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06) 3:10~23 또 다른 기초를 놓은 고린도 교회

안승준 2024. 11. 2. 22:3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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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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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오랫동안 오염되었다.

- 바울의 의도와 반대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바울은 정죄하려고 기록했다.

- 고린도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은 죄를 지적한다.

- 그들은 예수님을 아예 버리고 새로운 기초를 놓은 것이 아니라,

- 예수님과 ‘함께’ 또 다른 기초를 놓았다.

- 그것은 세상의 지혜였다.

[고전 3: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그렇게 평가한 기준은 ‘업적’이다.

- 고린도 교회는 분열하고 있고, 

- 그것이 바로 예수님 외에 또 다른 기초를 놓았다는 증거이다.

[고전 3:3]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고전 3:13]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하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는 단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것이다.

- 고린도 교회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기초를 쌓고 있다.

-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지만, 

- 은근슬쩍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가치를 추구한다.

우리는 착각한다.

-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기에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 예수님을 믿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그러나 바울은 우리를 고발한다.

- 관건은 예수님이 아니라고.

- 귀신마저도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약 2:19]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 즉, 예수님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으로 믿음을 확증할 수 없다.

믿음은 예수님‘만’ 인정할 때 확증된다.

- 예수님을 믿는 것과 함께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믿지 않을 때만 확증된다.

- 그것만이 예수님을 절대자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 절대자이기에 존재론적으로 나머지 모든 가치를 부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 예수님 외에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 예수님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돈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 예수님 믿으면, 명예도, 건강도, 사회적 지위도, 사람과 관계도, 정서적 평안도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바울은 이런 우리를 정죄한다.

- 그것은 전부 예수님 외에 놓은 기초라고.

- 전부 불에 타 없어질 것이라고.

[고전 3:13]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본문이 곡해된 현실 - 믿음 없음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본문을 반대로 해석했다.

- 정죄를 부정하지 않지만, 그 사이에 회복 메시지를 욱여넣는다.

- 예수님 외에 쌓은 다른 기초는 불 시험에 타버리지만,

- 자신은 불 시험에도 그대로 남아 상을 받을 것이라고.

[고전 3:14]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또한 자신에게 성령이 거하시기에, 자신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 그렇기에 자신은 거룩하다고 자부한다.

[고전 3:16~17]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경고하며 정죄하는 본문을 왜곡하여 자신은 거룩하다는 결론을 맺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 왜 바울의 의도를 곡해할까?

- 단순히 곡해하는 것을 넘어, 바울의 의도와 정반대로 해석할까?

- 어떻게 정죄 메시지에서 구원 메시지를 발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은 어리석다.

- 이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와 같은 질문이다.

-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원인은 믿음 없음이기 때문이다.

-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죄를 모르고,

-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며,

-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에 정죄 메시지에는 눈이 가려지고 구원 메시지만 보인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 원래 예수님은 믿기 어려운 존재이다.

- 십자가에 달려 죽은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따라서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가? 왜 바울의 의도를 곡해할까?’는 바른 질문이 아니다.

- 마치 ‘왜 산은 높은가? 왜 물은 흐르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 오히려 ‘왜 높아야 할 산이 낮아졌는가? 왜 흘려야 할 물이 멈춰있는가?’가 더 바른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왜 예수님을 믿는가? 왜 바울의 의도를 이해할까?’가 더 바른 질문이다.

- 그 질문을 통해 거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 바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왜 예수님을 믿는가?

- 본문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은 유일한 기초이며, 나머지 모든 기초를 부정하고 파괴하신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바울을 지지하는 논리도 파괴하고, 아볼로를 지지하는 논리도 파괴한다.

이를 현시대로 가져오면, 돈이 중요하다는 논리도 파괴한다.

- 돈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정한다.

-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 외에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 - 공감

그런데 그런 믿음이 왜 필요한가?

- 우리가 어떤 가치를 인정하면, 그 가치 체계 전체를 인정하게 되고,

- 그 체계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다.

- 그래서 자신이 상위에 혹은 하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 돈의 가치를 인정하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부자 혹은 거지로 인식한다.

- 또는 자신을 부자인 동시에 거지로 인식한다.

- 자기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거지로, 더 적은 돈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부자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사람을 반드시 불행하게 만든다.

- 자신을 거지로 인식한 사람은 자신을 가치 없다고 여겨서 불행하고,

- 자신을 부자로 인식한 사람 역시 자신이 가치 있다는 것을 함께 공유하고 기뻐할 사람이 없어서 불행하다.

- 어떤 부자든 자기보다 아래 사람에게는 부러움의 대상, 윗사람에게는 무시의 대상일 뿐이다.

- 누구와도 공감하고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돈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은 두 가지 양 극단으로 반응한다.

- 첫째로, 무시의 대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욱 부자가 되려 한다.

- 더욱 부자가 되면, 그래서 더욱 상위로 올라가면, 자기를 무시할 대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 그러면 무시당할 가능성이 줄기 때문이다.

둘째로, 부러움의 대상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 그것을 위해 무소유를 추구하며 가난해지려 한다.

- 더욱 가난해지면, 그래서 하위로 내려가면, 자기를 부러워할 대상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 무시당하지 않고, 부러움 받지 않아서, 자기를 공감해 줄 사람을 늘리려는 것이다.

-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사람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

- 자기를 억지로 증명할 필요 없는 그런 관계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린다.

- 그 안식 안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한다.

그것을 위해 사람은 돈을 벌거나 돈을 포기하는 것이다.

- 궁극적으로, 그것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반응이 성공하려면, 

- 부자가 되거나 무소유를 실천했을 때, 정말로 무시하거나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

- 실제로 주변에 있는 부자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 더욱 부자가 되면, 이전보다 더욱 부자인 사람과 접촉하게 되고,

- 그러면 그들에게 똑같이 무시당한다.

- 무소유를 실천하여 더욱 가난하게 되면, 이전보다 더욱 가난한 사람과 접촉하게 되고,

- 그러면 똑같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다른 가난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무능력해서 가난해진 것이지만,

- 자신은 능력이 있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가난해졌다는 명예까지 덧입혀져서,

-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부자에게까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선택은 무시와 부러움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안 된다.

-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공감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도, 미약한 호흡 외에 모든 것을 잃어도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식이다.

-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실패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공감받는 법 - 가치 체계에서 벗어남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가?

- 부자가 되는 것도,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돈의 가치 체계 안에서는 방법이 없다.

- 돈을 더 많이 얻어도, 더 많이 버려도 소용없다.

- 마치 늪에 빠지면 몸부림칠수록 더욱 빨리 가라앉는 것처럼 가치 체계 안에서 노력할수록 더욱 소외된다.

 

가치 체계 밖으로 나와야 한다.

- 돈에 대한 비교우위와 비교열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 돈이라는 가치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 돈은 무조건 나쁘다고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 이것 역시 돈의 가치 체계 안에 있는 것이다.

돈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좋은 가치도 나쁜 가치 없는 것,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 마치 길가에 보이지도 않는 들풀과 같이 말이다.

- 들풀은 감동을 주지도 않지만, 불쾌감을 주지도 않는다.

- 또한 들풀이 있어도 없어도 더 좋지도 않고 더 나쁘지도 않다.

-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

- 돈을 그렇게 인식해야 한다.

 

가치 체계에서 벗어남에 대한 오해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오해한다.

- 돈에 영향받지 않으려면, 무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돈이 있으면 욕심이 생기고,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불교는 무소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반대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 돈에 영향받지 않으려면, ‘경제적 자유’를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

- 경제적 자유란, 돈이 돈을 벌도록 하여 노동에서 해방되는 자유이다.

-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통해 노동하지 않아도 매달 일정 수익이 보장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소유도 경제적 자유도 돈의 가치 체계 안에 있다.

- 가치 체계 안에 있으면, 비교우위와 비교열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돈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여전히 돈에 종속된 상태이다.

- 무소유는 돈이 적은 것을 높은 가치로, 부자는 돈이 많은 것을 높은 가치로 두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오해도 있다.

- 돈의 가치 체계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 그들은 실제로 돈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 돈을 좋게도 나쁘게도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돈 외에 다른 가치 체계 안에 있다.

- 돈과 같이 세속적인 가치 체계에서 벗어났지만, 무형의 가치 체계에 속한다.

- 구제, 봉사, 기부의 가치 체계를 추구해서, 평생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자랑한다.

- 신념의 가치 체계를 추구해서, 자신이 성취한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 체제를 자랑한다.

 

그중에 가장 지독한 사람은 종교의 가치 체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 자신이 믿는 종교 체계 안에서 성취한 의로움을 자랑한다.

- 이런 사람들은 자기 종교 안에서 칭송받는다.

- 때로는 종교 밖에서까지 존경받는다.

- 마치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 역시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돈에서 벗어났을 뿐, 새로운 가치 체계 안에 갇혀 있다.

- 여전히 가치 체계에 영향받는다.

그래서 결국 무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진정으로 공감받을 수 없다.

- 평안과 안식이 없고, 진정한 자기를 발견할 수 없다.

 

가치 체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 -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어떤 가치 체계에도 갇히지 않고 자유로울 방법은?

-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 예수 그리스도만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뿐이다.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것뿐이다.

그럴 때만 무시와 부러움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아무도 자신을 무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고,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용납받을 수 있다.

- 자신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의 슬픔을 함께 슬퍼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다.

- 그 안에서는 아무도 자기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기에 평안과 안식을 누리고,

-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한다.

- 예수 그리스도 역시 새로운 가치 체계 아니냐고.

- 돈과 같은 세속적이고 유형의 가치는 아니지만,

- 종교적이고 무형의 가치 아니냐는 것이다.

맞다. 그런 점에서 차이가 없다.

- 게다가 특히 현실에서 보는 기독교를 보면 더욱 차이가 없다.

- 세상과 똑같이 교회 안에 많은 서열이 있다.

- 종교 직급으로 맨 위에 담임 목사부터 맨 아래 평신도까지 권력과 가치가 부여된다.

- 또 헌신 정도, 헌금 액수, 봉사 시간, 사역 종류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 더욱 추한 것으로, 교회 밖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교회 안에서 평가가 달라진다.

- 기업체 사장이나 정치인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치 체계 외에 다른 기준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 삼으면, 아무 문제가 없나?

- 이 역시 결국 사람 사이에 우열과 위계를 만들고,

- 또다시 무시와 부러움의 대상에 속박되는 것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 삼으면 문제가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이전에,

-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기준 삼으면 문제가 생기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핵심은 ‘소유’이다.

- 돈의 예를 들면, 만약 내가 돈의 가치 체계 안에서 100명 중의 50등이라고 해보자.

- 50등이 된 이유는 분명 50번째로 많은 돈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고,

- 그 액수가 천만 원이라고 해보자.

즉, 나는 천만 원을 ‘소유’한 것이다.

- 게다가 나머지 1등부터 100등까지 사람도 전부 그에 맞는 돈을 소유했다.

이렇게 소유하면 필연적으로 내 것과 네 것의 비교가 일어난다.

- 그러면 바로 상위와 하위가 결정되고,

- 그 즉시 무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헌금 액수, 봉사 시간, 사역 종류, 교회 직분도 개인이 ‘소유’한다.

- 보이지 않지만, 이마에 쓰여 있다.

- 그러면 곧바로 무시와 부러움이 생긴다.

따라서 무시와 부러움은 소유에 기반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소유할 수 없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게다가 개인이나 집단이 아무도 소유할 수 없도록 ‘책’이라는 형태로 고정되어 있다.

- 풀어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의해서만 정의된다.

- 그리고 그 성경은 만인에게 열려있다.

-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더라도, 성경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 수 없다.

- 자신만의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순간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우겨봤자, 증명할 방법은 없다.

- 우리는 성경에 의해 믿음을 정의할 수 있지만, 

- 그리고 성경의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 내가 그 믿음을 소유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 단지 그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뿐이다.

-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 체계 안에서는 부러움과 무시가 발생할 수 없다.

-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다르게 말하면, 모두에게 동등하게 소유되기 때문이다.

-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변질된 방법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 대표적으로, 중세 교회이다.

- 그들은 성경을 소유하려 했다.

- 그래서 자신 외에 아무도 성경을 읽을 수 없도록 했다.

게다가 교회에서 공적으로 라틴어만 쓰도록 했다.

- 성경을 읽더라도, 설교를 듣더라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 그래야 성경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독점된 권력은 부패한다.

- 중세 교회가 성경을 소유해서 한 짓이라고는 고작 면죄부를 판 것이다.

- 종교를 이용해서 돈 몇 푼 얻은 것뿐이다.

- 영생을 포기하고 얻은 대가라고 하기에는 초라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산물’을 통해서이다.

- 대표적으로, 예배, 설교, 교회 건물이다.

-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의식이고,

-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시간이며,

- 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머무는 공간이다.

- 즉,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예배, 설교, 건물을 소유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려 한다.

- 거룩한 예배, 흥미로운 설교, 화려한 건물을 통해 자신이 예수님을 소유했다고 자랑한다.

- 예배, 설교, 건물에 가치를 부여하여, 자기를 높인다.

물론 당사자는 모른다.

- 자신은 예배, 설교, 건물을 통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높인다고 생각한다.

- 예수님을 위해 예배, 설교, 건물에 열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들은 예수님을 포기한다.

-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예배, 설교, 건물을 포기해야 할 때,

- 이들은 예배, 설교, 건물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포기한다.

 

그랬던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이다.

- 이들은 율법과 성전에 헌신했다.

-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를 드리는 데 모든 열정을 쏟았다.

- 물론 자신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 자신이 진정한 성전이며 율법의 성취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

- 전부 율법과 성전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산물을 소유했던 사람의 운명이다.

 

그런데 똑같은 짓을 고린도 교회가 하고 있다.

- 고린도 교회는 지도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려 했다.

-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자기 지도자를 따르기 위해 예수님을 포기했다.

- 자기 지도자를 따르느라 예수님을 쪼개버렸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습니까? 또는,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까?

 

10~15절: 다른 기초를 놓은 고린도 교회

바울은 예수님 대신 지도자를 따르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한다.

[고전 3:11]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 물론 고린도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자기 지도자가 예수님을 더 잘 전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특히 많은 사람이 바울보다 아볼로가 더욱 지혜롭게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조차 문제이다.

- 만약 지도자를 평가한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였고,

- 아볼로를 지지하고 바울을 배척한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냐 아니냐 였다면,

- 이들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이들은 지혜를 기준으로 평가했다.

- 바울보다 아볼로가 더 지혜롭게 말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 지혜를 더 가치 있게 여겼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심판을 예고한다.

[고전 3:13]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고전 3:15]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 지혜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포기한 이들이 하나님의 불로 타버리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엉뚱한 해석을 한다.

- ‘구원을 받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이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한다.

- 그 사람의 ‘작품’은 타버리지만, 그 ‘사람’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맥락에 맞지 않는다.

- 13절에서 ‘업적’에 따라 ‘사람’이 평가받는다고 하고,

- 바로 15절에서 ‘작품’과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어색하다.

- 게다가 바로 다음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업적과 작품을 남긴 사람을 하나님은 멸하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15절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 즉, 불 속을 헤치고 나온다는 것은 나오지 못한다고 해석해야 한다.

- 불 속을 헤치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바울은 예수님보다 지혜를 가치 있다고 고린도 교회가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16~17절: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한 고린도 교회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를 멸망하게 한 주체가 누구냐?

- 바로 고린도 교회 자신이다.

-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다.

- 예수님보다 지혜를 더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 바울보다 아볼로가 더 지혜롭게 말한다는 이유로 아볼로는 지지하고 바울은 배척했다.

- 그래서 지도자를 두고 분열했고, 교회가 쪼개졌다.

이를 두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했다고 정죄한다.

-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쪼갰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23절: 자기를 속이고 지혜를 자랑한 고린도 교회

이런 상태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게 ‘자기를 속였다’고 바울은 정죄한다.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여기서 고린도 교회가 자기를 속인 부분은 자신을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은 실제로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어리석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지혜롭다고 착각했기에, 자기를 속였다고 표현했다.

 

왜 이렇게 정죄했을까?

- 왜 다른 많은 표현 중에 ‘속였다’고 했을까?

추정하건대, 자발성을 강조한 것이다.

-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보다 지혜를 선호하여, 결국 바울까지 배척하고 교회를 파괴한 것은,

- 단지 실수라든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 고린도 교회의 자발적인 선택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지혜에 진심이었다.

- 진정으로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 어쩌면 예수님을 믿은 이유 중 상당 부분이 지혜롭고 싶은 욕망일 수 있다.

지혜라는 단어가 이 시대에는 가치를 잃어서 고린도 교회가 이해되지 않는다.

- 그런데 지혜는 그리스 철학을 기반한 당시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 지금은 지혜의 자리에 돈이 있는 것뿐이다.

- 지혜를 돈으로 대체하면, 고린도 교회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솔직하게 말해서, 예수님 믿어서 세상에서도 안정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자기를 속였다.

- 예수님은 지혜로운 분이기에, 예수님을 믿은 자신도 지혜롭다고 속였다.

- 그러니 지혜롭게 말하는 아볼로가 옳고, 그렇지 못한 바울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우리도 똑같이 자기를 속인다.

-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진 분이기에, 예수님을 믿은 자신도 부자가 될 것이라고 속인다.

- 그래서 신앙의 이름으로 재산을 축적한다.

- 그러면서 자기 재산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기에 합당하며,

- 자신이 부자가 된 것은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반면에 교회 안에 여전히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자기 속임이 전부 지혜롭고 부자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은 지혜롭고 모든 것을 다 가진 풍요로운 분 맞다.

-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와 풍요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

- 하나님의 지혜와 풍요는 세상에서 어리석음과 가난이고,

- 세상의 지혜와 풍요는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가난이라고.

[고전 3:19~20]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20)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풀어 말하면,

- 예수님이 지혜롭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은 맞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그 결과 세상에서‘도’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 그러나 실상은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풍요롭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풍요로워진다는 말은 맞다.

- 그래서 현대 교회는 그 결과 세상에서‘도’ 부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 그러나 실상은 세상에서 거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과 세상을 괴리시키셨냐?

- 왜 하나님의 지혜와 풍요를 세상의 어리석음과 가난이 되도록 하셨냐?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고전 3:21]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자랑이 왜 문제냐?

- 누구 하나라도 자랑할 수 있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생기고,

- 부러움의 대상은 자동으로 무시의 대상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결국 관계는 깨지고, 자기 자신을 잃기 때문이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분열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소유’에 대해 말한다.

-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고전 3:21~23] ・・・・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 이는 고린도 교회가 모든 것을 가졌으니, 

- 세상에서‘도’ 지혜롭고 부자가 되어 자랑하며 살라는 뜻이 아니다.

-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오해한다.

이 구절의 뜻은, 고린도 교회가 모든 것을 소유했으니,

- 더 이상 아무것도 소유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을 다 가졌는데, 서로 더 가지려고 싸우는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는 것이다.

-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마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처럼, 거지처럼, 고아처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싸웠다.

- 바울은 이 점을 지적한다.

 

결론 - 여전히 본문이 곡해되는 이유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여전히 많은 사람이 본문을 곡해할까?

- 바울은 정죄하려고 쓴 글을 구원 메시지로 이해할까?

- 처음에는 단순히 믿음 없음 때문이라고 했는데, 한 걸음 더 가보자.

 

하나님은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도 구원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 여기까지는 맞다.

-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세상에서 지혜롭고 부자 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 왜 오해하냐면, 지혜와 돈에 대한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믿은 이유가 지혜와 돈 때문이었다.

그러니 성경도 곡해한다.

- 무조건 구원의 메시지로만 해석한다.

- 구원 외에는 전부 무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실제로 무엇이냐?

- 세상의 어리석음과 가난이다.

-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조롱당하며 가난한 채로 평생을 사는 것이 구원이다.

그에 대한 증거가 예수님 그리고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다.

- 예수님도 어리석다고 조롱당하며, 아무 소유 없이 죽으셨고,

- 바울 역시 고린도 교회에게 어리석다고 조롱당하며, 구질구질하게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원하는가?

- 결국 돈과 지혜 아닌가.

-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부러운 대상도 없고, 무시할 대상도 없이 인정받으며 안정되게 사는 것 아닌가!

바로 그 욕망이 고린도 교회를 파괴했다.

- 그 욕망 때문에 바울은 힘들게 편지까지 써서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고 있다.

게다가 그 욕망 때문에 바울이 힘겹게 쓴 편지를 2000년이 지난 우리까지도 곡해하고 있다.

- 바울이 정죄하기 위해 쓴 글을 정반대로 구원 메시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욕망 때문에 사랑하는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까지 파괴하고 있다.

- 지혜와 돈에 사로잡혀 타인과 자신까지 거래 수단으로 본다.

- 그래서 타인도 자신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 우리에게 바울은 말한다.

-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은 타인과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