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2) 15:1-11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 관계를 넘어서 사랑으로
지금까지 신앙을 '관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 '관계'가 없는 신앙은 결국 정한수 놓고 기도하는 미신과 완전히 같은 것이다.
- 그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혐오스러운지 공감하게 되었다.
- '관계'는 반드시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찝찝한 것이 하나 있다.
- 성경에는 '관계'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 '관계'와 관련된 단어는 많이 나오지만 말이다.
- 특히 성경은 '관계'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쓴다.
-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깊이 이해한 현 시점에서 '관계'와 '사랑'의 관련성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관계'라는 단어 사용 이유 - 더럽혀진 '사랑' 때문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랑'이라는 좋은 성경 용어를 두고 '관계'라는 단어를 고집했는가?
- 애초부터 '관계'가 아닌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다면, 해명을 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 왜 우리는 '사랑'으로 바로 직진하지 않고, '관계'를 거치는 먼 길로 돌아가는 것일까?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 마치 예수님 당시에 '그리스도', '메시야'라는 단어가 더럽혀졌던 것과 같이 말이다.
- '메시야'는 구약에서 예고된 인류의 구원자였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히어로'로 착각했다.
- 자신들만의 욕구를 들어주는 꼭두각시로 변질되어 있었다.
- 이스라엘 민족만을 로마 식민지에서 구원할 구원자를 의미했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럽혀진 '그리스도' 대신 '인자'라는 단어를 선호하셨다.
- '인자'라는 단어를 통해, 구약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전하실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도 '사랑'을 오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관계'가 아닌 '이용', '거래'로 생각한다.
- '사랑'을 유용한 것을 주거나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유용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열광했고, 십자가에 죽어 쓸모 없어졌을 때 비난했다.
이렇게 '사랑'은 '거래'로 전락했다.
- '거래'로 연결된 '사랑'은, 다른 말로 '매춘'이다.
-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매춘부'에 비유한 것이다.
- 현재는 구약의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부부 간에, 부모 자식 간에, 친구, 동료 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춘'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랑' 대신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 '관계'라는 틀 안에 있는 '사랑'만이 참 '사랑'이기 때문이다.
- '관계'를 이해해야만 '사랑'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관계' 밖의 '사랑'은 '매춘'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현실은 '관계' 밖의 '사랑'이 공공연히 '사랑'으로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랑'이 더럽혀졌기 때문이다.
'관계'의 한계 - 싸움
그렇다면 '관계'의 틀 안에서 '사랑'은 무엇인가?
'관계'는 뇌에 전선을 꽂는 것에 비유했었다.
- 이 비유의 메시지는, 내가 나를 아는 것 같이 상대방을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 그런 완벽한 이해 안에서 두 사람이 만날 때, 비로소 상호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언어에 비유해서 설명해보겠다.
- 현실은 마치 다 같은 한국어를 쓰지만, 엄밀하게 보면, 모두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 같다.
- 철수는 '철수어', 영미는 '영미어'를 쓰고 있다.
- 철수와 영미가 관계 맺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같은 언어를 써야 한다.
- 그것이 의사소통의 기본 전제이다.
- 모두 '철수어'를 쓰던, 모두 '영미어'를 써야 한다.
- 하지만 실상은 각자가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상태이다.
- 그 결과, 서로가 대화를 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해법은 하나이다.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모두 '예수어'를 쓰도록 하신 것이다.
- 모두 한 성령님께 전선이 꽂혀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그렇게 서로 관계 맺도록 하는 일이 성령님의 일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 만약 우리가 서로 전부 전선이 꽂혀있다고 가정해보자.
- 그래서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보자.
- 그래서 서로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해보자.
- 그래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 그래서 우리가 머리가 둘이고 몸이 하나인 샴쌍둥이처럼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 그렇게 비로소 관계라는 것을 맺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가장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날까?
- 100% 장담하건데, 싸움이 일어난다.
- 각자가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겠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겠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겠다고 쉴새 없이 싸울 것이다.
- 행복하려고 관계를 맺은 것인데, 관계 때문에 불행해진다.
- 단언하건데, 이런 불상사는 백이면 백 사람 모두에게 일어난다.
- 이렇게 성령님을 사이에 두지 않은 관계가 얼마나 참혹한지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따라서 올바른 관계는 반드시 싸움을 일으킨다.
- 머리도 하나 몸도 하나인 내 안에서도 운동할까 쉴까, 야식 먹을까 참고 잘까, 기도할까 놀까 하며 끊임없이 싸우는데, 다른 사람과 한 몸이 되면 얼마나 더 싸우겠는가!
- 나도 나를 완전히 용납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은 얼마나 더 용납하지 못하겠는가!
- 이 싸움은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마치 우리 안에서 싸움이 평생 죽기 전까지 지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 결국 이 싸움 때문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내가 누군가와 한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은 한번도 관계 맺지 않았다는 뜻이다.
- 만약 이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 안에서조차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 내적 갈등을 한 번이라도 겪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외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보다 자신을 용납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맺으면 100% 싸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어도 100% 싸움이 생긴다.
-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으려 하자 싸움이 일어났고, 그 싸움에 예수님이 희생당하셨다.
- 사람은 이런 존재이다.
- 이렇게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는 것이 죄의 근본이다.
그러나 관계를 맺어도 싸우지 않는 딱 하나의 관계가 있다.
-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관계이다.
- 우주 전체에서 삼위일체 관계가 유일하다.
-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만이 참 관계는 맺었지만 싸우지 않는 유일한 관계이다.
- 이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 관계 맺지만 싸우지 않는 이 능력이 세상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는, 하나님만 유일하게 가지고 계시는,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이다.
- 교회 벽에서 그토록 시답지 않게 읽어왔던 문구가 갖는 진정한 의미이다.
-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관계를 맺되 싸우지 않고 사랑하는 유일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 목적이 있는 거래
'사랑'은 당연히 서로 싫어하고, 증오하며, 서로에 대한 아무런 호의 없이, 무관심한 것은 아닐 것이다.
- 따라서 서로 좋아하고, 호의를 가지고 관심을 갖는 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겠다.
그런데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고, 특별하게 여기고,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서로 보임에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
- 서로가 가지고 있는 호의와 그에 대한 적절한 반응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 외에 아무런 이유와 목적이 없어야 한다.
- 상대방의 능력 때문에, 혈통이나 배경 때문에, 상대방의 유용함 때문에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관계는 본질적으로 '매춘'이다.
- '매춘'은 두 사람이 욕망과 돈을 목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욕망과 돈이라는 목적 없이 매춘부와 관계를 맺는다면,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다.
- 반대로, 부부라 하더라도 욕망과 돈 등의 목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면, 반대로 그것은 '매춘'이다.
세상에 '매춘부'와 싸우는 사람은 없다.
- 서로의 목적이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 이와 똑같은 이유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 굳이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서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관계 맺지 않기 때문이다.
- 상대방에게 원하는 것만 얻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대로 싸우지 않는 가족은 없다.
- 목적 없이 억지로 관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 관계는 맺었지만, 서로 목적이 달라서 싸우는 것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을만큼 관계가 가깝고 깊기 때문이다.
- 관계는 가까운데, 상대가 내 목적대로 움직이지 않고 손해를 주니까, 그래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니까, 화가 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인가? - 관계와 열정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거래 관계'가 아닌 '사랑의 관계'는 무엇인가?
-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 첫째는 관계, 둘째는 열정이다.
첫째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 관계를 맺지 않으면, 어떤 노력도, 어떤 열정도, 어떤 애정도 의미 없다.
- 관계를 맺지 않는 열정은 폭력이다.
- 상대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나의 것을 열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강요다.
- 나에게 청국장이 아무리 맛있더라도, 외국인에게 열정적으로 제시한다면, 쓰레기를 먹는 고문 경험을 주는 것일 뿐이다.
- 따라서 내가 나를 알듯 상대방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다.
-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다.
- 필요한 것만 주고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존중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 원하는 것만 주고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 죽어간다.
그런데 이것이 관계 맺을 때 생기는 싸움의 핵심이다.
- 사람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상충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운동이 필요하지만, 쉼을 원하는 것과 같다.
- 이러한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운동이 필요하다고 운동을 강요하면, 기분이 상한다. 그래서 관계가 깨진다.
- 반대로 쉼을 원한다고 쉼을 주면, 건강이 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잃는다.
- 즉, 필요한 것을 줘도, 원하는 것을 줘도, 결국 관계는 깨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관계는 깨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시냐?
- 본질적으로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다.
- 사람들은 기적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이다.
- 하나님께서 기적만 주시면,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진다.
- 반면 하나님께서 관계만 주시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 사람은 기분이 상해서 하나님을 떠난다.
- 하나님께서 기적도, 관계도 주실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신 것이다.
방법은 딱 하나다.
-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같게 만드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운동을 오래 해서 적응이 된 사람에게 운동이 쉼이 된 것 같은 것이다.
- 우리에게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 필요한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가?
- 역시 성령님이시다.
-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다.
-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이 관계를 원하도록 바꾸신다.
- 이것이 또 다른 성령님의 역할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신다.
- 그 결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사랑에 필요한 두 번째 조건은 열정이다.
- 만약 상대방 머리에 전선을 꽂아서 상대방을 전부 알았다고 해보자.
- 그래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보자.
- 게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조정하여,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같게 만들었다고 해보자.
과연 그러면 사랑을 느낄까?
- 아니다. 결국 사랑은 상대방에게 원하고 필요한 것을 받을 때 느낀다.
- 따라서 사랑에는 열정을 가지고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얼마 만큼을 줘야 만족할까?
- 예를 들어, 만약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나를 불러서 이유 없이 만원을 주면 어떨까?
- 너무 행복할 것이다.
- 편의점에 가서 과자를 사먹으며 만족할 것이다.
- 그런데 만약 10억을 가지신 부모님이 유산으로 만원을 주면 어떨까?
- 불행할 것이다. 화가 날 것이다. 배신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이유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
- 관계의 깊이 때문이다.
- 관계의 깊이가 다르면,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열정의 크기가 다르다.
-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 큰 열정을 기대한다.
- 그리고 관계의 깊이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열정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열정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게 된다.
- 그래서 10억 가진 부모가 유산으로 백만원, 천만원을 줘도 실망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얼마나 받아야 만족할까?
- 그 답을 우리 안에서 찾아보자.
우리는 나와 관계가 가장 깊은 '나'에게 얼만큼의 열정을 기대하는가?
- 나는 나에게 내 전부를 쏟아 붓는 열정을 기대한다.
- 나는 나에게 나를 아끼지 않는다.
- 말장난 같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어서, 서로의 머리에 전선을 꽂았다면, 그래서 서로를 동일하다고 느낀다면, 서로에게 얼마만큼의 열정을 기대할까?
- 나에게 나의 전부를 기대하듯, 상대방에게 상대방 전부를 기대하게 된다.
-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하기를 바란다.
- 상대방이 철저히 내 것이 되길 바란다.
- 나 외에는 누구도 상대방을 좌우할 수 없게 되길 바란다.
- 왜냐하면 상대방을 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방이 나 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조금이라도 좌우된다면, 실망하고,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관계를 끊어버리게 된다.
-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에 깊이 빠졌던 사람이, 신앙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오히려 더 깊이 실망을 하고 더 과감하게 신앙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 반대로 신앙에 깊이 빠지지 않은 사람이 실망도 하지 않고 얇고 길게 신앙 생활한다. 물론 그러다가 지옥에 가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야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동시에, 그것만이 예수님의 사랑을 바르게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전부를 기대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으셔서, 우리와 동일하다고 느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열정을 갖지 못했을 때, 하나님은 실망하시는 것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 충분한 열정을 발휘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우신 것이다.
- 우리에게 여전히 드릴 수 있는 열정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 상당히 많이 드려도, 우리에게 여전히 목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죽기 전까지 하나님은 계속해서 불만족하실 것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야 만족하신다. 무섭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 그것만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길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자신의 전부를 주셨다.
- 이제 우리가 죽을 차례이다. 우리 전부를 드릴 때이다.
[요 12:24-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 이렇게 죽어야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래야만 참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사랑이다.
- 사랑을 두 가지로 표현했다.
- 상대방을 나를 알듯 알아야 하고(관계), 상대방에게 전부를 주어야 한다(열정).
- 안타깝게도, 둘 중 하나조차도 우리는 할 수 없다.
- 인류 전체 중에 이 두 가지를 모두 행한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 이렇게 사랑은 절대로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반드시 이렇게 사람이 절대로 행할 수 없는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니까.
- 사랑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 사랑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이 아니라면, 전부 '매춘'과 똑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매춘부'라고 하신 것이다.
- 이는 이스라엘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전부 '매춘부'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실제 매춘부를 구원하신 것이다.
[요 8:10-11]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 아무리 매춘부였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메시지는 실제 매춘부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신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사실상 매춘부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번 본문은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로 연결된다.
[요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그런데 일견 예수님의 메시지가 시시해 보인다.
- 명색이 예수님의 유언인데, 싸우지말고 잘 지내라는 메시지라니, 유치하다.
- 왜냐하면 사랑을 '싸우지 않고 잘 지내는' 유치한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래서 그동안 '사랑'이란 단어 사용을 꺼렸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바른 의미로 두고 보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상당히 무겁다. 버겁다.
-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을 해주는 것이 이번 본문이 전하는 메시지이다.
- 다른 방법은 없다. 예수님 안에 머물며 예수님 의지하는 수밖에.
- 그래서 본문은 '머물다'는 단어를 10번이나 반복하는 것이다.
내용정리
이 본문은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비유이다.
-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를 다 알아내지 못해도 문제지만, 확대해석 해도 문제다.
- 비유 속에서 메시지를 뽑는 일은 섬세해야 한다.
둘째로, 비슷한 단어와 표현이 반복된다.
- 반복 속에서 변주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 따라서 반복된 표현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찾아내야 한다.
- 반복을 통해 중심 메시지를 강조하며, 변화를 통해 메시지를 구체화시킨다.
- 특히, '머물다'는 단어가 반복된다.
- 이는 예수님께 머무는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머무는 대상이 나(예수님) ➔ 내 말 ➔ 내 사랑 ➔ 계명으로 구체화된다.
셋째로, 이러한 변주 중에 마지막까지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이 있는데, 1절과 5절이다.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 둘 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며 비유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 그런데 1절에서는 '내 아버지'를 소개하는 반면, 5절에서는 '너희'를 소개한다.
- 이 변주의 의도를 설명하는 해석서가 없었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구조는 다음과 같다.
- 비유 틀을 설정하고, 비유 안에서 조건을 제시한 후, 그것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용한 다음, 마지막으로 이 비유의 목적인 권면을 한다.
- 1-4절과 5-10절은 약간의 변형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 그러나 비유 틀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1-4절은 하나님 아버지 중심으로, 5-10절은 가지인 제자들을 중심으로 변주한다.
- 이를 통해, 처음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큰 틀에서 비유를 제시하고, 다음에는 사람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는다.
비유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등장 인물은 포도나무, 가지 그리고 농부이다.
- 이 셋의 관계는, 포도나무가 가지를 소유하고, 농부가 포도나무를 소유한다.
- 농부 >> 포도나무 >> 가지
농부는 포도나무를 심고 관리한다. 특히 가지치기를 한다.
-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 통치하심을 뜻한다. 특히 심판자이심을 강조한다.
- 하나님은 열매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시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예 잘라 버리신다.
포도나무는 가지에 실질적으로 생명을 제공한다.
- 포도나무에 머물러 있는 있는 가지만이 열매를 맺는다.
- 이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만이 생명력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가지는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한다.
- 이는 예수님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과 관계 맺는 사람만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 여기서 열매는, 두 가지다. ① 구하는 것 그대로 이루어짐(7) ② 하나님께 영광(8)
- 여기서 ①은 '원하는 것'이고, ②는 '필요한 것'이다.
- 즉, 예수님과 관계 맺는 사람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의 일치, 즉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만이 원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 12: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그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었다.
- 우리가 이렇게 되는 것이 참 열매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생기는 것이 예수님과 관계 맺고 있다는 증거이다.
- 이 증거를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에 의해 깨끗하게 된다.
[2]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 여기 2절의 '손질하다'와 3절의 깨끗하게 되다'는 같은 단어이다.
- 이렇게 깨끗하게 된 사람은 더욱 열매를 맺게 되는 선순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깨끗하게 된다'는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딱 두 군데에서만 나온다.
- 이 본문과 세족식이다.
[요 13:1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예수님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요 13: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 즉, '깨끗하게 되는 것' 그리고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은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은 열매 맺는 가지를 깨끗하게 하시는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상술한다.
- 그것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 게명을 지키는 것이다.
- 즉,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억하며, 자신의 전부를 바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 그렇게 헌신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알게되면,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눌 수 밖에 없게 된다.
- 그렇게 다음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복접한 과정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즉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이다.
-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머무르다'는 단어를 10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 동시에, 반복 속에서 변주하며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이 무엇인지 점점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본문 12절과 17절에서는, 그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그 다음 18절부터는 사랑과 반대인 '미움당함'을 다룬다.
- 예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세상에 다가가시자,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였다.
- 동일하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다가가면, 세상은 예수님처럼 우리를 미워하고 죽일 것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사랑을 행하면 사랑으로 보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의 원리는 그렇지 않다.
- 세상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다.
- 예수님도 그러셨고,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긴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은 두 가지이다.
- 8절에서 말했듯,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 뿐만 아니라, 11절에 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도 받아서 우리도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 관계를 통한 영광과 기쁨은 이렇게 언제나 양방향적이다.
주제
① 사랑은 무엇인가? - 관계와 열정
관계는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아는 것이다.
- 문제는 원하는 것을 주면 필요한 것을 줄 수 없고, 필요한 것을 주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는 현실이다.
- 그래서 사람 사이의 관계는 100% 깨지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람들이 관계 맺지 않고, 거래하고 이용하기만 하는 것이다.
- 그래서 '매춘'과 같은 관계를 맺으면서도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 현실에서 관계 맺기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또 이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기대되는 열정은 관계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다.
- 우리는 관계를 맺어 나와 동일시 된 사람에게 상대방의 전부를 원한다. 목숨까지 기대한다.
-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배신당했다고 느낀다. 관계가 멀어진다.
- 그런데 세상에는 아무 대가 없이 목숨을 내거는 사람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는 올바른 관계가 전무한 것이다.
-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조차 대가를 요구한다.
- 그 요구에 보답하지 않기 때문에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가 깨지는 것이다.
- 하지만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능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냐?
첫째로, 성령님을 통해 두 사람이 참 관계를 맺게 하신다.
-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 두 가지를 일치시키신다.
-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을 원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게 만들면 된다.
- 그러면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을 제공하기만 하면 모두와 관계 맺을 수 있게 된다.
- 이 방법은 하나님과도 관계 맺도록 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필요하신 것도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부활을 통해 목숨을 여러개 주신다.
- 그래서 사람이 대가 없이 목숨을 쉽게 주도록 하신다.
- 그러니 나의 목숨을 바라는 상대방의 기대를 충족하킬 수 있다.
- 마찬가지로, 이 방법은 하나님도 만족시킬 수 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목숨을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다.
- 참 쉽다.
- 하나님께서 모든 판을 다 짜놓으셨다.
- 하나님의 판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 그러면 절대 불가능해보였던 '사랑'이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그 판에 들어가는 방법이 뭐냐?
- 본문에서 말하듯,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 이것이 전부이다.
- 그래서 본문이 10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②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란?
본문에서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깨끗하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2, 3)
- 이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이번 본문과 세족식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 세족식을 염두한 표현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은 무엇인가?
- 예수님이 씻어주시도록 발을 내미는 것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만큼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 베드로는 그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발을 내밀지 못했다.
- 하지만 발을 내밀어야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믿는 것이다.
-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9)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 너무 많이 듣고 잘 아는 말씀이지만, 참 믿기 힘든 말씀이다.
- 이 말씀을 믿을 때 신앙이 시작된다.
- 그래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성취된다.
③ 열매는 무엇인가?
전도나 선교를 열매로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 전도나 선교는 참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유일한 참 열매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8)
- 그리고 우리가 그것만을 바라고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7)
그러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무엇인가?
- 쉽게 말해, 하나님이 더 유명해지고, 더 많은 관심을 받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관종'이다.
- 진짜 '관종'과 차이가 있다면, 허울 뿐인 겉모습에 관심 받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본 모습에 대한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이다.
-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과 참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다. 정말 자신의 본질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측면에서 참 '관종'이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하나님의 본질이자, 사람의 본질이다.
- 하나님도 관계 맺고 영광 받아야 사실 수 있다.
- 사람도 관계 맺고 영광 받아야 살 수 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와 관계 맺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영광 받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요 17:22]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영광을 돌려서, 서로 관계 맺음과 동시에 서로의 관계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다.
- 그것이 신앙 생활이다.
결론
미양 교회는 지금 어떠한가?
- 서로 얼마나 관계 맺고 있으며, 서로에 대해 얼마나 열정을 품고 있는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사랑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니까. 천국에 가야 가능한 것이니까.
우리는 여전히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죄이다.
- 하나님께 회개해야 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며,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회개하고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마음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 그러나 현실은 그조차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우리가 얼마나 사랑이 없고, 매정하며, 잔혹한지 기억하자.
- 우리가 여전히 매춘 관계라는 것을 기억하자.
-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얼마나 미안한 상황인지 기억하자.
그리고 그 마음 가지고 예수님께 머물자.
-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기억하자.
- 예수님께 우리의 더러운 발 닦아 달라고 내밀자.
- 교회 관계 문제는 교회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께끗하게 하실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게 만드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를 '매춘부'에서 '신부'로 바꾸실 것이다.
- 그렇게 될 때, 하나님과도 그리고 우리 서로와도 관계가 회복될 것이다.
- 그것이 신앙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