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37) 13:1-20 발 씻기의 의미 - 사랑, 구속, 모범
내용 정리
1-5절: 상황 설정 - 예수님의 끝 없는 사랑
이제 그 때가 왔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심이 충분히 논증되었다.
-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까지도 설명되었다.
- 불신앙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심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였다.
13장부터 본격적으로 '그 때'가 시작된다.
- 그 동안 예수님은 '최고 실체'로서 기적을 행하셨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를 뻥튀기 하시며, 갖은 질병을 고치셨다. 자연의 한계를 능히 극복하셨다.
- 또한 예수님은 '절대 주체'로서 가르침을 주셨다.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상황을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움직이셨다. 사람의 의지조차 조정하셨다.
그러나 이제부터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신다.
- '최고 실체'의 모습을 버리고, 상황을 극복하지 않고, 상황에 굴복하신다.
- '절대 주체'의 모습을 버리고, 사람들의 의지를 꺽지 않고, 사람들의 뜻에 몸을 맡기신다.
- 이것이 유능 사역에서 무능 사역으로의 전환이다.
[요 12:28] "내가 이미 영광되게 하였고, 앞으로도 영광되게 하겠다."
- 이것이 '이전 영광'(31절)에서 '앞으로 영광'(32절)으로의 전환이다.
[31]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32]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역은 유월절을 기점으로 시작된다.(1)
- 이제 마지막 유월절이다. 즉,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이다.
- 예수님은, 출애굽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면했던 것과 같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인류에 구원을 주셨다.
예수님은 유월절, 즉 바로 이 날이 죽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갈 바로 그 날이라는 것을 아셨다.
- 그래서 '끝까지', 즉 남은 시간 전부와 힘을 몽땅 털어서, 남김 없이 사랑하셨다.
그 대상은 불신자를 포함한 인류 전체가 아니라, 자기 사람들에게 한정되었다.
- 자기 사람들이란, 특히 열두 제자들을 의미한다.
-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까지 제자들과만 각별한 시간을 보내신다.
이렇게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반면, 유다는 배신을 계획한다.(2)
- 본문은 이러한 배신을 악마의 계략으로 해석한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유다는 자신이 악마에 조정당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오히려 배신이 더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같은 생각을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일 때 가지고 있었고,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일 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근거 있는 가설이다.
-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유다는 선한 의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하나님 역사의 관점에서는 달랐다. 악마의 계략이었다.
- 악마가 유다를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유다의 행위에 악마를 끌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 유다의 악행을 악마 탓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니다.
- 유다 잘못을 경감시키고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 그래서 우리도 죄를 악마 탓으로 돌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 우리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유다처럼 악마에 조정당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 더 나아가 그러한 사태가 이미 우리 인생에 일어나고 있음을, 그래서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죽이고 있음을 경고한다.
- 그러니 악마에 조정당하지 않도록, 더욱 예수님 의지하라고 경고한다.
- 악마의 속임수에, 바리새인도, 바울도 당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박해했다.
- 우리라고 그러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님 의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유다처럼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렇다고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착오 없이 전부 맡기셨다.(3)
- 유다는 예정되었다가 누락된 것이 아니라, 예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을 신호탄 삼아, 하나님께 돌아갈 마지막 준비를 하신다.(3)
- 그것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이다.(4, 5)
기록에 따르면, 발 씻는 일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노예가 맡은 일이었다.
- 유대인 노예조차도 하지 않고, 이방인 노예만 했던 저급한 일이다.
-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의 발을 씻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금기된 일이라는 기록이 있다.
- 따라서 비슷한 예를 우리 시대와 문화에서 찾아보자면, '밑 닦기'보다도 더러운 일이다.
- 그렇기 때문에 발 씻기를 하시려는 예수님을 베드로가 노발대발하며 말린 것이다.
따라서 '발 씻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추하고 더러운 일이다.
-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발만을 씻어줄 것을 바라신 것이 아니다.
- 각 시대와 문화권 안에서 가장 추하고, 더럽고, 하기 싫은 일을 사랑이라는 이유로 행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모든 경계를 허무신 것이다.
- 그것이 '발 씻음'의 의미이다.
한 마디로, '발 씻기'는 사랑이다.
-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아름답고, 화려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 치열하고, 비굴하고, 추하고, 더럽고, 잔인하고, 거칠고, 냉혹한 모습의 사랑이다.
- 추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추함을 극복하고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 때문에 추해지는 것이다.
- 단순히 사랑의 어두운 면을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 때문에 지불하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밝히려는 것이다.
- 많은 비용 치뤘으니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시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가장 추한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감수하며 우리를 사랑하셨다.
- 특히 그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 죽음에서 불가역적으로 드러난다.
-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주는 유일한 사건이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 예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만 드러난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가장 많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일생 전체가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많이 있었다.
- 그리고 대의를 위해 예수님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많다.
- 신앙 없이도 목숨을 버릴 수 있고, 더 큰 고통을 이겨낼 수도 있다.
- 그런 것으로 예수님의 희생을 깎아 내리는 사람이 있다.
- 희생 정신이 투철한 성인으로 취급한다.
- 죽음과 희생의 행위에만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하면 이런 오해를 한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고 감명을 받아 사랑을 실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 그래서 예수님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발을 씻어주며 다니게 된 것이다.
- 이렇게 행하면서 바른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 똑같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겠다며, 죽을 기회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 예수님의 행위에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해서 생긴 오해이다.
우리는 행위와 함께, 행위 이면에 있는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 예수님께서 발을 씻으신 것은, 발 씻는 행위가 중요해서가 아니다.
- 굴욕을 감수하고 사랑하시겠다는 '퍼포먼스'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죽음을 감수하고 사랑하시겠다는 '행위 예언'이다.
- 행위를 통해 전달되는 예언 메시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발 씻기'와 십자가 죽음 사건을 통해 읽어야 할 메시지는 '사랑'이다.
- 우리도 많은 '사랑'을 한다. 배우자, 자녀, 친구, 동료를 사랑한다.
- 하지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사랑한다. 어느 정도 경계선 안에서만 사랑한다.
- 엄밀하게 말하면, 상대방을 이용하기 위해 사랑한다.
-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이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 뿐이다.
- 부부 사랑,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우정 모두 자기 사랑이다.
- 희생적인 죽음 역시 결국 자기 사랑이다.
- 이 세상에 자기 사랑이 아닌 것은 전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계를 초월하여 우리를 사랑하신다.
- 예수님은 자기 사랑이 철저하게 배제된 진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드러내시는 것이다.
- 인류 전체에서 참 사랑이 무엇인지 드러낸 유일한 분이시다.
- 이것이 감히 '성인'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6-11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으심 - 구속
이제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6)
- 언제나 그랬듯이 베드로는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발 씻기'에 담긴 의미를 나중에야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7)
- 그 때는 십자가 죽음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확증된 이후일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구속', 즉 죄 용서이다.(8, 10)
- 여기서 말하는 죄는 죄의 본질, 즉 자기만 사랑하는 죄, 그래서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하는 죄, 그 결과 예수님과도 관계 맺지 못하는 죄이다.
- '발 씻기'를 통해서 구속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구속 없이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8)
그러면서 예수님은 온 몸을 다 씻어달라는 엉뚱한 베드로의 말을 통해 구속의 의미를 구체화하신다.
- 구속은 '목욕'과 '발 씻기'로 구분되는데, 차이는 '목욕'은 한 번만 하고, '발 씻기'는 반복한다.(10)
- 따라서 '목욕'은 하나님과 깨어진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는 첫 과정이다.
- 반면에 '발 씻기'는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안에서 반복해서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① 예수님과의 관계는 '발 씻기', 즉 반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번 회개를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그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 반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 재확인하지 않으면, 본문에서처럼, 예수님과 상관 없게 된다.
-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자기만 사랑하고, 예수님과 관계 맺지 않고 있음을 확인한다.
-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재확인하여,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이 과정은 특정한 의식이나 행동으로 규정할 수 없다.
-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인되는 모든 사건을 다 포함한다.
- 우리 의지와 상관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기도, 말씀, 교제, 전도, 봉사 등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일어나는 사건일 수도 있다.
- 그래서 의지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하며, 동시에 예상치 못하게 주어질 예수님의 은혜를 기대해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까먹는다. 아무리 큰 충격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
- 예수님의 사랑을 아무리 잘 알아도, 까먹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 반복해서 재확인하는 과정 없이는 아무도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 그래서 반복되는 '발 씻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목욕'과 같은 급진적이고 변혁적인 회개의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② 예수님과의 관계는 '목욕', 즉 예수님의 사랑을 처음으로 깨닫는 과정도 필요하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사람이 두 번 경험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 사람이 가진 경험, 교육, 관계, 철학, 삶의 방식이 완전히 망가지는 사건이다.
- 내 인생 전체가 창조주를 괴롭히는데에만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다.
'목욕'하지 않은 사람은 '발 씻기'를 아무리 많이 해도 소용없다.
- 유다도 발은 씻었지만, 목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했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도 '목욕' 사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신앙의 첫 구속(목욕)과 그 이후 계속되는 구속(발 씻기)을 모두 강조하신다.
하지만 '목욕'하지 않은 한 사람을 남겨두신다.(11)
- 그가 자신을 팔아 넘기려 한다고 하신다.
- 그리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이렇게 본문은 예수님의 한 없는 사랑과 사랑 받는 제자의 배신을 대비한다.
- 이러한 대비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이 더 선명하게 밝혀진다.
12-17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서로 발 씻기를 요청 - 모범
예수님은 다시 식사 자리로 돌아오신다.(12) 그리고 '발 씻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가르침의 핵심은 '모범'이다.
- '발 씻기'는 단순히 예수님께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 서로 주고 받도록 하기 위해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 가르침의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다.(13)
- 자신을 제자의 선생 혹은 주라고 칭하신다.
- 이는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자들보다 윗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16)
예수님의 논리는 이렇다.
- 대전제: '발 씻기'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보다 아랫사람끼리 하는 것이 더 쉽다.
- 소전제: 그런데 나는 윗사람으로서 더 어려운 모범을 보였다.
- 결론: 따라서 너희 아랫사람들끼리 더 쉬운 '발 씻기'를 해야 한다.
말했듯이, 서로 발 씻으라는 요청은, 정말 발만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라는 뜻이다.
- 이러한 성도 간의 교제, 사랑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발 씻기'를 통해 1차 모범을 보이신 것이고, 또 다시 십자가에서 2차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너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만약 내가 상대방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서 다 준다면, 난 뭐 먹고 살라는 것인가?
- 굶어 죽으라는 것인가?
만약 열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전 재산을 팔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받아 먹기만 하면, 실제로 굶어 죽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는데, 제자들은 받아 먹기만 하고 제 목숨 챙기려 다 도망갔다.
-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예수님은 홀로 죽으신다.
하지만, 나머지 아홉 명도 전부 다 전 재산을 팔면, 열 명이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다.
- 아무도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다.
- 이것이 교회이고,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 천국은 이런 곳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열 명 중에 딱 한 사람만 배신해서 재산을 숨기면, 그 공동체는 순식간에 와해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이미 예전에 게임 이론으로 설명했었다.
- 신뢰 관계는 모두가 전적으로 서로를 신뢰할 때에만 가능하며, 딱 한 사람만 신뢰를 포기하고 더 큰 이익을 얻으려하면, 순식간에 모든 구성원이 신뢰를 포기한다.
- 신뢰 관계는 그만큼 불안정한 것이다.
- 그 결과 신뢰 관계에서는 모두가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었는데, 불신 관계에서는 아무도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열 명중에 한 사람이라도 헌신하는 것도 어려운데, 열명이 모두 헌신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능케 하신다는 것이다.
- 그것을 믿고 우리는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예수님의 모범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가 더 있다.
- 예수님의 모범 따라 다른 사람 '발 씻기'에 순종하면, 예수님의 모범 따라 배신당한다는 것이다.
- 예수님도 모두 함께 서로 '발 씻기' 해주는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 그러니 우리도 그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 예수님의 모범 따라 기대 없이, 배신당할 것 알면서도, 우리의 전 재산을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반전이 있다.
- 예수님은 배신을 당하셨지만,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는 보상을 받으셨다. 삼위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서로 '발 씻기'를 반복해서 하고 계신다.
- 이와 마찬가지로, 배신당할 것을 알면서도 전 재산을 판 사람만이 종말 후에 참 공동체를 갖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즉, 구원 받아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 반대로 배신이 두려워 자기 재산 챙긴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잘 살지 몰라도, 종말 후에 공동체가 없는 지옥에서 영원토록 배신당하며 살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다음 세 가지이다.
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서로에게 헌신해야 한다.
② 하지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헌신해도 배신만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해야 한다.
③ 그러나 그렇게 헌신과 배신을 반복해서 당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종말에 참 공동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천국이며 구원이다.
④ 반대로 배신이 두려워 헌신하지 않은 사람은, 종말에 참 공동체에서 배제될 것이다. 그곳이 지옥이다.
정말 너무 어려운 것이다.
- 배신할 사람을 사랑하고, 배신 당하면서 사랑하고, 배신했던 사람을 또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아마 예수님도 이것 때문에 괴로워하셨던 것 같다.
[요 13: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마음이 괴로우셔서, 환히 드러내어 말씀하셨다.
하지만 해야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
- 이것을 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고,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하도록 만드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끌어 당기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8-20절: 점차 구체화되는 배신자의 행보
이렇게 절절한 예수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과정에서도, 배신자는 계획을 계속해서 이뤄가고 있다.
- 예수님은 사랑하고, 헌신하시지만, 배신당하신다.
이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결국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예수님의 배신당하심은 구약에 예언되어 있기 떄문이다.
- 유다를 통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명하신다.(18)
-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19)
마지막으로 자신과 동일한 배신을 당할 제자들을 격려하신다.(20)
- 내가 보내는 사람, 즉 제자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 즉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고,
-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 즉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실 반대 상황을 염두한 것으로 보인다.
- 사람들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배신할 것인데,
- 그들의 실상은,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배신당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 우리가 배신당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우리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문제기 때문이다.
-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배신했기 때문이다.
주제
① 사랑 - 가장 추한 일을 하는 것
'발 씻기'와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희생 행위 그 이상이다.
- 이 안에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할 수 있는 모든 행위가 전부 담겨있는 것이다.
- 그 만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죽음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을만큼 크다.
이 사랑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십자가가 중요한 이유도, 십자가에서 사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랑이 죄 용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중요하다.
- 죄 용서 조차도 사랑에 비교하면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면, 그리고 그 사랑을 맛보면, 그 사랑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렇다.
- 사람은 그렇게 지어졌다.(사람은 그렇게 진화하였다.)
- 사랑을 느낄 때, 가장 만족하도록 생겨먹었다.
- 사랑의 관계 안에서만 자기 정체성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 돈, 명예, 권력, 힘을 얻으려는 이유도 결국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 사람은 사랑을 위해서 불편, 고통, 아픔, 슬픔, 비굴, 모욕 등을 다 견딜 수 있다.
- 바리새인이 율법을 지킨 것도,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율법이라는 불편을 감수하 것이다.
- 사람에게 사랑의 관계가 유일한 생명이다. 이게 없으면 병든다.
- 그렇게 사랑에 목말라서, 더 큰 사랑을 구걸하며 사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인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하고, 순수하며, 영원한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께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 예수님을 사랑하는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
-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지 못해서이다.
왜냐?
-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왜냐?
- 한 마디로, 속고만 살았기 때문이다.
-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거래하는 사람들만 봤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사랑처럼 완전무결한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도 거래라고 오해한 것이다.
- 예수님이 큰 사랑을 주시는 이유는 나에게 뭔가를 빼앗아 가기 위해서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두려워했던 이유도 이것이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만원 주고 십만원 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깡패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십만원 주고 십만원 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장사꾼이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백만원 주고 십만원 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성인이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1조 주고 1원 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사랑이다.
-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 하지만 바리새인은 1조를 주시는 예수님이 1조를 빼앗아가시는 장사꾼이라고 오해한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② 구속 - 사랑은 관계를 갖는 것
구속은 사랑의 방법 혹은 수단이다. 부차적인 것이다.
- 죄 문제는 언듯 중요해 보이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아니다.
구속의 예를 들면, 정말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을 때, 이전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 연락처도 지우고, 팔로우도 끊고, 생각도 안하고, 마음도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관계 정리가 중요한가?
- 이전 관계를 정리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연인에 대한 배신이다.
- 무존건, 반드시, 꼭 해야 할 엄청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전 관계 정리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가?
- 새로운 연인에게 사랑을 느끼면, 이전 연인에 대한 마음은 자연히 사라진다.
- 마음이 사라지면, 물리적인 관계는 더 자연히 사라진다.
- 만약 이것이 안된다면, 새로운 연인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죄 용서는 마치 이런 것이다.
- 중요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고 쉽게 이뤄지는 것이라서, 사소한 것이 된다.
- 반대로, 죄 용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 그럴 때는 죄 용서에 집중하기보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데 더 집중을 해야 한다.
따라서 죄 용서는 절대로 신앙의 본질이 될 수 없다.
- 본질은 사랑이다. 죄 용서는 사랑을 깨닫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③ 모범 - 예수님의 일생과 동일하게 사는 것
모범도 수단이다.
- 사랑하면,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 그러면,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같은 인생을 살면, 같은 행복과 같은 불행을 겪게 된다.
-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된다.
- 그러한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
- 반면에, 그러다가 배신도 당하게 된다.
- 그러면서 예수님과 같이 굴욕적인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 그렇게 예수님처럼 살다가 죽으면, 구원 받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려하지 않고 따라하려고만 하면, 절대로 할 수 없다.
- 할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지친다.
- 지치면 예수님을 원망한다.
- 그것이 우리 부모님 세대 부부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 우리 인생을 예상하는데 필요하다.
- 예상치 못한 배신을 당하면 절망하지만, 예상된 배신을 당하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
- 우리 인생을 점검하는데 필요하다.
- 우리 인생에 예수님처럼 헌신과 배신이 있으면 바르지만, 없다면 신앙을 되돌아 봐야 한다.
- 헌신과 배신이 있는데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신앙을 되돌아 봐야 한다.
- 아마도 예수님과의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
결국 사랑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것이다.
- 사랑 앞에 십자가 죽음도 수단으로 전락한다.
- 십자가 죽음을 수단으로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를 깨닫는 것이다.
-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셨기 때문에 다양한 표현 방법 중에 하나로서 죽으신 것이다.
- 예수님이 날 위해 죽었구나'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별로 의미 없다.
- 죽음이라는 작은 '창문' 안에 있는 거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랑을 알지 못하면, 죄 용서의 기쁨, 예수님처럼 사는 것 모두 아무 의미 없다.
- 사랑을 모르면, 죄 용서는 자기 위로, 자기 사랑의 수단일 뿐이다.
-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율법주의와 다르지 않다. 실패한 인생의 합리화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을 알면, 죄 용서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은 자연히 이뤄진다.
-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 죄로부터 멀어지려 노력하고, 예수님처럼 헌신하고 배신당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예수님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의 사랑을 알자!는 것이다.
- 이것이 구원이고 생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