 지나가길 바라고,

- 부활은 좋은 것으로, 빨리 오길 기대한다.

또 죽음과 부활을 완전히 합쳐서,

- 긍정적인 사람(강자)은 부활만을 구원으로 착각한다.

- 그래서 자신은 믿음으로 새 생명 얻었다며 자만한다.

-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약자)은 죽음을 구원으로 착각한다.

- 그래서 고난을 자처하며, 죄의식 속에서 괴로워한다.

육과 영을 완전히 구분하는 사람은,

- 육은 나쁜 것으로, 벗어버리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고,

- 영은 좋은 것으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본다.

또 육과 영을 완전히 합쳐서,

- 긍정적인 사람(강자)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영적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자신의 욕심조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적인 일로 포장한다.

-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약자)은 모든 일을 육적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치부하며 낙담한다.

 

그래서 정리하면,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① 잘된 것은 자기 탓, 안된 것은 남 탓 하는 사람

- 자기는 이미 부활의 은혜를 입어, 죽음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 육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을 도와주며, 바라는 것을 모두 이뤄주신다고 믿는다.

- 이런 사람은 세속주의로 변질한다.

② 안된 것은 자기 탓, 잘된 것은 남 탓 하는 사람

- 자기에게 죄가 너무 많아, 자기에게는 좌절, 절망, 죽음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육의 한계가 너무 커서 영적인 일은 꿈도 못꾼다고 생각한다.

-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며, 바라는 것을 이뤄주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 이런 사람은 고행주의로 변질한다.

③ 모든 것을 자기 탓하며,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

- 성공도 실패도 자기 때문이기 때문에, 자기만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인생의 주권이 완전히 자기에게 있다고 믿는다.

- 그래서 변화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는다.

-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산다.

- 이런 사람은 결국 번아웃 된다.

④ 모든 것을 남 탓하며, 지나치게 낙담하며 사는 사람

- 성공도 실패도 남 때문이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 인생의 주권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고 믿는다.

- 그래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 노력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믿는다.

- 이런 사람은 우울증에 걸린다.

 

물론 이 중 하나에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극히 일부일 것이다.

- 대부분은 여러 부류가 섞여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주된 경향성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복음을 왜곡하는가?

하나님께서 세계를 이중적으로 만드신 이유와 같다.

- 자신이 유일한 주권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유일한 주권자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세계를 이중성으로 만드셨다.

- 사람도 똑같다.

- 명확한 기준을 소유하여, 자기가 왕, 주권자, 통치자 되기 위해서이다.

- 기준을 소유하고 있을 때, 세상을 이해, 평가, 판단할 수 있고, 또 그래야 세상을 소유할 수 있으며, 또 그래서 세상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 죄의 본질이다.

- 내가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가 되어 세상을 통치하는 것.

- 물론 사람에 따라 원하는 세상의 규모가 다를 수 있다.

- 전 세계에서부터, 국가, 조직, 직장, 부서에 이어, 가장 작은 가정 그리고 나까지.

- 어쨋든 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적어도 이 범위 안에서는 하나님을 몰아내고자 하는 마음이 죄의 본질이다.

- 이 죄로 인해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전쟁을 하게 된다.

- 그 전쟁의 결과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다.

 

하지만 본문은 그렇지 않다.

- 유대 사람들의 살해 모의는 육의 세계에서 일어난 죽임의 사건이다.

- 그러나 그로 인해 바울의 신변은 더욱 안전해진다.

- 즉, 부활의 회복이 발생한다.

- 게다가 가이사랴로 가서 더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다.

- 즉, 복음이 전파되어 영의 세계가 확장한다.

정리하면,

- 죽음 속에 낙담하지도 않고,

- 부활의 회복으로 자만하지도 않으며,

- 육의 세계를 무시하지도 않고,

- 영의 세계만을 추앙하지도 않는다.

본문에서는,

- 죽음 속에서도 부활을 소망하고,

- 부활 속에서도 죽음을 대비하며,

- 육의 세계 속에 영적인 일을 기대하고,

- 영적인 일을 위해 육의 세계 안에서 뒹군다.

-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관리, 감독, 통치, 결정하신다.

 

이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다.

- 모든 규칙과 질서가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도,

- 다른 한편으로, 절대로 예상할 수 없고, 아무도 계획하지 않은 복음 전파가 일어난다.

-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역할을 하며 그저 그렇게 지나간다.

-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복음 전파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께서 주인공으로 세워주신다.

사도행전을 돌아봐도 바울의 전도 사역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다.

- 맨날 도망 다니기 바빴다.

- 1차, 2차 여행 때는 전도한 사람도 얼마 없다.

- 영향력도, 성과도 없었다.

- 사도로 인정받지도 못해서, 맨날 자기 사도 맞다는 항변이나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바울이 복음 전도의 주인공이다.

-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인공이심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죽음과 부활, 육과 영을 구분하지 않으면서도,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부활을 소망하며, 육에서 뒹굴면서도, 영적인 일을 생각했다.

-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면서도,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졌다.

이러한 태도는 너무 모순적이고, 너무 이상적이다.

- 이게 좋다는 것은 다 안다.

- 할 수 없어서 문제지.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론 - 인생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리는 인생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 인생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 왜냐하면 인생을 설명하고 이해해서, 통치하고 주도하고 싶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인생의 왕, 세상의 왕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바울이 사역을 성공한 원인을 설명하고 싶어 한다.

- 바울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 로마 신분 때문이라고 말한다.

- 똑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그래서 우리도 강력한 의지를 갖고, 높은 신분을 쌓아야 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를 많이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반대로 말한다.

- 바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전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한다.

- 그래서 우리도 태평하게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다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냐?

- 이렇게 말하면, 자기가 세상을 좀 아는 것 같기 때문이다.

- 세상의 왕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 특히 목사들이 그렇다.

- 목사 말고도 그런 사람이 너무 많다.

- 우리도 그런다.

 

하지만 모든 설명이 다 틀렸다.

- 인생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 감히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 그것은 교만이고, 무식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면, 아무것도 평가할 수 없고, 그러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데 말이다.

- 뭔가 기준을 가지고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 너무 당혹스럽다.

- 당장 일을 해야 할까, 아이랑 놀아야 할까, 아내와 대화를 해야 할까,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까?

 

그럼에도 명확한 기준은 하나 있다.

- 인생은 끝난다는 것.

- 이후 인생보다 더 길고 더 중요한 영생이 있다는 것.

- 영생에는 하나님과 사람과 사랑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

-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

바울은 그것을 위해 전도했고, 

- 그것을 위해 박해받았고, 

- 그것을 위해 로마로 갔고, 

- 그것을 위해 죽었다.

- 그래서 매 순간 비교적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 다르다.

- 누구는 너무 긍정적이고,

- 누구는 너무 부정적이며,

- 누구는 너무 적극적이고,

- 누구는 너무 소극적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인생이 끝나고 영생이 있다는 것은 같다.

- 그래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

- 그래서 함께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며 이끄실 것이다.

- 그것이 바른 인생이고, 바른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