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36) 19:1-10 요한의 침례와 성령 침례의 차이 - 미래적 신앙의 한계

안승준 2021. 4. 10. 00:20

본문 내용은 간단하다.

- 에베소의 제자들이 요한의 침례만 알 뿐, 성령은 알지 못했다.

[행 19: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침례를 행하였다.

- 그랬더니 그들에게 성령이 내려서 방언과 예언을 했다.

그러나 내용은 간단한 반면, 의문점은 많다.

- 본문 안에서, 요한의 침례와 성령 침례의 차이의 문제이다.

- 바울이 이 두 가지를 구분한 의도는 무엇일까?

- 앞뒤 맥락에서, 에베소의 첫 사역에 성령 침례가 갖는 의미 문제이다.

- 사도행전은 에베소에서 왜 성령을 전면에 부각했을까?

해설서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무책임하다.

- 에베소 제자들은 요한의 가르침까지만 듣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이 덧붙여서 가르쳐준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에베소에 성령 침례가 내린 이유는 그만큼 복음에서 성령이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 누구를 바보로 아나, 기껏 이런 정보 얻으려고 비싸게 돈 주고 해설서를 사겠느냐.

- 이런 설명은 동어 반복일 뿐이다.

-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무 고민 없는 말장난이다.

 

결론부터 말해서, 요한의 침례와 대비되는 성령 침례의 의미는 현재성이다.

요한의 침례는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신앙을 상징한다.

[행 19:4]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

- 반면 성령 침례는 이미 오셔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그래서 지금 당장 방언과 예언을 하도록 현재 역동하는 신앙을 상징한다.

[행 19:6]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그런데 에베소 제자들은 미래적 신앙만을 가지고 있었다.

- 다른 말로, 그리스도가 앞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

- 또 다른 말로,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 또 또 다른 말로,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

- 에베소라는 지역의 특성 때문이다.

-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데미 신전은, 폭 70m, 길이 130m, 높이 20m나 되는 건물로,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컸다.

- 그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도시이다.

[행 19:35] 드디어 시청 서기관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나서 말하였다. "에베소 시민 여러분, 우리의 도시 에베소가 위대한 아데미 여신과 하늘에서 내린 그 신상을 모신 신전 수호자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즉, 우상 숭배와 초자연적 현상이 난무하는 도시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 복음의 경로는 아마도 아볼로였을 것이다.

- 그런데 그가 에베소에 있을 때 성령 침례를 몰랐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 지금은 우상 숭배가 난무하고, 우상들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막강하다.

- 그런데 우리에게는 우상들을 대항할 능력이 없다.

-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연명하기 위해서는 우상 숭배 문화에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그날이 오면, 그래서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우상을 박살 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 그날까지 기다리자.

 

그런데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 에베소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 그러나 그 믿음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 무력했다.

- 신앙이 우상의 공격 앞에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그래서 여전히 우상이 두려웠고, 우상 숭배를 거부할 믿음이 없었다.

왜 그랬냐?

- 요한의 침례만 알고, 성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다른 말로, 미래적 신앙만 알고, 현재적 신앙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 다른 말로, 미래에 있을 구원만을 기대하고, 현재에는 구원의 능력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 또 다른 말로,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우상들을 박살 내실 것이라는 믿음만 있고, 그 일이 지금 당장도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오자마자 성령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제자들이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 우상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여전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 소극적인 기다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는다.

[행 19: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 분명히 말하지만, 에베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 그리고 죽음 부활을 믿었다.

- 그리고 그 부활이 자신에게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이 '믿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그 부활의 능력이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성령을 내리신다.

- 제자들에게 부활의 능력이 미래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역동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 미래적 신앙에서 현재적 신앙으로 돌이키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막강해 보이는 우상의 영향력을 박살 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더 이상 우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우상 숭배를 거부하게 하려고 말이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서 제자들은 방언과 예언을 한다.

- 여기서도 방언과 예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 방언과 예언이 뭔지에 대해 그리고 성령이 임하면 누구나 방언과 예언을 할 수 있는지 학자들끼리 논쟁하는데, 이는 그들이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 방언과 예언은 현재적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다.

- 소극적인 기다림으로 상징되는 요한의 침례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역동으로 상징되는 성령 침례로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본문 19장 11-20절에 기적이 나오는 것이다.

- 그것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우상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증명하는 기적이다.

- 귀신들조차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바울의 권세를 인정한다.

- 그러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은 귀신에게도 꼼짝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이 '현재에도 여전히'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그리고 우상 숭배가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지 증명한다.

 

이것과 같은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말씀하신다.

[요 11:23~27]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24)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25)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26)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을 종말에 한정해서 믿었다.

- 그러나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현재에도 여전히'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선포하신다.

- 요한복음(32) 11:17-37 예수님 눈물의 의미(부활의 현재성) 참고

 

요한복음(32) 11:17-37 예수님 눈물의 의미(부활의 현재성)

본문은 너무 유명할 뿐만 아니라 메세지도 단순명료하다. - 예수님은 나사로를 여윈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난다. - 이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증언하신다. - 그리고 죽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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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면, 

- 우리는 성령, 방언, 예언, 병 치유, 귀신 축출 등의 기적 이야기가 나오면 기대를 하게 된다.

- 우리에게도 기적이 임하기를.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를.

- 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 그리고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필요한 신앙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건일수록 사건이 전하는 메시지를 잊기 쉽다.

- 성경에서 기적의 역할은 바른 믿음을 깨닫도록 하는 수단이다.

-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소원이 믿음일 때 기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 바른 믿음을 구할 때,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바른 믿음을 알려주신다.

그런데 만약 소원이 믿음이 아닐 때, 욕망 충족을 위해 기적을 구하면 어떻게 될까?

- 13절에 나온 귀신 축출가처럼 된다.

[행 19:13-16]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14)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15)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16) 그리고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 믿음이 아닌 욕망을 위해 기적을 구할 때, 기적은 사람을 압도하고 짓눌러 굴복당하게 한다.

- 쉬운 예로, 믿음 없는 사람에게 기적적으로 복권 당첨이 되면, 돈에 압도당해서 인생 망친다. 

그러니 부활의 능력을 믿으며 기적을 기대하자.

-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기적을 욕망 분출 수단으로 삼지 말자는 것이다.

 

결론 - 기적을 기대하자! 헛된 기적 말고.

기적에 대해 양 극단의 태도가 있다.

- <무작정 기적을 구하는 태도>와 <기적을 극히 꺼리는 태도>이다.

- 전자는 기복주의, 신비주의로 변질된다.

- 반면 후자는 능력 없는, 죽은 신앙으로 변질된다.

본문에서 에베소의 제자들은 후자에 가까웠다.

- 왜냐하면 전자가 판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와 초자연적 현상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에베소의 제자들은 소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 능력 없고, 죽은 신앙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역동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 이를 통해 제자들이 적극적, 역동적으로 우상 숭배와 맞서 싸우도록 말이다.

- 그래서 방언, 예언, 축귀, 치유 기적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성경을 통해 읽는 사람들은 또 반대편으로 치우친다.

- 자신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 방언, 예언, 축귀, 치유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 어디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성령이 임하셨다고 착각하며 우르르 몰려든다.

그러나 이는 또 다시 <무작정 기적을 구하는 태도>로 돌아온 것일 뿐이다.

- 그래서 기복주의, 신비주의에 빠져서 무식한 광신도가 되거나, 광신도가 되어 아무리 기적을 구해도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실망하여 신앙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이 현대 신앙의 현실이다.

- 우리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 그러면서 실망과 자포자기의 심정만 더 커지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올바른 기적을 알지 못해서이다.

- 기적을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데, 막무가내로 아무렇게나 해석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기적을 원하는 것을 다 주는 것으로 알았다가,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기적을 전부 나쁜 것으로 치부하게 된 것이다.

- 그래서 기적을 거부하다가 예수님의 능력까지도 거부하게 되거나, 기적을 욕망 분출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헛된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 생존 욕구와 성장 욕구를 버리는 것이다.

- 그래야 생존과 성장을 위한 기적을 기대하지 않을 수 있다.

- 돈, 밥, 옷, 집, 건강을 위해 더 이상 노심초사하지 않을 수 있고, 명예, 성공, 인정, 안정을 위해 더 이상 아웅다웅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버리도록 이미 기적을 행하셨다.

- 부활을 통해 생존 욕구를 완전히 채워주셨다.

-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칭하심으로 성장 욕구를 완전히 채워주셨다.

-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존재 중에 가장 높은 존재로 세움 받았다.

둘째는, 참된 욕망을 갖는 것이다.

- 그것은 생존 욕구와 성장 욕구가 완전히 채워졌음이 믿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바로 그 모습으로 회복되길 바라는 것이다.

-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 맺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 그래서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말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 모든 욕구가 완전히 채워져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것도 싫어하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면?

- 관계가 유일한 욕구인데, 그 욕구가 매일 새롭게 넘치게 채워진다면?

- 상상할 수도 없는 기쁨의 극단에 이르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