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6) 9:1-12 유대 전통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

안승준 2019. 6. 24. 11:49

너무 오래 전에 말해서 잊어버렸겠지만, 본문은 '명절 사이클' 중이다.

 장

 주제

 설명

 1

 서론

요한복음 전체 개관 

 2-4

 가나 사이클

예수님의 정체성 증언 

 5-10

 명절 사이클

 유대 전통의 파괴를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 확증

 11~

 십자가행

십자가 죽음 준비 시작 

- 5-10장은 명절을 반복해서 언급하기 때문에 명절 사이클이라고 부른다.

- 유대 사람의 명절(5:1), 유월절(6:4), 장막절(7:2), 수전절(10:22)이 언급된다.

따라서 요한복음 9장은 장막절(7장)과 수전절(10장) 중 어느 날이다.

- 두 절기는 인접해있다. 장막절은 대략 10월 15-21일이고, 수전절은 대략 12월 25일 경이다.

- 장막절에도 밤새 불을 켜놓고 춤을 추고 찬송하는 빛의 의식이 있고, 수전절에도 성전 안에 8일 동안 등불을 켜놓은 의식이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 동일한 선포가 8:12과 9:5에 모두 나온다.

- 따라서 빛의 의미를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명절 사이클은 전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유대 전통에 도전하시고 파괴하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포하신다.

 장

 사건

주제 

 5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치심

안식일 율법에 대한 도전 

 6

산에서 오병이어를 주심 

 광야에서 만나를 준 모세에 대한 도전

 7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돌에서 물을 솟아나게 한 모세에 대한 도전 

 8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스라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도전

 9

 눈먼 사람을 치유하심

 질병이 죄에서 왔다는 전통에 대한 도전

- 안식일, 만나, 아브라함은 유대 사람들의 정체성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대표하는 것이 명절 절기이다. 

- 그래서 명절 사이클은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의 정체성과 대립하고 파괴하는 단락이다.

- 이를 통해, 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의 본질을 선포하신다.

- 그렇기 때문에 명절 사이클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 사람들의 적개심이 계속 커져서 죽이려는 시도까지 일어난다.

- 이런 이유로 명절 사이클 이후 11장부터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로 들어서신다.


9장 전체 개관

본문은 눈먼 사람이 치유 받는 사건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다.

 상징

 역할

 뜻

 설명

 빛

 본질

예수님 

 하나님을 드러내어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는 본질 

 낮

본질에 의한 

상태 

예수님이 계시는 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음이 가능한 시기 -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혹은 종말 이전 

 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음이 불가능한 시기 -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혹은 종말 이후 

 눈먼 사람

 본질에 의한 

긍정적 변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 

 눈 뜬 사람

예수님을 아는 사람 

 빛을 보고 예수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상징 

 바리새인

본질에 의한 

부정적 변화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 

 빛이신 예수님을 보지만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 

 눈 뜬 사람의 부모

예수님을 방관하는 사람 

 예수님을 알지만 신앙을 드러내기 망설이는 사람 상징

이러한 상징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① 예수님이 상태와 변화를 구분 짓는 유일한 기준이며 본질이다.

② 예수님을 기준으로 변화 가능성이 있는 시기와 변화 가능성이 없는 시기가 있다.

- 현재는 예수님이 계셔서 변화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다.

- 하지만 변화 가능성이 있는 시기는 한정적이고 결국 끝난다.

④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있다.

⑤ 반면에 예수님을 보고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 그 중에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사람도 있다.

본문을 해석할 때 주의점이 있다.

- 본문은 예수님이 중심이다. 눈먼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다. 이걸 헷갈리면 안된다.

- 예수님만이 낮과 밤의 기준이시며, 눈 멈과 눈 뜸의 기준이시다.

- 반면에 본문은 눈먼 사람의 역할을 최소화하여 기록하고 있다.

- 눈먼 사람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긴 했지만, 그것에 대한 강조가 전혀 없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조차 알지 못한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메시지일 뿐, 예수님을 믿기 위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이 다루고 있는 또 다른 주제는 예수님께서 유대 전통에 대해 도전하시고 파괴하시는 것이다.

유대 사람들은 질병 중 특히 타고난 장애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정죄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날 때부터 눈먼 사람과 그의 부모를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죄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또한 유대 사람들은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결과와 상관 없이 무조건 죄라고 생각했다.

- 이 역시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죄인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타고난 장애도 하나님의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며, 안식일을 범하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의로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이를 통해, 참된 판단 기준은 유대 전통과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전통과 율법은 유대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다.

- 이는 마치 우리에게 경험, 상식, 통념, 관습, 도덕, 윤리, 법률, 습관, 가치관, 본능, 직관 등을 아울러서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 유대 사람들이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종교 행위로 보이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일상이며 삶 그 자체이다.

- 우리가 도둑질은 나쁘다는 것을 상식이며 본능인 것처럼, 유대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위는 마치 어떤 아저씨가 내 차를 도둑질해서, 내 아들을 살인한 후, 거짓말을 해서 노숙자에게 도움을 준 것과 같다.

- 예수님은 내 인생, 내 가족, 내 소유, 내 명예를 다 파괴하신 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했다."라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눈 하나 깜박 안하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변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상당하다.

- 예수님께서 율법을 파괴하시는 것은 우리의 경험, 상식, 통념을 파괴하는 것을 상징한다.

- 도둑질, 살인, 거짓말이 나쁘다는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면, 아연실색하여, 화를 참지 못해, 이성을 잃고, 예수님을 잡아 죽일 것이다.

-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흥분한 것이다. 바리새인은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사람이다.

- 예수님은 이러한 파괴를 2000년 전에도 하셔서 죽임 당하셨고, 지금 오늘 이 시간에도 동일한 파괴를 행하셔서 우리의 살해 위협을 계속 받고 계시다.

이것이 현실에서의 복음이다.

-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려 달려들고, 반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려 달려드는 꼴이다. 진흙탕 싸움이다. 난장판이다. 

- 복음의 장밋빛 소망은 반드시 현실에서의 복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한 이후에만 빛을 발한다.

- 십자가 죽음 없는 복음이 거짓 복음이듯이, 진흙탕 싸움 없는 신앙 생활은 거짓 신앙 생활이다.

'관계'라는 관점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 '나'라는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수용하려고 하면, 일시적으로는 참고 참아 가능하다.

-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인내가 한계에 이른다. 폭발한다.

- 더 이상 상대를 수용할 수 없는 때가 오고, 그 때가 되면 상대를 수용하기보다는 변화시키려하고, 변화되지 않는 상대를 보며 화를 내게 된다.

- 결국 상대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원망과 분노만 남는다. 관계가 깨진다.

- 어디서 듣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부부에게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언제 관계가 회복되냐? 길고 지루한 싸움 끝에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문제, 부족함, 연약함, 완고함,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깨달을 때이다.

- 그래서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고집했던 자신의 생각이 파괴될 때,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여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 즉 '나'라는 존재가 파괴될 때에만 상대방에게 관심이 생기고 이해가 된다. 관계가 시작된다.

- 반대로, '나'가 파괴되기 전까지 귀는 열고 들었어도, 상대방이 한 말을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귀는 있지만 들을 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를 통해 기쁨, 소망,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 파괴가 먼저 일어나야 한다.

-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 생명을 먼저 파괴하신다.

- 교회가 관계 맺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우리는 복음 안에서 서로를 먼저 파괴해야한다.

- 어떤 방식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우리 안에 파괴, 분열, 싸움, 증오, 살의가 일어나야 한다.

- 서로가 서로를 죽이자고 달려드는 진흙탕 싸움이 일어나야 한다.

- 그런 과정을 통해 상대방 관점에서 본 나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 그런 내가 얼마나 형편 없는 존재인지 깨달아야 한다.

- 그런 상호 파괴가 일어난 이후에야 비로소 참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이다.

- 파괴 없이 일어난 관계는 절대로 참 관계가 아니다. 이용 관계일 뿐이다.

- 오죽하면 관계의 신이신 예수님까지도 파괴를 일으키시겠는가!

이런 관계를 위해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신 것이다.

- 율법 파괴는 단순히 유대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바꾸라는 의미가 아니다.

- 그런 의미라면, 이미 기독교 안에 있는 우리에게 본문 메시지는 필요가 없다.

- 율법 파괴는 사람 파괴이고, '나' 파괴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 맺고, 사람과 관계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관계를 통해 생명을 얻어, 인간으로서 인간다움을 갖고 인간다움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 이것만이 구원이다. 다른 구원은 없다.

이런 큰 관점에서 본문의 눈먼 사람 눈 뜬 사건을 보자.


내용 정리

1-5절: 9장 전체 서론 - 눈먼 사람의 치유 사건의 의미

8장 끝에서 예수님은 죽음을 피해 성전을 나오셨다. 하지만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그러던 중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 말했지만, 눈먼 사람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 주체성 없이 주어진 상황에 반응만 할 뿐이다.

- 눈먼 사람의 반응을 통해 뭔가를 유추할 수 없다.

제자들은 이 질병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

- 이는 유대 전통이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이러한 전통을 지지하지 않는다.

- 욥기에서 욥이 질병을 갖게 된 것은 죄 때문이 아니었다.

- 욥기를 제대로 읽었으면, 유대 사람들은 이 전통을 부정했어야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 성경을 안읽었다. 마치 현 시대에 신앙을 가진 사람들처럼.

예수님은 이러한 전통 자체를 부정하신다. 질병은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3)

- 오히려 하나님의 일들을 드러내려는 수단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다.

- 질병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 단순히 장애인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방법으로 유대 전통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요 4: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들이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을 믿어 관계 맺는 것이다.

[요 6:28-29]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눈먼 사람이 날 때부터 눈이 멀었고, 이 타이밍에 치유가 되는 목적은 예수님을 드러내어 믿도록 하는 것에 있다.

이를 확장하면, 우리에게 우리 인생은 우리의 목적이며 본질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우리의 인생조차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다. 

- 우리 인생 전체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썩어 없어질 시간일 뿐이다.

-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예수님을 드러내어 믿도록 하는 것에 소모되고 폐기되는 도구일 뿐이다.

-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다. 주연은 예수님이다.

- 이것을 믿고 기억하는 것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삼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이렇게 인생이 예수님에 의해 소모되고 폐기될 때에만, 예수님에 의해서 나답게, 나로서, 내 인생의 참 주인공으로 살 수 있다.

- 그렇지 않은 삶은 세상에 의해 주입된 거짓 나로 살면서, 세상에 조종 당하며, 세상에 이용 당하며, 피만 쪽쪽 빨린 후 지옥으로 버려진다.

- 그래서 예수님이 그토록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3절의 '드러내다(phaneroó)'는 단어로, 빛(phṓs)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 직역하면 lighten, '빛나게 하다'정도가 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일들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데, 그 빛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4-5절에서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 이것이 예수님만의 독보적인 역할이고, 하나님의 한계이다.

그리고 빛의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낮과 밤의 비유를 사용하는데,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 낮과 밤은 빛의 유무에 따라 구분되는데, 낮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끝나고 밤이 된다.

-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은 언젠가 떠나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지 않는 때가 온다는 뜻이다.

- 그래서 아직 낮일 때, 그래서 예수님이 계실 때, 그래서 아직 하나님의 일이 드러날 수 있을 때,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일을 열심히 하라는 권면이다.

특히 이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얼마 앞두고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신 것이다.

- 예수님이 곧 죽으실 것이고,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질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 때가 되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전하라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 죽음 부활 이후 성령님께서 빛의 역할을 이어가시 때문에, 예수님이 죽는다고 당장 밤이 되는 것은 아니다.

- 하지만 성령의 시대인 현재는 언제든 밤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 성경의 세계관에서 성령의 시대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시기이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은 바로 이어져 있는데, 그 사이를 성령의 시대가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 종말은 당장 내일이라도 올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긴박함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이다.

6-7절: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치유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방법이 참 더럽다.

① 땅에 침을 뱉어서 ② 진흙을 개어 ③ 눈에 바르고 ④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 것이다.

- 본문 안에서 침과 진흙의 의미를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하지만, 맥락 안에서 보면, 유대 전통에서 금기하는 것이다.

- 침은 부정함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레 15:8)

예수님은 유대 전통을 파괴하기 위해 유대 전통이 금기시하는 방법으로 치유를 하신 것이다.

- 이후 16절에 나오지만, 이 날이 또 안식일이다.

- 예수님은 유대 전통이 금기시하는 방법으로, 금기하는 날에 치유를 행하신 것이다.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 이런 방법으로는 치유를 행하면 안되었다.

- 그러나 치유가 되었고, 이를 통해 이들에게 인식의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균열을 통해 자신이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갔을 것이다.

- 그러나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균열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정죄했을 것이다.

- 이러한 일은 지금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의 인식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

게다가 치유가 일어나는 결정적인 장소는 실로암 못이다.

-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성전 밖,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유일한 연못이다.

- 그런데 이름이 '보냄을 받았다'이다.

이 이름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요 3:34]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요 6: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따라서 치유의 주체는 침이나 진흙도 아니고, 눈먼 사람의 순종도 아니고, 실로암,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신 예수님이다.

- 눈먼 사람의 순종이 중요했다면, 적어도 치유 받은 즉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했지만, 눈먼 사람은 거의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8-12절: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 아무 것도 모름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설왕설래하기만 한다.

- 목격자들은 치유가 정말로 일어난 것인지조차 확실히 알지 못했다.

- 게다가 누가 어떻게 치유를 했는지는 더욱 알지 못했다.

치유 받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 이 사람은 자신이 치유 받았다는 것과 치유 받은 방법은 알았다. 모르는게 더 이상하다.

- 하지만 누가 치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

- 왜냐하면 애초부터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헛된 신앙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다.

- 우리 주변에서도 신비한 일들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신비한 일들은 일어난다. 

- 단, 우리가 모를 뿐이다. 안다고 해도 신비의 주체이신 예수님께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하고 계실 것이다.

- 본문에서도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믿도록 일하셨다.

- 동일한 예수님께서 지금도 똑같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아무도 모르게 일하시고 계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 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일하셔도 무시해버린다.

- 또한 기적의 유익에만 집중하여, 정작 기적의 주체되시는 예수님을 외면한다.

이러한 문제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상황과 조건은 바뀌지 않았다.

-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 어떻게 자신을 믿도록 하실까?

이 질문을 가지고 다음 본문을 고민해보자.


주제

치유의 의미 - 본문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말한다.

① 유대 전통 파괴

침, 진흙, 안식일이 그런 것이다.

- 유대 전통에서 금기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유대 전통에서 금기하는 방법으로 치유하심으로 유대 사람들의 인식에 균열을 일으키셨다.

유다 전통을 파괴하신 이유는? 

- 유대 사람이 유대 정체성을 가진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에서만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어 관계 맺을 수 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치유 하신 것이다.

②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고 믿도록

눈은 뜨는 것은 유대 전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 전통과 자신에 매여 있으면, 눈먼 사람처럼 눈 앞의 예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 전통과 우리를 파괴하시는 것이다.

- 전통과 우리를 파괴하여, 사람을 전통과 자신에서 건져내신 다음에, 예수님을 보고 듣고 믿도록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하나다. 

- 유대 전통 파괴와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같은 것이다.


결론

이렇게 항상 파괴와 믿음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 다른 말로,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 믿음을 위해 언제나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

- 믿음은 좋지만 파괴는 싫다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만약 누군가가 꼭 굳이 그래야 하냐는 질문을 한다면, 믿음을 위해 파괴가 필요아냐는 질문을 한다면?

- 파괴와 믿음의 원리는 단지 신앙의 원리가 아니라 이 세상 만물에 모두 해당되는 원리이다.

- 한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결혼 이전에 반드시 다른 모든 여자와의 관계를 파괴해야 한다.

- 피자를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킨 먹고 싶은 욕구를 파괴해야 한다.

- 돈을 벌기 위해서는 놀고 싶은 욕구를 반드시 파괴해야 한다.

- 예수님 믿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 믿고자 하는 욕구를 파괴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받아 들여야 한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이 파괴되는 살육의 현장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이후에만 부활과 생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