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78) 45:1-5 큰일 찾기를 그만두어라!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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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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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상상해 보자.
- 집에 불이 나서 모든 소유와 재산을 잃고,
- 사랑하는 가족은 전부 불타 죽었으며,
- 자신도 심각한 화상을 입어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는 중이라면,
-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일까, 재앙일까?
모든 것을 잃었기 때문에 재앙일까?
- 아니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상황에서도 생명을 건졌으니, 은혜일까?
우리가 정말 이런 처지에 놓였다면,
-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나님께 기도할까?
- 아니면 왜 모든 것을 빼앗아 가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주할까?
당연하다.
- 우리는 절대로 감사할 수 없다.
- 남겨진 생명은 은혜일 수 없다.
- 오히려 생명을 남겨두신 하나님을 원망한다.
- 이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다.
화상 치료의 끔찍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 평생을 일궈왔던 성과와 재산이 모두 불타 사라진 것도 별것 아니다.
- 가장 치명적인 것은, 온몸이 불에 휘감겨서 살려달라고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어가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오를 때이다.
- 또다시 내 몸이 불에 붙는듯한 고통이다.
- 실제 불은 끌 수 있지만, 마음에서 타는 불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꺼지지 않는다.
- 자신 역시 불타는 고통을 느꼈기에, 더욱 선명하다.
바룩의 심정
왜 이렇게 참혹한 상황을 상상해야 하냐?
-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한 바룩이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땅과 집을 잃었다.
- 조국과 민족을 잃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 그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봤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 이스라엘 민족을 돌이키기 위해 목숨 걸고 부르짖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 숭배와 같은 죄 때문이라고 외치며,
-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의 공격에서 구해줄 수 없다고 설득했고,
-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고 절규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 결국 하나님의 경고대로,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 그래서 땅, 집, 조국, 민족, 사랑하는 사람을 전부 잃었다.
땅, 집, 조국, 민족을 잃고, 이방 땅에서 아등바등 생존하기 위한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 평생을 일궈온 성과와 재산이 모두 불타 사라진 것도 별것 아니다.
-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벨론 군대에 무참히 짓밟혀 죽어가던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 젖은 얼굴이 눈을 감을 때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 그럴 때마다 바벨론 군대의 칼 끝이 내 목을 향했을 때의 공포가 밀려온다.
- 그럴 때마다 살려달라고 내 이름을 부르짖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찢는다.
그런데 더욱 가혹한 것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 차라리 그들과 함께 죽었다면,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과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을 텐데,
-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자괴감’을 느낀다.
그때 바룩은 이렇게 고백한다.
- 주님께서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다.
- 나는 탄식으로 죽을 지경이다.
[렘 45:3] 주님께서는 그대가 언젠가 ‘주님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구나. 나는 탄식으로 기진하였고, 마음 평안할 일이 없다’ 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계시오.
바룩은 이런 처지였다.
- 고통과 슬픔으로 인한 탄식.
-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인한 자괴감.
-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
이스라엘 멸망으로 인해 단순히 나라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 모든 소유와 재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넘어,
-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지고 박살 나서 으깨지는 과정을 낱낱이 경험하면서도,
- 차라리 죽었으면 고통도 끝났을 텐데,
-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아, 자기 존재가 부정되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상태이다.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처지에서 바룩이 무슨 기도를 하겠는가.
- 모든 사람이 죽은 시체 더미에서 살아남았으니, 감사하다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 많은 것을 잃었으나 목숨은 남았으니, 다행이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우리였다면,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지나가다 교회를 볼 때마다 침을 뱉지 않겠는가?
- 죽은 사람 살려내라며 하나님께 소리치지 않겠는가?
- 왜 나도 죽이지 않았냐며 부르짖지 않겠는가?
이 울분이 시간이 지난다고 사그라지겠는가?
- 수십 년이 지나도 불쑥 치밀어 오르지 않겠는가?
- 아무리 행복한 상황에서도 이 울분이 떠오르는 순간 눈물 바다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룩은 우리와 달리 점잖게 반응했다.
- 고통에 슬픔이 더하여 죽겠다고 기도했다.
- 엄청난 자기 절제와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기도이다.
이런 상황에 신앙을 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 만하다.
- 이런 괴로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 게다가 자기 괴로움까지만 고백하고, 그 괴로움의 원인이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신앙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심정
그런데 하나님은 생각이 다르다.
- 하나님은 바룩을 칭찬하지 않으신다.
- 칭찬은커녕 이해, 공감, 위로조차 하지 않으신다.
- 오히려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괴로움에 울부짖는 바룩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내 마음이다.
- 모든 것을 잃어서 괴롭다고?
-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소유한 것을 전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하나님이다.
- 내가 소유하고 있는 온 세상을 부수는 것도 내 마음이고, 세우는 것도 내 마음이다.
-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책망하신다.
[렘 45:4] 주님께서는 나더러, 그대 바룩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 주가 말한다.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 온 세상을 내가 이렇게 다스리거늘,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멸망으로 슬퍼하며 도움을 구하는 바룩을 책망하신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책망은 처음이 아니다.
- 14장에서 예레미야도 책망하셨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멸망하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을 듣고 슬퍼한다.
-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달라고 두 번 기도한다.
[렘 14:7]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렘 14:19~22] “주님은 유다를 완전히 내버리셨습니까? ・・・・ (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의 기도를 모두 책망하신다.
- 이스라엘은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책망하신다.
[렘 14:11]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바룩과 예레미야를 책망하실까?
-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 슬퍼하며 회복을 기대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
첫째로, 전후 사정 볼 것 없이, 바룩과 예레미야의 기대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뜻이다.
-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 하나님의 뜻이 옳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 따라서 이스라엘 멸망을 거부하며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 그러니 하나님께 책망받기에 합당하다.
둘째로, 이스라엘은 멸망을 통해서만 진정한 회복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이전까지 멸망 없이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려고 셀 수 없이 시도하셨다.
- 그러나 전부 실패하셨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에 빠져 있다.
이제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 없는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 경험하는 것이다.
- 그래서 다른 어떤 우상보다, 세상의 모든 가치보다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자발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우상과 세상 모든 가치를 절대 오물로 여기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뿐이다.
- 실제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셋째로, 바룩과 예레미야가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이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대한 이유는 자신을 이스라엘에 종속된 존재로만 인식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신의 멸망으로 착각했다.
-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 자기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 멸망을 그토록 슬퍼했던 것이고, 회복을 그토록 기대했다.
- 어떤 관점에서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은 우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착각하고 있는 바룩과 예레미야를 책망하신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자신까지 멸망한다는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종속된 거짓 정체성을 거둬내고,
- 자기다운 자기, 즉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책망 이후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해된다.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는 하나님 말씀의 뜻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을 더 하신다.
- 첫째로,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다.
- 둘째로, 생명 보호를 약속하신다.
[렘 45:5]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이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터인데 너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이 두 가지 말씀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개별적인 두 가지 말씀이 아니다.
- 큰일 찾기를 그만두기 위해서는 생명 보호가 보장되어야 한다.
- 왜냐하면 큰일을 찾는 이유가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생명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하게 만든다.
- 그래서 하나님까지 거부하게 한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다.
- 큰일 찾기가 하나님까지 거부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신 스스로 생명을 보호할 필요 없도록 하나님께서 생명 보호를 약속하신다.
- 그래서 더 이상 큰일 찾기를 할 필요 없도록 하신다.
풀어 말하면,
- 이 구절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큰일’의 뜻을 정의하는 것이다.
- 원어로도 'great thing'이라는 단순한 뜻이고,
- 앞뒤 구절에서도 이 단어를 규정할 단서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45장 전체 맥락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룩이 ‘큰일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 본문이 제시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 이스라엘 멸망으로 인한 고통, 슬픔, 탄식 때문이다.
- 그 고통을 스스로 해소하고 해결하기 위한 행위가 바로 ‘큰일’이다.
그렇게 볼 때, ‘큰일’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 왜냐하면 바룩이 현재 ‘큰 고통’에 빠져있고,
- 큰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큰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큰 고통’은 무엇이고, 큰 고통을 해결할 ‘큰일’은 무엇인가?
- 당연히 큰 고통은 이스라엘의 멸망이고,
- 큰 고통을 해결할 큰일은 이스라엘의 회복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룩은 큰일을 찾는 것이다.
-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바룩은 왜 이스라엘이 회복하기를 원하는가?
-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원했다.
-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이스라엘에 속한 자신도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자신도 멸망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믿음은 틀렸다.
- 이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물론 바룩은 이스라엘 민족이다.
-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예레미야와 함께 예언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바룩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의 일부이다.
- 바룩에게 이스라엘은 중요한 요소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바룩까지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바룩은 자신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못했다.
- 자신을 이스라엘이 종속된 존재로만 인식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과 독립된 자신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바룩이 자신을 바르게 알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 큰일 찾기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 큰일을 찾아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고, 바룩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큰일을 찾는 행위 자체가 자신에 대한 무지이기 때문이다.
바룩은 오직 바룩 자신을 통해 회복된다.
- 바룩을 덧싸고 있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때 바룩은 회복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룩이 이스라엘에서 벗어나고,
- 이스라엘과 자신을 구분할 수 있기를 바라셨다.
- 이스라엘의 회복과 자신의 회복을 구분 지어,
-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하지만,
- 그것과 상관없이 먼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 자신의 회복을 위해서도 노력하길 바라셨다.
그것이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는 말씀에 담긴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바룩이 이스라엘의 멸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다.
- 바룩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은 마치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
- 너무 오래도록 이스라엘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을 연결 지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 자신이 이스라엘과 분리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 불안감 때문에 더욱 이스라엘에 종속되었다.
우리의 심정
이 불안감을 우리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한다.
- 돈, 명예, 인정, 안정은 우상이라고 말한다.
- 그런 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말한다.
- 그러니 돈, 명예, 인정, 안정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당연히 돈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심각한 악영향을 주는지 잘 안다.
- 그래서 돈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돈이 없어지고, 그와 함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상황을 상상만 해도 불안하다.
- 사회에서 퇴출당하여, 아무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 같아 두렵다.
-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돈을 의지한다.
왜 그러냐?
- 현실에서 돈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 그 영향력 아래에서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 실제로 돈이 없어 육체적, 사회적 생명을 잃는 것처럼 보이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돈을 구한다.
- 돈과 자신의 생명을 연결해서 생각한다.
-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 돈과 분리된, 독립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바룩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자신도 멸망할 것으로 생각하듯,
- 많은 사람이 돈이 없으면 자신도 죽는다고 느낀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 우리가 돈과 분리된, 독립된 자기 자신의 가치, 있는 그대로의 정체성을 인식할 방법은 무엇인가?
- 그래서 담대하게 돈을 포기할 방법은 무엇인가?
돈, 명예, 인정, 안정이 없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이다.
- 돈과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의 정체성을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다.
그렇게 돈이 없어도 정체성과 생명이 보장될 때, 돈을 포기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 보호를 약속하신다.
[렘 45:5] ・・・・ 이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터인데 너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데 이 약속은 단지 살아 있게만 해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 우리에게 돈이 없어서 노숙하며 구걸하는 삶을 유지해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 바룩에게 상실감, 죄책감, 자괴감에 빠진 상태로 목숨만 건져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 보호 약속은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자신을 지키며 살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 이전에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가진 돈의 가치와 동일시했다.
- 그래서 가진 돈이 적으면 자신의 가치도 작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과 상관없는 자기 고유의 가치를 깨닫게 하신다.
- 그래서 돈 없이도 참된 자신을 발견하여, 진정으로 자기답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바룩도 마찬가지이다.
- 이전에 바룩은 자기 존재를 이스라엘의 존립과 동일시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자신도 파괴될 것으로 생각했다.
-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바룩에게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바룩 고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신다.
- 그래서 이스라엘 없어도 참된 자신을 발견하여, 자기답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이것이 생명 보호 약속의 참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없어지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우리와 바룩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 우리는 돈과 자신을 혼동하고, 바룩은 이스라엘과 자신을 혼동했다.
- 돈과 이스라엘은 자기 고유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돈과 이스라엘이 파괴될 때만 정체성이 순수하게 드러날 수 있다.
- 그렇게 정체성을 인식할 때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기다움을 용감하게 드러낼 수 있다.
성경의 또 다른 예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 엄청나게 반복된다.
- 몇 가지 예를 들면, 우선 바리새인이 있다.
- 그들은 자신과 율법을 동일시했다.
- 율법을 엄격하게 지켜서 율법의 가치가 올라갈 때 자기 가치도 오른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가치를 훼손하자, 자기 가치가 훼손된다고 생각했다.
-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가치를 훼손한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의 가치를 훼손하신 것은 바리새인을 위해서였다.
- 바리새인이 율법과 상관없는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그래서 자기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위해 ‘큰일’, 즉 율법 지키기를 그만두도록 하신 것이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이다.
- 베드로는 자신과 이스라엘의 독립을 동일시했다.
-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 자신도 회복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하실 메시아라고 믿고 헌신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독립하지 못하신 채 잡혀가셨다.
- 그렇게 베드로는 독립의 꿈을 박탈당했다.
- 동시에 이스라엘 독립으로 이룰 자신의 회복도 잃었다.
-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이다.
- 자신을 회복하는데 예수님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베드로는 자신을 발견한다.
- 우선, ‘거짓된 자신’을 발견한다.
- 자신이 자신과 이스라엘의 독립을 동일시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 자신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이스라엘 독립을 통한 자기 회복을 위해서라는 것을 깨닫는다.
-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음으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 자기 회복은 이스라엘 독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임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교회의 반석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 그래서 교회를 통해 자신이 회복될 것이며, 온 인류가 회복될 것임을 깨닫는다.
이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큰일’, 즉 이스라엘의 독립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구약에서 욥도 같은 경험을 한다.
- 욥은 모든 것을 잃는다.
- 실낱같은 목숨을 제외하고, 재산, 명예, 사랑하는 가족까지 전부 잃는다.
특히 친구들에게 신앙까지 비판받는다.
- 친구들은 욥이 모든 것을 잃은 이유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재앙이라고 정죄한다.
- 겉으로 보기에 욥이 아무리 의로워 보여도, 분명히 욥에게 죄가 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욥은 다른 것보다 죄인이라는 정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자신에게 임한 재앙은 죄 때문이 아니며,
-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여,
- 명예와 신앙을 되찾는 일에 열중한다.
- 이것이 욥에게 ‘큰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다가 오류에 빠진다.
- 자신은 의인인데, 알 수 없는 재앙에 빠졌고,
- 의인에게 부당한 재앙을 주신 하나님을 정죄하기에 이른다.
- 즉, 자신이 의인임을 주장하려다가, 하나님을 정죄하는 죄에 빠진다.
그때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 하나님은 욥에게 각종 기이한 일을 보여주시며,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신다.
- 하나님의 뜻은 한계를 가진 인간이 전부 알 수 없을 만큼 크고 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은 재앙의 이유가 죄 때문이라고 했던 친구들의 주장도 부정하시고,
- 동시에 끝까지 자신을 의인이라고 단정했던 욥의 주장도 부정하신다.
그제야 욥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는다.
- 그제야 하나님도 욥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이렇게 ‘큰일’, 즉 자신의 의로움 찾기를 그만둔 이후, 비로소 욥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
- 그리고 재산, 명예, 사랑하는 사람까지 전부 회복된다.
이 회복을 위해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예수님께도 똑같이 적용된다.
- 예수님은 자기 목숨과 인류 구원을 동일시했다.
- 자신이 살아남아 그리스도의 역할을 지속해야 인류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 그런데 자신이 죽으면 인류가 구원받지 못하면, 그러면 자기 존재도 의미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괴로워하며 주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었다.
- 자신이 죽어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믿었다.
- 또한 인류의 구원과 상관없이 자신은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 즉, 자신의 목숨과 인류 구원을 구분했다.
- 그래서 자신이 죽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과 정체성을 지키실 것을 믿었다.
- 그래서 용감하게 십자가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다.
그 결과 예수님은 두 가지를 모두 얻었다.
- 십자가 죽음으로 그토록 원했던 인류 구원을 이루셨다.
- 동시에 죽음 이후 부활로 생명을 보호받았을 뿐만 아니라,
- 그리스도라는 정체성도 자신과 온 인류에게 확립되었다.
- 즉, 예수님은 ‘큰일’, 인류 구원 찾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 오히려 생명을 얻고 정체성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인류 구원까지 이루셨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결국 바룩도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얻는다.
- 물론 바룩의 바람대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지 않는다.
- 바룩의 생전에 이스라엘로 귀환하여 성전이 재건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룩의 목숨을 지켜주시고,
- 예레미야의 조력자라는 정체성도 확립시켜 주신다.
- 게다가 바룩의 바람대로 이스라엘은 회복된다.
-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하신다.
이렇게 바룩도 ‘큰일’ 찾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에, ‘큰일’은 성취된다.
결론 - 왜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 하실까?
왜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둘 때만 모든 것을 회복하실까?
- 왜 하나님은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포기한 이유에 생명 보호, 정체성 회복, 소망을 이루실까?
이전에 이미 그 이유를 성경에 기반하여 충분히 설명했다.
- 그래서 이번에는 성경을 배재하고, 오직 ‘인간 보편 정서’에 기반해서 설명해 보겠다.
인간의 고통은 두 가지로 나뉜다.
-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통’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통’이다.
- 예를 들어, 사람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의 고통을 느낀다.
- 배고픔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만약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굶어 죽어서 인류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따라서 배고픔은 모든 인류가 느끼는 고통이고,
- 생명을 위협하는 고통이다.
- 반대로, 배고픔을 고통스러워하는 인류만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고통이라고 해도,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느낀다.
- 수중에 돈이 있고 근처에 식당이 있는 사람이 느끼는 배고픔의 고통과,
- 어떤 방법으로도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 느끼는 배고픔의 고통은 차원이 다르다.
- 전자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해결하는 데 필요한 노력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고,
- 후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한 절망감 때문에 생기는 고통이다.
- 따라서 전자는 불편함의 고통이고, 후자는 죽음의 고통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전자이다.
- 부자가 되고 싶고, 성공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유능해지고 싶은데,
- 그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 부자가 되기 위한 노력도 고통스럽지만, 부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견뎌내는 노력도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런 고통은 삶을 위협하지 않는다.
-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 부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 부자가 아닌 자신을 인정하고, 소소한 기쁨을 누리려고 노력하면 고통은 해소된다.
- 적어도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통은 어느 정도 해소된다.
- 예를 들어, 배고픔의 고통이 심할 때, 얼마 지나면 식당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기만 해도 고통은 완화된다.
따라서 이러한 고통은 분명히 고통스럽지만, 견딜 수 있는 고통이다.
- 그래서 엄밀한 관점에서 이러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 그냥 지나가는 일상이다.
- 하다못해 눈 앞에 방금 튀겨진 치킨을 먹기 위해서도 손을 뻗어 치킨을 집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 그러나 치킨을 집는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여기지 않듯,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그런데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은 다르다.
- 배가 고픈데, 음식을 구할 방법도 없고, 배고픔을 견딜 힘도 없다.
- 돈이 없는데, 돈을 벌 방법도 없고, 돈이 없는 현실을 버틸 힘도 없다.
- 대학 입학 시험을 못 봤는데, 다시 공부해서 재도전할 힘도 없고, 안 좋은 대학을 다닐 자신도 없다.
- 사업에 실패했는데, 다시 재기할 용기도 없고, 실패한 채로 지낼 자신도 없다.
이런 상황이 정말 고통이고, 인류가 문제로 느끼는 상황이다.
이때 사람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 첫째로, 삶을 포기한다.
- 삶이 주는 고통을 견딜 수 없기에, 삶을 버린다.
삶을 버리는 방법은 다양하다.
- 목숨을 끊기도 하고,
- 정신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며,
- 세상과 분리되어 산 속에 고립하기도 한다.
- 그러면 삶이 주는 고통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이 두 번째 선택을 한다.
- 그것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을 가정하고,
- 그 신을 통해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즉, 종교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류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해소하려는 노력이다.
- 사람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기에,
- 모든 인류에게 종교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만약 종교를 거부하는 집단이 있었다면,
- 그들에게 고통을 해소하는 방법은 자살, 정신병, 고립밖에 없기 때문에,
- 인류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종교는 인류에게 절실하고,
- 그 종교의 본질은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태생적으로 실패, 좌절, 절망의 고통을 다룰 수밖에 없다.
-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종교가 탄생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가치를 부여한다.
- 실패, 좌절, 절망을 진정한 회복의 핵심 과정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 그래야 해결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류가 생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는 죽음을 극복한 영웅을 신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다.
- 해결할 수 없는 죽음조차 해결한 신이라면, 해결할 수 없는 나의 문제도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서 죽고 부활한 예수님의 이야기는 인류가 생각해 낼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종교 형태이다.
- 간혹 죽음 부활 이야기가 어떤 인류도 생각하지 못한 기독교만의 신비로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 인류 역사에서 부활 이야기는 많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이유는 명확하다.
- 예수님이 제자들 구원에 실패하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에 빠지신 것은,
- 실패와 절망에 빠져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류와 공감하기 위해서이다.
- 이를 반대로 말하면, 실패와 절망에 빠진 인류는 실패와 절망에 빠진 신을 만들어서,
- 자신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래서 그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해결하는 신을 통해 자신의 고통도 해결될 것을 기대한다.
- 그 기대가 절망에 빠진 인류가 죽지 않고 버티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셔야 했다.
그렇다면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 왜 하나님은 ‘큰일’ 찾기를 그만두라 하시고,
- 왜 하나님은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포기한 이유에 생명 보호, 정체성 회복, 소망을 이루실까?
신의 탄생 목적이 큰일 찾기를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
- 간절히 소망하던 것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절망한 사람,
- 그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 당장 소망을 이룰 수 없지만,
- 그래서 상실감, 죄책감, 자괴감에 빠져있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힘을 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만을 위한 책이다.
이를 반대로 말하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 없는 사람은 성경에 공감할 수 없다.
-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을 조금 더 쉽게 해결하려는 사람에게 성경은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 현실에 많은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을 아직 감내할 만한데,
- 그래도 고통을 줄여서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 5:3~4]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 반대로, 실패와 좌절로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소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이 성경을 왜 읽는지 돌아보자.
- 해결할 수 있는 고통을 조금 더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 결국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 그래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절망에 빠져 있다면,
- 성경은 답을 줄 것이다.
- 원하는 것을 다 얻지는 못해도,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은 줄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목적이며,
-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목적이다.
- 포로가 되어 해결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