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52) 18:28-40 '나'를 잃은 '총독' 빌라도와 '나'를 지키는 '죄수' 예수님
지난 본문은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왔다.
- 예수님은 대제사장에게 끌려가서도 당당하게 할 말을 하셨다.
- 반면에 베드로는 하녀 앞에서도 벌벌 떨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욕구'의 관점에서 설명했다.
-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욕구에 해방되어, 관계 욕구를 추구하셨기 때문에 당당하실 수 있었다.
- 반면에 베드로는 욕구에 속박되어 자기 목숨 보전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위축되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서, 베드로는 '나다움'을 잃었다.
-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목숨 걸고 원했던 예수님을 포기했다.
- 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반면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나다움'을 지키셨다.
- 목숨을 포기하시면서까지 해야할 말씀을 하셨다.
- 끝까지 원하시는대로 행하셨다.
이번 본문도 같은 상황이다.
- 예수님은 여전히 예수님답게 행동하신다.
- 죄수로서 결박된 채로 끌려다니시지만,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씀하신다.
-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총독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 총독은 '식민지의 관할권자'로서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권자이다.
- 그러나 그는 세 번이나 비굴해진다.
- 첫째로, 31절에서 그는 예수님 재판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선을 긋지만, 유대인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재판을 시작한다.
- 둘째로,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신문을 하는 쪽은 빌라도인데, 34절에서 정작 빌라도가 예수님께 신문을 당한다.
- 셋째로, 39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놓아줄 것을 제안하지만, 유대인들의 성화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이렇게 빌라도는 소신대로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변 사람과 상황에 끌려다닌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가?
- 영원토록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라는 오명으로 말이다.
-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처럼 의도를 가지고 죽였으면 덜 억울하기라도 하지, 등 떠밀려서 했던 원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비극적이다.
'나다움'을 잃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 '나'라는 기준을 가지지 않으면, 세상의 기준에 휩쓸릴 수 밖에 없다.
- 그러면서 상황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일관성 있게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일관성 없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결국 인생을 운에 맡기는 것과 같다.
- 운이 좋으면 별 탈 없이 지나가지만, 운이 나쁘면 인생이 나락에 빠진다.
- 이번 본문에 빌라도처럼 말이다.
이런 인생이 비극적인 것은, 자신이 왜 나락에 빠지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나락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이는 마치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 매일 매일 자신에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새를 당기는 꼴이다.
- 운이 좋으면 발사가 되지 않지만, 운이 나쁘면 발사가 된다.
- 발사가 되지 않아도 왜 안됐는지 몰라 불안하고, 발사가 되어도 왜 됐는지 모르고 죽는다.
그래서 '나다움'을 잃으면, 사람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첫째로, 한 없이 긍정적이다.
- 오늘도 머리에 총을 대고 방아새를 당기지만, 그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즉, 지금 당장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의 위기를 외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발사될 총알이 피해가지는 않는다.
- 한 방에 훅 간다.
- 결국 언젠가 총알은 발사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 없이 부정적이다.
- 그 동안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발사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쌓여 산다.
- 즉, 현실의 위기를 알지만 벗어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극도의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 이런 사람은 총알에 맞아 죽기 전에, 스트레스 때문에 죽는다.
- 매 순간을 죽음의 두려움에 쩔어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은 이러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한다.
- 이것이 '나다움'을 잃고, 자신의 인생을 운에 맡겨 사는 사람의 숙명이다.
이렇게 '나다움'을 잃은 사람은 역사적으로 많았다.
- 대표적으로,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선택을 했다.
- 히틀러의 지휘 아래에서 자신에게 맞겨진 일, 즉 유태인 학살을 완벽하게 해낸다.
- 그 결과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쓰게 되었다.
- 적어도 히틀러는 의도를 가지고 살인했지만, 아이히만은 등 떠밀려 살인을 했다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경고 메시지를 준다.
- 우리가 히틀러 되기는 어렵지만, 아이히만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다움'을 잃은 사람이 갖는 비극이다.
- 운이 좋으면 독일인이 될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유태인이 되고, 운이 더 나쁘면 아이히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히틀러나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사람이 적극적인 악의를 갖는 것은 어렵다.
- 하지만 아이히만이나 빌라도가 되기는 쉽다.
- '나다움'을 잃은 사람은 누구나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구에게나 권총에서 총알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선택을 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답게 살 것인가?
- 생각하는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인가?
- 이것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빌라도를 가르는 기준이다.
세상에는 딱 두 부류 밖에 없다.
- 예수님처럼 나답게, 생각하는 대로 사는 부류와 빌라도처럼 상황에 알맞은 선택을 하며 사는대로 생각하는 부류이다.
- 예수님처럼 살지 않으면, 모두 빌라도가 되는 것이다.
- 차이가 있다면, '운이 좋은' 빌라도와 '운이 나쁜' 빌라도가 있을 뿐이다.
- 운이 나쁜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였다면, 운이 좋은 빌라도는 아직 죽이지는 않았지만, 상황만 주어지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빌라도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운이 좋기 때문일 뿐이다.
- 예수님의 사형을 판결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상황만 주어지면, 우리는 언제든 빌라도로 돌변할 것이다.
- 아이히만이 되어, 폭군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나다움'을 되찾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렇게 본문은 우리에게 빌라도가 되지 말라고 경고하며, 예수님을 따르라고 독려하는 것이다.
내용 정리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① 28-32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하는 유대인과 거부하는 빌라도
② 33-38절: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 신문 당하는 총독 빌라도와 신문하는 죄수 예수님
③ 39-40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예수님의 석방을 요구하는 빌라도와 거부하는 유대인
핵심은 빌라도이다.
- 빌라도는 유대인 앞에서도, 예수님 앞에서도 우왕좌왕한다.
- 가장 힘이 센 총독이지만, 유대인에게 그리고 예수님께조차 휩쓸린다.
- 그렇게 '나다움'을 잃는다.
- 이러한 흔들림을 통해, 예수님의 굳건하심이 더욱 강조된다.
반면에 예수님은, 빌라도와 대비되어, 일관되게 주체적이시다.
- 빌라도 앞에서도 흔들림없이 해야할 말을 하신다.
- 상황에 알맞은 선택이 아닌, '나다운' 선택을 하신다.
한편, 유대인도 어떤 면에서 일관된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 '나다운' 선택을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 하지만 실상은 이중적이다.
- 이들은 율법의 절차를 따르지 않고, 여론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려한다.
- 이들은 율법보다 자신들의 뜻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율법을 어기면서도, 율법을 지키려 한다.
- 이방인들의 거처인 관저 안으로 들어가면, 부정해져서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관저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이렇게 일관성 없이 이중적인 모습이 '나다움'을 잃은 사람의 전형이다.
이렇게 세 인물의 모습을 비교하며 볼 때, 본문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28-32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하는 유대인과 거부하는 빌라도
예수님의 행적을 되짚어보면,
- 예수님은 12장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시고, 가르치시고, 기도하셨다.
- 그런 후 잡히셔서 안나스에게 신문을 받으시고, 가야바에게 또 받으셨다.
- 이렇게 신문을 받으시면서 밤이 지났다.
- 그런 후 빌라도에게 끌려오시니, 다시 아침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관저에 들어가지 않고, 앞에 서서 빌라도를 불렀다.
- 이방인 거처에 들어가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 몸을 더럽히면 율법에 따라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재판을 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린다.
- 역설적이다.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를 볼 때, 둘 간의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렇지 않았다면 고발 이유를 묻는 빌라도에게 유대인들이 빈정거리며 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정해보면, 사전에 유대인은 빌라도 측에 예수님의 사형을 요청했다.
- 그러나 빌라도 측은 증거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증거를 가져오지 못했다.
- 증거 부족의 이유로 빌라도 측은 거부했지만, 유대인은 빌라도의 약점을 빌미로 더 강하게 요구했다.
- 유대인은 빌라도의 정치적 지위가 취약한 것을 공격했다.
- 그래서 빌라도 측은 어쩔 수 없이 유대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 하지만 그럼에도 빌라도는 찝찝했고, 마지막까지 증거를 요구하며 저항했던 것이다.
[18:29] 빌라도가 그들에게 나와서 "당신들은 이 사람을 무슨 일로 고발하는 거요?" 하고 물었다.
[18:31]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를 데리고 가서, 당신들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그러나 끝까지 유대인은 예수님의 사형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은 유대인의 뜻대로, 빌라도에 의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32)
- 예수님의 예고대로 이뤄진다.
- 이렇게 상황은 모든 사람들이 동원되어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흘러가지만, 그 길 끝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증하는 목표가 완성된다.
사람의 인생은 이렇게 흘러간다.
- 사람이 볼 수 있고, 그것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는 사건의 흐름이 있다. 이를 '인간의 역사'라고 하자.
- 동시에 같은 사건이지만, 사람이 볼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건의 흐름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사건 속에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한다.
- 왜냐하면 보이는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다. 다시 살 수 없다. 이러한 관찰과 관찰에 근거한 판단은 틀린 적이 없다.
-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신다.
- 그리고 살린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부르기도 하신다.
- 하나님은 사람의 관찰력과 판단력을 초월하여 사건의 흐름을 만드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 본문에 나오는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사람의 관찰력 범위 안에 흘려 주실 때가 있다는 것을.
- 그것이 소위 '계시'이다.
- 이 '계시' 때문에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계시'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다시 질문하면, '계시'를 보기 위해 베드로는 무엇을 했는가?
-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갔다.
- 하지만 함께 모여 기도했다.
- 기도 중에 성령으로 '계시'를 받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어느날 갑자기 기도하고 있을 때 말이다.
33-38절: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 신문 당하는 총독 빌라도와 신문하는 죄수 예수님
대화에 굉장히 날이 서있다.
- 질문도 단순하지 않고, 대답도 오묘한 날카로운 대화가 오간다.
- 섬세하게 풀어보자.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데리고 온 예수님을 관저 안으로 부른다.
- 유대인은 율법 때문에 관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와 예수님은 단 둘이 대화할 수 있었다.
- 유대인이 없기 때문에 빌라도도 좀 더 솔직하게 질문할 수 있었고, 예수님도 방해받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빌라도의 첫 질문이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의 왕이오?'
- 원래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이 고발한 예수님의 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신성모독, 즉 신학적 죄이다.
- 하지만 사형을 받아내기 위해 빌라도에게 고발한 죄는 로마 황제를 부정하고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말하는 반란, 즉 정치적 죄이다.
- 빌라도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적 죄가 아니라 정치적 죄였다.
- 그래서 빌라도는 먼저 사실 확인을 한다.
- 유대인의 왕으로서 반란을 하려했는지 묻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한 질문에도 예수님은 쉽게 대답하지 않으신다.
- 오히려 질문을 하신다.
[18:34]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하는 그 말은 당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말하여 준 것이오?"
- 핵심은 빌라도 질문의 출처이다. 자기 자신인지, 다른 사람인지.
먼저 예수님이 질문에 바로 답하실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예'라고 답해도, '아니오'라고 답해도 둘 다 틀린 답이기 때문이다.
- '예'라고 하면, 신학적으로는 맞지만, 정치적으로는 틀린 답이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유대인의 왕은 맞지만, 로마 황제를 부정하는 정치적 왕은 아니기 때문이다.
- 반대로 '아니오'라고 하면, 정치적으로는 맞지만, 신학적으로는 틀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왕이라는 용어의 신학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으로 나눠서 말씀하시고자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질문의 출처를 질문하셨을까?
-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싶으셨다.
-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며 왕이 맞지만, 정치적으로는 세상을 정복하는 의미의 왕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다.
- 그래서 36절에서 정치적 왕이심을 부정하셨고, 37절에서 신학적 왕이심을 인정하신 것이다.
그러면 그 결론과 예수님의 질문이 어떤 관련이 있는가?
- 만약 질문의 출처가 빌라도라면, 로마인의 관점에서 '왕'은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 반면 질문의 출처가 다른 사람, 즉 유대인이라면,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이것을 먼저 구분하시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빌라도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18:35] 빌라도가 말하였다.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 당신의 동족과 대제사장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겨주었소.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
끊어서 보면, 빌라도의 첫 대답은 '내가 유대 사람이란 말이오?'이다.
- 즉, 자기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 따라서 빌라도의 질문은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인의 입장에서 한 질문이라는 뜻이다.
-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적 왕인지를 먼저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자신은 정치적 왕이 아니라고 36절에서 말씀하신다.
[18:36]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 풀어 말하면, 나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맞다.
- 그런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 만약 이 세상에 속했다면, 끝까지 싸워서 이겼을 것이다.
- 이렇게 무력하게 잡혀오지 않았을 것이다.
- 이것으로 내가 로마 황제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빌라도의 둘째 대답은, '당신은 무슨 일을 하였소?'이다.
- 그러면서 37절에서 또 다시, '당신은 왕이오?'라고 묻는다.
- 즉, 무슨 일을 했길래 유대인들이 저 난리를 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 정치적 왕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왕이라고 하는지 물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신학적 왕,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심을 밝히신다.
[18:37]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 풀어 말하면, 나는 정말 왕이 맞다.
- 그런데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왕으로서 진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왔다.
- 그렇기 때문에 진리에 속한 사람은 다 내 말을 듣고 날 따른다.
- 그런데 유대인이 저 난리를 치는 것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러니 너도 판단 잘 해라! 라고 빌라도에게 무언의 압박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무엇일까?
- 아마도 보편적인 의미의 진리일 것이다.
- 예수님은 자신의 의도도 전달하면서 동시에 로마인인 빌라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서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빌라도에게 두 가지 판단을 하게 했을 것이다.
- 첫째로, 이로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에 해당하는 죄, 즉 반란되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 둘째로, 하지만 예수님이 만고불변의 진리를 가진 신통한 사람이라는 이상야릇한 감정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하고 묻는다.
- 진리를 물은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 알 수 없는 신통함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답을 듣지는 않는다.
- 들어 봤자 소용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왜냐하면 어짜피 죽을 것이니까.
- 이는 죽이지 않고 진리에 대해 들어보고 싶지만, 죽일 수 밖에 없는 빌라도의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 본문에서 빌라도가 명목 상의 지위는 가장 높지만, 실제 힘은 가장 약했다.
- 죄수인 예수님께도, 식민지 백성 유대인들에게조차 자신이 원하는 바를 주장하지 못했다.
39-40절: 빌라도와 유대인의 대화 - 예수님의 석방을 요구하는 빌라도와 거부하는 유대인
그래서 빌라도는 편법을 쓴다.
- 유대인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예수님의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 하지만 예수님을 살리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린 후,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반발한다.
- 그래서 발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린다.
주제
'나' 없는 나의 위험성 -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
빌라도도, 바리새인도, 대제사장들도 전부 다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 모두 다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 윗 사람 말에 충성되고, 아랫 사람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 주어진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선택을 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다.
- 누군가에게 특별한 적대감을 갖고, 성에 안차면 죽이는 싸이코패스가 아니다.
- 누군가의 남편이고,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빠이고,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식이다.
- 아내를, 자식을, 부모를 지키기 위해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 우리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른다.
-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다.
이것은 남일로 치부할 수 없다.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
- 왜냐하면 우리도 이들과 똑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이 흉악범이기 때문에 살인한 것이 아니다.
- 아주 평범하게, 상황에 적절한 판단을 했기 때문에 살인을 한 것이다.
- 빌라도가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총독 지위에서 밀려날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아내, 자식, 부모가 굶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사형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자신들의 종교적 지위를 잃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가족이 굶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이 살인을 한 것은, 여느 가장의 지극히 평범한 고민 때문이다.
- 우리의 고민과 똑같다.
이래서 상황에 맞춰서 사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 순수한 내 선택으로 인해 어떤 참혹한 결과가 일어날지 스스로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운이 좋으면 아무에게도 피해 주지 않지만, 운이 나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운이 더 나쁘면 하나님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 더 비극적인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고 죽는다는 것이다.
- 이것이 '나' 없는 나의 위험성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실존이다.
-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의 숙명이다.
- 나는 태어나서부터 최선을 다해 노를 젓는데, 내가 젓는 배가 어떤 배인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운이 좋으면 상선이지만, 운이 나쁘면 해적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적선이 되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고 해도,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노만 젓다가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바꿀 수가 없다.
- 내가 탄 배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
- 왜냐하면 나에게는 노만 있을뿐 키가 없기 때문이다.
- 배가 해적선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노를 젓지 않는 것 뿐이다.
- 내가 노를 젓지 않아도, 배는 나아가게 되어 있고, 결국 사람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 내 인생의 결과를 운에 맞겨야 하는 것이 인간의 비극적인 숙명이다.
- 어떤 배를 탈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서, 예수님의 배에 타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려면,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에, 그토록 관계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
이렇게 인간의 나약함을 집중해서 보면, 우울하다. 무기력해진다.
-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사람을 죽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느껴진다.
-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해도, 결국 이 설교조차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될 것 같다.
이 우울감, 무력감, 좌절감을 우리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
-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며 좌절감을 느꼈듯이 말이다.
-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선의가 전부 악의라는 것을 느꼈듯이 말이다.
- 그래서 베드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기나 잡으러 돌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인생의 사형 선고를 받았으면 좋겠다.
- 그래야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예수님과 나만 있는 관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나의 선입견, 경험, 판단이 전부 배제된 올바른 관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나와도 바른 관계를 맺어 나답게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태초의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럴 때에야 비로소 나의 사명을 깨닫고, 사명에 헌신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 베드로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내 인생을 운에 맡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오늘도 총알이 발사되지 않을 것이란 헛된 기대에 취하지 않을 수 있고, 오늘은 총알이 발사될 것 같은 불안함에 억눌려서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신앙의 목적이다.
- 좀 더 나은 삶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 정말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 인간으로서 생명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이다.
- 내가 나로서 살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