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13) 7:17~24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의 참뜻

안승준 2025. 2. 15. 23:13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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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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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에게 진정한 자유를 제시한다.

- 율법과 신분에서 자유를 선포한다.

- 할례의 유무, 신분의 고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할 필요 없다.

- 없는 할례를 만들 필요도 없고, 있는 할례를 없앨 필요도 없다.

- 낮은 신분을 높일 필요도 없고, 높은 신분을 낮출 필요도 없다.

그러니 부르심을 받은 그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

-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고전 7:17] 각 사람은, 주님께서 나누어주신 분수 그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그대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내가 모든 교회에서 명하는 지시입니다.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고전 7:24] 형제자매 여러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까?

- 당시 고린도 교회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 할례, 신분을 비롯하여, 특히 결혼 유무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중요하다고 말했다.

- 결혼 전인 사람은 물론이고, 이미 결혼한 사람마저 이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 이를 지난 본문에서 자세하게 다뤘다.

[고전 7:1] 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를 두고 말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이 염려에 빠져 살았다.

- 결혼했는데, 이혼해야 하나?

- 결혼하고 싶은데, 하지 말아야 하나?

-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 할례를 없애야 하나? 할례를 받아야 하나?

- 노예에서 벗어나야 하나? 다시 노예로 돌아가야 하나?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염려에서 벗어나도록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 염려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이다.

- 결혼 유무, 할례 유무, 신분 고하는 신앙과 아무 상관 없다고 전하는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은 부르심 받은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말한다.

[고전 7:32] 나는 여러분이 염려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있으라.’고 말한 바울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으면 돼.’가 아니다.

-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만 있어야 해.’도 아니다.

- 오히려 ‘아무것도 억지로 할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이다.

- ‘많은 사람이 거룩해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는데, 전부 쓸모없어.

- 거룩해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믿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뿐이야.

-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이다.

바울의 이런 말에는 이런 전제가 있다.

- 왜 많은 사람이 거룩해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는가?

- 이원론에 입각한 가치 추구 때문이다.

- 독신이 더 의롭다거나, 무할례가 더 의롭다거나, 자유인이 더 의롭다고 주장했다.

- 마치 지금도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사랑하시나 봐.’

- 혹은 ‘시험에 합격하고 원하는 것이 이뤄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축복하시나 봐.’와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전제는 완전히 틀렸다.

- 결혼, 할례, 신분뿐만 아니라, 돈과 성취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수단일 수 없다.

- 노예보다 자유인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받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 거지보다 부자라고 해서 하나님께 더 사랑받은 사람이 아니다.

- 돈의 유무는 신앙과 아무 상관 없다.

그렇다면 신앙과 상관있는 것은 무엇인가?

- 한 사람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 오직 믿음이다.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본문을 반대로 해석한다.

- 바울의 말을 거룩해지기 위한 새로운 조건으로 이해한다.

-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 ‘반드시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 바울의 의도는 현실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과 관계에만 집중하라는 뜻인데,

- 하나님이 아닌 현실 상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오해한다.

-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이 거룩한 것이라는 새로운 율법주의에 빠진다.

- 이는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사건의 망언이 떠오르게 한다.

특히 같은 말을 권력자가 노예에게 할 때 부작용이 심각하다.

- “너희 노예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려면, 노예 그대로 살아야 해.

- 자유인이 되려는 것은 너희의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아.

- 그러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내 명령에 잘 복종해.

- 명령에 복종하며 노예로 사는 것이 하나님 뜻이야.”라며 

- 권력자의 착취와 폭력을 합리화한다.

 

이런 예가 실제로 있었다.

- 미국의 많은 교회에서 성경을 근거로 흑인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

- 하나님이 흑인을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가게 하셨기 때문에,

- 노예를 해방하는 것은 성경에 반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일이 직장 생활에서 많이 일어난다.

- 직장 상사가 불의한 일을 시킬 때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할까, 나와야 할까?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리라고 믿고 그대로 있어야 할까?

- 아니면 믿음으로 불의를 거절하고 직장에서 나와야 할까?

- 많은 사람이 본문을 근거로 그대로 있으라는 조언을 한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그것과 다르다.

- 바울은 필요에 따라 노예 해방을 위해 힘썼다.

- 노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만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간청한다.

- 빌레몬의 노예였지만 도망쳐 나와 바울을 만나게 된 오네시모를 해방해달라고 말이다.

-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바울의 충실한 일꾼이 되었다.

-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싶었다.

- 그것을 위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에 대한 용서와 자유를 구한다.

[몬 1:10]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에게 ‘부르심 받은 그대로’는 무슨 뜻일까?

- 이렇게 바울의 말이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며 본문을 보자.

 

17~20절: 할례의 부르심 받은 그대로

바울은 그대로 살라고 말한다.

- 할례를 지우려 하지도 말고, 할례를 받으려 하지도 말라고 말이다.

- 일단 그것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대로 살기만 하면 충분한가?

- 혹은 할례를 지우거나 받는 것은 나쁜 것인가?

- 바울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라는 말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 여기까지 질문해야 바울의 의도에 도달할 수 있다.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 하나이다.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할례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할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 할례에 시선이 돌아가서 하나님께 소홀해진 상태를 비판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 사랑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고전 7:19] 할례를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하나님만 절대 가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이라는 것이다.

- 풀어 말하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맺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고,

- 그 외에 할례, 율법, 예배, 봉사, 선행, 구제, 전도, 선교, 사역, 직장, 가족, 건강, 부귀, 명예 등 세상 모든 것은 필요 없는 것을 넘어 악하고 해롭다는 뜻이다.

- 세상 모든 것이 무조건 악하다기보다, 

- 하나님 외의 것이 조금이라도 가치를 갖는 순간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위협하기 때문에 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최우선 가치’라고 아무리 주장하더라도, 

- 할례도 조금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하나님의 절대성이 훼손된다.

- 물론 여전히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이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는 순간 할례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상의 가치가 지위를 갖게 된다.

- 그러면 사람은 세상의 가치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 여전히 하나님을 최고의 지위에 둔 상태로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절대 가치, 독보적 지위가 중요하다.

- 상대적 최고의 가치는 아무 소용 없다.

-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에는 실낱같은 가치도 부여하면 안 된다.

- 이것이 신앙이다.

 

더 쉬운 예로, 결혼이란 배우자에게 상대적으로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 절대적, 독보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 배우자 외에 누구와도 성적 관계를 맺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만약 배우자에게 최고의 지위가 있지만,

- 다른 사람에게 배우자로서 미약하게나마 작은 지위를 부여한다면,

- 그래서 배우자로서 대부분의 권리가 첫째 배우자에게 있지만,

- 일 년 중 딱 하루 혹은 그 하루 중 딱 한 시간만 배우자의 권리가 둘째 배우자에게 부여된다면,

- 그래서 아주 잠깐이라도 둘째 배우자와 성적 관계를 맺으면,

- 그것을 우리는 외도라고 부른다.

- 따라서 결혼은 배우자에게 절대 가치, 독보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 상대적 최고 지위는 아무 소용 없다.

-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에게 실낱같은 지위도 부여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배우자 외에는 아무도 만나면 안 된다는 뜻인가?

- 직장도 가지 말고, 친구도 만나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뜻인가?

- 결혼이 그런 것인가?

- 아니다. 누구나 만날 수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그러나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는 목적이 성적인 이유라면, 아무것도 안 된다.

- 성적인 이유라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것도 안 되고, 같이 길을 걷는 것도 안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 할례, 율법, 예배, 봉사, 선행, 구제, 전도, 선교 전부 하면 안 되는가?

- 특히 돈을 절대로 벌면 안 되는가?

-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하는 것이 신앙 생활인가?

- 아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단, 행위의 목적이 하나님을 절대 가치로 삼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행위가 독자적인 가치를 갖고, 행위 자체가 구원을 준다는 인식에서는 안 된다.

- 예배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이고,

-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수단으로 예배를 이용하는 것은 좋다.

- 그러나 예배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 구원받기 위한 행위라면 안 된다.

 

‘부르심 받은 그대로’의 숨은 뜻

바울이 할례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 할례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소중한 수단이었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변질되었다.

- 고린도 교회 중 일부는 할례가 의로움의 상징이며, 할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준다고 믿었다.

- 동시에 또 일부는 할례가 부정함의 상징이며, 할례를 지워야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다.

이들 모두 할례에 가치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 절대 가치를 훼손했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 구원자라는 것을 부정했다.

- 하나님이 최고의 창조주, 구원자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 할례도 조금은 구원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 할례는 믿음을 고백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 할례 행위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더 정확하게, 어떤 가치도 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 그래야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 따라서 할례가 있든 없든 상관 없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면서 모든 관심과 초점을 하나님께만 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라고 표현했지만,

- 그대로 머무는 것은 바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 모든 관심과 초점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 숨겨진 바울의 의도를 읽어내야 한다.

[고전 7:20]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고린도 교회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바울의 말에 가치를 부여한다.

- 그대로 머물러 있는 행위 자체가 의로움의 상징이며 구원을 준다고 착각한다.

-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자신을 자랑하며,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은 타인을 정죄한다.

- 그것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태도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따라서 그대로 머물기만 한다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 그대로 머물기는 하나님께 간절하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준비 행위일 때만 의미가 있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이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신앙 고백이고, 그 고백과 일치하는 삶이다.

- 그대로 머물기는 그러한 삶을 위한 수단일 때만 의미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는 신앙을 위해 그대로 머물기가 아니라 바꾸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 굳이 할례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신분을 바꿔야 할 때가 있다.

- 바울도 디모데를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기 전에 할례를 행했다.

[행 16:3]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동기이다.

- 바울이 왜 할례를 행했는가?

- 할례 행위 자체가 구원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 할례가 전도를 원활하게 할 것이라는 합리적 판단 때문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할례를 이용했다.

- 할례를 받았냐 받지 않았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중요하다.

- 이렇게 바울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지켰다.

 

그 맥락에서 예배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 예배 행위, 예배 형식, 예배 장소, 예배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

- 독립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

-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수단으로만 가치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더 잘 담을 수 있는 예배 형식을 고민해야 한다.

- 그리고 그것을 위해 아무리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이라 하더라도 파괴할 수 있다.

-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 예배 자체가 구원을 주지 않는다.

- 예배가 구원을 준다고 착각할 바에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이 낫다.

- 할례, 율법, 예배, 봉사, 선행, 구제, 전도, 선교 전부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말한 바울의 의도이다.

 

21~24절: 신분의 부르심 받은 그대로

본문은 신분 제도를 인정하며 노예 신분에 순응하라는 뜻이 아니다.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노예 신분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현실에 무작정 안주하여 수동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바울은 노예에게 자유를 독려한다.

- 자유의 기회를 이용하라고 말한다.

[고전 7:21] ・・・・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이용하십시오.

또 그렇다고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도 아니다.

- 신분 상승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정리하면, 바울은 신분에 대해 오락가락 말한다.

- 노예 상태에 그대로 머물라고 하고,

- 반대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으라고 한다.

- 신분 제도를 인정하는 동시에 신분 제도를 부정한다.

이를 통해 드러내는 바울의 의도는 명확하다.

- 신분 제도를 초월하라는 것이다.

- 신분 제도 역시 세상이 만든 가치 기준 중 하나이다.

- 신분 제도에 순응하거나 저항하는 것 모두 신분 제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 따라서 신분 제도는 아무런 가치도 영향력도 없으니, 오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 만약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으면, 신분 제도를 부정하고 노예를 벗어나 자유인이 되고,

- 반대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으면, 신분 제도를 인정하고 노예 그대로 머물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노예와 자유인의 경계를 허문다.

- 노예는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고,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말이다.

- 이는 노예와 자유인을 구분하는 신분 제도에서 벗어나

-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라는 뜻이다.

[고전 7:22] 주님 안에서 노예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또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고전 7:23]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 이 역시 같은 뜻이다.

-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신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께만 영향받는 사람이며,

-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 하나님만을 절대 가치로 여기며, 다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람의 노예’, 즉 신분 제도와 같이 사람이 만든 가치 체계에 영향받지 말라고 한다.

- 하나님 외의 세상 어떤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바울은 ‘부르심 받은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 노예 그대로 살 수도 있고,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 수도 있다.

- 사람이 만든 세상의 가치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말고,

- 오직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맺는 것만을 위해 살라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그대로 두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다.

-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에 이용당하지 말고 이용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신분 제도도 이용하고, 할례도 이용하라는 것이다.

 

결론 - 고린도 교회와 같은 우리의 현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의 현실은 세상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 사람의 노예, 신분 제도의 노예가 되었다.

- 그래서 신분 제도의 영향을 받아서, 노예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했다.

- 하나님의 영향력보다 신분 제도의 영향력을 더 크게 평가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을 향해야 할 시선이 신분 제도로 쏠렸다.

- 그래서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 자유인이 되어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 그 결과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부정했다.

 

우리의 처지도 이와 같다.

-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 학벌, 외모, 돈, 직업, 인맥, 경험, 부동산, 자동차 등 세상에서 인정받는 기준이 있다.

- 그 기준을 넘기 위해, 더 높은 기준으로 올라서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왜 그러는가?

- 그래야 합당한 사람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 많은 것을 가졌지만 외모가 부족한 사람은 돈을 쏟아부어 성형 수술을 한다.

- 많은 것을 가졌지만 돈이 부족한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다.

- 그래야 합당한 사람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낙오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

- 외모가 부족한 채로, 돈이 부족한 채로 그대로 살아라!

-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런 노력하는 대신에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두라.

- 하나님만 절대 가치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절대 오물로 여겨라.

-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인정하라.

- 그것만이 바른 신앙이고,

- 그런 신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 그렇게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때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고,

- 그렇게 자신을 사랑할 때만 염려 없이 평안과 기쁨 속에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 외모도 가꾸지 말고, 돈도 벌지 말라는 것인가?

이러한 반문 역시 고린고 교회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 그대로 머물라는 바울의 말을 듣고 그대로 머물기만 하려는 것이다.

- 새로운 율법을 찾아 율법주의에 빠지려는 것이다.

- 세상의 가치를 인정하여 하나님의 독보적 지위를 부정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그대로 머물기는 그것을 위한 준비 과정, 보조 단계일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은 무엇인가?

- 하나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지만, 하나만 말하면,

- 하나님을 절대 가치이고, 나머지 전부를 절대 오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기억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넘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귀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 이 믿음 안에서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사람의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킬까?

-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르심 받은 그대로 머물 때 사람은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 염려 없이, 낙오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없이 고요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 그럴 때만 잡음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할 수 있고,

-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으며,

- 자기 마음도 공감할 수 있다.

그렇게 공감할 때 진정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다.

- 두려움에 쫓겨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 사랑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달려갈 수 있다.

- 그것만이 바른 신앙이고 바른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