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44) 15:18-16:4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세상의 반응 - 미움

안승준 2019. 10. 19. 14:30

상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호의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호의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 그렇기 때문에 힘들지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랑 받기 위해서이다.

- 사랑하면 사랑 받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 아무도 미움 당할 것을 기대하며 사랑하지 않는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말한다. 사랑하면 미움 당한다고.

-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을 대표적인 예로 드신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 예수님은 평생을 세상을 사랑하셨지만,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많이 미움 당하셨다.

- 따라서 사랑하면 미움 당하는 과정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관찰해야 한다.

예수님은 명실공히 사랑의 왕이시다.

- 포도나무가 가지에 매달려 있듯,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사랑하셨다.(배타적)

- 그리고 자신의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모든 인류 중 가장 잘 지키신 분이시다.(개방적)

- 즉, 예수님은 세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며, 또한 세상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랑을 하신 사랑의 왕이시다.

그런데 세상의 반응은 뭐였는가? 미움이었다.

- 세상, 특히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너무 미워해서 죽이기까지 하였다.

- 자신들에게 특별히 해코지한 일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사랑에 대해 미움으로 반응했을까?

- 이것을 신앙과 상관없이 설명해보겠다.

- 세상에서조차 사랑을 미움으로 반응하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보겠다.

사랑에 미움으로 반응하는 이유 - 다름 때문

나의 예를 들어서, 나는 왜 부모님을 미워할까? 

-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까?

-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정말 정말 정말 사랑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면, 나도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 하지만 나는 사랑을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고 미움으로 반응했다.

왜그랬을까? 단순히 내가 나쁘기 때문일까?

- 내가 나쁜 것은 맞지만, 논외로 하자.

핵심은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 부모님은 나를 정말로 사랑하신다.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신다.

- 그래서 특히 부모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가능한 많이 주고 싶어하신다.

- 그것은 경제적, 사회적 성공이었다.

- 그것을 위해 돈, 마음, 몸을 전부 남김 없이 쓰셨다.

그런데 그런 부모님을 나는 왜 미워하냐?

- 그것을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나는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 성공보다는 신앙 생활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워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

-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여, 서로 조정하고 합의했다면, 미워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무시했기 때문에, 싸움과 미움이 생긴 것이다.

- 이렇게 아무리 좋은 것을 준다고 해도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싸움이 생긴다.

- 왜냐하면 부모 자식 관계라 하더라도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내가 산낙지를 좋아한다고 해도, 또 산낙지가 아무리 건강에 좋다고 해도,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어린 자녀에게 아무리 주고 싶다고 해도, 만약 자녀에게 산낙지 먹기를 강요한다면?

- 산낙지를 당장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안좋은 기억 때문에 산낙지를 평생 먹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으며, 심하면 산낙지를 먹으라고 한 나를 평생 미워할 수도 있다.

- 내가 자녀를 존중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자녀는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 왜냐하면 나와 자녀는 원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신 이유

다시 예수님으로 돌아와서,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왜 미워했냐?

- 바리새인과 예수님은 원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은 세상 안에서의 성공을 원했다. 

- 세상에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풍요를 원했다.

-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사랑 받길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 이후에도 지속되는 성공을 주시길 원하셨다.

-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바라셨다.

- 즉, 예수님은 세상에 참 사랑을 주시고 싶으셨지만, 세상이 원했던 것은 거짓된 사랑이었다.

바리새인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산낙지 같은 것이었다.

- 먹고 싶다는 관심보다 더럽다는 구역질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 세상적으로도 혐오스럽고, 종교적으로도 부정한 것이었다.

- 그랬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지금 오신다면 어떨까?

- 우리도 바리새인과 같은 이유로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일 것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완전히 같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산낙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우리의 인생 - 미움 당함

그런데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물며, 예수님과 배타적이고 은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또 그 결과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래서 예수님과 같이 세상에 참 사랑을 주려고 한다면?

-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였듯이, 우리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제자들을 회당에서 쫓아내고, 죽였다.

- 이와 같이 우리는 세상 커뮤니티로부터 배제되며, 그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당장 오늘 내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오늘보다는 1년 후에, 1년 후보다는 10년 후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제되어갈 것이다.

-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더 무관심해질 것이고, 세상은 우리를 더 못마땅해할 것이다.

- 예수님의 죽음이 필연적이듯이, 우리가 미움 당하는 것도 필연적이라는 뜻이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로 인정되듯이, 우리도 미움 당함을 통해서 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런데 미움 당함은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다.

- 예수님조차도 미움 당하셔서 죽임 당하실 때 고통스러워하셨다.

- 십자가 고통을 회피하고 싶어하셨다.

그래서 그 고통이 왔을 때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이다.

- 미움 당함의 고통은 너희가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해서 생긴 것이다.

- 너희는 예수님께 속해 있지만, 세상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너희까지도 미워하는 것이다.

- 그러니 미움 당해서 힘들다고 신앙 포기하지 말라!

- 회당에서 쫓겨나고 죽임 당해도, 죽을 때까지 예수님만 믿어라!

특히 그 믿음을 지키는데 성령님이 도와주신다.

- 성령님의 역할은 단순하다.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것이다.

-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움 당함의 고통 속에서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셔서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하신다.

예수님이 이러한 위로를 하신 이유는 두 가지다.

①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함은 너무 커서 맨정신으로는 절대로 견딜 수 없다. 

② 그러나 성령님을 통해서는 아무리 큰 미움 당함도 능히 견뎌낼 수 있다.

정리하면, 본문은 크게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는, 위로이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할 제자들의 고통을 공감하시며 위로하신다.

- 고난과 고통이 오면 사람은 으레 자신 안에 잘못을 찾기 마련인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 오히려 예수님을 잘 믿어서 받는 고난이라고 제자들의 신앙을 칭찬하신다.

둘째는, 권면이다.

아무리 큰 미움을 당하여 쫓겨나고 죽임 당할 처지에 놓인다고 해도, 계속해서 예수님께 머무르라는 권면이다.

- 믿는 사람은 반드시 미움 당함을 받는데, 그 때 믿음을 버리고 싶은 유혹이 있다.

- 그 고통은 너무 커서 아무도 견뎌낼 수 없는 고통이다.

- 그래서 넘어진 사람이 많다.

- 아마 요한복음 기록 당시 박해가 심해서 배교의 유혹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넘어지지 말라!

- 미움 당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라!

- 그럴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자.


내용 정리

본문은 큰 틀에서 다음과 같다.

주제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

 위로 방법

 18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설명

 미움 받는 

이유 ①

 19-20

 제자의 정체성 -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해있음

 대전제: 세상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속한 것을 미워한다.

 소전제: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한다.

 결론: 따라서 제자들은 세상에게 미움을 받는다.

 미움 받는 

이유 ②

 21-25

 세상의 정체성 - 아버지를 미워함

 대전제: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소전제1: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보이셨다.

 소전제2: 그러면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데, 세상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소전제3: 그 이유는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결론: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까지도 미워하는 것이다.

 위로 수단

 26-27

 성령님 - 흔들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하심

 위로 이유

 1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때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현실 진단

 2-4

 세상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함

 너희를 회당에서 내쫏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주의 깊게 볼 부분은, 미움 받는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눠서 설명한 부분이다.

- 첫째는 제자들이 잘해서, 둘째는 세상이 나빠서이다.

- 이 두 가지 이유가 합쳐져서 미움 받는 이유가 얼마나 필연적인지 설명한다.

또 예수님의 현실 진단 내용이 인상적이다.

- 제자들은 믿음 때문에 두 가지 고통을 당한다.

- 첫째는 회당에서 배제되는 사회적인 고통이고, 둘째는 목숨을 잃는 육체적인 고통이다.

- 사회적 고통은 경제적, 정서적 고통을 동반한다. 

- 회당에서 배제되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만날 수 없고,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돈도 벌 수 없기 때문이다.

- 육체적 고통의 크기는 무한대다.

- 죽음은 단지 목숨을 잃는 것을 넘어서 무한대의 육체적 고통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미워하는 핵심적인 대상은 누구라고 말하는가?

- 자기네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16:2)

-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 대제사장, 서기관 등이 해당될 것이다.

- 그들은 하나님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죽였다.

-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조금의 의심 없이 믿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안계시지만, 예수님의 죽음 부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지금도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긴다는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 그들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일 것이다.

-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박해를 당한다면, 그 핵심은 교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일 것이다.

- 그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며 죽이려 들 것이다.

- 본문에 따르면, 이렇게 교회가 박해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 아닐까?

- 우리 교회가 세상에 속해있지 않고 예수님께 속해있다는 이유로 세상, 특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에게 박해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주제

① 믿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하는 필연적인 이유 세 가지

첫째는, 예수님의 선례이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또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의 말도 지킬 것이다.

- 과정과 이유를 다 떠나서, 예수님이 신앙 때문에 박해 받으셨고 죽임 당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 여느 사람과 달리, 예수님은 신앙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흠이 없는 분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 예수님은 영적, 도덕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등 어떤 기준으로 봐도 완전한 인간이다.

- 그런데 딱 신앙 하나 때문에 박해를 받으셨다.

-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이 올바른 신앙을 사람을 '올바른 신앙 때문에' 박해한다는 것이다.

-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이다.

둘째는, 제자들의 선함이다.

- 게다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올바른 신앙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속해있다.

- 그런데 세상은 자기 편에는 사랑을, 예수님 편에는 박해를 행한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반응하고, 세상은 냉혹한 박해로 반응한다.

만약 우리가 받는 고통이 우리의 문제 때문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고쳐야할 부분이라면?

- 반드시 문제를 고쳐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 고통은 극복 대상이다.

- 예를 들어, 돈이 없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극복해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 그것은 돈에 매여서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

-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돈이 없어도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우리가 받는 고통이 신앙 때문이라면?

- 그것은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참고 감내해야 할 것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을 극복하거나 벗어나지 않고, 참으신 것처럼 말이다.

-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고통이 너무 싫어서 극복하시고 벗어나셨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영광 받지 못하신 것은 물론이고, 인류 전체가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싫어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지옥에 속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 나의 고통이 나의 선함 때문인지 악함 때문인지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구원 받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다. 불가능하다.

- 그러나 나의 선함으로 인한 박해의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양지차다.

- 이것을 모르면, 모든 고통을 극복 대상, 회피 대상으로만 본다.

- 그러면 모든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예수님까지 회피하게 된다.

- 그러나 알면,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 그러면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고통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그 고통이 나의 선함 때문이건 악함 때문이건, 고통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게 된다.

- 악함 때문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고 벗어나게 된다.

- 반면에 선함 때문이라면, 예수님과 함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 모든 고통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이 차이가 고통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 사람과 선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차이다.

- 고통을 무조건 악으로 보는 사람은 고통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 오히려 고통을 해결해주시지 않는 예수님을 원망한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을 배신할 수 밖에 없다.

셋째는, 세상의 악함이다.

- 세상은 관점에 따라 악해 보일 수도, 선해 보일 수도 있다.

- 왜냐하면 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 내 편만 사랑하고, 그 외에는 미워한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더라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사람이라고 하여 사랑했을 것이다.

- 왜 세상은 이런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차후에 고민해보자.

따라서 세상 편의 입장에서 세상은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곳이다.

- 반면에 세상이 아닌 예수님 편의 입장에서 세상은 미움과 살인이 넘치는 냉혹한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세상은 어떤 곳인가?

- 즐겁게 하는 곳인가, 아프게 하는 곳인가?

- 즐거운 곳이라면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환대를 받기 때문일 것이고, 아프게 하는 곳이라면 예수님께 속하여 세상의 박해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오해해서, 세상을 비관하자는 것이 아니다.

- 슬픈 일이지만,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하는 것은 세상을 아픈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 반대로 세상을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세상은 즐거워야 하는데,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고통으로 자살하는 것이다.

정말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아프게 하는 곳이라고 아는 사람은, 반대로 세상을 사랑한다.

- 세상을 비관하지 않고 긍정한다.

- 세상은 자신을 아프게 하지만, 이 아픔을 통해 예수님을 더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또 이 아픔을 통해, 더 많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즐겁지 못한 것을 고통스러워하며 사는가, 아니면 예수님께 속하여 세상이 주는 박해 속에서도 사랑의 관계를 기대하며 사는가?

-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② 특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의 공격이 무서운 이유

이렇게 우리를 박해하는 세상 중에 특히 더 경계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 바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

- 참고로,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을 전부 다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우리 교회는 항상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특별히 더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어짜피 다 그 놈이 그 놈이다.

- 문제는 이들이 신앙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 때문에 우리가 경계를 늦주기 쉽다.

- 이들의 박해를 세상이 주는 박해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앙의 위기는 교회 밖의 사람보다 교회 안의 사람에 의해 올 가능성이 더 많다.

- 우리를 거지라고 놀리거나, 어리석고 무능하다고 무시하는 것은 구분하기 쉽고 견디기 쉽다.

-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공격을 받으면, 우리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 물론 고민을 통해 신앙이 더 견고해질 수도 있다. 

- 하지만 고민으로 인해 우리 신앙의 본질이 흔들릴 수 있다.

-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세상의 공격에 거침 없이 무너지게 된다.

- 결국 고민 끝에 신앙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다.

- 이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의 공격이 무서운 이유이다.

해법은 무엇인가?

- 딱히 없다. 신앙의 본질이신 예수님을 더 잘 알고, 그 분 안에 머무는 것 밖에.

- 그럴 때에만 세상의 공격을 견딜 수 있다.

- 그럴 때에만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 이면에 있는 사람 신앙의 본질도 구분할 수 있다.

- 그럴 때에만 신앙을 고민하고 회의하고 흔들리지만, 고민을 통해 신앙이 견고해질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이다. 


결론

제자들에게 임할 박해와 고난의 말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기도 하지만, 막상 말하려면 할 말이 없기도 하다.

- 그 동안 신앙 생활하면서 겪었던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많은 말을 하고 싶다.

- 신앙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커서 기도 밖에 할 수 없었을 때, 그 때 받았던 은혜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 고난이 얼마나 나의 신앙을 견고하게 만들었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 어려움들이 신앙 때문에 생긴 박해인지 되돌아보면, 할 말이 없어진다.

- 어려움들의 대부분은 내가 선해서라기보다 악해서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기 때문이다.

- 그 때 힘들었던 이유가 내가 했던 헌신에 대해 세상에서 보답 받고 싶은 욕심이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내 신앙에 대해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안되니까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차마 박해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 단지 신앙 때문에 힘들었고, 예수님으로 좀 나아졌던 경험이 있을 뿐이다.

- 나의 선함 때문이건 악함 때문이건, 어쨋든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성경은, 세상은 더 악해지고, 신앙 생활하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 이 말은, 오늘과 같은 신앙으로 내일을 살면, 결국 신앙을 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점점 극심해지는 박해 속에서 우리는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

- 아무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결심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그 소망을 날로 날로 커지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신앙을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