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0) 5:17-26 기적의 목적 - 문제 해결이 아닌 관계 회복

안승준 2020. 10. 4. 16:28

이번에도 사건 자체는 단순하다.

-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성전 지도자들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꺼내주며 전도하라고 명령하였다.

- 그래서 사도들은 아침 일찍부터 성전에서 전도했다.

- 뒤늦게 사도들이 탈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다시 붙잡는다.

따라서 본문의 핵심은 천사의 기적이다.

- 사도들이 감옥에서 소리 소문 없이 빠져 나온 것이다.

-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다.

- 알 수 있는 것은 감옥 문이 잠겨 있었다는 것과 간수가 멀쩡히 서 있었다는 것이다.

[행 5:23] 감옥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는데, 문을 열어 보았더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적이 좀 이상하다는 것이다.

- 감옥에서는 나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바라던 기적이다.

- 그러나 감옥 주변을 떠날 수 없었고, 또 다시 잡혔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기적이다.

- 아무런 흔적도 없이 탈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기적다운 기적이지만, 기적의 결과가 투옥이라는 점에서 가치 없는 기적이다.

- 기적의 과정은 멋있지만, 결과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기적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 기적의 목적은 무엇일까?

- 왜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오히려 다른 문제를 만드는 기적을 하나님은 왜 주신 것일까?

이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관계 회복을 위해서이다.

첫째로, 사도들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이다.

- 이 사건을 계기로 감옥에서도 꺼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재확인했을 것이다.

- 그래서 더욱 더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이다.

- 아직 예수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들 뿐이다.

- 그런 상황에 사도들이 투옥되면 아무도 복음을 들을 수 없다.

- 따라서 기적을 통해 전도가 행해졌고,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셋째로, 사람 간의 관계 회복이다.

- 지난 두 차례 전도 때마다 믿는 사람들의 공동 생활, 공동 소유가 일어났다.

- 이렇게 전도는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회복시킨다.

따라서 본문의 기적은 '관계'의 관점에서 완벽한 기적이다.

- 사소한 기적 하나로 다양하고 많은 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 효율적인 기적이었다.

그러나 '일'의 관점에서 보면 반쪽짜리 기적이다.

- 쓸모 없는 기적이다.

- 왜냐하면 탈옥한 사도들이 결국 다시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일으키시는 방법이다.

- '일'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성과가 없지만, '관계'의 관점에서는 효과적인 기적을 주신다.

예를 들어 보면,

첫째로, 바울에게는 알 수 없는 질병이 있었다.

- 그래서 바울은 치유를 위해 기도했는데, 치유가 아닌 다른 기적을 받았다.

- 질병의 의미를 깨달아 더욱 강하게 되는 은혜를 얻는다.

[고후 12:7-10] ・・・・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 이 역시 '일'의 관점에서 바울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 하나님께 치유 부탁을 거절당했다.

- 수 많은 사람을 치유한 바울이 자기 자신은 매일 병 때문에 골골댔다.

-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서 바울은 많은 것을 얻었다.

- 하나님과의 겸손한 관계를 얻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능력을 깨달았다.

둘째로, 바울은 파선되었다.

-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될 때 배를 타고 이동했다.

- 이동 중 폭풍우로 파선까지 당했지만, 바울의 식사 기적, 예언 선포 등을 통해 아무도 죽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 이 사건도 '일'의 관점에서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못했다.

- 바울은 여전히 죄수 신분이며, 로마에서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다.

- 하지만 '관계'의 관점에서는 큰 수확을 얻었다.

-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줬고, 로마 황제에게까지 예수님을 전했다.

셋째로, 예수님의 죽음이다.

- 말 그대로 예수님은 죽으셨다.

- 사람들의 박해, 모욕, 저주로부터 아무런 건짐도 받지 못하셨다.

-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 그러나 죽음 이후 예수님은 부활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셨다.

- 그리고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 '일'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무용하지만, '관계'의 관점에서 가장 효율적인 사건이다.

이런 사건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 '일'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 언제나 '일'의 관점에서는 실패, '관계'의 관점에서는 성공이다.

이유는, 예전부터 여러 번 말해서 잘 알 것이다.

- 그래야만 '관계'에 초점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 만약 '일'과 '관계'의 관점에서 모두 성공하면, 사람들은 '관계'는 안중에도 없고 '일'의 성공에만 열광할 것이기 때문이다.

- 겉보기에 매력적인 '일'의 성공 때문에 본질의 유익을 가진 '관계' 회복은 가려지기 때문이다.

- '일'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일'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인류의 죄악된 본질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일'을 통해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약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못을 괴력으로 뽑으시고 내려오셨다면?

- 그래서 자신을 정죄한 사람들을 단박에 죽려버리시고 힘을 과시하셨다면?

-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초고속으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경배했을 것이다.

- 고개를 제대로 드는 사람조차 없을 것이다.

- 예수님 말씀이라면 목숨 걸고 순종했을 것이다.

- 순종하지 않으면 죽임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을 것이다.

- 아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 자신의 힘을 드러내시는 순간, 그 즉시 예수님과 사람의 관계는 끝난다.

- 수평 관계는 불가능해지고, 수직 관계를 통한 이용, 거래 관계만 가능해진다.

- 안전한 항해를 하기 위해 심청이를 인당수에 빠뜨리듯 예수님께 기계적인 순종만 있을 뿐이다.

- 율법주의도 똑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의 관점에서는 실패가 있어야 한다.

- 하나님의 무능력이 드러나야 한다.

-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면 안된다.

-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안되고, 바울의 질병은 고쳐지면 안되며, 바울의 죄수 신분은 계속되어야 한다.

- 특히 이번 본문에서 성전 지도자들의 박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

- 그렇게 '일'의 실패 속에서만 '관계'에 초점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 '일'이 실패한다고 항상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이 성공하면 절대로 '관계'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일'의 실패 속에서만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상한 반쪽 짜리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다.

- 의도적으로 탈옥을 하게 하신 후 다시 투옥되게 하신 것이다.

- 정말 탈옥이 목적이었으면 멀리 도망가게 하셔야 했다.

- 그러나 탈옥을 하게 하신 후 또 다시 투옥되도록 성전에 머무르게 하신 것이다.

-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야만 관계 회복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관계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원리는 우리 인생에 굉장히 큰 충격을 준다.

-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문제 해결에 인생 전체를 쏟아 붓고 있기 때문이다.

-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제 해결이 너무나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 문제 해결이 안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기 때문이다.

- 육체적으로는 연명할 수 있을지언정,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문제 해결을 일부러 안하신다는 메시지는 공포스러운 메시지이다.

- 신앙 생활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존재 이유조차 부정하는 것이다.

- 우리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 잘 알겠지만, 이 문제로 우리 교회는 떠난 사람이 여럿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의 가치 기준이 문제 해결에서 관계 회복으로 바뀌어야 한다.

- 우리 인생이 '일'의 관점이 아니라 '관계'의 관점으로 바뀌어야 한다.

- 그래서 '일'의 실패에는 두려움이 적어지고, '관계'의 회복에는 기쁨이 커져야 한다.

- 그런 사람에게만 신앙을 유지할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존재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불특정 다수와의 두루뭉실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 그런 관계는 단지 '눈치' 혹은 '체면'일 뿐이다.

- 우리가 다른 사람 눈치 때문에, 체면 유지하려고 얼마나 많은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가.

- 눈치와 체면이 우리에게 돈을 벌어다 주긴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간다.

여기서 관계란, 뇌와 뇌가 연결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진실된 관계를 말한다.

- 서로 이용하기 위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도 가진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깊은 관계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고 싶으신 관계이다.

- 우리가 하나님과 맺어야 할 관계이다.

- 그런 관계가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 믿음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한 관계를 말한다.

- 인간의 신념, 사랑, 우정, 신뢰, 의리로는 절대로 맺을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 만약 가능하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 세상을 '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관계'의 관점에서만 기적을 일으키시는데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시는 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관계'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통치하고 계신대도 말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 우리 인생의 목표는 아무 '일' 없이, 큰 '문제' 없이, 하는 '일' 잘 되며 사는 것이다.

-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 세상은 사탄의 소굴일 뿐이다.

- 하나님은 기적 하나 일으키지 못하시는 독방 늙은이일 뿐이다.

- 신앙은 죽어서 천국가는 보험일 뿐이다.

- 현실은 내 손으로 살아 남아야 할 전쟁터일 뿐이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가 '관계 회복'이고 '사랑'인 사람에게 세상은 천국이다.

- 모든 것이 기적처럼 느껴질 것이다.

-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질 것이다.

- 물론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하는 사람의 격려를 들을 것이다.

- 그런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참된 구주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17-18절: 사도들의 투옥 - 성전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

② 19-24절: 사도들의 탈옥 - 주님의 천사의 기적 때문

③ 25-26절: 사도들의 재투옥 - 사도들의 전도 때문

- 사도들이 투옥과 탈옥 후 재투옥 되는 사건이다.

- 그 과정에서 성전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반복해서 잡아들인다.

-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사도들을 탈옥시켰는데, 사도들은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전도한다.

- 그래서 또 잡히는 것으로 끝난다.

본문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몇 가지가 있다.

- 첫째, 사도들을 투옥하는 성전 지도자들의 시기심에 대해서.

- 둘째, 하나님 말씀 따라 전도하는 사도들의 순종에 대해서.

- 셋째, 성전 지도자들까지도 두려워하는 사도들의 인기에 대해서.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모두 이전에 충분히 다룬 주제이다.

- 그래서 본문도 나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 따라서 본문이 초점을 두고 있는 메시지는 기적적인 사도들의 탈옥이다.

그런데 기적이 좀 이상하다.

- 기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자마자, 그날 밤 다시 질병으로 죽게 된 것과 같다.

- 이 얼마나 끔찍한 기적인가.

- 죽음의 고통을 두 번이나 겪게 되다니.

- 인생에서 한 번도 끔찍한 경험을 두 번이나 하게 된 것이다.

- 이는 기적이 아니라 저주이다.

본문의 기적도 마찬가지이다.

- 탈옥 안했으면 몇 대라도 덜 맞고 풀려날 수 있었을텐데, 탈옥한 죄까지 더해서 더 맞았다.

- 그러니까 기적은 사도들에게 유익은 없고 손해만 준 꼴이다.

따라서 문제 의식은 다음과 같다.

- 사도들은 어짜피 잡힐 것인데 하나님은 왜 탈옥시킨 것일까?

- 사도들이 도망가지도 못하게 전도 명령을 내릴 것이면서 왜 도망가게 하신 것일까?

- 도대체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목적은 무엇일까?


17-18절: 사도들의 투옥 - 성전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

사도들의 두 번째 투옥이다.

- 처음에 성전에서 못 걷는 사람을 치유하고 나서 성전 지도자에 의해 투옥되었다.

- 그로 인해 교회 공동체는 더욱 더 강해졌고, 영향력이 더 커졌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성전의 영향력에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 당시에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셨다.

- 그래서 성전 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악함으로 사람들을 지배했다.

- 마치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딱 하나 있는데, 산적들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받는 것과 같다.

- 성전 지도자들은 산적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을에 또 다른 산적이 와서 마을로 들어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이다.

- 게다가 새로운 길에 통행세를 안받는 것이다.

- 그러니 사람들이 원래 길로 안가고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이다.

- 그러자 기존 산적이 받던 통행세가 점점 줄어들게 된 것이다.

- 게다가 새로운 산적의 인기가 날로 치솟는 것이다.

그러니 기존 산적이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 사람들이 전부 새로운 길로만 가니 시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 그래서 기존 산적은 새로운 산적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산적과 합세해서 함부로 공격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처지에 성전 지도자들이 처한 것이다.

- 그래서 사도들을 함부로 할 수도 없고, 가만히 놔둘 수도 없게 된 것이다.

-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조용히 잡아서 때린 후 다시 놔주는 것 뿐이었다.

성전 지도자들이 예수님은 얼렁뚱땅 죽일 수 있었다.

- 한 사람만 죽이면 해결되는 문제였기에 비교적 단순했다.

- 적당히 거짓말로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더 해결하기 어렵다.

- 죽여야 할 대상이 열두 제자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까지 있기 때문이다.

- 거짓말 몇 가지로 상황을 처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았다 풀었다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성전 지도자들이 어리석고 나약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만큼 복잡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 때만큼 상황을 쉽게 잠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24절: 사도들의 탈옥 - 주님의 천사의 기적 때문

그렇게 간신히 사도들을 잡아들였는데, 어이 없이 사도들이 탈옥을 한 것이다.

- 힘드게 잡아들인만큼 허탈감도 컸을 것이다.

게다가 성전 지도자들을 더 무섭게 만드는 것은 탈옥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 감옥의 문제도, 간수의 문제도 아니었다.

[행 5:23] 감옥 문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고, 문마다 간수가 서 있었는데, 문을 열어 보았더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더 당황한 것이다.

[행 5:24] 성전 경비대장과 대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서, 대체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고, 사도들의 일로 당황하였다.

- 안그래도 잡아들일 명분이 없었는데, 기적까지 일어난 것이다.

- 상황이 성전 지도자들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돌아갔다.


25-26절: 사도들의 재투옥 - 사도들의 전도 때문

그런 상황에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 사도들이 보란듯이 성전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전 지도자들은 사도들에 대한 괘씸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겼을 것이다.

- 기껏 탈옥해서 간다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에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 그래서 더 미워졌을 것이다.

- 그러나 탈옥해서 성전에 머무르는 당당함에 두려웠을 것이다.

- 그래서 더욱 더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성전 지도자들 때문은 아니다.

- 단지 주님의 천사의 명령에 순종한 것 뿐이다.

게다가 단순히 명령에 순종한 것도 아니다.

- 항상 하던 것을 한 것 뿐이다.

- 사도들에게 전도는 직업이요, 취미며, 놀이요, 사명이며, 삶 그 자체였다.

- 그렇기 때문에 천사의 명령은 사도들에게 명령으로 들리지 않고 격려로 들렸을 것이다.

- 마치 시험을 보러 가는 자녀에게 '시험 잘 봐라~'는 명령이 아니라 격려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전도를 했고, 그러니 다시 투옥되는 것은 뻔한 일이다.

- 그만큼 사도들이 용감하고 담대했기 때문이 아니다.

- 관점을 달리 보자.

- 그만큼 사도들의 삶과 전도가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 마치 우리에게 아무리 숨 쉬지 말고 참으라고 명령해도 숨을 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숨 쉬면 맞아 죽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숨을 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 맞아 죽으면서까지 숨을 쉬는 것이 용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숨 쉬는 것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용기가 아니다.

- 신앙과 삶의 일치이다.

- 신앙을 떠나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 인생의 본질부터 인생의 겉모습까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 그래야 사도들처럼 죽음을 감수하는 신앙을 가질 수 있다.

- 그래야 탈옥을 해서 숨지 않을 수 있다.

- 계속 성전에서 전도를 계속할 수 있다.


주제 - 인생의 목적이 바뀌어야 신앙의 목적이 바뀐다.

우리는 여전히 신앙의 목적을 '일'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 신앙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고, '일'이 잘 되길 바란다.

- 그래서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일'이 꼬이면, 그제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 이 정도도 양반이다.

-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신앙을 부정한다.

-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돌아선다.

- 게다가 그러한 신앙이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왜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 몰라서 못벗어나는 사람은 논외로 하자.

- 적어도 우리는 신앙의 목적을 '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얼마나 나쁜지 아니까.

앎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 하루 24시간 중에 '관계'의 관점을 갖는 시간보다 '일'의 관점을 갖는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 사실상 '관계'의 관점을 갖는 시간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아무리 '관계' 관점을 가지려고 해도, 익숙한 '일'의 관점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의 관점이 방해 되기 때문이다.

- '관계' 관점이 일을 그르치고, 문제를 만들며, 성과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과를 내려 할까?

- 그래야 남보다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적어도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남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적어도 남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랑할 거리가 있어서, 어디가서 기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인생 전체를 쏟아 부어 성과를 내려는 것이다.

-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계'의 관점에서 멀어지고 '일'의 관점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 그 길이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모른채 말이다.

- 그리고 그 끝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있다는 것을 모른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인생 속에서 있으면서 신앙을 가지려는 노력은 헛수고다.

- 진흙탕 속에서 샤워하는 꼴이다.

- 노력은 가상하나 가치가 없다.

먼저 인생이 바뀌어야 한다.

- '일'의 관점에서 '관계'의 관점으로 바뀌어야 한다.

- 그래서 라이프 스타일이 전부 바뀌어야 한다.

- 인생의 목표가 성과에서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

- 더 많은 것을 이루기를 포기하고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다운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이다.

- 그 전의 하나님은 이름만 하나님이었지 종이었다.

-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는 노예였다.

- 마치 모든 소원도 다 들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요술램프 지니가 실상은 노예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관점이 바뀌고 관계를 원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보인다.

- 그토록 관계 맺기 위해 우리를 향해 달려오셨던 하나님의 헌신이 보인다.

-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런 문제도 해결해주시지 못했던 하나님의 무능함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도 예비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보인다.

- 언제나 우리를 향해 바라보시고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관심이 보인다.

그래야 우리에게 본문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을 때 감사할 수 있다.

- 만약 지금 우리에게 본문과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면, 불만을 넘어서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 해결해주시려면 완전히 해결하시지 어설픈 기적 때문에 몇 대 더 맞았다고 원망할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이지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달랐다.

- 탈옥해서도 감사했지만, 다시 투옥되서도 감사했다.

-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었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 회복하도록 전도할 수 있었다.

- 탈옥 뿐만 아니라 투옥까지 감사해야만 사도들처럼 전도할 수 있는 것이다.

- 죽음을 감수하는 것이 희생하여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아 이익 얻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끝까지 죽음을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우리와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 생활의 변화가 아니다.

- 이미 우리 모두 신앙 생활 자체는 다 잘하고 있다.

- 신앙에 대해서는 남부럽지 않게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의 변화이다.

- '관계'의 관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 '일'의 관점을 포기하는 것이다.

- 그럴 때에야 신앙의 변화가 뒤따라 올 것이다.


결론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 아쉽게도 아직 나도 모르겠다.

-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 이 이상을 알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없다.

아주 기본적인 것 한 가지만 말하면,

- 우리의 인생에서 모두 공통적으로 가진 세 가지 영역이 있다.

- ① 일하는 나 ② 배우자로서 나 ③ 부모로서 나

- 이 영역에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일터에서는 관점을 전환하기 어렵다.

- 일터는 내가 바꿀 수 있는 영역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일터라는 곳 자체가 '일'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일터를 제외하고 두 가지만 생각해보겠다.

먼저 배우자와 자녀가 언제 좋은지, 언제 싫은지를 생각해보자.

-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문제 안일으키고 일을 잘 수행할 때에만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보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좋을 때는 관계 맺을 때여야 한다.

- 그들의 삶, 경험, 감정에 공감이 될 때여야 한다.

- 그리고 그들에게 나의 삶, 경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도록 설명할 때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런 시간과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 그래서 서로의 뇌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일을 줄이는 것이다.

- 문제 해결을 미루는 것이다.

- 왜냐하면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관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 관계의 고수는 일을 통해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하수인 우리는 둘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아직 관계와 일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일을 통해 관계를 맺으려 하다보면, 일에 매몰되어 관계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시행 착오를 겪다보면, 일과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그래서 하나님과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 이런 과정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가 깨닫게 해주시지 않을까?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