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01) 1:1~9 해석의 기본인 바울의 정서 - 분노와 불안

안승준 2024. 8. 24. 23:0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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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를 읽을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바울의 정서이다.

- 바울은 복음에서 멀어진 고린도 교회에 엄청나게 화나 있고, 

- 화난 만큼 고린도 교회 사람들을 잃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

- 바울의 분노와 불안이 고린도전서를 지배하는 정서이다.

물론 분노와 불안은 사랑 때문이다.

- 사랑했기 때문에 소중한 고린도 교회가 망가진 것이 속상했고,

- 사랑했기 때문에 이미 망가진 교회라도 잃을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분노와 불안으로 표출된다.

- 그래서 교회를 잃지 않기 위해 바울은 정열을 담아 편지를 썼다.

 

물론 본문에서는 분노와 불안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 숨겨져 있다.

- 이유는 번역 과정에서 미묘한 감정 표현이 사라졌기 때문도 있다.

- 어순과 배치에 담긴 뉘앙스까지 번역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부분도 있다.

-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고린도 교회가 불쾌해서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했다.

- 그렇다고 반대로 감정을 배제하면, 고린도 교회가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없다.

- 그래서 바울은 자기 감정을 간접적으로 미묘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한다.

 

게다가 우리의 편견 때문에 바울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 우리에게 바울은 언제나 불안 없이 담대하고,

- 분노하지 않고 침착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 그래서 노심초사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분노 폭발하는 바울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는 바울의 감정은 상당히 불안정하다.

- 분노와 불안을 오간다.

- 죄를 범하고도 죄의식 없는 교회에 대해 분노하면서,

- 동시에 죄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날까 봐 불안해한다.

- 분노와 불안이라는 강렬한 감정 속에서도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 침착하고 차분하게 교회를 설득하려고 애쓴다.

- 그러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불쑥 드러난다.

이러한 바울의 복잡한 감정을 해석하는 것이 고린도전서에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분노와 불안을 전제하고 본문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세운 ‘날카로운 발톱’과

- 정죄해서 내치려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이키도록 하려는 ‘부드러운 손길’을 동시에 발견해야 한다.

만약 부드러운 손길만 본다면, 본문은 뻔한 감사만 반복하는 무의미한 글이 되고,

- 만약 날카로운 발톱만 본다면, 쓸데없이 잔소리만 반복하는 글이 된다.

 

본문 해석 - 거꾸로 읽기

바울의 편지는 언제나 인사로 시작한다.

- 발신자(1절), 수신자(2절), 축복(3절)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당시 편지의 전형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인사 그 자체가 아니라,

- 발신자와 수신자를 어떻게 소개하느냐에 있다.

- 이 부분에서부터 바울은 편지 기록 목적을 담는다.

 

그런데 바울은 기록 목적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 고린도 교회의 죄와 죄로 인한 바울의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숨기면서 드러낸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갔는데 주인이 깜박하고 물을 안 줬을 때,

- ‘물 왜 안 주냐? 물 달라.’고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 ‘이 집 물이 그렇게 맛있다는데, 지난 번에도 정말 시원하게 마셨다. 정말 감사했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런 메시지도 얻을 수 없다.

- 표면적인 의미는 물 맛을 칭찬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 그러나 화자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화자의 의도는 물 주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 이것이 내면적인 의미이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 언변, 지식을 칭찬한다.

[고전 1:4~5]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 물론 표면적인 의미는 감사와 칭찬이다.

- 그런데 이는 바울의 의도가 아니다.

바울의 의도는 지적과 요구이다.

- 고린도 교회가 은사, 언변, 지식을 잘 활용하기 때문에 칭찬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 은사, 언변, 지식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 이것이 내면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바울의 표현을 거꾸로 해석할 때만 바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바울은 행복한 마음에서 칭찬과 감사를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 분노와 불안의 감정을 가지고 지적과 요구를 위해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 의도를 잘 전달하기 위해 칭찬과 감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 겉에 있는 칭찬과 감사에서 내면의 지적과 요구를 발굴해야 한다.

거꾸로 읽어야만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1~3절: 인사말 - 바울을 거부하는 고린도 교회

‘발신자’인 바울과 소스데네가 ‘수신자’인 고린도 교회에 쓰는 편지라는 것을 밝힌다.

- 그런데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 대한 설명이 의미심장하다.

 

바울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으로 소개한다.

- 이것도 거꾸로 해석해야 한다.

- 결론부터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지 못했다.

- 교회가 바울을 아예 거부했다기보다, 몇 가지 이유로 바울을 의심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한다.

[고전 4:1]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관리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고전 9:1~2]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 바울은 복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람이었지만, 교회에게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을 받았다.

 

바울은 자기 소개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의심을 반박한다.

- 자신을 사도라고 명확하게 소개하며 시작한다.

이는 단순히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을 의심하는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며,

- 더 나아가, 교회가 복음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바울을 의심하게 만든 원인을 지적하는 것이다.

즉, 바울은 자기 소개에서부터 고린도 교회를 정죄하며 시작한다.

 

고린도 교회를 설명하는 구절도 마찬가지이다.

- 먼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소개한다.

- 왜냐하면 교회가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사람의 소유라고 주장하는 기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1: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은 저마다 말하기를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게바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한다고 합니다.

추측해 보건대, 교회의 지도자를 두고 갈등이 있었다.

- 자기 측 지도자만 옳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지도자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라고 강조한 것이다.

- 이를 통해 각 지도자가 갖는 언변과 지식의 차이로 갈등하는 교회를 정죄하며,

- 언변과 지식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이라고 말한다.

- 이 역시 거꾸로 봐야 한다.

- 고린도 교회가 거룩했기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 거룩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룩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한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의도한 ‘거룩함’은 무엇이냐?

- 역시 결론부터 말해서, 분열이 아닌 연합이다.

 

풀어 말하면, 고린도 교회는 지지하는 지도자에 따른 파당이 있었다.

- 특히 바울파와 아볼로파 사이에 갈등이 심각했다.

[고전 3:4]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분열의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냐?

- 바로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 착각을 근거로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만을 옳다고 판단했고,

-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지도자는 틀렸다고 판단했다.

- 그런 착각이 교회 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결국 분열하게 되었다.

- 특히 고린도 교회는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바울까지 부정했다.

-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운 장본인임에도 말이다.

 

바울은 이러한 분열을 ‘성전 파괴’라고 말한다.

[고전 3:16~18]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바울은 교회를 성전에 비유했기에 교회 분열을 성전 파괴라고 표현한 것은 적절하다.

그리고 바울은 성전을 ‘거룩함’과 연결한다.

- 즉, 바울에게 거룩함은 파괴되지 않은 온전한 성전이며,

- 이는 분열되지 않고 연합한 교회를 뜻한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거룩하여진 성도(거룩한 이)’가 되기를 요구하며

- ‘거룩’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반복한 이유는 명확하다.

- 지금 교회가 분열되었기 때문이고,

- 그 원인은 교회가 자신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회는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느라, 의도하지 않게, 하나님의 지혜까지 부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든 원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착각을 한 번 더 지적한다.

- 바울은 편지를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각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보낸다.

[고전 1:2] ・・・・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 바울이 편지 수신자에 교회 이외의 사람을 포함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모든 이들을 포함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가 자신만을 특별히 지혜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주변의 다른 신자를 무시하고 부정했기 때문이다.

[고전 14:36]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났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자신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주변 교회뿐만 아니라 바울까지 부정했다.

- 게다가 역설적으로 바울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하나님까지 부정했다.

- 자신들만 지혜 있다고 착각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실태이다.

 

4~9절: 감사 - 언변과 지식으로 와해된 고린도 교회

바울이 인사말 이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바울 서신의 특징이다.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고전 1:4]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여러분의 일로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역시 거꾸로 읽어야 한다.

- ‘감사를 드립니다.’를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로 해석해야 한다.

- 바울은 감사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요구하고 있다.

- 이는 고린도 교회에 결함이 있다는 뜻이다.

 

결함의 중심에는 ‘풍족한 언변과 지식’이 있다.

[고전 1: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 언변과 지식은 스스로를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상징한다.

- 교회를 분열하게 만든 바로 그 착각이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언변, 지식, 지혜 등 많은 것을 얻었다.

- 하지만 많이 얻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을 신뢰했고,

- 그로 인해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바울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 불신하는 위기에 빠졌다.

- 그렇게 자기 지혜를 신뢰하는 사람이 모이면 분열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물론 언변과 지식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교회 안에서 튼튼하게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전 1: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서 이렇게도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 그러나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 오히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 즉 복음이 튼튼하게 자리 잡기는커녕,

- 언변과 지식 때문에 복음이 와해되고 교회는 분열한다.

 

그래서 바울은 요구한다.

- 고린도 교회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가 분열되지 않고 튼튼하게 세워지기를.

[고전 1: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이는 현재 교회가 자신만을 지혜 있다고 착각하는 흠이 있고,

- 그로 인해 교회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강조한다.

[고전 1:9]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가지게 하여 주셨습니다.

- 이 역시 거꾸로 보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는 무엇을 뜻하는가?

- 단순히 예수님과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예수님 안에서 ‘교회의 연합’까지 뜻한다.

바울은 ‘친교’를 다음 구절에서 사용했다.

[고전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닙니까? (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 즉,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는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함’이고,

- 그것은 한 몸이신 그리스도에 참여한 교회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현재 분열 상태에 있다.

- 이는 교회가 한 몸이 아니라는 뜻이고,

- 이는 교회가 한 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멀어졌고,

- 교회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요구한다.

-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회복하라고.

- 그래서 분열된 교회를 다시 한 몸으로 연합하라고.

 

고린도 교회 문제의 핵심 - 자기에 대한 무지

그렇다면 교회는 왜 이 지경이 되었냐?

- 왜 교회는 분열했냐?

- 왜 교회는 자신이 지지하는 지도자만 옳다고 판단했냐?

- 왜 교회는 자신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지혜가 있다고 착각했냐?

- 왜 언변과 지식과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한 몸 되도록 하기보다,

- 자신만 지혜 있다고 착각해서 서로 정죄하고 분열하도록 만들었냐?

이 물음은 복음서의 바리새인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

- 왜 율법은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보다,

- 하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만들었냐?

 

율법 자체가 애초부터 나쁘기 때문인가?

- 언변, 지식, 지혜가 애초부터 나쁘기 때문인가?

아니다.

-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언변과 지식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고전 1:5]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면에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 때문에 바리새인도 고린도 교회도 문제가 생겼는가?

 

바리새인 중 누구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따르겠다는 목적으로 율법을 지켰다.

-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들이 아는 율법과 다른 주장을 했고,

- 그래서 자기들이 아는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죽인 것뿐이다.

이렇게만 보면 바리새인에게 문제가 없어 보인다.

- 하지만 바리새인은 심각한 문제를 가졌다.

- 너무 심각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만큼 심각하다.

 

그것은 ‘자기들이 아는 율법’에 대한 지나친 신뢰이다.

- 그래서 ‘자기들이 아는’ 율법만 옳고,

-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율법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자기들이 아는 율법과 다른 것은 전부 틀렸다고 착각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

- 왜 자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가?

- 왜 자신에게 율법을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고 착각하는가?

자신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이 율법과 같은 선을 통해서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 선한 율법이 있으면, 자신이 정말로 선해질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왜 사람은 무지해지는가?

- 왜 자신이 지혜롭다고 착각하는가?

- 왜 율법의 수여자인 하나님이 아니라, 수혜자인 자신에 집중하는가?

욕망 때문이다.

- 자신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의로우며, 가치 있고, 중요하며, 선하다고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 세상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더 엄밀하게 말해서,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 누구나 욕망이 있다.

- 문제는 욕망에 매몰되어, 손쉽게 가치있어 ‘보이는’ 존재가 되기 위해,

- 진정한 자신을 외면하는 것이다.

- 겉만 치장하느라, 내면을 돌보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겉으로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같은 이유이다.

- 세상에서 의인으로 보이기 위해 의인이 되기를 포기했다.

-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드러나 보이는 율법 행위에 집중했다.

- 그래서 안식일, 금식, 할례 등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 행위를 강조했다.

그로 인해 내면이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을 소홀히 했다.

- 그래서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잊었다.

-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 행위를 했고,

-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했으니,

- 내면과 상관없이 자신을 의롭다고 착각했다.

그 때문에 내면의 죄는 무시했다.

- 왜냐하면 의로워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 그 욕망에 눈이 가려져, 진정한 자기 내면에 있는 죄를 무시하고 무지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내면의 죄가 절제 없이 발현되었다.

- 자신은 의롭다는 착각 때문에 더욱 과감하게 죄를 지었다.

-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더욱 악랄하게 탄압했다.

- 그 탄압은 내면의 죄가 발현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지만,

-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 그래서 악랄한 죄를 범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었다.

결국 그 악랄한 탄압이 세상의 약자를 거쳐 하나님까지 이른다.

-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에 이른다.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욕망했던 고린도 교회

고린도 교회도 정확하게 이 과정을 따른다.

-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를 욕망했다.

- 헬라 문화 아래 있었던 고린도 사람에게 지혜는 돈보다 더 귀한 최고의 가치였다.

그런데 손쉽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다.

- 그것을 위해 지혜의 수여자인 하나님보다 수혜자인 자신에 집중했다.

- 그래야 자신이 부각되고, 그래야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되었다.

- 실제로 지혜 있는 사람인지는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결국 자기도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 그와 동시에, 자신이 실제로는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 바로 이것이 무지의 시작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잊고 지혜롭다고 착각하게 되자, 어리석음이 절제 없이 표출된다.

- 대표적인 예가 자기만 옳고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전부 틀렸다고 치부하는 것이다.

-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내부에서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여 분열한다.

- 게다가 자신의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까지 부정하게 된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처한 현실이다.

 

결론 - 무지하다는 인식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 세상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 그러나 현실성이 없다.

-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하다.

- 일시적으로 할 수 있지만, 지속할 수 없다.

 

유일한 해법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다.

- 세상에서 아무리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 자신조차 아무리 살펴봐도 자신이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여도,

- 자신은 근원적으로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 그리고 단순한 기억을 넘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무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죄 인식이고 회개이다.

-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서 가치 없고, 추악하며, 부정한 존재인지 마음 깊이 인식하는 것.

- 겉으로 보기에 윤리적,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의로워 보여도,

- 여전히 내면이 부정함과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무지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욕망이 있어도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 지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어도,

- 그래서 손쉽게 지혜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욕망에 따라 내면을 놔둔 채 겉만 치장해도,

- 그래서 세상 모두가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칭송해도,

- 그래서 세상 전부를 속여도,

- 적어도 자신은 속지 않을 수 있다.

- 자신이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 자신은 여전히 무지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며,

- 하나님만이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으로 만드실 분이라는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라’고 말한다.

[고전 3: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어리석은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만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 자신이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기에, 

-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 반대로, 자신이 무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 그는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어진다.

죄 인식, 무지 인식만이 하나님과 관계 맺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