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37) 19:11-22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 왜 하필 이 시점에?
이게 너무 궁금하다.
- 왜 하필 이 시점일까?
- 에베소에서 사역 잘하고 있다가 왜 갑자기 로마로 가겠다는 것일까?
- 바울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길래 그런 결심을 했을까?
이보다 더 궁금한 것은, 사도행전은 왜 에베소 사역 한 가운데 로마행 결심을 끼워 넣은 것일까?
- 에베소 사역과 로마행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 사도행전은 에베소 사역과 로마행을 결합하여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을까?
이것을 알려고 엄청 찾아봤는데, 실패했다.
- 에베소 사역과 로마행을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없다.
- 로마행을 에베소 사역이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없다.
- 맥락과 무관하게 로마행 자체만 가지고 갑론을박한다.
이런 부분이 신학에서 가장 답답하다.
- 로마행처럼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을 맥락과 상관없이 이해하다니.
-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일수록 더욱더 맥락의 경계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데 말이다.
- 왜냐하면 이 사건은 사건 자체의 매력이 커서 전하는 메시지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치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 자체의 매력에 빠져서 오히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메시지를 깨닫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같은 문제가 신학에서도 반복된다.
- 예수님을 눈앞에서 본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을 더 못 알아보듯, 본문의 배경 설명을 너무 많이 알다 보니 도리어 본문 메시지에 무관심하다.
-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이 죽으실 때 예수님을 모독하고 부정했다.
-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러 번 말했지만, 문맥 없는 이해의 가장 큰 문제는 자의적 해석이다.
- 자신의 생각, 경험, 의도가 해석에 침투한다.
- 가끔은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대부분은 아무런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 히틀러는 악의적인 의도를 갖고 성경을 왜곡해서 600만을 죽였다.
- 반면에 바리새인은 다른 의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을 죽였다.
이것이 자의적 해석이 초래하는 결과이다.
- 때로는 생물학적 생명이 죽고, 때로는 사회적 생명이 죽고, 때로는 영적인 생명이 죽는다.
이것이 더 무서운 이유는, 이러한 죽음을 살인자 본인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대부분이 자신의 의도를 벗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살인 현장에서조차 살인범은 당당하다.
- 왜냐하면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마치 유대인의 죽음 앞에서 히틀러가 당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바리새인이 당당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지금도 너무 흔하다.
- 쉬운 예로, 따돌림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회적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하다.
-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 친해서 장난친 것이라고 한다.
반면 피해자는 반복해서 죽음을 경험한다.
- 그 죽음은 살아있는 내내 피해자를 괴롭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피해자의 인생을 가해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사소한 오해로 인한 가벼운 놀림으로 시작한다.
- 그런데 그것을 가해자는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피해자 인생 전체를 비하하기까지 이른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이해할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
- 대놓고 따돌리진 않지만, 은밀하게 따돌린다.
- 부주의하게, 자의적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판단하면, 결국 작은 히틀러에 의한 소규모 홀로코스트가 일어난다.
- 아무런 판단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이 내뱉는 사소한 평가질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평가질을 하려면 평가의 기준이 되는 자신의 경험과 의도를 드러내놓고 하자.
- 은밀하게 툭 던지지 말고, 왜 그런 평가를 하는지 자신의 기준을 환히 밝히자.
- 그래서 그 평가가 공동체 안에서 평가될 수 있게 하자.
- 그래서 평가받는 사람이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
드러내놓을 자신이 없다고 절대로 숨기며 이중 플레이 하지 말자.
- 은밀하게 상대를 내리누르고 자신을 올려세우는 일은 하지 말자.
- 의도가 분명치 않아 평가받는 사람이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은 만들지 말자.
- 의도를 숨겨서 모호하게 들리는 말은 하지 말자.
- 어떤 말이건, 최대한 선명하게 말하자.
그래야만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다.
- 공동체 안에서 상대가 날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으면, 공동체는 결국 깨진다.
- 적어도 상대가 날 죽이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서로 의지할 수 있다.
- 의지하는 관계를 통해 하나 될 수 있다.
본문의 맥락은 다음과 같다.
① 1-7절: 성령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 - 성령은 미래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 에베소 성도들은 미래에 있을 구원자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었다.
- 에베소라는 우상숭배 성지에서 두려워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 그래서 바울은 성령이 현재진행형임을 가르치며, 우상숭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라고 말한다.
- 그런 후 성령의 현재진행형을 방언과 예언으로 증명한다.
② 8-10절: 제자들의 심화 학습 -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말씀을 듣게 되었다.
- 이렇게 성령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이 퍼졌다.
- 에베소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요한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까지 확장되었다.
- 동시에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도 동시에 퍼졌을 것이다.
- 우상숭배라는 사회 질서 유지 체계를 당당하게 거부하는 흐름이 생긴 것이다.
③ 11-20절: 우상에 대한 성령의 상대 우위 증명 - 우상숭배자들이 모두 도망하였다.
- 바울로 인한 치유, 축귀 기적도 있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기적은 우상숭배자들을 통해 증명된 성령의 상대 우위이다.
- 귀신들조차 바울과 바울의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우상숭배자들을 조롱한다.
-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한다.
-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은돈 오만 닢의 마술책을 불태운 사건이다.
- 이는 약 137년의 일당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금액이다.
- 이를 통해 사회 질서 체계인 우상숭배를 드러내놓고 거부하는 집단이 나타났음을 보여준다.
④ 21-22절: 로마행 결심 - 로마에도 꼭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⑤ 23-41절: 우상숭배자의 반격 - 바울 때문에 아데미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있다.
-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 우상숭배자가 우상을 지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우상의 무능력을 드러낸다.
-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아데미 여신의 수호자임을 자처함으로, 도리어 여신이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무력한 존재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장을 큰 관점에서 보면, 우상에 대한 성령의 비교 우위를 증명하고 있다.
- 성령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 방언과 예언으로 성령의 현재진행형 능력이 나타나고,
- 그것이 온 아시아에 확장되며, 성령이 우상보다 강함을 증명한 후,
- 마지막으로 우상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로마행 결심이 나온다.
- 그러니까 로마행 결심은 우상에 대한 성령의 승리 분위기에서 나온다.
- 여기까지는 대부분 인정할 수 있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우상에 대한 성령의 우위가 왜 로마행으로 연결되냐?
- 성령의 능력을 확인한 바울이 왜 갑자기 로마로 시선을 향하게 되었을까?
여기서부터는 모르겠다.
- 이제부터는 내가 쓴 소설이다.
- 소설이더라도 참신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단서가 너무 없어서 진부한 소설이 되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절정의 성공에 힘입어 끝판왕인 로마를 바라본 것이다.
바울에게 로마가 끝판왕이라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 로마가 제국의 중심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까지 바울은 로마로 직행할 용기가 없었다.
- 복음의 능력을 믿었고,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전했으며, 성과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드디어 에베소에서 사역의 성공적인 열매를 맺는다.
- 가장 긴 시간 동안 한 자리에 집중해서 전도한다.
- 그리고 아시아 전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한다.
- 게다가 에베소 전체에서 우상숭배라는 사회 근본 시스템을 변혁하는 성과까지 맛본다.
- 그러니까 에베소는 지금까지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통틀어 유일하게 집단적인 사역의 성공을 거둔 곳이다.
그러니 충만한 자신감과 확신 속에서 끝판왕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간혹 바울을 이러한 관점으로 보는 것이 바울을 비굴하게 만들 수 있다.
- 왜냐하면 바울이 처음부터 로마로 가지 않은 것은 용기 없음, 믿음 없음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 만약 정말 바울이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세상의 중심인 로마로 가서 전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굴함과 합리적임은 한 끗 차이다.
- 바울은 이전까지 자신에게 준비가 덜 되었다는 것을 용기 없이 비굴하게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 신앙이라는 미명아래 무모하게 도전하지 않았다.
- 철저하게 준비했고, 사람들을 모았으며, 적절한 때를 기다렸다.
- 그렇게 1차 전도 여행 시작부터 지금까지 약 10년을 기다렸다.
이러한 합리적인 판단의 예는 또 있다.
- 1차 전도 여행의 첫 지역인 구브로이다.
- 바울과 바나바는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를 첫 사역지로 정한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용기 없고 비굴해서이다.
-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편하고 안락한 고향 지역을 선택한다.
- 그 외의 지역으로는 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 전도 여행이라는 것을 처음 시작하는데, 전혀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은 무모하다. 어리석다.
- 아는 사람과 머물 곳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둘 중에 뭐일까?
- 왜 바울을 비굴이 아니라 합리로 볼까?
- 만약 바울이 머뭇거리다가 포기했으면 비굴한 판단이다.
- 그러나 바울이 섬세하기 준비하다가 결국 실행에 옮겼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신앙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세상의 합리와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합리의 근거가 되는 경험을 통제하고 조성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관계를 추구하는 경험을 반복해서 주신다.
- 그래서 믿는 사람은 경험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게 만드신다.
반면에 세상은 거래를 추구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한다.
- 끊임없이 뺏고 빼앗기는 경험을 반복하게 한다.
- 그래서 세상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을 반복해서 경험하면 거래를 몸서리치게 싫어하게 된다.
- 마치 목욕하고 나온 사람 앞에 놓인 시궁창처럼 말이다.
- 그래서 사랑과는 가까워지고, 거래와는 멀어진다.
반면에 거래를 반복해서 경험하면 사랑이 어리석어 보인다.
- 마치 바닷가에서 신나게 수영하고 있는 사람이 바닷가에서 멀끔하게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 젖게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사랑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하신다.
- 공감하고 공감받고, 이해하고 이해받고, 포용하고 포용 받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기다려주고 기다림 받는 경험을 한다.
- 그래서 사랑의 선순환이 일어나 천국을 경험하게 하신다.
반면에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거래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하신다.
-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억압하고 억압당하고, 착취하고 착취당하고, 빼앗고 빼앗기고, 속이고 속는 경험을 한다.
- 그래서 거래의 악순환이 일어나 지옥을 경험하게 하신다.
결론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하나님과 사람과 반복해서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 그래서 사랑의 관계를 머리로, 마음으로, 몸으로 알아야 한다.
- 그리고 그것이 몸에 배어서 익숙해져야 한다.
- 동시에 몸에 이미 배어있는 거래하는 습성이 낯설어져야 한다.
- 그래서 거래를 보면 머리 이전에 몸이 먼저 거부 반응을 보여야 한다.
- 마치 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본 즉시 소름이 돋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경험을 반복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 우리의 경험을 통제하고 조성하신다.
- 경험이 여러 차례 누적시키셔서 판단 기준을 바꾸신다.
- 그래서 자연스럽게, 합리적으로, 경험에 근거해서 끊임없이 사랑하게 만드신다.
바울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 하나님께서 세상 기준의 합리적인 거래 관계보다 비합리적인 사랑 관계를 경험하게 하셨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하셨다.
그런 예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난 사건, 빌립보 간수 구원 사건, 그리고 이번 본문의 에베소 성령 승리 사건이 있다.
- 이런 억지스럽게 보이는 사건을 통해 사랑의 관계가 머리, 마음, 몸까지 스며들게 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억지로 사랑의 관계를 바울에게 욱여넣으신 것이다.
-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섭리이다.
그것이 완성되자 드디어 끝판왕인 로마로 향하게 된 것이다.
- 끝판왕 로마에 대한 두려움보다 로마에 대한 사랑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이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 차례나 동역자들이 죽음을 경고하며 말려도, 끝까지 로마행을 고집한다.
- 그리고 바울은 그 예고대로 죽는다.
그러한 판단이 바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경험에 근거한 바른 판단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말이다.
바울은 그렇다 치고, 과연 우리에게도 그것이 가능할까?
우리에게도 사랑의 관계가 배어들 수 있을까?
- 그래서 자신의 생명보다도 하나님과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는 철저히 믿음의 영역이다. 우리가 할 수 없다.
- 성경은 증거한다.
- 그렇게 되었던 믿음의 선배를 보여준다.
- 그런 삶의 실상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처참한지 가감 없이 보여준다.
- 그리고 그런 삶 속에 얼마나 큰 기쁨과 만족이 있는지도 보여준다.
- 그런 후에 비극보다 기쁨이 훨씬 더 크다고 말해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하게 한다.
- 비극을 감수하는 기쁨을 선택할지, 비극도 기쁨도 포기할지.
그래서 기쁨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에게는 경험을 주신다.
- 반복해서 사랑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신다.
- 동시에 거래 경험이 주는 비극을 느끼게 하신다.
- 그래서 점점 더 사랑을 사랑하게 하시고, 점점 더 거래를 미워하게 하신다.
이는 전적으로 신의 영역이다.
- 사람은 경험을 통제할 수 없지만, 신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신은 말 그대로 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의 관계가 배어진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
-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 상상의 영역 밖이다.
그래서 의심이 든다.
- 과연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 정말 그렇게 되면 좋다는 것은 알겠지만, 과연 가능할까?
그리고 그 의심 때문에 더 머뭇거리게 된다.
- 설마 되겠어?
- 어짜피 안될 텐데, 굳이 생고생 해야겠어?
- 그냥 비극도 없지만 기쁨도 없는 삶을 적당히 사는 것이 낫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사랑을 보여주셨다.
- 2000년 전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셨다.
- 그 십자가 사랑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지 알려주셨다.
-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랑의 기쁨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정말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다면,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일까?
- 비극도 기쁨도 없는, 사랑 없는 삶을 사는 것일까?
- 아니면 비극도 있지만 그를 넘고도 남는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일까?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