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3) 15:12-17 예수님 방식의 사랑은 친구 삼는 것이다.
천국에 가지 못하는 이유 - 자신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
요한복음이 이끌어가는 최종 목적지는 결국 '사랑'이다.
-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라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 너무 뻔하고 식상한 표현이라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랑, 그리고 이웃과의 수평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은 목적지까지 가는 길과 타고 갈 리무진까지도 이미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 길도, 리무진도 모두 예수님이시다.
- 예수님이라는 리무진을 타고, 예수님이라는 길 위로 가면, 예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 우리는 딱 하나만 챙기면 된다.
- 바로 '나'이다.
- 나만 챙겨서 리무진에 타기만 하면 천국으로 직행한다.
-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그토록 '예수님 안에 머물라!'라고 10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 리무진에 머물라! 리무진 타라! 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 리무진 안탄다.
- 그래서 천국 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말한다.(눅 18:25)
- 또 천국으로 가는 문은 좁고 비좁아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마 7:13-14)
이유는 단순하다. 가기 싫어서이다.
-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 갈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다 마련되어 있는데, 안가는 것이다.
왜 싫으냐? 왜 안가냐?
- 단순하다. 몰라서이다. 제대로 몰라서 오해하기 때문이다.
- 바르게 알기만 하면, 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뭘 모르냐?
- 두 가지를 모른다.
- 첫째로,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른다.
- 둘째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이는 마치 길을 잃는 이유가 두 가지인 것과 같다.
- 목적지를 모르거나, 지금 내가 어디인지 모를 때이다.
- 길을 찾는데 있어서, 목적지를 아는 것만큼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아무리 목적지를 알고 지도가 손에 있어도, 내 위치를 모르면 아무 곳도 갈 수 없다.
- 그래서 신앙 생활에서 목적지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만큼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앙을 판단하는 방법도 두 가지이다.
-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이다.
-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신앙의 본질인 것은 당연하지만, 예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하면 지식은 아무 소용 없다.
- 예수님에 대해 아무리 잘 알아도, 그 예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전부 껍데기 지식에 불과하다. 아무 소용 없다.
그런데 특히 요즘에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너무 많다.
-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수준급의 지식을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대신 정리해서 알려주는 사람이 널려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것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알려 줄 수도 없다.
-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다. 스스로 노력하고 고민하고 성찰해야 한다.
-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과 관계 속에서,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 신앙에 대한 열정이 있는사람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체를 알 수 있다.
- 그런 사람만 성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정보가 넘쳐나는 현재 우리 시대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보다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 신앙의 열정을 판단하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
- 예수님을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잘 알아야 한다.
- 그러나 현재 시대가 정보 습득보다 자기 성찰에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 그래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졌던 자기 성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 자신을 성찰하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 뿐이다.
- 예수님을 기준으로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자신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을 더 알 수가 없다.
- 자신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바르게 알아야,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자기가 누구인지 잘 알게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는 선순환을 이룬다.
-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지식이 쌓이고, 그로 인해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이다.
- 이 선순환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 그래서 신앙 생활 중에는, 자신은 배제하고 예수님께 집중하는 시기가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예수님을 배제하고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시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누군가는 자신에 집중하는 것이 '인본주의'라며 비판하는데, 어리석은 말이다.
이 선순환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의 인생은 비극적이다.
- 예수님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진다.
-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알지 못하게 된다.
- 그러면 필연적으로 주변 상황에 휩쓸릴 수 밖에 없다.
-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렇게 살면 처음에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으로 어느 정도 살만 하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족은 커진다.
- 돈도 많아지고 사람들의 인정과 평판도 쌓여가지만, 여전히 불만족하다.
-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렇게 된 사람은 영원토록 만족할 수 없는 것이다.
- 길을 잃었는데, 목적지도, 내 위치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 그러면서 목적지와 내 위치를 알려는 노력은 안하고, 주변만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삶이며, 이러한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지옥이다.
이는 신앙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똑같다.
- 피상적인 관계에서는 정보를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 어디 사냐, 취미가 뭐냐, 어제 뭐했냐 등의 대화만 해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다.
- 그러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정보 교환만 하면 지루해진다. 더 이상 말할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 그 때에는 내면을 교환하는 대화를 통해서만 관계가 가능하다.
- 그렇기 떄문에 상대가 내면에 대해서 숨기려 하거나, 드러낼 내면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 그 관계는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
- 그런데 그러면 관계가 그 상태로 멈춰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깨진다. 서로 재미 없기 때문이다.
- 관계는 더 가까워지거나 더 멀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다. 적당한 거리로 지속되는 경우는 없다.
- 이렇게 사람 사이에서도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천국행 리무진을 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예수님을 기준으로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이 얼마나 크고 귀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몰라서이다.
- 예수님과의 관계 문제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는 것의 의미 -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
마지막으로, 우리가 모르는 것의 핵심은 무엇인가?
- 관계이며, 더 나아가서 사랑이다.
- 우리가 가장 원하고 필요한 것이 사랑인데도 말이다.
-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셨다.
- 그래서 사람의 본질이 사랑이다.
- 사랑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도록하는 유일한 것이다.
- 사랑만이 사람에게 참 생명이다.
-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사람은 밥 없이는 살아도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이다.
-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자살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랑이 이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이는 마치 휘발유가 떨어져서 자동차가 멈췄는데, 왜 멈췄는지 몰라서 엔진 오일, 냉각수, 와이퍼 워셔액 등만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것과 같다. 바로 앞에 주유소가 있는데도 말이다.
- 사랑을 모르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것이다. 내 인생 전부를 망가뜨릴만큼.
- 사랑을 모르는 인생의 결말은 허무함에 빠져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좀비일 뿐이다.
-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좀 더 구체화 해보면,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모르는가?
두 가지로 나뉜다. ① 관계 없는 사랑과 ② 열정 없는 사랑이다.
- 이전에 사랑을 관계와 열정이라고 말했었다.
- 그런데 둘 중에 하나가 없어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문제가 있다.
① '관계'가 배제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지식 없이 열정만 가진 사랑은 결국 '매춘'이다.
- '매춘'은 상대방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상대방을 강력하게 원한다.
- 하지만 상대방에 대해 눈꼽만큼의 관심도 갖지 않는다.
-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열정적으로 자신의 욕망만을 채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결국 상대방도 망가뜨리고 자신도 망가뜨린다.
- 상대방은 아무런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깬다.
- 동시에 사랑을 쏟아부은 상대방이 관계를 깨고 배신했다는 생각에 자신 역시 좌절한다.
대표적인 예로,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있다.
- 이는 단순한 드라마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시대에 대부분의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미명 하에 폭력을 행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 부모가 자식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알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공부시켜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결혼 하게 하려 한다.
- 그러면서 부모는 말한다. 다 너를 위해서라고.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너가 세상에서 행복하기만 바랄 뿐이라고. 행복하기 위해서 대학, 직장, 결혼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순수한 자식 사랑이라고.
-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모도, 자식도 착각한다. 그리고 세상도 이것이 사랑이라고 인정한다.
- 이러한 사랑의 결말이 자살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채 말이다.
- 자식이 자살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 역시 평생을 자식 잃은 슬픔에 죽은 것처럼 살게 된다.
이러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매춘'이다.
- 관계와 관심이 배제된 열정이기 때문이다.
- 상대방의 원함과 필요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랑'을 착각할 때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된다.
② '열정'이 배제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관심을 가지고 호감을 보이는 것 자체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정작 상대방을 위해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말이다.
- 걱정하고, 안부 묻고, 잘 되라고 격려하지만,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윗집 주인 아저씨와 카드 흘린 아줌마가 있다.
- 이 사람들은 최근에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꼈던 두 사람이다.
- 윗집 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는 잘 크냐, 아이가 똑똑하다, 잘 지내라! 며 관심을 가져주신다.
- 이렇게 항상 덕담과 칭찬을 하시며, 기분을 좋게 해주신다.
- 그래서 괜히 받은 것 없이 고맙고, 뭔가 마음이 따뜻해진다.
- 나는 착하기만 한 아저씨가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
- 또 얼마전에 카드를 찾아드린 아줌마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다.
- "귀찮으실텐데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한 마음 감사해요. 좋은 일들 많으시길요."
- 카드를 찾아 줘서 기분이 좋았는데, 칭찬까지 받으니 내가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기프티콘과 함께 받은 문자 메시지를 통해 진심 어린 감사가 느껴졌다.
- 사랑 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 그들이 날 사랑한 것일까?
- 그들이 거짓말 했다는 것이 아니다.
- 그들의 마음은 순수했을 것이다. 정말 내가 잘 되길 바랬을 것이다.
- 나도 그들이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란다. 나는 그들을 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순수했다.
- 하지만 나도 그들도 서로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 말만 할 뿐이고, 마음만이 전부이다.
-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이유는 진정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는 서로에게 아무런 상처를 주지 않는다.
- 서로에 대한 기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 서로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 '관계' 없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세상이 착각하고 있는 사랑이다.
- 나조차도 이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 이유는 단순하다. 실제로 마음 안에 뭔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실상 - 마약 중독자
우리는 이런 존재이다.
- 거짓된 사랑에도 충분히 도취될 수 있다.
- '매춘'을 하면서도 사랑을 느끼고, '말'과 '마음'만으로도 사랑을 느낀다.
- 이는 마약을 하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의 한계 때문이다.
- 실제로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누구나 마약을 보면 죽음을 보지 행복을 보지 않는다.
- 마약 중독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 우리가 마약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마약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행복 뒤에 있는 끔찍한 죽음을 알기 때문이다.
- 마약이 사람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관계 없는 사랑과 열정 없는 사랑에서 기쁨이 아니라 죽음을 봐야 한다.
-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보지 못한다.
- 왜냐하면 거짓된 사랑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 게다가 내가 거짓 사랑 중독자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하며 죽어가듯이, 우리도 거짓 사랑을 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만 찾는다.
- 하지만 마약 중독자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강제 입원이다.
- 물론 마약 중독자는 강제 입원을 가장 싫어할 것이다.
- 왜냐하면 마약을 할 수 없으니까.
- 하지만 마약 중독자에게는 강제 입원 치료만이 생명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짓 사랑만 찾는다.
- 손 쉽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참 사랑이다.
- 참 사랑만이 우리를 살리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는 참 사랑을 정말 싫어한다.
- 참 사랑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왜냐하면 우리는 거짓 사랑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매춘('관계' 없는 사랑)이나 상처 주지 않는 관계('열정' 없는 사랑)를 원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참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그토록 싫어하는 것이다. 죽일만큼.
마약 중독자가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치료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 완벽한 치료 방법이 있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 문제는 자신이 치료 받기 싫기 때문이다.
- 마약이 자신을 죽인다는 것을 알아도, 지금 당장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 당장 손 쉽게 얻을 수 있는 만족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약 없이 만족감을 얻으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기 싫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자신이 중독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병원에 입원하면 치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이유도 똑같다.
- 구원의 길이 너무 어렵고 불명확해서가 아니다.
- 예수님의 사랑이 완전하고 참되다는 것을 안다.
- 문제는 싫어서이다.
- 이 길의 끝이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 내가 거짓 사랑 중독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 정확히 말하면, 알지만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하면, 그래서 예수님께 손 내밀면, 그래서 예수님 안에 머물면,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다.
- 모든 것이 완비되어 있다.
- 나만 인정하면 된다.
- 내가 거짓 사랑에 중독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 리무진에 타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누구나 구원 받을 수 있다.
- 그래서 본문이 계속해서 '예수님 안에 머물라!'고 하면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 본문은 예수님 안에 머물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10] 너희가 나의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은 무엇인가?
[12]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 추가적으로, 반드시 예수님의 방식대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 다른 방법으로 사랑하면 무효다.
그래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한다.
① 양 끝 구절 12, 17절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② 그 사이 구절에서 예수님 방식의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이 두 가지는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랑이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단순히 사랑하라는 권면은 우리에게 부족하다.
-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내 마음대로 사랑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거짓 사랑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짚어준다.
- 우리가 본문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이 점을 염두하며 본문을 보자.
내용정리
본문의 구조는 a - b - b' - a' 로 보인다.
구조 |
절 |
주제 |
a |
12-13 |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 |
b |
14-15 |
예수님 방식의 사랑 |
b' |
16 |
사랑의 기원이신 예수님 |
a' |
17 |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 |
- 양 끝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강조한다.
- 그리고 가운데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한다.
본문은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한다.
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할 때, 그 '사랑'이 무엇인가?
②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① 사랑은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
- 친구 되는 것
이것의 관계는 수단과 목적이다.
- 죽음이 수단이고, 친구 되는 것이 목적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참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전부인양 말하는 사람이 있다.
-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 결국 십자가 사건도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물론 결정적인 수단이다.
- 참 신앙은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이다.
사람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희생, 봉사, 섬김은 수단일 뿐이다.
-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것들이지만, 이것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 없다.
- 이런 수단을 통해 서로를 열정적으로 알아가야 한다.
- 결국 관계를 맺을 때 희생이 의미 있는 것이지, 관계 맺음 없는 희생은 동정일 뿐이다.
- 동정은 상대방을 이용해서 봉사 욕망을 채우려는 '매춘'일 뿐이다.
그렇다면 친구는 무엇인가?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을 알려주는 사이이다.
- 마치 전선으로 뇌를 연결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 이것이 관계라고 이미 말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사람의 뇌에 전선을 꽂고 계신다.
- 이를 다르게 말하면 전지 전능이다.
-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자기 자신을 알듯이 알고 계신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예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즉, 우리는 예수님 뇌에 전선을 꽂고 있지 않은 것이다.
-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 신과 사람의 수준 차이 때문이기도 하고, 사람이 신의 생각에 관심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신다. 방법은?
- 사람 중에 하나님의 생각에 관심 있는 사람만 모은다.
- 그런 다음에 그 사람에게 성령을 넣어서, 사람을 신의 수준으로 높인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도록 하신다.
- 즉, 우리가 예수님 뇌에 전선을 꽂도록 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로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친구 관계가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관계 안에서, 목숨을 다하는 열정으로 예수님과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가지고도 설명할 수 있다.
- 예수님은 포도 나무고, 우리는 가지다.
- 가지는 나무에 머물러 있을 때에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 그런데 나무는 가지가 가지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다 쳐내고, 열매 맺는 가지를 새로운 포도 나무로 만드시는 것이다.
- 가지는 종과 같이 일방적으로 종속되기만 한 관계였다.
- 그러나 포도 나무가 된 가지는 친구와 같이 양방향으로 종속된,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와 열정만이 사랑이다.
여기서 본문이 한 가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있다.
- 본문의 전개를 보면, 사랑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 사람의 순종이라는 원인으로 예수님과 관계 맺어지는 결과가 따라오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명확히 하신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다.
- 사람의 순종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이 원인이다.
- 예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반응하여 상호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요일 4:1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②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관종'이라고 말했었다.
- 그것만이 유일한 참 열매이다.(8)
- 따라서 결국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 역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일까?
-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 그것은 '서로 사랑하기'는 그리스도인 안에만 있다는 것이다.
- 즉, 교회 밖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믿음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물론 믿음이 드러나는 상황은 많지만, 신앙의 본질이 관계이기 때문에 사랑이 가장 결정적이다.
그러면 당연히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주목할 수 밖에 없다.
-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도록 한다.
- 특별한 상을 수여 받고 수상 소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많다.
- 또 자신이 겪은 믿음의 여정을 간증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도 많다.
- 이런 것들을 다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들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고 싶어하시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 관계의 신이신 하나님께서 받고 싶으신 영광은 오로지 관계를 통해서이다.
주제
① 예수님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자신을 아는 것
우리는 신앙의 문제가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인류 전체 중에서 손 꼽히게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이다.
- 워낙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 나에게 얼마나 관계와 사랑이 필요한지 아는 것이다.
-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관계와 사랑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아는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 사랑을 왜곡되게 알고 있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배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벗어나려 했다.
-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다.
이렇게 사랑을 왜곡되게 알고 있으면서, 그러한 자신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죽이게 된다.
② 예수님 방식의 사랑인 친구 삼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 삼기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친구에게 모든 것을 알도록 하는 것 - 이는 곧 '관계'이다.
- 친구를 위해 죽는 것 - 이는 '열정'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까지 아심과 동시에 자신의 전부를 알려 주신다.
- 이로써 비로소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 정보의 불균형은 결국 지배와 폭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 파놉티콘이라는 감옥에서 감시자가 숨어있는 것처럼 숨는 자는 권력을 갖게 된다.
- 그래서 교회 목사들이 자신의 삶을 숨기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전부를 친구에게 드러내신다.
- 권력, 지배, 폭력을 버리고 관계를 맺으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관계를 위해 자기 전체를 투신하셨다.
- 사랑의 정의 자체가 자기 전체를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배우자'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 배우자에게 자기 전체를 투신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다.
- 사랑을 여러 이성에게 나눠주는 것은 사랑처럼 보이지만 사랑이 아니다.
이러한 완전한 상호 관계와 완전한 열정만이 사랑이다.
③ 서로 사랑할 때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
이렇게 완전한 사랑만이 사랑이다.
하지만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우리가 아닌 완전한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랑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 그 이유를 단순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 그렇게 참된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한 영광만이 하나님이 받고 기뻐하시는 영광이다.
- 이것 외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도록 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결론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이야기한다.
- 돈 벌고, 직장 다니고, 집에서 살림하고, 육아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고 한다.
- 정말 그래야 한다. 우리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 수 있냐?
- 이것에 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아무 실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리새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 실체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는 것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하나님이 영광 받도록 하는 방법은 서로 사랑하는 것 뿐이다.
- 그리고 그것은 교회에서 이뤄져야 한다.
- 교회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먼저 이뤄져야 한다.
- 교회에서조차 이뤄지지 않는다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 교회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
- 그런 사람에게 전도와 선교는 무의미하다.
우리 정말 서로 사랑하자. 그것만이 살 길이다.
그런데 그것 이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 우리가 지금 얼마나 사랑하지 않고 있는지 절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 우리가 했던 사랑이 얼마나 유치했는지, 얼마나 더러운 매춘이었는지 아는 것이다.
- 우리의 관계가 매춘 관계와 차이가 없었으며, 윗집 아저씨와의 관계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렇게 서로를 욕되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하지 않고 섣불리 사랑하려고 하면, 결국 바리새인 꼴 난다.
- 힘을 합쳐 예수님을 죽이려 들 것이다.
- 서로에 대한 상처만 남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 정작하게 되돌아보자.
- 그것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실체 있는 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