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 모든 말과 행동의 패턴에는 내 가치가 담겨있다.
그 가치는 우선순위가 있고, 내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그 숨겨진 가치에 따라 움직인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답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가치여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떤 사람은 ‘돈’,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 , 또는 ‘안정된 삶’ 등의 가치를 마음에 숨기고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가치는 평소에는 문제로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에게 ‘1.사람들의 인정 2.예수님’ 이라는 가치가 있다고 하자. 그래도 ‘예수님’이 2번이라는 상위 가치이기 때문에 1번인 ‘사람들의 인정’이 건드려지지 않는 한 나는 둘 다를 가치 있게 여기며 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1번 가치와 2번 가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내 삶에 찾아오면, 나는 더 우위의 가치인 1번 가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2번인 예수님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그로써 내게 1번 가치가 있음이 드러난다.
이해를 위해 나의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 중요했다. 아니, 인정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인정을 못 받을까봐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겠다. 예수님이 아닌 1번가치는 단순히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생명’이고 ‘삶의 원동력’이다. 그것을 위해 살고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나에게는 ‘사람들의 인정’이 그랬다. 유년시절의 어떤 경험이나 사건들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람들의 인정을 못 받는 것(다른 말로 누군가에게 욕먹는 것)이 두려워 그 힘으로 삶을 산 것 같다. 그런데 평소에는 1번인 인정과 2번인 예수님이라는 가치가 부딪칠 일이 없었다. 둘 다 가지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자청년에게 하셨던 것처럼 두 가치 중 하나를 포기해야하는 상황을 반드시 우리 삶에 주신다. 나에게도 여러 번 두 가지 가치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번은 아이를 키우면서 찾아왔다.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 중요했고, 내가 인정을 받기 가장 쉬운 분야는 내 ‘일’이었다. 일을 좋아했고, 일에 자신이 있었고, 일에서 인정을 받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고서 일할 시간이 줄자 많이 힘들었다. 아이가 크면 다시 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을 못하는 시간을 버텼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가 기관에 못가게 되는 상황이 생기면서부터였다. 아이가 크면 당연히 기관에 보내고, 그럼 나에게도 일할 시간이 다시 생기겠지? 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아이가 기관에 못 가게 되는 상황이 생기자 마음이 어려워졌다. 일을 포기할 것인가? 아이를 포기할 것인가? 두 가지 중 선택을 해야 했다.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은 안한다는 것은 아니라 일 시간이 많이 줄어든다는 것이었고,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이를 매정하게 어떻게든 기관에 다시 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포기할 순 없었다.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을 조금 포기했고, 아이와 시간을 더 많이 보내게 되었다. 사실 처음에는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내 인생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에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내 예상과는 많이, 아주 많이 달랐다.
나는 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부족한 엄마였다. 아이보다 내 삶이 더 중요했다. 아이를 사랑한다는게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책임감으로 아이를 키웠던 것 같다. 아이를 낳고 남편과도 육아 문제로 갈등이 많았다. 문제는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의 사랑 없음과 이기적인 마음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반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을 정하고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되니, 점점 더 아이와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이의 말을 더 잘 듣게 되고, 아이의 관심사를 공유하게 되고, 아이의 웃음 포인트도 알게 되고, 그렇게 아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아이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와 관계가 좋아지니 남편과도 갈등이 없어졌다. 또, 아이와 시간을 더 보내면 일도 많이 못할 줄 알았지만, 남편이 시간을 더 내주어 남편과 반반 육아를 하게 되면서 일할 시간도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생겼다. 일도 있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 하고, 육아 하는 시간에는 육아에 집중하며, 내 삶도 더 규칙적이고 짜임새 있어졌다. 결국, 나는 ‘일’과 ‘아이 사랑’중에 아이 사랑을 선택했지만, 일도, 아이도 규칙적이고 효율적인 삶도, 남편과의 관계도, 다 오히려 좋아졌다.
하지만 내가 그 선택의 순간에 있을 때, 나는 나에게 예수님(사랑)외의 ‘일(인정)’이라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냥 나에게 인정이 중요하다 정도만 생각했지, 이것이 나에게 예수님을 위협할 만큼 중요한 가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들을 겪으며 나중에 내가 그런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또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럼 삶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랑(관계)’를 선택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사랑’도 ‘관계’도 예수님 외의 가치가 아니냐? 라고 말이다.(사실 내가 이전에 이렇게 질문했었다.) 그런데 내가 내린 결론은 사랑(관계)는 예수님 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분리해 생각 할 수가 없다. 이전에도 글을 썼듯이 나는 예수님 없이는 사랑이 한 톨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 없이 진짜 사랑을 진짜 관계를 찾는다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반드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사람들과 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삶에서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진짜 사랑을 하려는 선택을 하는 것이고,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는 선택을 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위에 든 예에서도 예수님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랑(혹은 관계)’를 선택하냐, ‘일(사람들의 인정)’을 선택하냐? 만 이야기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선택,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는 선택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처럼 다른 사람에게 인정 받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사랑과 관계를 위한 선택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돈 버는 것을 조금 포기하는 것이 사랑과 관계를 위한 선택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진짜 사랑과 관계를 위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에게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관계와 사랑을 얻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이냐? 묻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다.
1.당신은 당신을, 그리고 당신과 가까운 주변 사람을 더 사랑하기 위한 선택을 하며 살고 있나요? 그것이 정말 상대방을 더 사랑하기 위한 선택일까요?
2.당신은 겉보기에 좋은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선택을 하고 있나요? 겉으로 하하호호 하는 관계가 아닌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3.혹시 다른 무언가를 위해 그 관계를 잠시 미뤄두거나 희생하고 있지는 않나요? 희생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무언가는 관계를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반대로 나에게 누군가가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1. 항상 사랑만을 위해 선택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의 내가 정말 부끄럽고, 정말로 사랑만 하는 선택을 하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사랑(예수님)외에 남아있는 가치들은, 모두 알게 되고 없어지길 정말로 원합니다. 내가 정말 상대방을 더 사랑하기 위한 선택을 하는지는 다 알지 못하지만 사랑인줄 알았던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빨리 돌이켜 다시 새로운 방법으로 사랑하게 되길 원합니다.
2. 이전에는 ‘사람들의 인정’을 잃을까봐 두려워 진정한 관계를 맺는 선택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사랑을 알게 되고나니 ‘진정한 관계’를 정말 원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인정을 못받더라도 진정한 관계를 선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작은 마음의 변화가 제 삶에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사랑(관계)를 선택하는 경험들이 제 삶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남편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 관계가 너무 소중합니다. 바램은 이렇게 마음을, 예수님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관계가 더 많아지길, 소망합니다.
3. 이전에는 말할 것도 없이 많이 그랬고, 지금도 그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관계가 가장 소중하단 걸 알고 있고, 그렇지 못한 제가 느껴졌을 때 부끄럽습니다.
나는 언젠가 세상 떠나는 날 다른 건 몰라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랑하는 삶’, ‘진정한 관계를 맺는 삶’이고, 그건 단순히 ‘사랑’하는 삶이라고 표현되니 너무나도 단순하고 쉬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쉬운 개념임에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적다는 점에서 어려운! 그런 삶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