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53) 27:1-22 바벨론을 섬겨라! - 단순한 순종과 역설적 순종

안승준 2023. 2. 10. 21:57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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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정확하게 세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① 바벨론을 섬겨라.

② 바벨론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말아라.

③ 그러나 바벨론 역시 멸망할 것이다.

 

① 바벨론을 섬겨라.

시작부터 예레미야는 나무 멍에를 목에 매는 행위 예언을 한다.

[렘 27:2]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무 멍에들을 만들어 밧줄을 달고, 그 멍에들을 네 목으로 메어다가,

- 여기서 ‘나무 멍에’는 신체 구속 도구로,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여 옥에 갇혔을 때 목에 매었던 나무 형틀이다.

- 이 형틀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주변 국가(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가 바벨론에 지배당할 것을 상징한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가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고 섬길 것을 명령하신다.

[렘 27:6~7] 지금 나는 이 모든 나라를 나의 종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맡겼으며, 들짐승도 그에게 맡겨서, 그가 부리게 하였다. (7) 그러므로 모든 민족이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과 그의 손자를 섬길 것이다. 

게다가 같은 말씀을 주변 국가의 왕뿐만 아니라,

-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렘 27:12] 나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도 이와 똑같은 말을 전하였다. “여러분들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겨서 살아 남도록 하십시오.

- 그리고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에게까지 반복하신다.

[렘 27:16~17] 그리고 나는 제사장들과 이 모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17) 너희는 그들의 말을 듣지 말고, 바빌로니아 왕을 섬겨서 살아 남도록 하여라. 어찌하여 이 도성이 폐허가 되어야 하겠느냐?

 

그런데 만약 바벨론을 섬기지 않는다면?

-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렘 27:8] 그러나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않으며,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목에 메지 않는 민족이나 나라가 있으면, 나는 그 민족을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처벌해서라도, 그들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멸망당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7:10] 그들의 예언은 거짓이다. 너희가 그들의 말을 듣게 되면, 너희는 고향 땅에서 멀리 쫓겨나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내쫓아 멸망하게 할 것이다.

[렘 27:13]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는 백성은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찌하여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은 그와 같이 죽으려고 하십니까?

 

여기서 의문이 든다.

- 도대체 바벨론이 뭐길래, 바벨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죽이겠다고 하실까?

- 바벨론이 하나님을 대신할 구원자이기 때문에, 바벨론만 믿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일까?

- 혹은 바벨론이 하나님조차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벨론에 굴복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해서, 바벨론은 아무것도 아니다.

-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일개 나라일 뿐이다.

[렘 27:5] 내가 큰 권능과 편 팔로 이 땅을 만들고, 이 땅 위에 있는 사람과 짐승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나의 눈에 드는 사람에게 이 땅을 맡기겠다.

- 그냥 당시 강대국이다.

- 현재 미국과 같은 국력을 가진 나라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에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이다.

게다가 바벨론은 결국 멸망할 것이다.

[렘 27:7] … 물론 바빌로니아도 망하고 느부갓네살도 망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의 나라도 강한 족속들과 위대한 왕들을 섬길 것이다.

- 바벨론은 구원자도 아니고, 하나님조차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도 아니다.

- 하나님은 바벨론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 그것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있으시다.

[렘 25:12~14] 이렇게 칠십 년이란 기한이 다 차면, 내가 바빌로니아 왕과 그 민족과 바빌로니아 땅의 죄를 벌하며, 그 곳을 영원한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겠다. … (14) 참으로 이번에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많은 강대국들과 대왕들을 섬길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직접 행하고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 주겠다. …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바벨론을 섬겨야 한다고 명령하셨을까?

- 오히려 반대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영향력을 거부하여,

- 아무것도 섬기지 말고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 바벨론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 아닌가?

 

여기서 하나님의 본심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지 않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굴종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 만약 하나님이 굴종을 원하셨다면, 여러 번 말했듯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짓지 않으셨을 것이다.

- 사람을 하나님처럼 독립적, 능동적 주체가 아닌, 의존적, 수동적 존재로 지으셨을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저항할 수 없는, 죄를 범할 가능성조차 없는, 

-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조차 없는 저능한 존재로 만드셨을 것이다.

- 그래야만 완전한 의미의 굴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여기서 완전한 의미란, 마음 속에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전무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목적이 ‘하나님 섬김’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섬김을 명령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벨론 섬김을 명령하셨냐?

- 오직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다.

- 당시 외교적 상황에 근거할 때, 바벨론을 섬길 때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바벨론을 거부하는 것은 마치 공기를 섬기지 않겠다며 숨을 참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선택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선택으로 무의미한 죽음에 이르지 말고,

- 이스라엘이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 그래서 굳이 예언자까지 보내셔서, 바벨론을 섬기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바벨론 섬김 명령은 이스라엘 생존 전략이며,

-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② 바벨론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말아라.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이스라엘이 생존하여 다시 이스라엘다움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란 것은 ‘회복’이 아닌 ‘성공’이었다.

- 본래 모습을 회복하여 가장 나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 본래 모습을 부정하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성과를 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으로부터 ‘독립’이었다.

- 어엿하게 독립 국가가 되어,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정체성 포기를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성공 욕망’을 파고든 사람이 바로 거짓 예언자이다.

- 거짓 예언자는 이제 곧 독립하여 바벨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렘 27:9] 그러므로 너희에게 있는 예언자들이나 점쟁이들이나 해몽가들이나 박수들이나 마술사들이 너희에게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해도, 너희는 듣지 말아라.

[렘 27:14]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바빌로니아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에게 하는 예언은 거짓입니다.

[렘 27:16] 그리고 나는 제사장들과 이 모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주의 성전의 기구들이 이제 곧 바빌로니아에서 되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너희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말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하는 예언은 거짓이다.

- 추정하건데, 거짓 예언자가 포함된 권력 집단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서 권력을 얻으려 했다.

- 거짓 예언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 사람들을 동원해서 권력을 얻고,

- 권력을 가지고 경제적, 정치적 힘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권력 집단은 바벨론에 의해 진압되었을 것이다.

- 그로 인해 권력 집단에 동참하여 독립을 주장했던 사람들도 희생당했을 뿐만 아니라,

-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잠재적 반역자가 되어, 

- 무고한 사람들도 더욱 가혹한 압제를 당했을 것이다.

이것이 거짓 예언자가 선동한 ‘성공 욕망’의 폐해이다.

-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린다.

- 그렇기 때문에 ‘성공 욕망’이 나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공’이 아닌 ‘회복’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목적은 좋은 기능을 가져서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 아무 기능이 없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할지라도, 

- 정체성을 회복하여 자기답게 사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사람을 영원토록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 어떻게 성공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반대로 어떻게 회복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이전에 충분히 설명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이스라엘 독립이 나쁜 것인가?

- 그러면 식민 지배 상태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인가?

- 언제나 강자의 힘에 굴복하고 순응하기만 해야 하는 것인가?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힘 앞에 무릎 꿇는 것인가?

아니다.

- 하나님은 힘에 굴복하는 것을 싫어하신다.

- 저항하길 바라신다.

- 그런데 단, 그 저항의 목적이 ‘성공’이 아닌 ‘회복’일 때만이다.

- 반대로 성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저항하지 않길 바라신다.

 

대표적인 예가 ‘다니엘’이다.

- 다니엘은 유다의 귀족 출신으로, 바벨론의 환관이 되어 승승장구했다.

- 바벨론을 섬기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 바벨론에 순응했다.

- 그래서 고위 관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체성이 훼손될 순간에는 철저히 저항했다.

- 우상 제사 음식을 거부했고,

-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했으며,

- 기도 금지 명령을 거부했다.

- 이 때문에 풀무 불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졌다.

- 여기서 식사, 절, 기도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다니엘의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만약 다니엘이 개인과 민족의 ‘성공’을 원했다면, 양극단에 빠졌을 것이다.

- 독립을 주장하며 철저하게 바벨론을 배척하던가,

- 반대로 성공을 위해 정체성을 포기하고 바벨론의 우상을 숭배했을 것이다.

- 혹은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바벨론을 배척하지도 못하면서, 독립하고 싶은 욕망에 우상 숭배도 못하며, 소신 없이 우유부단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회복’을 위해 바벨론을 섬겼고,

- ‘회복’을 위해 우상 숭배를 거부하고 정체성을 지켰다.

그 결과 왕을 대신하는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 이렇게 결과만 놓고 보면, 다니엘은 마냥 행복했을 것 같다.

 

그런데 실제로 다니엘의 삶은 어땠을까?

- 그는 세상 한 가운데 있었다.

- 그런데 그 속에서 세상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 그 때문에 육체적 죽음의 위기에 처했고,

- 그보다 더 자주 사회적, 정서적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 실제로 다니엘은 주변 대신의 질투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진다.

-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 기도 행위를 걸고넘어졌다.

- 주변 모든 사람은 다니엘이 사회적, 정서적으로 죽기를 바랐다.

그렇게 갖은 모함과 질투를 받으며 살아가던 다니엘은 행복했을까?

-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

- 세상 속에서 세상을 거부했기에, 언제나 미끄러져 빠질 위험에 직면했다.

-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니엘이 실수하기만을 바랐다.

- 그래서 다니엘을 밟고 올라서길 바랐다.

- 그런 위협 속에서도 세상에 과몰입하지 않고, 정체성을 지켜야 했다.

이따위 고위 관직 버려버리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지 않았을까?

- 반대로 이스라엘 정체성 따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

- 세상에 휩쓸리거나, 반대로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다니엘은 우리가 상상하는 행복한 삶은 아니었다.

- 언제나 총구가 등 뒤를 겨누고 있는 심정이었다.

- 세상에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어,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을 감당했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모순을 감당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 답은 하나다.

-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 그 사랑을 통해 자기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 그 사랑에 기반한 자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 그 확신으로 당당하게 세상에 들어갔고,

- 담대하게 세상을 거부했다.

-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 비록 죽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확신이 있었다.

- 그만큼 자유로웠다.

- 그 자유가 있었기에, 유연하게 세상에 들어갈 수 있었고, 유연하게 세상을 거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신앙의 이상적인 모델이다.

- 하나님 사랑에 기반한 자기 확신을 통해, 

-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들어가서, 세상을 담대하게 거부하는 삶.

-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삶.

-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는 삶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 신앙과 인생의 완성된 모습이다.

- 완전한 자유를 가진 천국에서의 삶이다.

 

본문 메시지는 여기에서 멈춘다.

-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보자.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당장 다니엘처럼 살 수 있을까?

세상 속에서 세상을 거부할 수 있을까?

- 지금 우리의 현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을 거부하지 못하고 휩쓸린다.

- 그런 점에서 다니엘 모델은 우리가 이상으로 봐야 할 모습이지,

- 현재 실현할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언제나 기회만 되면, 세상에 과몰입한다.

만약 우리가 다니엘을 따라 한다고 고위 관직에 오르면,

- 정체성을 포기하고 힘에 굴복하여, 

- 우상 제사 음식을 먹고, 금 신앙에 절하며, 기도 금지 명령에 따라 기도를 멈출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먼저 일상에서부터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하고, 자기답게 살 확신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삶에서 이뤄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와 동시에 현실에서 행해야 할 것은 ‘세상과 거리 두기’이다.

- 우리가 현재 세상에 지나치게 깊게 들어가서, 세상에 휩쓸리고 있기 때문이다.

- 이미 휩쓸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다.

- 이것 때문에 우리가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해도 항상 실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 발, 눈이 죄짓게 하면, 찍어 버리라고 하셨다.

[막 9:43~48]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 (47)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손, 발, 눈이 없어지길 바라시기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의 바람은 손, 발, 눈 가진 채로 죄짓지 않는 것이다.

- 다니엘이 세상 속에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거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 뉴욕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 이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최선이 힘들면 차선도 좋다는 것이다.

- 멀쩡한 몸으로 죄짓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 그것이 힘들면, 손, 발, 눈이 없더라도 죄짓지 않는 것이 차선이다.

- 예를 들어, 큰 사고로 다리가 괴사했을 때, 괴사한 다리를 그냥 두면 생명이 위독해지기에, 다리를 절단해서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를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라는 책에서 ‘단순한 순종’이라고 말한다.

- 죄짓게 하는 손, 발, 눈을 찍어버려서라도, 죄짓지 않는 것이다.

- 세상에서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세상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 돈에 쉽게 유혹당한다면, 아예 거지가 되는 것이다.

- 그렇게라도 해서 세상과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진 만큼 자기다워지는 것이다.

- 본회퍼는 이를 초보적 수준의 순종이고, 상대적으로 쉬운 순종이며,

-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 가야 할 과정이라고 말한다.

- 단순한 순종조차 할 수 없으면,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는 ’역설적 순종‘이다.

- 손, 발, 눈을 찍어버리지 않고, 죄지을 가능성을 내포한 상태에서 죄짓지 않는 것이다.

- 그래서 이를 역설적 순종이라고 한다.

- 죄(지을 가능성)를 버리지 않으면서 죄를 버리기 때문이다.

- 돈을 벌면서도 돈에 매이지 않는 상태, 

- 사창가에 있으면서도 음란에 빠지지 않는 상태,

- 직장에 다니면서도 직장에 과몰입하지 않는 상태,

- 핸드폰을 계속 쓰면서도 유튜브에 빠지지 않는 상태이다.

 

당연히 ‘역설적 순종’이 최선이다.

- 세상 안에서 세상을 거부했던 다니엘처럼 말이다.

- 그는 세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 그래서 세상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세상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역설적 순종’은 우리의 미래이지, 현재가 아니다.

- 이미 자유로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지,

- 자유를 찾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다.

- 우리는 결국 역설적 순종을 하게 될 것이지만,

- 지금 당장 역설적 순종을 하려 하면, 무조건 불순종에 빠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순종’이다.

- 우리는 세상에 들어가는 순간 세상에 휩쓸려 과몰입된다.

-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바로 넘어진다.

- 우리에게 세상에 저항할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세상에 휩쓸려 과몰입되어도, 이미 넘어진 순간에도 넘어졌다는 것조차 모른다.

- 왜냐하면 평생 넘어진 상태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세상에 휩쓸려 넘어진 상태를 정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주변에서 세상을 저항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고,

- 봤다고 해도 알아볼 눈이 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무시했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손, 발, 눈을 찍어 버리는 것’이다.

- 먼저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의 영향력이 없는 ‘광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영향력도 없는 청정 지역(광야)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 마치 부부가 결혼하고 처음 신혼 여행을 가서,

- 아무도 없는 청정 지역에서 단둘이 서로만 바라보듯,

- 때 묻지 않은 자기 자신을 만나서, 자신을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여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타오르는 애착과 열정이 필요하다.

- 내가 ‘때 묻지 않은 자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 ‘자신의 원형’ 그대로를 찾아내어 사랑하고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 마치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구애하듯 말이다.

- 자기 자신에게 올인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애착, 열정, 의지가 어떻게 생기냐?

-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생기냐?

 

많은 사람이 착각하기를, 자기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 이는 자기기만이다.

-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 우리는 자신의 실제 모습이 드러날까봐 언제나 노심초사한다.

- 대표적인 예가, 성취 욕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 있는 모습 그대로는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 성취를 통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 실패해서 지금보다 더 못한 모습이 되면 큰일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체성, 즉 자신의 원형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 우리가 이미 자신을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을 부정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 ‘못’ 찾는 것이 아니라 ‘안’ 찾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

-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 사랑해야 한다.

- 그래서 단점에서조차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져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단점까지 인정하고 사랑할 때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냐?

-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뿐이다.

- 우리 자신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려주실 때뿐이다.

- 자신은 평생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그래서 언제나 숨기려 하고, 언제나 바꾸려 했던 부분,

- 볼 때마다 수치심을 느끼며,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부분이

- 오히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알려주실 때뿐이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 수치스러운 부분이 사랑스럽게 보이게 될 때이다.

- 이는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 우리는 자기가 자신을 얼마나 혐오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 오직 하나님이 알려주실 때만 가능하다.

- 그래야 자기가 자신의 어떤 모습을 혐오하는지 알게 되고,

- 혐오하는 모습조차 사랑하게 된다.

 

그때가 돼야 비로소 자기를 사랑하게 되고,

- 그래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고,

- 그래야 신혼 여행 가듯, 때 묻지 않은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 광야로 가게 되고,

- 광야로 가기 위해 세상에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때만 세상에서 나올 때 생기는 손해를 감수하게 된다.

- 마치 한 사람과 결혼하기 위해 세상 모든 사람을 포기하는 손해를 감수하듯 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단순한 순종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길게 가져,

- 정체성이 단단하게 확립되어야,

- 역설적 순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세상 안에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

- 다니엘처럼 세상 안에서 세상을 거부할 수 있다.

- 돈을 벌면서도 돈에 매이지 않을 수 있고,

- 사창가에서도 음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 직장에 다니면서도 직장에 과몰입하지 않을 수 있고,

- 핸드폰을 보면서도 유튜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다.

- 이러한 자유만이 우리를 사람처럼 살게 해준다.

- 이러한 자유 없는 삶은 짐승과 다르지 않다.

- 짐승보다 못한 삶이다.

반대로 하나님 사랑 없이, 자기 사랑 없이, 정체성 회복 없이, 자유 없이는 

- 세상에서 세상을 거부할 수 없다.

- 세상에 휩쓸려 자기를 잃을 뿐이다.

- 짐승보다 못하게 살뿐이다.

 

③ 그러나 바벨론 역시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 섬김을 명령하셨지만, 바벨론 섬김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섬김을 통해 ‘성공 욕망’을 버리고 ‘회복’되기를 바라셨다.

- 괜히 독립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포기하지 말고,

- 현재에 순응하여 바벨론을 섬기며, 자신을 되찾는 것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렘 27:7] … 물론 바빌로니아도 망하고 느부갓네살도 망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의 나라도 강한 족속들과 위대한 왕들을 섬길 것이다.

- 바벨론 섬김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뜻이다.

-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광야이다.

-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에 있을 때, 광야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은 오히려 광야 생활을 연장할 뿐이다.

- 광야에 순응하여,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밀월 관계를 맺을 때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을 섬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 바벨론이 하나님과 같은 참된 섬김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소중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 마치 광야가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라, 반드시 거쳐 가야 할 중간 기착지인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이 멸망한다고 예고하신 것이다.

- 말 그대로, 바벨론은 중간 기착지이기 때문이다.

- 지금은 반드시 머물러야 할 곳이지만, 동시에 반드시 떠나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이다.

-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론 - 참된 자유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되길 바라신다.

- 그래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줬더니, 그 자유를 지키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에 줘버렸다.

- 스스로 자신을 강대국의 노예로 삼았다.

- 그들의 우상을 숭배하고,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을 착취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의 바람대로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다.

- 이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자유를 함부로 남에게 준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 이스라엘은 자유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헌납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자유를 되찾아주려고 하신다.

- 먼저 자유가 없는 바벨론 포로 상태에서 자신을 찾도록 도와주신다.

- 자신도 잃고, 자유도 잃은 상태에서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면 감당할 수 없기에,

-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회복시키신다.

그렇게 70년이 지나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하나님은 그때 자유를 찾아주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시 독립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답게 살게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 이것 말고는 다른 어떤 사랑도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신다.

정체성 회복과 자유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엄청나게 긴 과정이 필요하고,

- 어렵게 얻었다고 해도 쉽게 잃을 수 있다.

-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섬세하고 세밀하게 준비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다시 자유를 빼앗기지 않도록,

- 한 번에 자유를 왕창 주시지 않고, 

- 긴 광야 생활을 통해 조금씩 자유를 스스로 터득해가도록 하신다.

- 우리가 보기에는 느려 보이지만, 하나님은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불만을 제기할 수 있다.

- 왜 하나님은 당장 자유를 주시지 않냐?

-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아무것도 안 주시냐?

- 또 나는 지금도 이미 세상에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데, 왜 꼭 굳이 세상에서 나와야 하냐?

 

그럴 수 있다.

- 나도 같은 불만이 있다.

- 나도 답답하고, 때로는 속상하고 야속하다.

그런데 이는 내가 나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 내가 얼마나 자유를 지킬 수 없는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나도 이스라엘처럼 자유를 아무에게나 헌납할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한 번에 왕창 주시지 않고,

- 서서히 자유를 터득해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 그래서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존재로 성숙시켜 가시는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세상에서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 정말 자신을 돌아보자.

- 자신의 현재를 냉정하게 보자.

- 얼마나 세상에 휘둘리고 있는지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순종이다.

- 역설적 순종이 아니다.

- 세상에서 벗어나 청정 지역인 광야에 머무는 것이다.

- 청정 지역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것이다.

- 우리는 아직 그 수준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역설적 순종의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 세상에서도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게 될 것이다.

- 참 자유를 얻어서 세상을 휘젓고 다닐 것이다.

- 세상에서 세상의 영향 받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줄 것이다.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 베드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를 소망하자.

- 그리고 기다리며 준비하자.

- 그리고 준비하기 위해 포기하자.

세상을 포기하고 자신을 얻자.

- 그렇게 자신을 얻어, 온전히 자기답게 자유롭게 살게 될 때,

- 영원의 시간을 소망하게 될 것이다.

- 우리가 영원을 소망하지 않는 것은 현재 자신이 싫기 때문이다.

-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 싫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원을 소망할 때만 실제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만이 역설적 순종을 할 수 있다.

- 즉, 세상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고, 세상에 자유롭게 저항할 수 있다.

- 세상 안에서 자기답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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