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에베소서(02) 1:15-23 하나님만의 독보적인 능력 - 관계의 능력

안승준 2020. 3. 21. 16:10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기도하는가?

- 솔직히 말해서, '나'를 근거로 기도한다.

- 이는 잘못된 기도이며, 분명히 죄이다.

먼저 말하는데, 이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다.

- 노력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숨이 붙어 있고, 몸을 갖고 있고, 시간과 공간 안에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나'에 근거한다.

- 내가 '나'를 가지고 있는한, 우리는 언제나 '나'이다.

오히려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 자신의 기도가 '나'가 아니라 하나님깨 근거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거짓말장이이다.

- 유익을 얻기 위해 거짓말하는 사기꾼이거나, 자신의 기도 근거조차 알지 못하는 무식자이다.

- 특히 목사 중에 많다.

이것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의 뜻이다.(엡 2:3)

- '나'에 갖혀 있고,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나'라는 필터를 거쳐 인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 모든 것이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전에 말했듯이, '나'에게서 구출되는 것이 참 구원인데, 방법은 성령님을 통해 뇌에 전선을 연결하는 것이다.

- 그러면 '나'라는 필터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곡 없이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성령님만의 고유의 역할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했었다.

따라서 '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우리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 또 다시 말하지만,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초월하시는 성령님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는 부수입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자아성찰'이다.

- 비유로 표현하면, a + 𝔁 = b 와 같은 것이다.

- 여기서, a는 왜곡 없는 <실제 현실>, b는 사람에 의해 왜곡된 <인식된 현실>, 𝔁는 현실을 왜곡시킨 <나>이다.

-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왜곡된 채로 b로만 인식한다.

- 그런데 성령님은 사람에게 '나'에게서 벗어난 실제 현실인 a를 알려주신다.

- 그래서 사람은 진짜 죄가 뭔지, 진짜 의가 뭔지,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히 통치되고 있는지,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올바로 깨닫게 하신다.

그런데 방정식에서 a와 b를 알면, 자연스럽게 𝔁를 알게 된다.

- 마찬가지로, 실제 현실과 왜곡된 현실을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를 알게 된다.

- 내가 세상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왜곡시키고 변질시켜 '나'가 주인인 세계, '나'의 선택에 따라 변화되는 세계로 왜곡해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죄를 알게 될 때, 그제서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을 알게 된다.

- 사람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 중이 제 머리 못 깍듯, 내 눈으로는 나를 직접 못 보듯, 사람은 반사된 나만을 볼 수 있다.

- 실제 세계와 인식된 세계를 비교할 때 그 차이가 '나'이고, 그렇게 비교를 해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자아성찰인 것이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면, 자아성찰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반대로 말하면, 자신을 여전히 잘 모르는 사람, 혹은 자신을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한 것이다.

물론, 자아성찰이 신앙의 목적이 되면 안된다.

- 방정식에서, 아무리 𝔁가 알고 싶어도, 𝔁만 파고 들면, 절대로 𝔁를 알 수 없다. 

- a와 b를 알아야 한다.

-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a를 알 수 있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경험해야 b를 알 수 있다.

- 그래서 자아성찰을 '부수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고, '나'로부터 벗어나야 할 신앙의 소망이다.

하지만 바울은 '나'가 아닌 하나님께 근거하여 기도한다.

- 이래야 언제나 기도할 수 있다.

- '나'에 근거하면, 일이 잘 풀리고 상황이 좋을 때만 기도하게 된다.

- 혹은 반대로, 일이 안풀리고 상황이 나쁠 때에만 기도하게 된다.

- 그리고 내가 기분이 좋아서 믿음이 좋은 것 같을 때는 기도할 맛이 나지만, 컨디셔이 나쁘고 믿음이 없는 것 같을 때는 기도하기 싫어진다.

바울 기도의 근거는,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 본문은 그 능력이 무엇인지 설명한다.(20-23절)

- 그리고 그 능력에 근거해서, 에베소 성도들이 그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한다.(15-19절)

바울 기도의 중요한 특징은 '순환 논리'이다. 

- 기도의 근거도 하나님의 능력, 기도의 목적도 능력이다.

-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되고, 알게 된 능력을 근거로 또 다시 능력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 즉,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될수록 더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왜 신앙이 이런 원리로 동작하는가?

- '관계'이기 때문이다.

-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 이것 외에 일말의 여지라도 다른 것에 초점이 맞춰지면, 신앙 전체가 변질된다.

- 마치 부부가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하더라도, 일말의 여지라도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 부부 관계 자체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 언제나 서로에게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단계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직장, 친구, 취미, 휴식 등 모든 것은 언제나 부부 관계를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 신앙에서 예배, 찬양, 봉사, 전도, 선교 등이 전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위한 수단인 것과 같이 말이다.

- 신앙 생활을 할수록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어야지, 그 외의 수단이 풍성해지면 안된다.

-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과 사람의 순환 논리로만 작동하는 것이다.

신앙의 순환 논리에는 순환한다는 것 외에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다.

- 순환하면서, 특정한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다.

-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순환하면서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목표에 도달하면 순환도 끝난다.

그 목표가 뭐냐?

-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이다.

[엡 1: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 즉 관계 확장에 있고, 그것을 위해 창조하신 것이다.

- 관계를 자신 외부로 확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 따라서 종말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신과 관계 맺게 하시는 것은 필연이다.

-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비롯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통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냐?

- 이번 본문에서 그 과정을 다룬다.

- 핵심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둔 '몸' 된 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엡 1:22-23]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머리'와 '몸' 비유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 결론부터 말해서, 머리와 몸의 관계는 지배자와 복종자의 관계가 아니라, 유기적 협력 관계이다.

- 즉, 교회는 그리스도께 순종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는 서로에게 순종하여 함께 통일을 이뤄가는 주체이다.

이러한 점을 본문을 통해 자세히 생각해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① 15-19절: 기도 제목 세 가지 - 소망, 상속, 능력

② 20-23절: 기도의 근거 - 하나님의 능력

지난 본문에서 바울은 복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 그 복은, 우리(바울)와 여러분(에베소 교회 성도)을 상속자 삼아 주신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성도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한낱 사람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권세를 주셨기에, 바울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본문에서 바울은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한다.

- 에베소 교회가 소망, 상속,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지난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와 같다.

- 그러니까 바울은 이미 받은 것을 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언듯 보면, 이해가 안된다.

- 극단적으로 말해, 달래서 이미 줬는데 또 달라는 것은 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친한 친구가 정말 어렵다고 100만원만 빌려 달라고 해서 빌려줬더니, 또 다시 반복해서 달라고 한다면, 날 호구로 보는 것이다.

- 그런데 이는 거래 관계에서만 그렇다.

사랑의 관계에서는 다르다.

-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한테 뽀뽀를 해달라고 해서 받았다면, 또 다시 요구할 수 없는 것인가?

- 부부가 배우자에게 데이트 하자고 해서 했다면, 또 다시 요구할 수 없는 것인가?

- 사랑의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며 계속해서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거래 관계에서는 재화가 이동하면, 한 사람은 줄어들고, 한 사람은 늘어난다.

- 그래서 일방적인 거래에는 한계가 있다.

- 한 쪽 사람이 소진되면, 거래는 불가능해진다.

반면에 사랑의 관계에서는 사랑이 이동하면, 양 쪽 모두 늘어난다.

- 사랑을 받은 사람만 사랑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준 사람도 느낀다.

- 그래서 받아도 받아도 다시 요구할 수 있는 것이고, 주고 줘도 또 줄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부부 중 한 사람이, 자신은 사랑을 이미 충분히 받았으니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면, 이혼하자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 뿐이다.

- 거래 관계에서는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 상대를 위하는 것인 반면, 사랑의 관계에서 사랑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 관계를 끊겠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기도가 이해되는 것이다.

-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이미 어떤 상속을 받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 그 상속을 주신 하나님께 장엄한 찬양을 드렸다.

- 그런 후 곧바로 그 상속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다시 기도하고 있다.

- 왜냐하면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 에베소 교회가 이미 하나님을 알지만, 또 다시 하나님을 아는 것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유익이기 때문이다.

-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방금 뽀뽀를 받고,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노래를 부르다가, 또 다시 자녀에게 가서 뽀뽀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참 관계이다.

- 이것이 사랑이다.

-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 그리고 이것만이 진짜 인생이다.

-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는 유일한 방식이다.

15-19절: 기도 제목 세 가지 - 소망, 상속, 능력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 이유는 에베소 교회가 가진 '믿음'과 '사랑'이다.

- 바꿔 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 이 두 가지는 예수님께서도, 요한도, 바울도 언제나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도 제목을 제시한다.

- 그런데 그 직전에 기도 제목이 성취되는 방법을 먼저 말해준다.

[엡 1:17-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이 구절은 그냥 읽으면 오해의 여지가 있다.

- 지혜와 계시로 알려주시는 영, 즉 성령님이 임하셔서,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을 알게 해주신다는 뜻으로 읽힌다.

- 그러니까 이전에는 성령님이 없어서 마음이 어두웠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상태에 있었음을 가정한다.

- 그래서 바울이 성령님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원어를 직역하면 약간 다르다.

[엡 1:17-18] God might give (to you)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knowledge of him) [18] (having been enlightened the eyes of the heart of you)

- enlighten 동사가 현재 완료 형태이다. 이미 완료된 동작이라는 뜻이다.

- 따라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이전에 이미'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셨던)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바란다. 

- 핵심은, 이전에 이미 성령님이 임하셔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셨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성도들은 이미 지혜와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 그런데 같은 성령님이 또 다시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반복하냐?

- 관계이기 때문이다.

- 순환 논리이기 때문이다.

- 사랑이기 때문이다.

- 사랑은 알아도 알아도 계속 알고 싶고, 주어도 주어도 또 주고 싶고, 받아도 받아도 더 받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도 제목이다.

①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

②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

③ 하나님의 능력

- 이 세 가지를 마음의 눈을 밝히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님으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이미 지난 본문에서 다 언급한 것이다.

'부르심의 소망'은 이것이다.

[엡 1:4-5]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5]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 전에 택하시고 자녀 삼기로 예정하셨다.

- 즉,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

-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란 소망을 갖도록 하신 것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소망은 막연한 헛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상속자가 되어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게 될 날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으로 얻게 될 '상속'이 뭐냐?

[엡 1:9-11]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여, 그 만물을 우리에게 상속하시는 것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을 포함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 단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의 개념으로 말이다.

-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는 것이며, 서로가 서로를 통치하는 것이다.

- 삼위일체 안에 만물이 들어가, 객체가 아닌 주체, 종이 아닌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속을 하려면, 하나님께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

[엡 1:11]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 만물을 상속으로 줄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만물을 소유해야 한다.

- 그리고 그 만물을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가지셨기 때문에 만물을 상속하실 수 있었던 것이고, 성도는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 제목 세 가지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다각도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 능력을 근거로 상속이 가능하고, 상속을 근거로 소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세 가지 기도 제목을 통해, 한 분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이 바울이 에베소 성도를 위해 한 기도의 핵심이다.

20-23절: 기도의 근거 -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세 가지 기도 제목 중에 특히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해서 설명한다.

- 왜냐하면 소망과 상속의 근거가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능력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①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

②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것보다 뛰어나게 하심

③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심

④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로 삼으심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물의 주로, 만물을 예수님의 종으로 만드신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증명된 것이다.

- 그 능력을 근거로 만물을 상속하실 수 있는 분이심이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한 가지 세밀하게 볼 것이 있다.

[엡 1:22]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 이 부분의 번역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

직역하면, he gave him as head (over all things) (to the church).

- 즉,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교회에게 만물 위의 머리'가 정확한 번역이다.

- over와 to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이 두 번역의 미묘한 차이는 이렇다.

-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머리시라는 것이다.

- 그런데 머리가 지배하는 대상은 교회가 아니라 over에 해당하는 만물이다.

- 그리고 머리를 소유하는 대상은 만물이 아니라 to에 해당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군림하고 지배하는 대상은 만물이지 교회가 아니다.

- 교회는 예수님께서 지배하시는 대상이 아니라, 예수님을 소유하고 관계 맺는 대상이다.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 먼저 하나님께서 만물을 예수님의 발 아래 굴복시키셔서, 예수님을 만물 위의 머리로 삼으셨다.

- 그런 다음에 그 예수님을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과 교회가 함께 만물을 통치하도록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 절인 23절에 교회를 이렇게 설명한다.

[엡 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와 만물의 관계는 수직 관계이다.

- 만물은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된 존재이고, 그리스도는 만물을 지배, 장악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수평 관계이다.

- 머리는 몸을 일방적으로 지배하지 못한다.

- 머리가 몸을 움직이긴 하지만, 몸은 머리를 지탱하고 있다.

- 상호 관계이고, 사랑의 관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머리, 교회는 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와 교회가 함께 온전한 사람이 되어 만물을 통치하는 것이다.

-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시는 방식이다.

- 우리는 이렇게 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다음으로 교회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라고 소개한다.

- 직역하면, 'the fullness of the One all (in all) filling'이다.

두 부분으로 끊어서 설명하면,

첫째로,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한 존재(the fullness of the One)이다.

- 단순하게 말해서, 교회는 그리스도로만 채워져 있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 쉽게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와 관계 맺고,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 또 복잡하게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존재로서, 서로 구분되지 않을만큼 서로 깊이 관계 맺은 존재이다.

- 뇌에 전선을 꽂은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the One all in all filling)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는 충만케 하시는 분(filler)이다.

그런데 충만케 한다는 것이 어떤 행동을 의미할까?

- 그리스도께서 머리로서 만물을 대상으로 하시는 행동은 이것밖에 없다.

[엡 1: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 즉, 통일이다.

- 만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서로를 위해 살도록 하는 것이다.

- 서로가 자기만 채우려고 경쟁하면 모두 빈털터리가 되지만, 서로가 서로를 채우려고 노력하면 만물이 충만해진다.

-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관계 회복을 위해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이란,

- 만물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통일되게 하시는 분께서 교회를 가득 채우시는 것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해 교회 안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 그렇게 회복된 관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회복되고, 또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선순환을 이루는 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참 하나님의 능력이다.

-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 말이다.

- 그 능력을 통해 성도는 만물을 상속 받는 것이고, 그러한 완전한 통일을 기대하는 것이 참 소망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주제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만의 독보적인 능력 - 관계의 능력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착각한다.

- 세속적인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 신앙을 가진 사람조차 부활의 능력, 창조의 능력, 구원의 능력 등을 하나님의 최고 능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상황에서 유익할까?

- 누군가에게는 죽고 부활해서 사는 것보다 그냥 죽어있는 것이 나은 경우도 있다.

- 선 뿐만 아니라 악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다.

- 비록 구원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삶이 구원 이전보다 못할 때도 있다.

- 이런 능력들은 논란과 비판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관계 회복 능력은 보편적으로 언제나 유익하다.

- 나에게 악한 의도로 고통을 주고, 구원 받지 못해 죄만 범하는 사람조차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과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다.

그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부활, 창조, 구원을 행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모든 능력은 관계 회복 능력 아래 종속된다.

하나님은 존재의 본질 자체가 관계, 사랑이다.

- 삼위일체로서, 영원 전부터 사랑의 관계를 맺고 계셨기 때문이다.

- 그 관계의 확장이 창조이고, 관계 맺는 과정이 구원이며, 관계의 완성이 종말이다.

- 극단적으로 말해, 피조 세계 전체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 관계라는 틀 아래 종속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 존재의 본질인 삼위일체가 관계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만큼 관계의 능력이 독보적이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그 능력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발휘하시는데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하냐?

-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만물과 다르다.

- 만물은 하나님의 뜻에 맹목적으로, 종속적으로 따른다.

-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 말 그대로 종이며, 노예이다.

- 아무런 주체성도 없다.

반면에 교회는 '몸'이다.

- '머리'와 상호 작용하며, 함께 관계를 이뤄가는 주체이다.

- 관계 회복을 경험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관계 회복에 대한 소망이 있고, 관계 회복의 능력도 있다.

이러한 교회의 능력은 독보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독보적인 공동체인 것이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관계를 위해 살아야 한다.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관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 그리스도 밖은 불가능하다.

- 그리스도 밖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불신앙이다.

그 다음,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그리스도 밖의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듯이, 교회도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세상은 너무 강해서 개인은 맞설 수 없다.

- 예수님조차도 세상에 개인적으로 맞서지 않으셨다.

- 제자 공동체와 함께 일하셨다.

- 교회만이 세상과 맞서서 관계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우리 고민의 초점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

-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함께 세상에 침투할 수 있을지 말이다.

-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말이다.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이런 고민을 하기 바란 것이다.

- 만물을 통일 시키셔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과의 관계를 한 걸음 확장할 수 있도록,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기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도 같은 것이다.

- 우리 각자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부르심의 소망을 알아야 한다.

- 공동체를 세상과의 관계 확장을 위해 부르신 것은 분명한데, 그 방법과 과정을 깨달아야 한다.

- 교회의 소명을 알아야 한다.

- 그래야 개인의 소명, 즉 자아성찰도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깨달을 때, 지난 본문의 바울처럼 기쁨에 겨워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동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