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71) 38:1~28 시드기야가 멸망한 이유 - 투항한 유다 사람들

안승준 2023. 11. 3. 22:3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본문의 단락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① 1~3절: 예레미야의 경고 예언 

- 이전과 같이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② 4~6절: 대화 1 - 예언에 대한 고관들과 시드기야의 대화

- 고관들이 예레미야의 사형을 요청하자, 시드기야는 무력하게 허락한다.

③ 7~13절: 대화 2 - 예레미야에 대한 에벳멜렉과 시드기야의 대화

-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의 구출을 요청하자, 시드기야는 허락한다.

④ 14~28절: 대화 3 - 예레미야와 시드기야의 대화

-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믿지 못한다.

 

단락 구분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본문이 부각하는 인물이 누구이냐이다.

- 예레미야와 시드기야, 그리고 고관들과 에벳멜렉이 나오지만,

- 명확하게 모든 대화에 시드기야가 나온다.

물론 중심 사건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예언으로 인한 투옥과 구출이다.

- 하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 사건을 두고 갈팡질팡하는 시드기야이다.

고관들, 에벳멜렉, 예레미야와 대화하는 시드기야의 말을 통해

- 시드기야 마음의 중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화 1 - 고관들과 시드기야의 대화

고관들은 예레미야서 전체에서 정죄 받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한다.

- 한마디로, 선민 사상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 멸망해서도 안 되고, 멸망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이 믿는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은 평안뿐이다.

- 평안 예언 외의 다른 모든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 비록 그 말씀이 하나님께 나왔다고 해도 말이다.

[렘 38:4] 대신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해서, 아직도 이 도성에 남아 있는 군인들의 사기와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재앙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그 착각 때문에 하나님의 멸망 심판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 멸망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한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예수님은 율법과 율법을 신성시하는 바리새인을 부정했다.

- 율법이 변질되어 율법의 참뜻을 잃었다고 정죄했다.

그러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고발하여, 결국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다.

 

바리새인과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똑같다.

- 바리새인은 율법을 신성시했고,

- 이스라엘의 고관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신성시했다.

물론 율법과 민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율법과 민족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선물을 신성시했다는 것이다.

- 그 결과 이전에 받은 하나님의 선물과 지금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상충하자,

-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선물만 고수했다.

그 고집과 집착 때문에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이고, 이스라엘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죄인의 전형이다.

-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죄인의 전형으로 삼지 않는다.

- 오히려 하나님을 열렬히 따르는 자들이다.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열렬히 따른다고 하면서,

-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비슷한 것’을 따른다.

- 대표적인 예로, 구약에서는 언약궤와 이스라엘 민족이고,

- 신약에서는 율법과 성전이다.

- 이들은 하나님 대신에 언약궤와 이스라엘 민족, 율법과 성전을 믿다가 멸망 심판을 받는다.

-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괘와 이스라엘 민족, 율법과 성전을 모두 파괴하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 비슷한 것’을 믿는 것조차 죄이며,

- ‘하나님 비슷한 것’을 믿는 이는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고 죽일 것을 경고하신다.

 

그러나 본문의 초점은 고관들이 아니라 시드기야에 있다.

- 시드기야는 죄인의 전형인 고관들에게 무력하게 휘둘린다.

- 그래서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고관들에게 예레미야를 내어주어 죽이도록 허락한다.

[렘 38:5] 시드기야 왕이 대답하였다. “그가 여기에 있소. 죽이든 살리든 그대들 뜻대로 하시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대들에게 반대하겠소.”

여기서 예레미야는 예수님과 달리 처형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대신 물웅덩이 속에 빠지기만 한다. 죽지 않는다.

그러나 물웅덩이는 교도소처럼 잠시 가둬두었다가 풀어주는 곳이 아니라,

- 굶어 죽을 때까지 가둬두는 곳이다.

- 즉, 예레미야는 말 그대로 처형당한 것이다.

[렘 38:9]  … 그들이 예레미야를 물웅덩이 속에 집어 넣었으니, 그가 그 속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따라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사형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시드기야는 왜 예레미야를 죽이도록 허락했을까?

단순하게 말하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믿지 않았다.

- 그래서 예레미야가 죽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시드기야가 무덤에서 일어나 반박할 것 같다.

- 자신은 하나님도, 예레미야도 믿었다고 말이다.

- 자신은 예레미야를 믿었기에 예레미야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었고,

- 그를 감옥에서 구출했다고 말이다.

맞다. 시드기야는 믿음이 있다.

- 단, 세상이 허락하는 한계까지만 말이다.

- 자신에게 손해가 없는 한계까지만 말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그 한계를 넘어서면, 믿지 않았다.

- 그래서 예레미야가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세상에 저항하지 않고 동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믿음이 없다.

 

자세히 말하면, 시드기야는 왕이었지만, 왕이라고 국가를 혼자 다스릴 수 없다.

- 고관들의 지지와 도움이 필요하다.

- 고관들 없이는 왕위 유지가 어렵다.

- 한 명의 고관은 힘이 약하지만, 

- 고관들이 뭉치면 왕에 대항할 힘을 갖는다.

- 그렇기 때문에 왕위가 고관들의 손에 달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드기야가 고관들과 다른 뜻을 가졌을 때,

- 왕이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 왕이 마음대로 하려면, 고관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만약 싸움에서 지면, 왕위를 빼앗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그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있을 때만 왕은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

용기가 없으면, 왕은 고관들에게 휩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문제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할 용기가 없었다.

-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지키고 싶었지만, 

-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요청하는 고관들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다.

- 예레미야를 지키다가 자신의 왕위가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 굳이 예레미야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를 포기한다.

그렇다면 시드기야가 예레미야를 전혀 믿지 않았냐?

- 아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믿었다.

- 그러나 자신이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믿었다.

-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믿었다.

그러나 안전이 훼손되고 왕위가 위협될 때는 바로 믿음을 포기했다.

- 예레미야를 죽이도록 허락했다.

- 이것이 시드기야의 실체이다.

성경은 이러한 믿음을 ‘반쪽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 없음’이라고 한다.

 

믿음의 진정성

우리가 ‘믿음’ 하면, 대상이나 사실을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거나,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죽고 부활하도록 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진정성을 갖기 어렵다.

- 왜냐하면 믿음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믿는다고 손해 보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믿음을 가져도 삶을 급격하게 바꿀 필요가 없다.

- 믿음을 가져도, 살던 집에서 안락하게 살 수 있고,

- 믿음을 가져도, 다니던 직장에서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고,

- 믿음을 가져도, 만나던 사람과 편안하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 믿음을 가져도,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 약간만 개선해도 교회에서 박수치고 난리가 난다.

- 믿음에 따른 변화를 개성 정도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믿음은 진정성을 갖기 어렵다.

 

따라서 믿음의 진정성은 역설적으로, 믿음이 아니라 ‘믿지 않음’으로 증명된다.

-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상을 믿지 않을 때 증명된다.

- 그래서 살던 집이 안락함을 보장해 주리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

- 다니던 직장이 안전함을 보장해 주리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

- 만나던 사람과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리라는 믿음을 포기할 때,

- 평생을 살아온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포기할 때,

- 그렇게 믿음을 포기할 때만 삶이 급격하게 변하고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치관과 라이프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 거짓말이다. 믿지 않는 것이다.

 

쉬운 예로, 부부는 서로에게 사랑 고백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다.

- 그러나 사랑 고백으로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없다.

- 외도하면서도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은 ‘사랑하지 않음’으로 증명된다.

- 배우자를 사랑하여, 다른 누구도 성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때만 사랑의 진정성이 드러난다.

- 사랑 고백을 백 번 해도, 외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 사랑 고백은 거짓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믿지 않음을 통해서 증명된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 외에 모든 것에도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포기할 때 증명된다.

 

그런 점에서 시드기야는 믿음이 있었다.

-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묻는다.

그러나 ‘믿음 없음’은 없었다.

-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을 믿는 믿음을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기 왕위도 믿었다.

- 자기 왕위를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 마치 배우자를 사랑하지만,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도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드기야는 믿음의 진정성이 없다고 확증할 수 있다.

 

대화 2 - 에벳멜렉과 시드기야의 대화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몇 안 되는 의인이다.

- 그는 시드기야와 달리 위협을 감수하고 예레미야를 구조한다.

- 그래서 결국 그는 시드기야와 달리 생명을 얻는다.

[렘 39:15~18] 예레미야가 여전히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6) “너는 저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에게 가서, 이와 같이 전하여라.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보아라, 내가 이 도성에 복이 아니라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포하였는데, 이제 내가 한 그 말을 이루겠다. 이 일이 바로 그 날에, 네가 보는 앞에서 일어날 것이지만, (17) 바로 그 날에 내가 너를 건져내어, 네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18) 오히려 내가 너를 반드시 구해서, 네가 칼에 죽지 않게 하겠다. 네가 나를 의지하였기 때문에, 내가 너의 생명을 너에게 상으로 준다. 나 주의 말이다.’

반면에 예레미야를 믿지 않은 시드기야는 비참하게 고통당한다.

[렘 39:6~7] 바빌로니아 왕은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바빌로니아 왕은 유다의 귀족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7) 그리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바빌론으로 끌고 가려고,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그런데 본문의 핵심은 에벳멜렉이 아니라 시드기야이다.

-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예레미야를 위해 군인까지 제공한다.

[렘 38:10] 그 때에 왕은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너는 여기 있는 군인들 가운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어서 그를 그 물웅덩이 속에서 끌어올려라.”

그래서 이 단락만 보면, 시드기야는 분명하게 의롭다.

- 에벳멜렉과 함께 하나님께 생명을 얻어야 마땅하다.

- 예레미야를 구출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성이다.

- 예레미야를 웅덩이에 넣은 주체가 누구인가?

- 바로 직전에 시드기야 자신이다.

- 자신이 가두고 자신이 구출했다.

따라서 구출 명령은 시드기야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 오히려 시드기야의 비겁함을 드러낸다.

 

시드기야는 왕의 권력으로 마음만 먹으면 예레미야를 구출할 수 있었다.

- 그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 그 능력을 본문은 증명한다.

그런데 바로 전 단락에서 예레미야를 구해주지 않는다.

-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 자기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 자신을 위해 비겁하게 예레미야의 생명을 팔아넘긴다.

 

이것이 에벳멜렉과의 차이이다.

- 에벳멜렉은 마음이 있어도 능력이 없다.

- 그래서 마음대로 예레미야를 구출할 수 없다.

- 에벳멜렉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왕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드기야는 마음대로 예레미야를 구출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시드기야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 시드기야의 행함을 통해 거꾸로 시드기야의 불성실함, 불의함, 비겁함을 보여준다.

 

대화 3 - 예레미야와 시드기야의 대화

본문의 메시지는 이전 대화와 다르지 않다.

- 시드기야의 불의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차이는 시드기야의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 이전의 두 대화에서 시드기야의 속마음은 감춰져 있다.

- 단지 웅덩이에 넣은 행위와 웅덩이에서 구출한 행위만 보여준다.

- 그래서 믿음과 믿음 없음을 오가는 겉모습만 보여준다.

- 그래서 시드기야의 실체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대화에서 시드기야는 자기 실체를 직접 드러낸다.

- 시드기야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을 보여준다.

 

시드기야의 내면을 보여주는 방법은 본문의 구조이다.

- 본문은 교차대구 구조이다.

a: 14~16절 -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요청

   b: 17~18절 -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

      c: 19절 - 시드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유 - 투항한 유다 사람들

   b’: 20~23절 -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 선포

a’: 24~28절 -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 선포 금지 요청

본문은 구조를 통해 c가 본문의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본문이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시드기야의 실체이다.

- 시드기야가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풀어 말하면,

- 예레미야는 b와 b’에서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 그것은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시드기야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를 구할 수 있고,

-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면, 시드기야 개인과 국가 전체가 파괴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일관성 없이 갈팡질팡한다.

- a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숨김없이 말하라고 한다.

[렘 38:14] 시드기야 왕은 사람을 보내어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주님의 성전 셋째 문 어귀로 데려왔다. 그리고 왕은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한 가지를 묻겠으니, 아무것도 나에게 숨기지 마시오.

- 그러나 a’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라고 말한다.

[렘 38:24] 그런데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시드기야는 왜 갈팡질팡하는가?

- c에서 그의 내면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그것은 ‘투항한 유다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렘 38:19] 그런데도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한 유다 사람들이 두렵소. 바빌로니아 군대가 나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면, 그들이 나를 학대할지도 모르지 않소?”

이것이 본문 전체의 핵심이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우면 갈팡질팡한다.

- 소신을 가지고 자기 주장을 고수하다가, 세상의 두려움 때문에 소신을 포기하기도 하고,

- 소신을 포기하고 세상에 타협하다가, 자기 자신을 잃는 두려움 때문에 다시 세상을 포기하기도 한다.

두려움의 실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 갈팡질팡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갈팡질팡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자신과 세상을 더욱 깊이 이해한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이상하다.

-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두려움의 실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 직관적으로 볼 때, 전쟁에서 항복하지 않는 이유는 나라를 잃는 것이 두렵거나, 적군에 의해 파괴당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 시드기야가 가장 두려워할 대상은 하나님 아니면 바벨론이어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투항한 유다 사람들’이 누구길래, 왕인 시드기야까지 두렵게 했으며,

- 시드기야는 왜 그들을 두려워했을까?

 

투항한 유다 사람들의 실체

추측하건대, ‘투항한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와 결탁하여 바벨론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 그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이익을 얻는 사람이다.

- 이를테면,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이스라엘의 고관이 된 로비스트이다.

- 그들은 이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지만,

- 바벨론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도움으로 바벨론에 저항하길 바랐다.

그리고 여전히 이집트가 바벨론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도 다시 돌아와, 

- 이집트를 통해 이스라엘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길 바랐다.

 

게다가 시드기야를 보좌하는 대부분 고관들도 이러한 친-이집트 세력이었다.

- 그래서 고관들은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항복하지 못하도록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투항한 유다 사람들'과 고관들과 같은 친-이집트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 그래서 시드기야도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 그래서 이집트를 버리고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요구를 묵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항복한다고 해도,

-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이스라엘 고관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 바벨론에 포진한 ‘투항한 유다 사람들’에 의해 학대당할 수밖에 없었다.

[렘 38:19] 그런데도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한 유다 사람들이 두렵소. 바빌로니아 군대가 나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면, 그들이 나를 학대할지도 모르지 않소?

이렇게 해석할 때만, 시드기야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 바벨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설명하며, 바벨론은 정복한 국가를 파괴하지 않았다.

- 만약 바벨론이 정복 전쟁을 한 이유가 국토를 넓히는 것이었다면,

- 정복한 국가를 파괴하고, 그곳에 새로운 바벨론 국가를 세워서 바벨론 사람을 이주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의 목적은 세금이었다.

- 세금을 거둬서, 바벨론 본토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 그러기 위해서 정복한 국가를 파괴하면 안 된다.

- 그들이 원활하게 생산 활동을 하도록 국가를 보존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바벨론은 정복한 국가의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했다.

- 그래야 생산성이 올라가서,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그들이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내정을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저항하면, 무력으로 진압했다.

- 이스라엘이 파괴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 계속해서 이집트와 결탁하여 바벨론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저항은 친-이집트 세력이 주도하였다.

- 왜냐하면 친-이집트 세력은 바벨론에 내는 세금을 바벨론이 아닌 이집트에 낼 때,

- 중간에 가로채서 자신의 배를 불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친-이집트 세력은 자기 유익을 위해 국가가 파괴되도록 한 이들이다.

- 일제 식민 시대에 친일파 매국노와 같다.

 

시드기야는 이미 이러한 현실을 알았다.

- 친-이집트 세력의 바람대로 이집트가 바벨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계속 이집트와 결탁하여 바벨론에 저항하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예레미야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이집트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멋대로 바벨론에 항복할 수도 없었다.

- 바벨론에 항복하면, 왕권을 잃는 것은 당연하고,

- 바벨론 포로로 먼저 가 있는 ‘투항한 유대 사람들’에게 학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시드기야가 갈팡질팡한 이유이다.

-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예레미야를 따라 이집트를 버리고 바벨론에 항복하자니,

- 이스라엘 고위층을 꽉 잡고 있는 친-이집트 세력이 두렵고,

- 정치적으로 판단하여, 고관들을 따라 이집트를 의지하여 바벨론에 저항하자니,

-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이 두려웠다.

 

무슨 선택을 해도, 시드기야는 왕위를 지킬 수 없었다.

-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 바벨론에 ‘자발적’으로 항복할 것인가?

- 아니면, 바벨론에 ‘비-자발적’으로 항복 당할 것인가?

물론 자발적으로 항복하면, 무고한 백성과 군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예레미야도 시드기야가 항복하면, 목숨과 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예언했다.

[렘 38:17] … ‘너는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여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너의 집안이 모두 살아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최악의 선택을 한다.

- 그것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이다.

- 그래서 비-자발적으로 항복 당하는 선택이다.

 

시드기야는 자신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친-이집트 세력을 선택하여, 예레미야를 죽여 없애지도 않았고,

- 바벨론 항복을 선택하여, 고관들을 내치고 예레미야를 따르지도 않았다.

- 꼭두각시가 되길 자처하여,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요청을 받으면 그렇게 했고,

- 예레미야를 살리라는 요청을 받으면 그렇게 했다.

[렘 38:5] 시드기야 왕이 대답하였다. “그가 여기에 있소. 죽이든 살리든 그대들 뜻대로 하시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대들에게 반대하겠소.

그런데 바로 시드기야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 그래서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최악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22절 비유 해석

그런 관점에서 볼 때 22절의 비유도 이해할 수 있다.

(22) 보십시오, 유다의 왕궁에 남아 있는 여인들이 모두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로 끌려가면서 이렇게 탄식할 것입니다. ‘믿던 도끼에 발 찍혔다. 친구들이 너를 속이고 멋대로 하다가, 네가 진창에 빠지니, 너를 버리고 떠났다.’

- 시드기야는 믿던 도끼, 즉 고관들에게 배신당한다.

- 고관들은 시드기야를 멋대로 속이다가, 결국 배신하고 돌아선다.

풀어 말하면,

- 고관들은 시드기야에게 이집트를 의지하고 바벨론에 저항해야 국가를 지킬 수 있다고 말했다.

- 그러나 이는 사실상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고관들이 이집트를 의지하라고 말한 것은, 

- 국가를 지키고 시드기야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이집트를 의지해야만 자신들에게 유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 즉, 고관들은 유익을 얻기 위해 시드기야를 속였다.

그런데 정작 국가가 바벨론에 멸망하면, 고관들은 어떻게 하냐?

- 자기 말에 책임지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면서 끝까지 왕을 돕냐?

- 아니다.

- 그들은 왕을 버리고 어떻게든 도망가서, 이집트 뒤에 숨는다.

- 그곳에서 호의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관들이 시드기야를 속였다고 표현한 것이다.

- 그리고 시드기야가 진창에 빠지니, 시드기야를 버리고 떠났다고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미 그것을 알았다.

- 이미 패권이 이집트를 떠나 바벨론에게 있다는 것을.

- 그래서 바벨론이 이집트보다 강하다는 것을.

-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영향력에서 떠나 바벨론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 그래서 바벨론에 저항하는 것은 무고한 백성과 군인을 희생하는 것이고,

- 바벨론에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것이 국가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러나 친-이집트 세력인 고관들은 현실에 역행하고 있었다.

- 계속해서 이집트를 의지하여 바벨론에 저항했다.

- 그것이 국가에 도움을 주지 않고, 무고한 백성과 군인만 희생시킨다는 것을 알았지만,

- 자신에게 유익을 주기에 같은 주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집트를 버리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한다.

[렘 39:1~2] 유다 왕 시드기야 제 구년 열째 달에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는데, (2) 시드기야 제 십일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

- 멸망의 원인은 다양하다.

- 당연히 시드기야 왕부터, 친-이집트 세력인 고관들, 왕과 고관들의 잘못된 선택을 고발하지 않은 거짓 예언자들, 그들의 선택을 비판하지 않고 침묵한 백성들,

- 그뿐만 아니라 이런 정치 지형을 남겨준 이전 왕들과 선조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런데 본문은 특히 시드기야를 주목한다.

 

왜 하필 시드기야인가?

본문은 시드기야의 어떤 점을 부각하는가?

- 역설적으로, 시드기야의 믿음을 부각한다.

- 예레미야를 구출하고, 예레미야의 말을 적극적으로 들으려 한 노력을 부각한다.

왜냐?

- 단순히 믿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시드기야가 멸망한 것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 시드기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썼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히려 시드기야에게 없었던 것은 ‘믿음 없음’이다.

- 시드기야는 세상에 대한 ‘믿음 없음’이 없었다.

- 그래서 왕위 유지를 포기하고 고관들을 물리쳐서,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았다.

- 그는 여전히 왕위를 가치 있게 여겼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

- 세상에 대한 믿음 없음이 함께 있을 때만 신앙을 지킬 수 있다.

 

결론 - 성경의 목적은 ‘죄 없음’이 아니라 ‘죄 인식’이다.

우리는 믿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신앙을 자랑스러워한다.

- 반면 성경은 믿지 않았던 순간을 열거하며, 우리를 정죄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옳은가?

- 믿었던 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운가?

- 아니면 믿지 않았던 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의한가?

비유로 말하면, 

- 깨끗한 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깨끗한 물인가?

- 아니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 많이 들어 있어도 오물이 들어 있으니 더러운 물인가?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그 안에 오물이 한 방울 들어가면, 그 물은 더러운 물이다.

- 누구도 깨끗한 물이 많이 들어 있으니, 깨끗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은 믿었던 순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 믿지 않았던 순간으로 결정된다.

 

이것 때문에 시드기야가 멸망한 것이다.

- 믿음으로 예레미야를 도운 순간이 많았지만,

- 믿음 없이 고관들에 휩쓸린 순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문이 시드기야를 조명한 이유이다.

 

성경에 대한 오해 - 죄 없음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성경을 오해한다.

- 성경이 믿음 없는 순간을 정죄하니,

- 성경의 목적을 믿음 없는 순간을 전부 없애서, 언제나 믿기만 하도록 하는 책이라고,

- 그래서 성경이 완벽한 믿음을 요구한다고 오해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오해이다.

- 성경은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 믿음 없는 순간을 없애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 믿음 없는 순간이 없는 사람만을 의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완벽한 의로움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 완벽한 의로움을 가지려는 것을 죄라고까지 말한다.

- 완벽한 의로움을 가지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믿지 않았던 순간을 정죄하냐?

- 완벽한 의로움을 가질 필요 없다면, 완벽한 의로움이 없다고 왜 정죄하냐?

성경의 목적은 ‘죄 없음’이 아니라 ‘죄 인식’이다.

- 우리에게 의로운 순간도 있지만, 불의한 순간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 죄를 인식하여,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때문이다.

- 좌절과 절망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죄 없음은 하나님과 관계를 파괴한다.

- 사람에게 죄가 없어지고 좌절과 절망에서 벗어나 버리면,

-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성경의 목적은 죄 인식이다.

-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를 정죄한다.

- 수천 가지 의로움이 있어도,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죄를 들쑤신다.

- 그 한 가지 죄가 수천 가지 의로움을 묵살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 시드기야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없앨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라고 깨닫게 한다.

-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잔혹한 정죄 안에서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경을 잘못 이해한다.

- 그래서 성경의 정죄를 듣고 불쾌해한다.

- 나름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에게 왜 굳이 나쁜 점만 찾아내어 괴롭히냐고 따진다.

- 왜 자신의 좋은 점은 칭찬하지 않냐고 따진다.

- 왜 자신이 수많은 좋은 점은 뒤로 하고, 나쁜 점만을 근거로 정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 그런 하나님을 폭력적이고 사랑이 없다고 비난한다.

애석하게도, 정죄가 싫고 의롭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이다.

- 하나님께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야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벗어나 멋대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죄에서 벗어나 의로움을 ‘획득’하여, 하나님을 ‘졸업’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죄를 받으니, 하나님을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하고,

- 그러려면 계속 하나님의 속박 안에서 자유가 박탈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속박된 삶에서 벗어나길 원하냐?

-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우리에게 돈, 명예, 인정, 안정 등 세상의 가치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 하나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세상의 가치가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세상에 대한 ‘믿음 없음’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 아니다.

- ‘믿음 없음’이다.

‘믿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이미 ‘믿음’을 가졌다.

- 하나님의 절대 가치를 안다.

그러니 이제 ‘믿음 없음’이 필요하다.

- 세상의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직 ‘믿음 없음’만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