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32) 17:1-15 예수라는 또 다른 왕

안승준 2021. 3. 13. 02:21

본문은 특별한 사건 없이, 중간 다리 역할만 한다.

- 바울은 여느 때와 똑같이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 그리고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바울을 박해한다.

- 바울은 이전과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논증한다.

- 그리고 유대인도 이전과 같이 로마 황제를 부정한다고 박해한다.

- 바울의 메시지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똑같고, 유대인들의 메시지도 예수님께서 비판받으신 포인트와 같다.

-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반복이다.

- 반면에 그만큼 우리에게 그 두 가지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 본문은 좀 다르다.

-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거쳐서, 아테네로 간다.

- 그곳에서 드라마틱한 사건이 일어난다.

- 바울이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과 논쟁한다.

- 이는 빌립보에서 얻은 이방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실제로 구현되는 장면이다.

- 이전과 다르게 바울은 이방인과 직접 대면한다.

그 빌립보와 아테네를 연결하는 것이 이번 본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아테네를 가게 된 경위가 신비롭다.

본문으로 추정해보건대, 바울은 아테네에 갈 계획이 없었다.

- 지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지도를 보면, 바울은 큰 길을 따라가려고 했던 것 같다.

- 지도에 표시된 길은 '에드나티아 가도'로, 로마가 전쟁을 위해 비잔티움까지 연결한 고속도로이다.

- 바울은 이 길을 따라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른다.

[행 17:1]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 문제가 생겼다.

-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으러 온 것이다.

[행 17:5]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그래서 바울은 바삐 도망을 가는데, 그곳이 베뢰아이다.

[행 17:10] 신도들은 곧 바로 그날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두 사람은 거기에 이르러서, 유대 사람의 회당으로 들어갔다.

- 베뢰아는 에그나티아 가도에서 벗어난 곳이다.

- 여기서부터 바울은 에그나티아 가도를 따라가려는 계획이 또 틀어진다.

그렇다면 왜 베뢰아로 갔을까?

- 엄청난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 줄행랑을 치는 와중에 무슨 고민을 했겠는가.

-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 밖에 안 했을 것이다.

어떻게하면 살 수 있겠는가?

- 에그나티아 가도를 벗어나는 것이다.

- 그 길은 너무 좋아서 따라오기가 쉬우니까.

- 그래서 일부러 길이 나쁜 곳을 찾은 것이 베뢰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울이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 베뢰아는 에그나티아 가도는 아니지만, 에그나티아 가도에서 그리 멀지 않다.

- 아마도 바울은 다시 에그나티아 가도로 돌아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그 길로 가야 더 멀리, 더 빠르게, 더 쉽게 큰 도시로 가서 전도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 베뢰아까지 유대인들이 따라왔다.

[행 17:13]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알고서, 거기에도 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다.

그래서 또 다시 도망을 간다.

- 그런데 인제야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간다.

- 그곳이 아테네이다.

[행 17:15] 바울을 안내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아테네까지 인도하였다. 그들은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가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에게로 와야 한다는 지시를 받아 가지고, 베뢰아로 떠나갔다.

왜 아테네냐?

- 끝까지 따라온 유대인들을 따돌리기 위한 유일한 선택은 배를 타는 것뿐이었다.

[행 17:14] 그 때에 신도들이 곧바로 바울을 바닷가로 떠나보냈다.

- 그래서 바닷가에 가서 아무 배나 탔는데, 공교롭게 아테네 행이었다.

그곳에서 역사적인 일이 일어난다.

- 바울이 처음으로 회당과 관련 없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

- 빌립보 간수를 계기로 변화된 바울의 인식이 드디어 실제로 구현된다.

- 그러니까 비로소 이방인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울을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바울이 실패하게 하시는 것이다.

- 논리와 이성, 합리로 할 수 있는 모든 판단을 실패하게 하신다.

- 그래서 에그나티아 가도를 완전히 벗어나게 하신다.

그런 다음에 바울은 어쩔 수 없이 계획에 없던 새로운 경로로 가게 되는데,

- 그곳에 바로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된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깨달았을 것이다.

-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언제나 회당 주변만 맴돌았다.

- 회당에서 전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러나 빌립보와 아테네를 계기로 자신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 회당을 넘어 온 인류에게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역사하실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은 이렇게밖에 역사하실 수 없다.

- 실패를 통해서만 사람은 경험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경험의 틀에서 벗어날 때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보수적이고 완고하다.

- 이를 다른 말로, 사람은 상황이 경험에 기반하여 해석될 때 편안해한다.

- 또 다른 말로, 상황이 예상한 대로 될 때 편안해한다.

- 또 다른 말로, 경험했던 대로 판단했을 때 문제가 없으면,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절대시한다.

- 여기에 더하여, 경험과 판단을 신앙을 빌미로 신성시한다.

- 즉,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패가 반복되면, 그제야 과거 경험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 내가 했던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 그리고 경험을 근거로 내렸던 판단이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 그래야 새로운 상황에 새로운 기준을 가지고 새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 이전까지는 경험의 틀, 다른 말로 편견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 봤어도 편견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 많다.

-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난 사건이다.

- 이전에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전부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다.

- 그러나 고넬료가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본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이방인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사건이 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 그러나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

- 이전 경험의 틀이 깨지고 나서야, 이전에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같은 일은 일어날 것이다.

- 경험의 틀이 깨지고, 이전에 들었던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이해하게 되고, 그 예수님이 참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인격적으로 믿게 되는 순간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이 어떻게 오냐?

- 다르게 말해서, 경험의 틀이 깨지는 순간이 어떻게 오냐?

과연 경험의 틀은 어떻게 깨질 수 있을까?

- 사람은 본능적으로 보수적이다.

- 경험의 틀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 어떤 상황이 와도, 아무리 실패가 반복돼도, 손해를 볼지언정 경험의 틀을 바꾸지 않는다.

- 사람은 절대로 스스로, 자연스럽게, 부드럽게 경험의 틀을 바꿀 수 없다.

- 그 일은 베드로도 바울도 할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실패뿐이다.

- 한두 번의 실패로는 턱도 없다.

- 이전 경험의 틀이 부서질 만큼 이전 경험을 부정하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전 경험을 부정하는 새로운 경험이 바로 실패이다.

- 단지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그렇다.

따라서 경험의 틀이 깨져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헌신하게 되려면,

- 굵직한 실패를 반복해서 경험하는 것뿐이다.

- 그런 실패를 통해 16장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갈 수 있었고, 이번 본문에서는 아테네로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경험의 틀이 무너진다는 것은 말이 쉽지, 엄청난 것이다.

나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본다.

- 왜냐하면 경험의 틀에 의해 가치관,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통해 신념이 생기며, 그것이 결국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이다.

- 즉, 경험의 틀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 게다가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준다.

나는 감히 이 고통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 말한다.

- 죽음보다도 더.

- 왜냐하면 사람은 경험의 틀이 무너지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목숨을 요구하신다.

[눅 9:23~25]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 우리의 목숨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감수한 사람만이 이전 경험의 틀을 무너뜨릴 수 있고, 그래야만 경험의 틀 밖에 있는 죽음 부활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험의 틀이 무너질 때 비로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 단순 무식하게 말해서, 경험의 틀의 또 다른 이름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편견은 다른 사람을 볼 때만 작용하지 않는다.

- 자신을 볼 때도 똑같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잘생긴 사람이 성공한다는 경험의 틀을 가진 사람을 생각해보자.

- 그는 못생긴 사람을 비하하고 무시하는 편견을 가졌을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자신 스스로도 잘생겨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 그러다가 만약 불의의 사고로 못생겨지면, 자신의 편견에 갇혀서 스스로를 비하하며 절망할 것이다.

- 경험의 틀이 견고한 만큼 절망의 폭도 커진다.

그러나 경험의 틀이 무너지고, 편견에서 벗어나면,

-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 누구도 무시하고 비하하지 않으며,

- 자신조차도 비하하지 않으니, 어떤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게 된다.

- 외모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하찮은 것이지만, 실제적이다.

- 복음의 은혜 중에 부스러기 같은 것이지만, 현실에서 와닿는 복음의 유익이다.

- 이렇게 복음은 우리에게 돈, 명예, 성공, 외모, 안전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는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논리를 차례대로 말해보면,

- 먼저 자유는 경험의 틀이 무너질 때 온다.

- 그런데 경험의 틀이 무너질 때 사람은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는다.

- 따라서 죽음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만 경험의 틀을 무너뜨릴 수 있다.

- 그런데 죽음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죽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뿐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자유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다르게 말한다.

돈, 명예, 성공, 외모, 안전 등으로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현실에서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 돈을 얻으면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경험의 틀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이것을 얻으려고 그토록 노력하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를 자유케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돈을 우리를 구원할 왕이라는 뜻이다.

- 세상은 돈을 왕이라 믿고, 돈에 인생을 바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 돈을 왕이라 믿는데, 예수님을 왕으로 믿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내가 돈을 믿고 돈에 평생을 헌신했는데, 예수님 때문에 돈도 부정되고, 돈과 함께 내 인생 전체도 부정되기 때문이다.

- 인생과 함께 경험의 틀이 부정되고, 그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 예수님이 생명을 주실 구원자가 아니라, 생명을 앗아갈 살인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서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박해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행 17:7] 그 사람들은 모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명령을 거슬러 행동을 합니다.

-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한다.

-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을 전함으로 자신들의 진짜 왕인 돈, 명예 등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의 인생 그리고 목숨마저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토록 바울을 죽이려고 목숨 걸고 덤비는 것이다.

[행 17:5]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시기하여, 거리의 불량배들을 끌어 모아다가 패거리를 지어서 시내에 소요를 일으키고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끌어다가 군중 앞에 세우려고 찾았다.

[행 17:13] 데살로니가의 유대 사람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알고서, 거기에도 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다.

- 바울을 자기 동네에서 쫓아내는 것도 모자라 따라다니면서 방해를 한다.

- 이들의 열정만큼 이들이 바울에게 위협을 느꼈다는 것이고, 이들이 위협을 느낀 만큼 이들이 세상 왕을 철저히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해는 복음을 더욱 널리 전하는데 이용될 뿐이다.

-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방해로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다.

- 또한 이러한 방해로 복음은 아테네와 고린도까지 퍼지고,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이 믿게 된다.

 

결론 - 세상에서는 세상의 왕과 '예수라는 또 다른 왕'이 경쟁한다.

누가 진짜 왕인지 대결한다.

- 세상의 왕은 시간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다.

- 사도행전 당시에는 황제였고, 지금은 돈이다.

- 예수님은 그런 것과 계속해서 싸우며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승자는 누구인가?

- 언뜻 보기에 세상이 이긴 것 같다.

- 우리는 세상에서 예수님보다 세상의 영향력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보자.

- 황제는 사도행전 당시 막강한 힘을 가졌다.

- 그래서 황제의 권력 아래에서 예수님도 죽었고, 바울도 죽었다.

- 황제가 예수님을 이긴 듯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예수님이다.

- 왜냐하면 이제는 아무도 황제를 숭상하진 않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왕으로 경배받으시기 때문이다.

- 황제의 영향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예수님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경쟁했던 수많은 세상의 왕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예수님만이 2000년 동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 계속 상대를 바꿔가면서 말이다.

 

물론 지금 돈의 영향력은 막강해 보인다.

- 과연 돈이 세상의 왕 자리에서 내려올 날이 있을까 싶다.

- 돈의 영향력은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도 사람들은 황제를 그렇게 생각했다.

- 그는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 오죽하면 신으로 착각하기까지 했겠는가.

- 그랬기 때문에 황제에게 박해를 당하던 그리스도인들은 배교했다.

- 황제의 영향력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황제는 없다.

돈도 결국 황제와 같이 될 것이다.

- 언젠가 사람들은 돈이 세상의 왕이었다는 사실을 역사 책에서나 보게 될 것이다.

- 그리고 돈을 숭배했던 우리를 보며 비웃을 것이다.

- 어떻게 종잇 조각에 그렇게 열광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마치 우리가 황제를 숭배했던 로마 당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실 것이다.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세상의 왕과 경쟁하고 계실 것이다.

- 지금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보다 세상 왕의 영향력이 더 커 보일 것이다.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승자는 예수님일 것이다.

-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세상의 왕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더 영향력 있어 보일 것이다.

- 하지만 결국 그들은 세상의 왕과 함께 몰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