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11) 5:27-42 신앙을 바라보는 세상의 또 다른 관점 - 저러다 말겠지.
본문을 해석하는데 핵심적인 방향키는 가말리엘에 대한 평가이다.
-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 이다.
- 학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관점이 모두 논쟁 중이다.
그런데 이 평가에 따라 세상에 대한 평가 역시 결정된다.
- 세상은 복음에 때로는 긍정적일 수 있는지,
- 혹은 세상은 복음에 언제나 부정적인지 알 수 있다.
가말리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가말리엘은 사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것과 그들을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을 그대로 내버려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가말리엘의 깨달음으로 사도들이 풀려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 이 관점은 악한 세상 속에도 알 수 없는 의인은 있으며, 그 세상의 의인으로 인해 교회와 복음이 지켜진다는 결론이 이른다.
반면 가말리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가말리엘의 의도는 사도들이 '사람에게서 난 사람'이기 때문에 드다나 유다와 같이 결국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그러니 그냥 내버려 둬도 상관 없다는 것이다.
- 즉, 복음에 대한 무지로 인해 복음을 무시한 것이다.
- 이 관점의 전제는 세상은 언제나 악하며, 때로는 도움이 되는 상황조차 세상의 악한 의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두 평가 외에도 양가적인 평가가 있다.
- 가말리엘에게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세상 역시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관점은 긍정적 평가에 포함된다.
- 왜냐하면 긍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전부 긍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이지만 때로는 긍정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즉, 긍정과 부정이 공존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가말리엘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 따라서 세상에는 긍정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싫어하고,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한다.
- 때로는 세상이 도움을 줄 때도 있지만 실상은 악한 의도의 결과일 뿐이고, 그 도움조차 결국 박해만 가중시킨다.
- 마치 너무 목이 말라 바닷물을 마시면 더 목이 말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가말리엘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도행전에서 교회에 호의적이며 긍정적으로 평가된 바리새인은 없다.
- 니고데모의 경우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나오지만, 가말리엘은 전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다.
- 그런 사람의 애매모호한 말을 함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둘째로, 사도들은 가말리엘의 판단을 '모욕'으로 생각했다.
[행 5: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셋째로, 가말리엘은 사람에게서 나서 결국 흩어진 사람의 예만 들었다.
- 가말리엘의 의도는 그들과 같이 교회 역시 흩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넷째로, 만약 가말리엘이 교회에 호의적이었다면, 사두개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에게 격분하여 죽일 작정이었다.
[행 5: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 그리고 공의회는 사두개인이 다수이고, 바리새인이 소수이다.
- 그런데 갑자기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공의회 전체가 죽일듯한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다.
- 오히려 죽일듯한 마음이 가말리엘에게 향했을 것이다.
이렇게 가말리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로 인해 본문은 어떻게 해석되는가?
- 공의회가 사도들을 죽이려다가 풀어주는 사건은 어떤 의미인가?
- 세상이 사도들에게 준 호의인가, 아니면 악의인가?
호의로 풀어준 것이 아니라, 악의로 무시한 것이다.
- 어짜피 흩어질 사람들이니 괜히 힘빼지 말자는 것이다.
- '저러다 말겠지'란 심정으로 경거망동하지 말자는 것이다.
- 지금까지 모든 반란이 자멸했던 것처럼, 이들도 자멸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세상의 또 다른 관점이다.
- 무관심이다.
- 영향력 자체를 없다고 보는 것이다.
- '어디서 개가 짖나?'하며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확증 편향이다.
-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취하고, 불리한 정보는 무시하는 것이다.
- 사두개인의 성전과 바리새인의 율법 외에 하나님과 관계 맺는 또 다른 통로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 그런데 부정해도 부정이 안되니까 무시하는 것이다.
- 이런 식으로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 때로는 적극적인 박해보다 이렇게 소극적인 박해가 더 힘들 때가 있다.
-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고 드러내놓고 논쟁하면, 그러는 과정 속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 맞아도 견딜 수 있는 믿음을 주시거나, 할 말을 생각나게 해주시는 지혜를 받을 수 있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무관심 속에서는 하나님을 느끼기 힘들다.
- 자신과의 싸움이 된다.
- 세상의 적극적인 박해가 있을 때에는 저절로 동기 부여가 되는데, 없을 때에는 스스로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
- 하루 이틀은 가능해도 자발적인 동기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필요하다.
[행 5:42]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그리고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가르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다.
- 서로가 서로에게 동기가 되어야 한다.
- 세상이 복음을 무시하면, 공동체 안에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적용점 두 가지를 정했다.
- 하나는 교회 공동체 입장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입장에서이다.
첫째로, 세상은 우리의 신앙에 무관심할 것이다.
- 목숨 걸고 갖는 우리의 신앙을 하찮게 여길 것이다.
-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질 것으로 치부할 것이다.
-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이 그럴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지속할 수 있는 신앙을 배워야 한다.
- 오늘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열정도 중요하지만, 10년 후에도 오늘의 열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 아무도 듣지 않아도 계속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해도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동기 부여를 해주고, 말을 들어주며, 신앙을 붙잡아 줄 공동체가 필요하다.
- 공동체만이 무관심한 세상 속에서 신앙을 지속시켜줄 것이다.
둘째로, 우리도 세상의 가말리엘처럼 확증 편향에 빠질 수 있다.
-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과 자신을 왜곡시킬 수 있다.
- 적당히 일 열심히 하는 것을 신앙으로 둔갑시키기도 하고, 하나님은 외면한채 일에 열중하는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 바리새인은 율법을 신앙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했고, 사두개인은 성전을 신앙으로, 성전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 우리도 주일성수를 신앙으로, 교회에 참여하는 자신을 의인으로 착각한다.
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 알지만 모른척 하는 것이다.
-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 그래서 결국 스스로 속인다는 것까지 잊혀지는 것이다.
- 자기가 자신을 속인다는 것도 모르도록 완벽하게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을 속이기는 어렵다.
- 혼자서 자신의 거짓말을 알기 어렵지만, 함께 진솔하게 대화하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세상의 무관심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의 확증 편향에 대항하기 위해 결국 공동체가 필요하다.
-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27-33절: 공의회에서 사도들이 신문 받음 -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공의회에 씌우려 한다.
② 34-40절: 가말리엘의 경고 -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③ 41-42절: 교회 공동체의 반응 -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기뻐한다.
- 공의회에서 그리고 가말리엘을 통해서 사도들은 계속 박해를 받는다.
- 그러나 교회는 박해에 괴로워하지 않고 기뻐한다.
- 따라서 박해를 받을수록 교회는 더 강해진다.
27-33절: 공의회에서 사도들이 신문 받음 - 사도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공의회에 씌우려 한다.
성전 지도자들은 탈옥했다가 다시 투옥된 사도들을 신문한다.
- 신문 포인트는 두 가지이다.
- 첫째로, 예수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랬는데 왜 계속 가르치냐!
[행 5:28]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 둘째로, 왜 예수가 죽은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느냐!
[행 5:28]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이로 보아 사도들의 전도에는 성전 지도자들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가 항상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를 시작으로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셔서 그리스도 삼으셨다는 이야기가 이어졌을 것이다.
[행 4:10] 여러분 모두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이를 들은 성전 지도자들은 정죄감을 느꼈던 것이다.
-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하나님의 반역자라는 주장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도 두 가지로 대답한다.
- 첫째로,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행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행 5:32]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 둘째로,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죄 사람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행 5:30-31]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31]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전도하는 상황에서 자주 일어난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 전제가 부정되면, 예수님의 죽음 부활이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이 죄로 인해 죽었음을 인정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 마치 건강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약을 팔 수 없는 것과 같다.
[막 2:17]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서 복음을 듣는 입장에서는 정죄 받는 느낌이 드는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정죄를 한다는 오해를 듣는 것이다.
- 물론 이를 빙자해서 하지 말하야 할 정죄를 하는 경우도 있다.
-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 하지만 전도 과정 중에 정죄에 괴로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행 2: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 최소화해야 하는 일이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다.
특히 전도할 때 복음 듣는 사람의 분노를 감수해야 한다.
- 전도하는 의도는 사랑이다.
- 그래서 상대방이 예수님을 믿어 행복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상대방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을 공격하기까지 한다.
- 따라서 전도자는 언제나 공격 당함을 감수해야 한다.
- 인류를 사랑하셔서 전도하셨던 예수님이 인류에 의해 죽임 당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성전 지도자들은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한다.
[행 5:33]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34-40절: 가말리엘의 경고 -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가말리엘의 요지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행 5:38] 그래서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바는 이것이오. 이 사람들에게서 손을 떼고, 이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일 수 있다.
- 첫째로, 사도들이 별다른 영향력 없이 사라질 것이니까.
- 굳이 나서서 진압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 둘째로, 아무도 사도들의 영향력을 없앨 수 없으니까.
- 막을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둘 중에 사도들에 대한 가말리엘의 태도는 무엇일까?
- 당연히 첫째이다.
- 둘째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드다와 유다의 예를 든 것이다.
- 그들처럼 사도들도 결국 흩어져 없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가말리엘의 이 말 때문에 해석에 혼동을 준다.
[행 5:39]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것을 없애 버릴 수 없소. 도리어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봐 두렵소.
- 이를 가말리엘의 실제 심정으로 봐서,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는 단순한 가정이다.
-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을 없애버리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실제로 가말리엘이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아니다.
가말리엘의 경고는 사도들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의 박해이다.
- 공의회에서 사도들을 죽이려는 적극적인 박해를 했다면, 가말리엘은 사도들에게 관심을 끊는 소극적인 박해를 한 것이다.
- 사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났을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람이게서 난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런 것이다.
- 그럴 때 더 효과적으로 사도들을 진압시킬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공의회 전체가 동의한 것이다.
[행 5:39-40] 그들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40]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 공의회는 대수롭게 않게 여겨도 상관 없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 그래서 평소처럼 또 다시 때리고, 전도하지 말라고 경고했을 뿐이었다.
- 그러나 사도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커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41-42절: 교회 공동체의 반응 -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기뻐한다.
결국 박해를 받은 교회 공동체는 기뻐하며, 해오던 신앙 생활을 더 열심히 했다.
[행 5:41]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 박해를 받고 모욕을 당하면 슬퍼해야 했다.
- 그리고 신앙 생활을 하지 않아야 했다.
- 이것이 상식인데, 왜 교회 공동체는 반대로 행동했을까?
본문에서는 깊이 다루지 않지만, 이 주제는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 신앙은 칭찬 받고 인정 받는 것만을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
- 박해 받고 모욕 당하는 것도 기쁨으로 삼는다.
예가 너무 많은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첫째로, 바울의 자랑 방식이다.
[고후 11:27-30]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28]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30]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 바울은 칭찬 받고 인저 받은 것을 자랑하지 않고, 박해 받고 모욕 당한 것을 자랑한다.
-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산상수훈이 있다.
[마 5:3-12]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 모욕, 박해, 비난 받을 때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럴 때 기뻐하라고 말한다.
- 그리고 구약의 예언자들도 그랬다고 말한다.
- 왜 이렇게 말하는지 자세히 설명하려면 길다. 짧게만 말하면,
-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까지 싫어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이다.
[롬 1: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예수님은 유능한 기적이 아니라 무능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로 확정되실 수 있다.
- 이 역시 설명하려면 복잡하다. 간단하게만 말하면,
- 유능한 기적은 기적의 주체가 아닌 기적 자체에 시선을 쏠리게 하는데, 무능한 기적은 기적의 주체에 시선을 쏠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박해와 모욕을 통해서만 신앙은 깊어질 수 있다.
- 새디스트라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만 순도 100%의 하나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비-직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굉장히 일상적이다.
- 일상에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다.
- 그럴 때 서로의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 그 사람의 능력과 배경에서 그 사람 자체로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에서도 어려울 때 신앙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더 기뻐할 수 있고, 그럴 때 내부 결속과 외부 확장이 모두 일어나는 것이다.
주제 - 신앙의 가장 큰 적은 무관심이다.
성전 지도자들과 같이 외부의 적도 무관심이지만, 내부 결속을 방해하는 내부의 적도 무관심이다.
- 외부의 가족, 친구들이 우리를 향해서도 '저러다 말겠지'한다.
- 게다가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향해 '저러다 말겠지'한다.
-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열정이 치솟으면, 응원하고 도전받기보다, 다시 수그러들길 기다린다.
외부의 무관심에 대응하는 법은 내부의 깊은 관심이라고 말했다.
- 그런데 내부까지 서로 무관심하면 답이 없다.
- 결국 서로에게 무관심해지면, 하나님께도 무관심하게 된다.
- 그대로 끝이다.
- 교회 공동체도 끝이고, 공동체의 각 개인의 신앙도 끝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교회 공동체는 그렇게 계속 반복해서 모였던 것 같다.
결론
해법은 뭘까?
- 우리가 함께 그동안 많이 고민해봤지만, 그다지 없는 것 같다.
- 어리석게도 억지로 모여 뭔가를 하는 것 밖에는 말이다.
만난다고 다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나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할 수 없겠지만, 하기 싫지 않은 것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뭐든지 해보자.
-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자.
- 팟케스트도 해보자.
그러면 그 다음 방법이 생각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