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42) 21:17-40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르는 바울 - 복음의 후폭풍

안승준 2021. 6. 5. 00:33

유대 사람들은 바울이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른다며 죽이려 든다.

[행 21:28] 소리 쳤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합세하여 주십시오. 이 자는 어디에서나 우리 민족과 율법과 이 곳을 거슬러서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더욱이 이 자는 그리스 사람들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에 대한 근거로,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전 안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행 21:29] 이는 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는 것을 전에 보았으므로,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왔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 심지어 로마 당국도 로마인이 성전 안에 들어가 사형을 당하는 것조차 묵인해주었다.

 

하지만 바울은 민족, 성전, 율법을 거스르지 않았다.

- 드로비모를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았다.

- 두 가지 모두 오해였다.

첫째로, 바울은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 단지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다.

- 그것을 '성전' 안까지 온 것으로 착각했다.

-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확증편향의 전형이다.

- 그런데 이는 두 번째 판단도 오류임을 증명한다.

둘째로, 바울은 민족, 율법, 성전을 거스르지 않았다.

- 이것이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더 근원적인 이유이다.

- 유대 사람들은 바울을 유대 민족의 반역자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 드로비모 문제는 이것을 증명하려는 미끼일 뿐이다.

바울이 대한 오해를 더 자세히 표현한 구절이 있다.

[행 21: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소문으로 듣기로는, 당신이 이방 사람 가운데서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유대 사람의 풍속도 지키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를 배척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 즉, 바울이 유대 사람에게조차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 이를 증명할 직접적 증거가 없으니, 드로비모 사건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명백한 오해이다.

- 바울은 이방인에게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

- 유대 사람이 율법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 오히려 바울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필요에 따라 율법을 지켰다.

- 그러한 예로, 바울은 야고보의 요청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하기까지 한다.

[행 21:26]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날 그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한 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다.

게다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공인한 사안이다.

[행 15:28~29] 성령과 우리는 꼭 필요한 다음 몇 가지 밖에는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29)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삼가면, 여러분은 잘 행한다고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의 의무가 없음을 이미 수년 전에 공인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바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 유대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 율법을 배척하지도 않았으며,

-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에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왜 이랬냐?

이들은 왜 아무 잘못 없는 바울을 못 죽여서 안달이냐?

- 살인마도 아닌 이들은 왜 멀쩡한 바울에게 살의를 갖게 되었냐?

- 살인마이긴커녕, 유대교도 아닐뿐더러,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같은 그리스도인인 바울을 죽이려 들까?

- 바울의 어떤 점이 이 착한 사람들에게 살의를 품게 했을까?

이 질문을 현대 시대를 배경으로 바꿔보면,

- 어떻게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적의와 살의를 갖게 될까?

- 교회 안의 내분은 어떻게 일어나나?

- 특히 교회 내분 중에서도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말아야 하는 내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이런 점까지 확대해서 생각해보자.

 

바울의 주장은 간명하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유일무이한 주님이라는 것이다.

-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신앙과 인생의 전부라는 것이다.

분명하게도, 이 주장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모여든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 어떤 교회에 가서 물어도, 이것을 절대불변하는 진리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 바울은 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한다.

- 예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이다.

- 심지어 민족, 율법, 성전까지 말이다.

- 이런 것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이다.

- 오직 구원은 예수님만을 통해서라고 말이다.

이것으로 교회 내분이 시작된다.

-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 그리스도인 중의 일부는 예수님이 전부라는 말은 믿었지만, 예수님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 이 두 가지 말이 완전히 같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그래서 민족, 율법, 성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다.

-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은 믿으면서 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 완전히 같은 두 가지 말을 하나는 받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거부한다는 것이.

- 예수님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분의 원인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 문제의 원인이 애초부터 합리와 논리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대화로는 해결이 안 된다.

-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와도, 예수님이 오셔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유대 사람들은 이 말을 들으면, 살의를 느낄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이 말 안에는 실제도 '칼'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겨누기 때문이다.

- 이 말의 진의를 깊이 생각하면, 나의 목숨, 인생, 가치관, 경험이 모두 말살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복음을 들으면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한다.

- 그래야 그것이 바른 복음이다.

- 그렇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사람은 당연히 살의를 갖게 된다.

- 복음을 죽이던지, 그게 아니면 복음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 한다.

- 육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부활을 소망하면, 죽음을 감수할 수 있다.

- 죽음 속에서 소멸이 아닌 회복을 보기 때문이다.

- 역설적으로, 죽음 속에서 참 생명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을 소망하지 않고 죽음만 보면, 죽음을 피하려고만 한다.

- 생존 본능이 발동한다.

-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죽음을 전하는 자를 향해 전력으로 공격한다.

- 여기에서 살의가 생기는 것이다.

- 남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 바울을 죽이지 못하면 유대 사람들 자신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베소에서부터 유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 자신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 먼 길을 떠날 힘을 얻은 것이다.

- 그래서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까지 합세하자고 소리치는 것이다.

[행 21:28] 소리 쳤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합세하여 주십시오.

- 그래서 모든 유대 사람들이 함께 바울을 죽이려 드는 것이다.

[행 21:31]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소요에 휘말려 있다는 보고가 천부장에게 올라갔다.

 

유대 사람들의 살의는 이렇게 간절하고 절박하다.

-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함께 빠져 죽는 것이라고 한다.

- 살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하다 보니, 살리러 온 사람을 죽여서라도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국 함께 빠져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그만큼 지금 유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절박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이렇게 된다.

- 살리러 온 사람조차 죽인다.

-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

- 이성이 마비된다.

- 완전히 같은 두 가지 말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확증편향이 일어난다.

- 모든 감각이 왜곡되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더 나아가서 제대로 본 것도 왜곡시킨다.

- 그래서 자신이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정보도 살기 위해 필요한 정보로 왜곡한다.

그래서 바울에게 잘못이 있다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 예루살렘 '성' 안에 있었던 드로비모를 보고 '성전' 안에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 여기서 성과 성전은 완전히 다르다.

- 이는 마치 경기도와 우리집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로마 군대가 와도 우왕좌왕한다.

- 바울의 잘못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다.

- 각자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착각에 빠져 있으니 중구 난방한다.

[행 21:33~34]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그는 부하들에게 쇠사슬 둘로 바울을 결박하라고 명령하고, 그가 어떤 사람이며, 또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물었다. (34) 그러나 무리 가운데서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질렀다. 천부장은 소란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었으므로,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하였다.

 

혹자는 이러한 유대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지적한다.

- 그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이는 모든 인류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 물에 빠진 사람이 구조 대원을 죽이려 하듯, 죽음이 임박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다 보니,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그랬다.

-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 예수님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 말이다.

 

확신하건대, 우리는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 사람들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다.

- 더 정확하게 말해서, 바울보다 유대 사람들이 훨씬 더 공감이 간다.

- 왜냐하면 우리 역시 이들의 살의를 현실 속에서 쉴새 없이 느끼기 때문이다.

-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어리석은 판단을 셀 수 없이 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면,

- 우리는 모두 사랑과 돈 중에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 돈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것과, 돈은 많지만 누구와도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며 사는 것 중에 고르라면, 분명히 전자를 고른다.

- 사랑의 관계가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돈이 없어지면, 그래서 육체적, 사회적 죽음을 감지하면,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 우리는 즉시 사랑을 포기한다.

- 사랑에 썼던 에너지를 모두 거둬들이고, 돈에 총력을 기울인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 썼던 에너지를 거둬들이고, 모든 에너지를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만을 위해 쓴다.

- 게다가 자기를 지키는 과정 중에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

- 만약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된다면, 살해도 서슴지 않는다.

-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대표적인 예는 이혼이다.

- 결혼 생활로 인한 육체적, 사회적 죽음을 피하기 위해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를 '사회적', '감정적'으로 죽이는 것이 이혼이다.

- 자기가 더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 그러니 이혼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 이혼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이렇게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진다.

- 특정한 일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사역으로 드러난 인류의 어리석음이다.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절대적, 독보적 기준을 제시했다.

- 그런데 그로 인해 '모든 것의 상대화'라는 후폭풍을 일어났다.

- 그 거센 바람이 모든 인류를 휩쓸고 지나갔다.

① 유대 사람들에게 지나갔을 때는 민족, 율법, 성전이 상대화되었다.

- 물론 바울은 민족, 율법, 성전을 무시하지 않았다. 존중했다.

- 율법을 지켰으며, 특히 유대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다.

- 오직 이방인에게만 불필요하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았을 뿐이다.

-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율법이 상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율법이 '사람에 따라' 지켜도 되거나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치부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율법이 절대 기준에서 터럭만큼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래서 바울을 죽이려 드는 것이다.

② 후폭풍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지나갔다.

- 그들은 모든 신에게 힘이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믿었다.

- 그래서 각양각색의 신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고 있었다.

-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절대적이며 유일한 신을 제시했다.

- 그러면서 그들이 믿는 모든 신을 상대화시켰다.

- 그러니 얼마나 열 받겠는가.

- 그들에게 바울은 자신들의 삶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강도로 보인다.

- 그래서 에베소의 은장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행 19:23~28] 그 무렵에 주님의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 (24)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이가 ・・・・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27)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28)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 여신은 위대하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③ 후폭풍이 로마인에게도 지나갔다.

- 그들에게 바울의 복음은 황제를 상대화시켰다.

- 절대 군주이며 신인 황제를 말이다.

- 이로 인한 분노로 결국 바울은 네로 황제에게 죽임당한다.

④ 그리고 후폭풍은 우리에게도 왔다.

- 근대를 지나 현대 포스트 모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결국 '나'만 남았다.

- '나'를 드러내고 '나'로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다.

-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이다.

- 그래서 우리는 '돈'을 통해 '나'를 확립한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나'와 '돈'을 상대화시킨다.

- 귀하게 여겼던 '나'는 더러운 죄인일 뿐이라고 말이다.

- 아무 쓸모도 없는 지옥의 땔감일 뿐이라고 말이다.

- 그리고 '나'의 타락을 부추기는 것은 '돈'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 내 인생 다 바쳐 '돈'을 통해 '나'를 확립해가고 있는데, 그것이 전부 틀렸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 내 인생 전체를 박살 내고 있는데 말이다.

복음은 이렇게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이다.

- 살의를 갖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바울은 예수님 이야기만 했다.

민족, 율법, 성전, 그리고 모든 신, 그리고 황제, 그리고 나와 돈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듣는 사람은 예수님 이야기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민족, 율법, 성전, 그리고 모든 신, 그리고 황제, 그리고 나와 돈을 무시한 것만 기억한다.

- 그러면서 왜 이런 것들을 무시하냐며 화낸다.

- 살해 위협을 느끼며 살의를 갖는다.

-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 바울은 예수님 이야기만 했는데 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처한 현실이다.

- 이것이 복음 전하는 자가 처한 현실이다.

- 이것 때문에 복음 전하는 자는 언제나 목에 칼 끝이 겨눠져 있는 것이다.

- 언제나 생명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은 전도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당신이 먼저 나에게 칼을 겨눴다고 말이다.

- 당신이 먼저 칼을 들고 달려오기에 살기 위한 정당 방어일 뿐이라고 말이다.

-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 본능이라고 말이다.

- 내 목숨 지키려는 것뿐인데, 왜 그것을 나쁘다고 하냐며 말이다.

- 자신에게 악의는 없고 순수하다며 말이다.

 

그런데 과연 전도자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정말 칼인가?

- 복음이 칼인가?

- 생명 아닌가?

- 문제는, 사탄에게 복음을 생명이 아닌 칼로 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고전 1:23]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 성경은 이렇게 복음이 칼로 보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은 바울을 죽이려고 이렇게 아우성치는 것이다.

[행 21:36] 큰 무리가 따라오면서 "그 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외쳤다.

- 그리고 바울은 결국 죽는다.

 

결론 - 우리에게 복음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복음이 생명으로 다가오는가, 칼로 다가오는가?

- 생명으로 다가온다면, 헌신해야 마땅하다.

- 반면 칼로 다가온다면, 살의를 가져야 마땅하다.

- 만약 우리에게 헌신도 살의도 없다면,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복음이 생명 되길 바란다.

- 예수님이 전부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기를 바란다.

- 그래서 예수님만을 위해 살길 바란다.

- '나'로부터,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만 하며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 우리에게 복음은 생명도 아니지만, 칼도 아니다.

- 복음이 얼마나 우리를 풍성하게 살리는지도 모르지만, 무섭게 죽이려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 그래서 복음에 대한 살의조차 없다.

- 복음을 바르게 들었으면, 헌신은 아니라도 살의는 가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 살의를 가져봐야,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게 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살인이다.

예수님이 전부라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의 목숨, 인생, 경험, 가치관을 말살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살해 위협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이 글이나 글을 쓴 나에게 살의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살의를 느끼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꺼내 달라고 기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전부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죽음과 함께 부활을 믿도록 하는 것이다.

부활을 믿고, 영생을 얻어, 생존 본능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 그러면 더 이상 나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 살해 위협이 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 그러면 모든 순간에 사랑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 모든 순간에 사랑을 느끼는 것이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니 말이다.

- 바로 그곳이 천국이니 말이다.

- 죽기 전이건 죽은 후이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우리에게 분노와 살의를 유발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