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0) 9:32-43 유대에서 이방으로 복음의 전파 과정 - 참 친절하신 하나님
본문은 복음이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거쳐서 이방으로 전달되는 과정이다.
-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행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 이를 단순히 복음 전도 과정만을 시간 혹은 장소 순서로 말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는 복음의 포괄성을 말하는 것이다.
-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즉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영향력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복음의 전달 경로가 아니라 복음의 속성이 얼마나 포괄적이고 근원적인지 말해준다.
- 따라서 이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말씀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복음이 이방에 전해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은 자신들의 혈통과 율법 그리고 성전 제사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것을 배제하고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었다.
- 그들에게 혈통과 율법, 제사를 벗어나시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었다.
-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복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방인도 마찬가지다.
- 그들에게는 이미 수 많은 신이 있었다.
- 여기서 말하는 신은 단순한 미신 종교가 아니다.
- 마치 우리에게 수학, 과학, 철학, 경영학, 경제학, 심리학과 같은 것이다.
- 즉,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 도구이다.
- 따라서 신이 많다는 것은 멍청하게 많은 미신 종교를 두루뭉실하게 믿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이 다양했다는 것이고, 다양한만큼 상대적으로 정확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복음은 모든 신을 부정하고 한 신만을 인정하는 '이상한' 종교이다.
- 그들에게 복음은 유치한 구식 종교였다.
- 이는 마치 우리에게 수학, 과학, 철학 등 지금까지 나온 모든 학문은 다 틀렸다. 오로지 '수학의 정석' 이 한 권만이 유일한 진리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이방인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누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복음의 포괄적인 속성이 인류 역사 최초로 발현되는 과정이 바로 이번 본문이다.
- 복음의 포괄성은 구약에서도 수 차례 선포되었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는 않았다.
- 구약에서 예고된, 인류 전체를 위한 복음이 인류에게 처음으로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러니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 그 전쟁의 선봉장이었던 스데반은 죽었다.
- 바울도 이미 수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
- 복음 때문에 누가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절제절명의 상황이다.
- 복음의 포괄성이 그만큼 위험하고 민감한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정말 섬세하고 친절하게 접근하신다.
-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마구잡이로 복음을 내던지시지 않는다.
- 잠자는 아기 깰세라 까치 걸음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신다.
- 그 하나님의 친절함이 스데반이 죽은 사도행전 8장부터 바울이 선교 여행을 시작하기 직전인 12장까지 나온다.
- 이 단락에서 복음은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까지 안착하게 되는데, 그 과정이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해 8장부터 12장까지의 타임 라인을 보면,
- 예루살렘에서 스데반의 죽음과 예루살렘 교회 흩어짐(8:1, 2)
- 흩어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서 전도(8:4)
-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8:5)
-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전도(8:14)
- 빌립이 가사에서 에티오피아 네시 전도(8:26)
- 바울의 다마스쿠스에서 회심과 전도(9:3, 20)
- 복음이 유대, 갈릴리, 사마리아까지 전파(9:31)
- 베드로의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9:32, 36)
- 베드로가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전도(10:1)
- 이방인에게 첫 번째 성령 강림(10:44)
-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인 전도 보고(11:1)
- 바나바와 바울의 안디옥 전도(11:23)
-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의 순교화 베드로의 투옥(12:2, 4)
-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 여행 시작(12:25)
몇 가지 살펴볼 것 중 첫 번째는 장소이다.
-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복음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시작한다.
- 그래서 먼저 빌립을 통해 사마리아에 도착한다.
-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무시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족이라는 인식은 있었다.
- 그래서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적었다.
- 그렇게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파되자, 룻다와 욥바로 향한다.
- 룻다와 욥바는 이방인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 이렇게 민감한 순간에는 언제나 베드로가 나온다. 정체성이 확실하고 논란 없는 사람이니까.
- 그런 후 본격적으로 복음은 이방 지역인 가이사랴로 간다.
- 그 곳에서 첫 번째 성령 강림까지 일어난다.
- 이를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 다시 검증한다.
- 그 후 이방 선교의 베이스 캠프인 안디옥이 등장한다.
- 동시에 예루살렘에서의 박해가 한계까지 치달아 복음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떠나고, 이방 지역의 선교 여행이 새롭게 시작된다.
다음으로 볼 것은 인물이다.
- 특히 베드로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 바울조차 베드로와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 사마리아에 빌립이 전도하지만, 베드로가 와서 확정짓는다.
- 이방인이 많은 룻다와 욥바 지역에는 베드로가 직접 간다.
- 결정적으로, 첫 번째 이방인 그리스도인 고넬료 역시 베드로가 전도한다.
다음으로는 바울이다.
- 베드로의 사역 사이마다 바울이 서서히 등장한다.
- 그러면서 조금씩 전도의 중심 축이 베드로에서 바울로 옮겨 간다.
- 이러한 전환은 복음의 중심 축이 예루살렘에서 이방 지역인 안디옥으로 옮겨가는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완전한 전환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베드로에서 바울로의 전환 역시 완결된다.
이렇게 다섯 장에 걸쳐서 서서히, 세밀하게, 단계적으로 전환된다.
- 사마리아에서 이방 지역으로 바로 가지 않고, 룻다와 욥바와 같은 중간 지대를 거쳐 간다.
- 베드로에서 바울로 단 번에 전환되지 않고, 서서히 중첩되어 전환된다.
- 그러면서도 복음의 근원적인 통로인 예루살렘의 사도들과의 관계도 반복해서 확인한다.
- 그래서 급진적인 변화를 일으키면서도 본질은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서서히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셨다.
- 아마도 하나님께서 단 번에 전환하셨다면,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하기만 했을 것이다.
- 결국 복음의 포괄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거대한 전환을 여러 단계로 세분화해셨다.
- 그래서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는 정도만큼만 변화시키셨다.
- 그래서 사람들의 인식을 서서히, 하지만 급진적으로 변화시키셨다.
예를 들어 보면,
- 아무리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어도, 박해가 없었다면 복음이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 유대 지방인 룻다와 욥바에서 이방인들이 복음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이방인에게 전도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에 이렇게 말했었다.
- 사람이 복음으로 급진적인 생각의 변화가 생기고 행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 단번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결국 급진적인 변화를 이뤄나가는 것이다.
-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교회 공동체를 위한 선택을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합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 그런 합리적인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급진적인 전환을 이룬다.
그런데 이번에는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해보겠다.
-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겠다.
- 하나님은 힘과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 이렇게 굳이 수 많은 절차를 지켜가며 사람을 배려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이다.
- 우리가 그런 급진적인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함께 하고 싶으시기 때문이다.
- 그런데 강압적, 수직적, 권위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인 사랑의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힘을 철저히 숨기시고, 능력 없는 것처럼 느리게 수 많은 단계를 거처서 원하시는 전환을 이루신 것이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급진적인 전환을 바라신다.
- 그리고 결국에 우리는 언젠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급진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 마치 회심 이전에 바울이 회심 이후의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과 공동체를 위한 삶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어겨서라도, 사람의 본성을 거슬러서라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뜻이 확고하시더라도, 함부로, 마음대로, 폭력적으로 하시지는 않는다.
- 목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과정에서의 폭력을 합리화하지 않으신다.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시지만, 아무 수단과 아무 방법이나 쓰진 않으신다.
- 정말 신중하고 세심하게 우리에게 가장 알맞는 방법으로만 행하신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방법으로만 하신다.
[고전 10:13]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 아무리 베드로라고 해도 갑자기 이방인에게 전도하라고 했으면 싫다고 도망쳤을 것이다.
- 보자기에 담긴 벌레를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다고 거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 베드로가 룻다와 욥바에서 이방인들이 복음 듣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아무리 환상을 봤다고 해도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하러 갈 수 없었을 것이다.
- 베드로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급진적인 전환을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상황들을 연출하셔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셨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다음 두 가지이다.
- 첫째로, 하나님께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확고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고 완벽하게 이루신다.
-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꼰대 중의 왕꼰대이고, 무식한 근본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은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공감하시며 우리에게 알맞은 방식을 수도 없이 개발하신다.
-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며 우유부단하고 줏대 없어 보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왜 이러시는 것일까?
-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다.
-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고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에 하나님은 꼰대로 보일 수 있다.
- 또 어떻게든 우리를 살리시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시다보니까 하나님은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신다.
- 그래서 모든 것이 변해도 우리를 살려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 동시에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신다.
그러한 섬세하고 친절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예루살렘에서 곧바로 가이사랴의 고넬료에게 보내지 않으신 것이다.
- 본문의 룻다와 욥바에서 많은 이방인의 긍정적인 반응을 미리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 그래서 베드로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방인 전도라는 급진적인 전환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신 것이다.
같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
-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상황을 통해 한 걸음씩 우리를 급진적인 전환으로 이끌고 계시다.
- 그런 상황들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을 행하고 계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은 이뤄질 것이다.
- 그러면 언젠가 우리 내면에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급진적인 전환이 확 튀어 나오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것처럼, 그리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도한 것처럼 말이다.
- 우리에게는 그 사건이 갑자기 툭 튀어 나온 독립적인 사건으로 보일테지만, 그 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전부터 수 많은 단계를 섬세하게 배치하셨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분명히 그 일을 이루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