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86) 50:1~20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의 멸망 예언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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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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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떻게 전해지는가?
- 사람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할까?
단순하게 말해서,
-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흥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 망할 때이다.
- 그러면 흥하고 싶어서, 그리고 망하기 싫어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
- 즉, 믿는 사람의 흥함과 믿지 않는 사람의 망함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의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을 동시에 전한다.
- 망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렘 50:4] 그 날이 오고, 그 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이 다 함께 돌아올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은 울면서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나 주를 찾을 것이다.
- 흥했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망시킨 죄로 망한다.
[렘 50:13] 나 주의 분노 때문에, 바빌론 도성은 아무도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온 나라가 황무지로 뒤바뀔 것이다. 그러면 그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그 곳에 내린 모든 재앙을 보고, 놀라며 조롱할 것이다.
- 아무런 가망 없어 보였던 이스라엘이 다시 국가를 재건하고,
- 영원무궁할 것 같았던 바벨론이 망하는 모습을 보면,
- 누구라도 하나님의 능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이는 개인 영역에서도 동일하다.
- 우리 안에 믿음이 있는 영역과 믿음이 없는 영역이 있는데,
- 믿음이 있는 영역이 흥하고 믿음이 없는 영역이 망할 때,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 다르게 말해서, 하나님께 순종한 일은 흥하고 불순종한 일은 망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진정한 신앙의 목적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기 위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신앙을 갖는 목적과 직결되어 있다.
- 신앙의 목적에 따라 신앙에서 바라고 구하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앙을 갖는 이유는, 한마디로, 잘되려는 것이다.
-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신앙에서 ‘잘됨’을 구한다.
- 부와 명예, 건강, 사람들과 평화, 안정된 환경, 그러면서도 삶의 재미를 구한다.
- 이런 것이 일반적인 잘됨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직관적이고 논리적이다.
- 잘됨을 위해 신앙을 갖기에 신앙에서 잘됨을 구한다.
- 그래서 삶에서 잘됨을 얻어 원하는 대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많은 사람의 목적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 그것은 ‘잘됨’의 정의이다.
- 과연 원하는 것을 얻어서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이 잘됨일까?
- 반대로 원하는 것을 잃고 불행하고 불안한 삶은 못됨일까?
- 그렇다면 ‘잘됨’의 기준은 무엇일까?
결국 신앙은 이것을 정립하는 일이다.
- 행복과 불행, 평안과 불안의 구분을 넘고, 원하는 것을 얻거나 잃는 것을 넘어서,
- 진정으로 사람에게 ‘잘됨’이란 무엇일까?
상식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잘됨’이 아니다.
- 포로로 끌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순간은 ‘잘됨’이다.
- 결과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 멸망하여 포로가 되는 모든 과정이 진정한 잘됨을 위한 과정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 예수님의 죽음은 잘됨인가, 아닌가?
- 예수님이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죽으셨기에 잘됨이 아닌가?
- 아니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과정이기 때문에 잘됨인가?
결국 부활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셨기에 죽음조차 잘됨이다.
- 예수님의 부활이 잘됨인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십자가 죽음도 잘됨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 국가, 민족을 회복한 것이 잘됨인 것과 똑같이,
-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간 것도 잘됨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이러한 잘됨이 낯설다.
-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수님의 부활이 잘됨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 하지만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수님의 죽음까지 잘됨이라는 것은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있다.
왜냐하면 직관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 멸망과 죽음을 좋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영역이다.
- 차분하게 곱씹어보면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 직관이 거부하여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생긴다.
- 부활만을 잘됨으로 여기고,
- 죽음은 잘됨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 치부한다.
- 그래서 예수님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는 배제하게 된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신앙에 한계가 생긴다.
- 따라서 신앙을 제약하는 직관은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
신앙의 걸림돌인 직관
그렇다면 그 직관이 무엇이냐?
- 왜 직관은 잘됨을 회복과 부활로만 제한하고, 멸망과 죽음을 배제하는가?
경험과 감정 때문이다.
- 원하는 것을 얻는 경험을 했을 때 느꼈던 긍정적 감정 때문이다.
- 그리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느꼈던 부정적 감정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괴로워했고, 회복할 때 기뻐했으며,
- 예수님이 죽으실 때 괴로워했고, 부활했을 때 기뻐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 회복과 부활만 좋은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하고,
- 그것이 장기 기억으로 넘어가서 직관을 만든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긍정적인가?
- 원하는 것을 얻어서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이 항상 긍정적인 삶으로 연결되는가?
감정과 삶의 연결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중독’이다.
- 마약 중독자는 마약을 할 때 극도의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 그러나 그 마약은 마약 중독자를 부정적인 삶으로 이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독자는 감정과 삶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
- 지금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삶에는 기쁨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오히려 지금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금단 증상이 결국 미래의 삶에 기쁨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긍정적 감정이 잘됨이라는 직관을 부정해야 한다.
이는 마약과 같은 심각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 운동, 공부, 숙제, 늦잠, 양치, 청소, 식사 등 일상 전체와 관련 있다.
- 운동을 미루고 편하게 쉬면 당장은 편하지만 장기적으로 건강을 잃는다.
- 귀찮다고 양치를 미루면 이가 썩어서 고통을 겪는다.
- 바쁘다고 식사를 미뤄도, 먹고 싶다고 과도하게 먹어도 건강을 잃는다.
당장 편하고 행복한 것이 잘됨은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셨던 것도 같은 이유이다.
-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긍정적인 감정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 죽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이 아니다.
- 괴롭고 비참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삶을 만든다는 판단을 거부하셨다.
- 직관을 부정하셨다.
신앙을 바르게 이끄는 힘 - 나다움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셨나?
- 왜 예수님은 부정적인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셨나?
- 무슨 요인이 직관을 부정하게 하셨나?
- 예수님께 직관과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나?
‘나다움’이다.
- 자기답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직관과 감정을 벗어나게 했다.
- 예수님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욕구가 직관과 감정뿐만 아니라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 세상에 의해 주입된 것도 아니고, 하물며 하나님에 의해 요구된 것도 아니라,
- 예수님이 탄생할 때부터 예수님 안에서 용솟음치던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자기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라면, 절대로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근원적인 동기를 ‘나다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 편하게 쉬고 싶지만, 무거운 몸을 이끌고 괴롭게 운동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 쉼보다 운동을 통해 얻는 가치가 더 원하기 때문이다.
- 즉, 운동이 더 나다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쉼과 운동 모두 원한다.
- 그런데 쉼은 당장의 만족을 주고 운동은 미래의 만족을 준다.
- 그래서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쉼을 선택하고 싶다.
- 하지만 쉼보다 운동을 통해 얻는 가치를 더 원한다.
-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쉼보다 운동이다.
따라서 ‘나다움’에 대한 열정만이 쉼에 끌리는 직관을 부정할 수 있다.
참고로, 무조건 운동이 나다운 선택이라는 뜻이 아니다.
- 나다움은 사람마다 다르다.
- 쉼이 나다운 선택인 사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행하려는 의지이다.
- 직관과 경험은 때로 나다움을 방해한다.
- 하던 대로 혹은 하라는 대로 하도록 만든다.
- 그래서 해보지 않아서 숨겨진 나다움을 더욱 억누른다.
그때 나다움의 의지를 가진 사람만 숨겨진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 직관과 경험을 거역하여, 하지 않던 대로 혹은 하지 말라는 대로, 나답게 행한다.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실 때 괴로우셨다.
- 예수님 자신도 하지 않았던 길이고,
-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제자들도 모두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관과 경험을 거역하셨다.
- 그래서 하지 않던 대로, 하지 말라는 대로 십자가 죽음의 길로 가셨다.
이유는 딱 하나이다.
- 그것이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 당장은 죽는 것이 두렵고,
- 당장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프지만,
- 예수님은 가장 나다운 선택을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고,
-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수 있었다.
- 그리스도가 되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
진정한 나다움 - 사랑
그렇다면 예수님의 나다움은 무엇인가?
- ‘사랑’이다.
풀어 말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고,
- 그것을 위해 더 많은 사람에게 바른 사랑을 알려주셔서,
- 사랑만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던 나다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 이를 통해 진정한 사랑의 표본을 보여주셨다.
- 그리고 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를 선택하여 보호하고 구원하신 진정한 사랑을 행하셨다.
- 그래서 숨겨져 있던 우리의 진정한 나다움인 사랑의 욕구를 깨우셨다.
- 그래서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 어떻게 모든 사람의 나다움을 사랑 하나도 규정할 수 있는가?
-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하고 살기에,
- 각기 다른 나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물론 사랑도 중요한 욕구지만, 사랑 외의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 것 아닌가?
- 단적인 예로,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사는 것보다 홀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살길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질문이다.
- 온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진 인간 근원의 욕구가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고,
- 이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질문이다.
- 마치 사람이 아무런 도구 없이 자기 모습을 볼 수 없고, 촉감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듯이,
- 인간은 스스로 인간의 본질을 대답할 수 없다.
- 간접적으로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 창조 이전 하나님 존재의 본질도 삼위일체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고,
- 창조 목적도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였으며,
-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도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양방향의 사랑이었고,
-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신 것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으며,
- 종말에 이루어질 천국 역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세계이다.
성경은 모든 인류의 나다움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본문 해석 - 교차대구
본문의 하나님 역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이다.
-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의 나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고 증명되냐?
- 바벨론 멸망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과 관계 회복과 바벨론의 멸망을 동시에 강조한다.
- 그것을 위해 교차대구 구조를 사용한다.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4~5절 -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 - 하나님과 언약 관계 복구하려는 이스라엘
b: 6~7절 -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 - 주에게 범죄하여 길 잃은 양 떼인 이스라엘
c: 8~10절 - 바벨론의 멸망 예언 - 바벨론 탈출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d: 11~13절 - 바벨론의 멸망 원인 - 나의 백성을 노략하여 주를 분노하게 한 바벨론
c': 14~16절 - 바벨론의 멸망 예언 - 바벨론 공격 명령하는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
b': 17~18절 -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 -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잡아먹히는 이스라엘
a': 19~20절 -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 - 이스라엘이 죄 없도록 용서하시는 하나님
- 본문은 a - b - c - d - c' - b' - a' 구조이다.
- 이 구조는 양 끝의 a, a'와 중심의 d를 동시에 전하면서,
- 중심인 d에 강조점을 둔다.
그런 점에서 a의 이스라엘 회복 예언과 d의 바벨론 멸망 예언을 동시에 전하면서,
- 중심인 바벨론 멸망 예언에 강조점을 둔다.
결론부터 말해서, 바벨론 멸망이 뜻하는 바는 ‘삶의 터전 파괴’이다.
- 당시 이스라엘은 국가가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오는 혼란기를 지나,
- 바벨론 포로 삶에 적응하여 안정되었다.
- 따라서 이스라엘이 바란 회복은 바벨론 안에서의 안정이었다.
- 그곳에서도 나름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지속되길 원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곧 바벨론의 안정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인가?
- 영원히 바벨론 포로로 사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회복을 주는가?
- 바벨론 안에서 안정은 당장의 기쁨을 준다.
- 마치 운동하지 않고 쉬는 것이 편안함을 주는 것처럼.
- 그러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운동하면, 지속적인 건강을 얻는다.
-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올 때만 진정한 자유와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복이 곧 바벨론 안정이라는 직관과 경험을 거부하게 하신다.
- 삶의 터전인 바벨론을 파괴하여 바벨론 안에서의 회복이 아니라,
- 바벨론을 떠나 이스라엘 땅 안에서의 회복을 선포하신다.
그것을 위해 바벨론의 멸망을 강조해야만 한 것이다.
- 그것만이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회복할 수 있는 길이고,
- 이스라엘이 나다움을 회복할 때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나다움이기 때문이다.
결론 - 나다움을 회복하는 방법
역설적으로 말해서, 나다움은 나를 벗어날 때 생긴다.
- 예수님도 자기를 부인하고 죽음으로 자신을 벗어나셨다.
-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자신으로 회복하셨다.
- 이스라엘도 삶의 터전이었던 바벨론이 파괴될 때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진정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 마찬가지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당장 쉼을 원하는 자신에서 벗어날 때이다.
- 자신이 평생 가져온 직관과 경험에서 벗어날 때만 숨겨진 나다움이 표출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을 벗어날 수 있을까?
- 무작정 하던 일을 전부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될까?
- 새로운 일을 선택하더라도 결국 자신의 경험과 직관 테두리 안에서 선택한다.
자신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다.
-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쉼인지 운동인지 판단할 수 있다.
- 그럴 때만 쉬고 싶은 자신을 벗어나 운동할 수 있다.
-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살고 싶은 자신을 벗어나
-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죽음의 길로 가셨다.
그러면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 우리는 과연 자신을 벗어나 죽음까지 감수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한 것이고,
-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 사람은 스스로 자신과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다.
- 예수님을 믿을 때만, 그래서 죽음 후 부활을 믿을 때만,
- 그래서 성령을 통해 우리도 죽고 부활할 것을 믿을 때만 가능하다.
- 그 믿음으로 죽음이라는 걸림돌을 넘을 수 있고,
- 걸림돌을 넘을 때만 사랑을 할 수 있으며,
- 사랑을 할 때만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고,
- 자신을 벗어날 때만 진정한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나다움을 회복한 사람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나다움을 찾고, 나다움으로 진정한 사랑을 하여,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믿고,
- 그 믿음으로 나다움을 찾는 선순환 과정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