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2) 10:36-48 이방인을 위한 베드로의 첫 설교 - 로고스
베드로가 이방인을 위한 첫 설교인 본문은 여러모로 굉장히 중요하다.
- 그 중에 가장 명료하고 객관적인 이유를 하나만 꼽자면, 본문의 맥락 면에서이다.
맥락을 보면,
- 7장에서 스데반의 죽음 이후 복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 수 없었다.
- 그래서 복음은 8장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가사에서 에디오피아 네시를 만나고,
- 9장에서 유대와 이방의 중간지인 룻다와 욥바까지 이르게 된다.
- 그런 후에 드디어 10장에서 본격적으로 이방 지역인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 즉, 7장에서부터 시작된 세밀하고 단계적인 복음의 여정을 베드로의 설교가 일단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복음의 여정의 절정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설교는 굉장히 세밀하게 봐야 한다.
- 본문의 맥락상 함축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드로 설교의 문법이 파격적이다.
- 문장이 길고 수식이 많은데다가, 주어만 있고 동사가 없는 문장이 반 정도나 된다.
- 문장의 일반적인 원칙이 파괴된 본문이다.
- 그런데 물론 번역본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다.
- 그래서 원어로 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본문은 절정의 맥락에서 극단적으로 함축된 어구로 뭔가를 강조하는 것이다.
- 질문은 세 가지이다. why? what? how?
why?
-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이방 지역인 가이사랴까지 복음 이동 과정을 섬세하고 단계적으로 표현했다.
- 그만큼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것이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베드로의 설교는 그 섬세하고 까다로운 과정의 절정이다.
- 그러니 엄청나게 급진적인 메시지를 응축하고 정제된 어구로 표현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how?
- 원어를 보면, 주어만 있고 동사가 없는 긴 문장이 세 개나 나온다.
- 그 주어가 바로 본문이 강조하는 바일 것이다.
what?
- 그건 차차 확인해보자.
원어로만 알 수 있는 특징
첫째로, 36절, 38절, 39절과 같이 완전한 문장이 아닌 경우이다.
- 특히 36절은 번역문만으로는 어디에 강조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행 10: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 말씀을 보내신 하나님께 있는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지, 말씀으로 인한 평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선입견을 가지고 볼 때, 만민의 주님이시고 평화를 전하신 예수님께 강조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너무도 명확하게 word에 강조점이 있다.
- 동사도 없이 the word라는 주어만 있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 이러한 파격은 강력한 강조이다.
- the word만 주연이고, 나머지 하나님, 이스라엘 자손, 예수님, 평화, 만민의 주는 조연이다.
- 그렇다면 이러한 구문으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뒤에 보겠다.
둘째로, 37절과 같이 수식구가 많은 경우이다.
[행 10:3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 번역문에서는 동사가 '아시는 대로', '끝난 뒤에', '시작하여', '이루어졌습니다'가 나열되어 있다.
- 그러나 원문을 보면, '여러분은 안다.'가 주문장이고, 나머지는 전부 수식구이다.
- 그래서 번역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에서 이루신 일을 강조한다는 오해를 준다.
- 반면에, 원어는 말씀을 여러분이 안다, 인식했다, 경험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셋째로, 38절과 같이 수식절이 복잡한 경우이다.
[행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 원문은 동사도 없이 주어인 Jesus the one from Nazareth과 나머지는 수식절로 된 불완전한 문장으로, 예수님께 강력한 강조가 있다.
- 그러나 번역문에서는 세 문장으로 쪼개어 초점을 분산시켰다.
- 이렇게 불완전한 문장을 번역할 경우에, 완전한 문장으로 바뀌면서 문장 구조가 다 깨진다.
- 특히 원문에서는 예수님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의 역할이 시작과 끝에 반복되면서 강조된다.
- 예수님 존재의 근원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어 분석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알게 되었나?
- 우선 38절에서 예수님을 강조하며, 예수님의 근원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메시지는 굳이 원어를 보지 않아도 당연한 메시지이다.
- 하지만 36절에서 the word를 강조한 것과 37절에서 you have known을 강조한 것은 원어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다.
그러면 이것이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 여기서부터는 내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한 다른 해설서는 없었다.
- 결론부터 말해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면서 전도 메시지에도 이방의 색채가 입혀졌다.
- 특히 복음이 헬라 철학의 색채가 입혀졌는데, 헬라 철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아니라, 방법론만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복음을 설명하는데 the word, 즉 원어로는 logos로 시작하는 것이다.
- 헬라 철학에서 logos는 '만물의 근본 원리' 혹은 '신적인 원리', '진리' 등을 뜻한다.
- 이렇게 헬라 철학 용어를 차용함으로 이방인에게 설득력 있는 전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대부분의 이방인이 헬라 철학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라 철학을 차용했지만, 수용하지는 않았다.
- 그것이 바로 you have known을 강조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logos는 본질과 현상이라는 이원론에 기반을 둔다.
- 즉, 헬라 철학에서 logos는 본질로서 현상이 배제된 개념이다.
- 따라서 logos는 시공간 안에 있지 않으며, 사람이 알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일원론에 기반한다.
- 그래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본질임과 동시에 시공간 안에 존재한다.
- 마치 예수님께서 초월적인 신임과 동시에 성육신하신 인간이신 것처럼 말이다.
- 그 점을 you have known을 통해 강조한 것이다.
- 특히 특정한 지역인 갈릴리와 유대 그리고 특정한 시점인 요한의 침례 사역 이후에 오신 말씀이라고 말한다.
- 그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진리를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인 logos로 표현하여 두 가지 모순되는 개념을 결합한 것이다.
- 이를 통해 헬라 철학을 차용하되 수용하지는 않고, 초월자이지만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본질을 설명했다.
- 즉, 복음을 이방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변형했지만, 변질되지 않고 전달한 것이다.
본문에서 선포된 복음에 헬라 철학이 채색되었다는 것이 이전 설교와 비교해보면 더 분명해진다.
- 먼저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성전 건물에 매여 하나님을 거부한 이스라엘을 비판하며 예수님을 죽인 것을 정죄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행 7:51~53]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53)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서도, 예수님을 죽인 것을 정죄하는 것이 핵심이다.
[행 3:12~16]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13)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14)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5)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첫째 설교에서도, 구약을 근거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정죄한다.
[행 2:34~36]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35)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굴복시키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36)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유대인을 향한 설교 메시지였다.
- 핵심은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정죄이고, 근거는 율법과 성전 그리고 그것을 담고 있는 구약 성경이었다.
- 유대인에게 최적화된 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이방인에게 설득력이 없다.
- 왜 그런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 이방인인 우리가 이미 경험했다.
- 성경을 근거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이방인에게 소용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헬라 철학을 가져온 것이다.
- 당시 헬라 철학은 마치 우리에게 자본주의와 같이 친숙한 것이다.
-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너무 친숙해서 그것의 존재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당시 사람들에게 헬라 철학은 공기와 같은 것이었다.
- 그래서 헬라 철학에서 인류 보편적 진리 개념을 담고 있는 logos를 이용한 것이다.
- 예수님이 바로 그 logos라는 것이다.
그런데 logos 개념을 그대로 수용하면, 인류 보편적 진리에 예수님이 함몰된다.
- 예수님은 보편적 진리를 설명하는 수단을 전락한다.
- 그래서 용어는 차용하되, 개념을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추가한 개념이 뭐냐?
- 진리가 시공간 안에서 인간이 알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란 개념을 추가한 것이다.
- 이는 기존의 logos에는 없는 개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설명할 때 의도적으로 구체적, 현실적, 육체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 진리이신 예수님이 시공간을 초월하심과 동시에 시공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말이다.
- 예수님을 왜 이렇게 모순적 존재로 정의해야 하는지는 이전에 이미 많이 말했었다.
그 예가 37, 38, 40, 41절이다.
[행 10:37]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행 10:38]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행 10:40~41] 하나님께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이런 현실적인 표현은 유대인에게 했던 설교에는 없다.
- 그들에게는 불필요하다.
-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구약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으로는 안된다.
- 그래서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육체적 경험을 근거로 설명한다.
- 그래서 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 선한 일 중에 특히 축귀를 강조하며, 부활 후 현실에서 나타나 함께 먹고 마신 행위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용어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용어로 설명한 것이다.
- 이를 통해 이방인의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다.
- 시공간과 먹고 마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로 복음의 정체성이 한층 진화한다.
- 더 정교한 체계를 갖게 된다.
이전에는 복잡한 체계가 필요 없었다.
- 유대인에게만 전도할 때에는 구약 성경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말해주면 끝이었다.
- 그런데 유대인이라면 모두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다.
- 그래서 구약 성경을 설명할 필요도 없다.
- 당신들이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이 예수님을 통해 이렇게 성취되었다고 말해주면 된다.
하지만 이방인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성취했다고 설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 그 예수님이 왜 진리인지 되물었을 것이다.
- 그래서 성경에 근거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 체계에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작업이 logos를 필두로 이뤄진 것이다.
- 그래서 logos가 가진 진리의 근원적, 초월적, 보편적 의미가 예수님께 부여된 것이다.
하지만 logos 개념이 가진 한계가 있었다.
- 현실적, 육체적, 경험적 개념이 배제된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초월적인 logos임과 동시에 현실에 성육신한 분이라는 개념이 비로소 만들어졌을 것이다.
- 이것이 다 logos를 복음을 설명하는데 이용해서 일어난 파장이다.
잠깐 샛길로 새면, 하지만 이것 때문에 이후에 복음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 예수님을 초월적인 logos와 완전히 동일하게 생각하여 초월적이기만한 분으로 오해한 것이다.
- 대표적인 예가 가현설이다.
- 예수님이 초월적 존재인데, 저급한 육체를 입으셨을리 없다는 것이다.
- 그래서 거짓된(가) 현상(현)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 즉,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은 단지 환상이었다는 것이다.
- 이것이 logos의 이원론에 복음이 전적으로 함몰될 때 생기는 전형적인 오해이다.
이전까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 유대인은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자로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달랐다.
- 복음을 듣고 예수님이 신이라는 것인지, 인간이라는 것인지 의심했을 것이다.
- 이방인들은 신이라면 육체를 입을 수 없고, 인간이라면 진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과 인간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성육신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 여기서 '성'은 신이고, '육신'은 인간이다.
- 즉, 예수님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뜻이다.
이는 구약에는 전혀 없던 개념이다.
-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에 이 개념의 원초적인 형태는 있지만, 필요 없었기 때문에 묻혀있던 개념이다.
- 그런데 복음을 이방인에게 설명하기 위해 logos를 차용하면서 성육신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 개념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 복음을 이방인에게 익숙한 logos 개념에 인류 모두에게 익숙한 현실적, 경험적 개념이 추가된 것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지막 양념으로 구약 성경을 덪붙인다.
- 그러한 본질적이며 동시에 현상적인 복음이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 본질과 현상의 통합이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예수님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 이 근거는 주된 근거가 될 수 없지만, 효과적인 보조 근거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 그래서 본문에서도 가장 마지막 43절에 예언자의 증언을 추가한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방인을 위한 베드로의 설교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했던 설교와 완전히 다른 설교를 했다.
- 유대인에게는 구약을 근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논증했지만, 이방인에게는 헬라 철학을 차용해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진리라는 것을 논증했다.
- 이렇게 베드로는 구약에 기반을 둔 사람에게는 구약으로, 철학에 기반을 둔 사람은 철학으로 복음을 전했다.
- 구약과 철학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차용하고 변형하여 재창조하였다.
-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쉽게 전달될 수 있었다.
- 그와 동시에 더 큰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가치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드로의 설교도 우리에게 재창조되어야 한다.
- 헬라 철학이 유행일 당시에는 추상적, 본질적인 것이 멋진 것이었지만, 현대에는 추상적인 것은 쓸모 없는 것이고 구체적, 현실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 속에 살고 있다.
- 예를 들어, 고대에는 보이지 않는 명예가 최고의 가치인 반면 현대에는 보이는 돈이 최고 가치인 것과 같다.
- 그래서 베드로는 헬라 철학의 인식에 반하여 진리의 현실적인 면을 강조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자본주의 또는 돈이다.
-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보이지 않는 것이 저평가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반대로 진리의 추상적인 면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 마치 이방인들에게 구약을 근거로 전도하는 것이 무의미하듯, 우리에게 베드로의 설교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만약 베드로의 설교를 그대로 적용하면,
- 그래서 진리이신 예수님의 보여지는 육체적 속성을 강조하면,
-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와 함께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만 강조되면,
- 안그래도 보이는 것에 몰두하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 함몰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이다.
- 신앙에서도 보이는 것만 추구하며,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게 될 것이다.
- 그래서 부자되고 성공하는 것만을 바른 신앙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 마치 신비주의자들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 맞게 재창조하면,
- 예수님은 부자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돈을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이다.
- 그러나 여기까지만 하면, 예수님은 자본주의에 함몰된다.
- 예수님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돈 벌이 수단이 된다.
그래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 동시에 예수님은 거지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돈을 전혀 채워주시지 않을 것이다.
- 더 나아가, 우리조차 예수님과 같이 거지로 만드실 것이다.
-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지이지만 어떤 부자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 유대인의 관점에서, 마치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임당하셨지만, 어떤 사람보다 더 하나님의 풍요로운 생명을 누리신 것처럼 말이다.
- 헬라 철학의 관점에서, 마치 예수님은 육체 때문에 진리에 도달할 수 없지만, 어떤 사람보다 더 근원적인 진리에 도달하신 것처럼 말이다.
유대인은 예수님 때문에 율법과 성전 그리고 구약이 부정될까봐 두려워했다.
- 이방인은 예수님 때문에 육체에 매여 진리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다.
- 그래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였고, 이방인은 제자들을 죽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거지될까봐 두려워한다.
-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하지만 꼭 기억하자.
-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유대인은 율법을 영원히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율법을 바르게 성취할 수 있었다.
-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이방인은 진리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 때문에 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참 풍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 만약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풍요로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 돈은 많아 부자이지만, 영원한 결핍과 빈궁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을 것이다.
-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