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70) 37:1-21 예레미야를 구해준 시드기야 왕의 운명은?

안승준 2023. 10. 20. 22:3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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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의 남은 내용을 요약하면,

- 37~40장은 이스라엘의 멸망,

- 41~45장은 이스라엘 멸망 이후의 혼란,

- 46~51장은 주변 국가에 대한 예언,

- 52장은 요약 및 결론이다.

그러니까 45장까지 아홉 장이면 중요한 내용은 끝난다.

- 46장부터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국가의 이야기이다.

그런 점에서 37장부터는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결말 메시지에 해당한다.

- 예레미야서가 가장 마지막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 예레미야서가 반복했던 이스라엘의 죄일까, 하나님의 사랑일까, 아니면 그 외의 다른 것일까?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뉜다.

① 1~11절: 일관되게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레미야’

② 12~16절: 일관되게 예레미야의 예언을 거부하는 ‘이스라엘’

③ 17~21절: 앞에서는 침묵하지만, 뒤에서 예레미야를 구해주는 ‘시드기야’

- 물론 모든 단락에서 예레미야, 이스라엘, 시드기야가 상호작용하고 있지만,

- 단락마다 부각되는 주체가 다르다.

- 부각되는 주체에 따라 부각되는 메시지도 다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와 예레미야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서 시작부터 계속해서 대립했다.

- 그런 점에서 1~11절, 12~16절은 특별한 것이 없다.

- 예레미야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하고,

- 이스라엘은 일관되게 예레미야를 박해한다.

- 이는 예레미야서에서 셀 수 없이 반복되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시점이다.

- 현시점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일보 직전이다.

- 바벨론이 이미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이전 왕인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간 후,

- 시드기야가 새로운 왕이 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다.

- 그래서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파병을 요청했고,

- 예루살렘으로 출동한 이집트 군대를 처리하기 위해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잠시 떠난 시점이다.

[렘 37:5] 바로의 군대가 이미 이집트에서 출동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때였다.

 

이 때문에 시드기야를 비롯한 이스라엘 고관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 바벨론의 퇴각을 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전히 지키신다고 믿었다.

- 이 작은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이 절대 멸망할 수 없는 선민이라는 착각이 강화되었다.

그래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기까지 한다.

- 아마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도 멸망 예언을 철회하고 회복을 예언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렘 37:3] 그 때에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서, 자기들을 도와 그들의 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 기대와 달리, 예레미야는 일관되게 멸망을 예언한다.

[렘 37:7~8]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를 보내어 나에게 물어 보도록 한 유다 왕에게 너희는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를 도우려고 출동한 바로의 군대는 제 나라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8)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는 다시 와서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질러 버릴 것이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 오히려 착각 때문에 심각한 부작용이 생겼다.

-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를 더욱 믿지 않게 되었다.

-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을 넘어, 예레미야를 이스라엘을 반역한 바벨론의 앞잡이라고 생각했다.

-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예언했으니, 그런 오해를 들을 만도 하다.

[렘 37:13] 그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 곳에 한 수문장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냐의 손자이며 셀레먀의 아들로서, 이리야라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예언자 예레미야를 붙들고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바빌로니아 군인들에게 투항하러 가고 있소.”

 

이렇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욱 멀어진다.

- 이러한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벌어져서,

- 결국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 멸망을 자초하는 데까지 이른다.

 

정리하면, 본문은 그동안 계속 그랬던 것처럼 두 가지를 강조한다.

-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의로움과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계속해서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강조한다.

-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서 시작부터 계속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본문의 중심은 아니다.

-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보조 도구이다.

 

본문이 부각하는 것은 이스라엘도, 예레미야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 시드기야이다.

- 이스라엘의 죄와 예레미야의 의 사이에서 시드기야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 그것을 본문은 17~21절에서 말한다.

 

시드기야는 갈팡질팡한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렘 37:3] 그 때에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서, 자기들을 도와 그들의 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투옥된 예레미야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다.

[렘 37:17] 하루는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그에게 은밀히 물어 보았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습니까?” 그 때에 예레미야가 대답하였다.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가 참혹한 감옥에서 안전한 근위대 뜰에서 지내도록 배려한다.

[렘 37:21] 시드기야 왕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그 도성에서 양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빵 만드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빵을 매일 한 덩이씩 가져다가 예레미야에게 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당시 감옥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도소가 아니다.

- 난방, 냉방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음식과 물조차 없다.

-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굶어 죽는다는 뜻이다.

[렘 37:20] 그러니 이제 부디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높으신 임금님, 부디 저의 간구를 받아 주셔서, 저를 다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거기에 가면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

 

시드기야는 그런 곳에서 예레미야를 구해주었다.

- 이동에 제약은 있었지만, 음식을 공급하여 생명을 지켜주었다.

이렇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신뢰했다.

- 그가 하는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다.

- 예레미야에게 두 번이나 하나님의 뜻을 묻고, 이스라엘의 멸망 예언을 듣지만,

-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

-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렘 37:2] 그런데 왕이나 그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 특히 예레미야가 예언 때문에 투옥될 때 방관한다.

[렘 37:15~16] 고관들은 예레미야에게 화를 내며, 그를 때린 다음에, 서기관 요나단의 관저에 있는 구치소에 예레미야를 감금시켰다. 그 때에는 그 집이 감옥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6) 그 곳에는 지하 감옥이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거기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시드기야는 도대체 왜 이럴까?

그는 예레미야를 믿었을까, 믿지 않았을까?

-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했을까, 거부했을까?

- 그는 이스라엘의 죄에 가까울까, 예레미야의 의에 가까울까?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모습은 예레미야의 의에 가까워 보인다.

-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예레미야가 투옥될 때 방관하는 모습은 이스라엘의 죄에 가까워 보인다.

시드기야는 죄와 의 중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

 

결론부터 말해서, 시드기야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 이스라엘의 죄에 완전히 빠져들지도 않고,

- 예레미야의 의에 완전히 동참하지도 않는다.

-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고,

- 예레미야가 의를 외칠 때 마음으로만 동조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다르게 말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저항하기 위해 이집트에 도움을 구할 때 동참하고,

- 반면에 예레미야가 투옥되어 죽어갈 때 감옥에서 꺼내어 음식을 제공한다.

이런 시드기야를 성경은 어떻게 규정할까?

 

성경은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시드기야를 ‘죄인’으로 규정한다.

- 근거는 명확하다.

-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항복하면, 시드기야 뿐만 아니라 가족과 민족까지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렘 38:17] 그러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말하였다. “주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임금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바빌로니아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여야 한다. 그러면 너는 너의 목숨을 구하고, 이 도성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와 너의 집안이 모두 살아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 그래서 자신, 가족, 민족이 전부 파괴된다.

[렘 39:5~7]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여,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를 사로잡아, 하맛 땅의 리블라로 끌고 가서,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앞에 세워 놓았다. 바빌로니아 왕이 시드기야를 신문하였다. (6) 바빌로니아 왕은 리블라에서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바빌로니아 왕은 유다의 귀족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7) 그리고 왕은 시드기야의 두 눈을 뺀 다음에, 바빌론으로 끌고 가려고, 그를 쇠사슬로 묶었다.

이렇게 성경은 시드기야의 멸망을 통해 그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시드기야는 다른 고관들처럼 예레미야를 직접 박해하지 않았다.

- 이전 왕인 여호야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불태워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투옥된 예레미야를 구해주었다.

- 여러 차례 예레미야를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묻는 열정까지 보여줬다.

 

이런 행동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이 행동 때문에 예레미야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 주변 고관들에게 예레미야와 같은 바벨론 앞잡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었다.

- 그 비난을 감수하고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찾아간 것이다.

- 분명히 용기 있고 소신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았다.

- 끝까지 바벨론에 저항했다.

 

도대체 시드기야는 왜 이랬을까?

- 그 이유에 대한 단서가 38장에 나온다.

- 고관들이 멸망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자, 시드기야는 이렇게 대답한다.

[렘 38:5] 시드기야 왕이 대답하였다. “그가 여기에 있소. 죽이든 살리든 그대들 뜻대로 하시오. 나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대들에게 반대하겠소.”

즉,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 그래서 예레미야를 신뢰했다.

- 신뢰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물었다.

그러나 현실의 압박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 현실 앞에서 믿음을 포기했다.

- 주변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이고 바벨론에 저항하기를 압박하자, 순응한다.

-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현실에 타협한다.

이것이 시드기야가 정죄당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이것 때문에 시드기야의 태도가 애매해 보이는 것이다.

- 시드기야는 이스라엘 고관들과 달랐다.

- 고관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관심조차 없었다.

- 그러나 시드기야는 주의 깊게 듣고 이해했다.

-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그런데 믿음에 한계가 있었다.

- 자기 왕위가 훼손되지 않는 한계 안에서만 유효했다.

- 왕위가 훼손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믿음을 포기했다.

이러한 점이 시드기야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도 하고, 없는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시드기야와 같은 예는 성경에 많다.

가장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죽음 부활 이전의 제자들이다.

-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고,

- 삼 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다.

- 제자들의 노력과 열정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에 한계가 있었다.

- 자기 목숨이 지켜지는 한계 안에서만,

-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민족을 독립하고자 하는 소망 안에서만 유효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잡히시자, 모두 예수님을 떠난다.

- 예수님과 함께 잡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 그리고 예수님이 민족을 독립하실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믿음을 포기한다.

이렇게 십자가 이전 제자들은 믿음이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또 다른 예로, 빌라도 총독이다.

-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 게다가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요 19:7~8]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총독 지위가 위협받자, 예수님을 죽이도록 허락한다.

 

과연 우리는 십자가 이전의 제자들과 총독 빌라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 아니면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지만, 믿음에 한계가 있었고, 

- 결국 믿음을 포기했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말할 필요도 없다.

 

믿음은 이런 것이다.

- 99% 믿어도, 1%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 99가지 영역에서 예수님을 믿어도, 한 가지 영역에서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 이전 제자들도, 총독 빌라도도, 시드기야도 99% 믿었다.

- 그래서 믿음대로 살기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 우리는 99%씩이나 믿은 그들에게 감탄한다.

- 그러나 성경은 99%밖에 믿지 못한 그들을 정죄한다.

시드기야를 통해 99%의 믿음을 가진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죄 받는 시드기야를 보면 찝찝하다.

우리 중 누구도 당당하게 시드기야를 옹호하며 죄 없다고 변호해 줄 사람도 없지만,

- 반대로 시드기야를 정죄하며 멸망 심판이 마땅하다고 말할 사람도 없다.

- 시드기야를 자신 있게 의인이라고 칭송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 반대로 시드기야가 비참하게 심판받을 만큼 죄인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우리가 보기에, 시드기야는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 열정을 보였다.

- 주변 고관들이 새파랗게 눈을 뜨고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 예레미야 편에 서는 것이 왕의 지위에 타격을 주는 상황에서,

- 예레미야와 끊임없이 접촉했다.

- 예레미야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줬다.

우리는 과연 한 번이라도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는가?

- 신앙을 위해 시드기야처럼 용기를 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점에서 시드기야는 상당히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

 

이런 시드기야에게 의의 면류관을 씌워줄 수는 없지만,

- 죄인이라고 낙인찍을 수 있을까?

그래서 성경이 시드기야를 참혹한 죄인 취급하면, 찝찝하다.

 

특히 더 찝찝한 것은 시드기야에서 우리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 누구도 자신을 무조건 구원받아야 할 의인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대부분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죄인이라 단정하면, 불쾌하다.

- 의인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 그렇다고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억울하다.

그 이유는 우리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없는 시간 쪼개서 신앙생활 하고 있고,

- 사람들 눈치 보면서 밥 먹기 전에 기도하고,

- 힘겹게 번 돈의 일부를 헌금으로 내고 있다.

이것이 충분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 이것이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한다면, 섭섭하다.

- 신앙을 위해 애써온 삶을 부정하는 것 같다.

 

이렇게 찝찝하고, 억울하고, 섭섭한 감정이 들 때 드는 전형적인 질문이 있다.

-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더 요구하시는가?

- 얼마나 더 헌신해야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 하나님은 우리가 거지가 되어 길에 나앉아야 만족해하시는 분인가?

-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정해두시고,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고 전부 지옥에 보내시려는 분 아닌가?

-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이라면, 과연 그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할까?

이런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결국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의와 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시드기야가 많은 선행에도 결국 죄인으로 규정된 이유는 무엇인가?

- 왜 시드기야가 행한 노력은 부정되고, 잘못만 부각되는가?

 

답은 명확하다.

- 하나님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나머지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겼느냐이다.

- 비록 이 기준대로 행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 적어도 이 기준에 근거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했냐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이 이 기준대로 행하도록 기도했냐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단순히 좋은 분, 강한 분, 귀한 분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 게다가 최고 좋은 분, 최고 강한 분, 최고 귀한 분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을 독보적인 분으로 정의한다.

- 유일하게 좋은 분, 유일하게 강한 분, 유일하게 귀한 분으로 정의하고,

- 나머지 모든 것을 나쁜 것, 약한 것, 하찮은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을 믿는 것이 의와 죄를 나누는 기준이다.

 

그런 점에서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좋은 분, 강한 분, 귀한 분으로 여겼다.

- 그랬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다가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물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독보적이고 유일한 분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 하나님도 소중하지만, 하나님 외에 왕의 지위도 소중히 여겼다.

하나님과 왕의 지위 중에 어느 것을 더 소중히 여겼냐는 중요하지 않다.

- 비록 하나님을 최고에 두고, 왕의 지위를 그다음으로 두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 왕의 지위를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겼다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독보적이고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겼다.

- 그러나 하나님을 유일하게 소중한 분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드기야는 왕의 지위를 유일하게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 그러나 왕의 지위를 어느 정도 소중히 여겼다.

이것이 시드기야가 죄인인 이유이다.

 

성경이 구분하는 네 가지 분류

성경은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① 명확한 의인: 예레미야

- 대표적인 의인이다.

② 명확한 죄인: 이스라엘 고관들

- 대표적인 죄인이다.

③ 애매한 죄인: 시드기야

- 하나님을 향한 나름의 열정이 있지만, 결국 죄인이 된다.

④ 애매한 의인: 사마리아 여인

- 아무런 열정 없이 절망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의인이 된다.

이렇게 예레미야와 이스라엘 고관들은 양 끝에 위치하고,

- 시드기야와 사마리아 여인은 가운데 위치한다.

 

이 분류는 두 가지 비교를 통해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① 예레미야 vs 이스라엘 고관들(양극단의 비교)

- 명확한 의인과 명확한 죄인을 비교한다.

- 이를 통해 의인과 죄인을 구체화한다.

의인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따른다.

- 물론 중간에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 그래서 하나님과 갈등한다.

- 그러나 결국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하나님을 따른다.

- 박해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멸망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반면에 악인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거부한다.

- 장기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유익이지만,

- 당장의 유익에 눈이 멀어 해로운 선택을 한다.

- 하나님은 계속해서 해로운 선택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시지만, 그들은 고집부린다.

- 그래서 결국 하나님과 관계도 멀어지고, 자기 자신도 파괴하게 된다.

-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멸망의 주범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한다.

- 첫째로, 의인으로 사는 과정에는 실패, 시련, 좌절이 있어서 힘들다.

- 그러나 마지막에는 참된 회복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

- 둘째로, 악인으로 살면, 당장 유익을 얻을 수 있어서 편하다.

- 그러나 결국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잃고 파괴된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서는 예레미야와 이스라엘 고관들을 비교하며,

- 의인과 악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그래서 의인이 되지 못하면, 죄인이 되어 모든 것을 잃고 파괴된다고 경고한다.

 

② 사마리아 여인 vs 시드기야(애매한 부류 간의 비교)

사마리아 여인은 드러나는 선행을 하지 않았다.

- 오히려 그는 이방인에다가 남편이 여럿인 부정한 삶을 살았다.

반면에 시드기야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 예레미야를 구해주기까지 한다.

- 게다가 그는 이스라엘의 왕까지 오른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사마리아 여인은 불의하고, 시드기야는 의롭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차이는 무의미하다.

- 의와 죄를 나누는 기준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 내면의 차이가 의와 죄를 나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했다.

- 즉, 그는 물동이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고,

- 오직 예수님만 절대 가치로 여겼다.

- 그래서 의인이 되었다.

반면에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 즉, 그는 왕위를 여전히 가치 있게 여겼고,

- 이는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죄인이 되었다.

 

이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내면의 차이가 의와 죄를 나누는 기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 겉으로 보기에는 시드기야가 사마리아 여인보다 나아 보인다.

- 그러나 실상은 시드기야는 죄인, 사마리아 여인은 의인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고관들과 시드기야를 비교하면,

- 시드기야가 더 나아 보인다.

- 그러나 실상은 둘 다 똑같은 죄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분류를 잘못 이해한다.

예레미야같이 명확한 의인을 보며, 

- 저런 의로운 삶은 선택받은 소수만이 할 수 있고,

-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은 저렇게 극단적인 의로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예레미야와는 다르지만, 자신도 충분히 의롭다고 자위한다.

이스라엘 고관들같이 명확한 죄인을 보며, 

- 우리는 저렇게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 나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저들처럼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 고관들과 달리, 자신은 충분히 의롭다고 착각한다.

즉, 우리는 자신을 예레미야와도, 이스라엘 고관들과도 구분한다.

- 이를 통해 자신은 충분히 의롭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 예레미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예레미야처럼 죽음을 감내해야 한다.

- 그리고 우리의 실상은 이스라엘 고관들과 똑같다.

- 그러니 지금처럼 계속 하나님을 부정하고 거부하면, 이스라엘 고관들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즉, 성경은 우리를 예레미야와도, 이스라엘 고관들과도 동일시한다.

- 이를 통해 우리가 죽음을 감내하지 않고,

- 죽음이 두려워 하나님을 부정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것이 성경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 우리를 예레미야와 동일시하여 의롭게 살도록 독려하고,

- 이스라엘 고관들과 동일시하여 죄에서 벗어나도록 독려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한다.

- 예레미야와 자신을 구분해서, 현실에 타협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 이스라엘 고관들과 구분해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부정한다.

그래서 아무런 변화 없이 살던 대로 사는 자기 삶을 긍정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죄이다.

- 죄를 많이 짓더라도 죄를 자각하면, 변화 가능성이 있다.

-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적게 짓더라도 자각하지 못하면, 변화 가능성이 없다.

- 적은 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많아질 것이고,

- 많아진 이후에도 여전히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 행위 자체보다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죄’가 더 악질이다.

- 변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죄 받는 시드기야를 보면 우리가 찝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해서 ‘정죄감’이다.

- 시드기야가 정죄 받을 때 우리도 정죄 받기 때문이다.

- 시드기야가 왕위를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예레미야를 도운 것처럼,

- 우리도 지금 누리는 안락함을 지킬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신앙생활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시드기야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 마찬가지로 우리도 안락함을 지키기 위해 예레미야와 같은 극단적인 순종을 거부하고 있다.

그 결과 시드기야는 눈앞에서 자녀들이 처형당하고, 두 눈이 뽑히는 재앙을 당한다.

-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그와 같은 파괴와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한다.

이 경고가 찝찝한 이유이다.

 

하지만 찝찝함을 더욱 자극하는 것이 있다.

- 만약 성경의 경고를 듣고, 찝찝함을 느껴서, 자기 죄를 깨달아, 

- 하나님만 절대 가치로 여기고, 나머지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기로 다짐한다면,

- 찝찝함은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동기가 된다.

- 그렇게 동기를 부여하려는 것이 예레미야서의 목적이다.

그러나 찝찝함이 찝찝함으로 지속되는 이유는,

- 새로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다.

- 지금 누리는 안락함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 안락한 일상 역시 가치 있다고 여기는 확신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악질적인 죄 때문이다.

-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죄’, 더 나아가, ‘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죄’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은 시드기야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한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라.

- 그것만이 하나님을 절대 가치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나 시드기야처럼 여전히 하나님 외의 것을 가치 있게 여기면,

-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다.

- 결국 완전히 파괴되어 멸망할 것이다.

 

결론 - ‘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 이것이 정말 골치 아픈 부분이다.

- 그래서 ‘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죄’를 악질이라고 말한 것이다.

얼마나 악질이냐면?

- 하나님도 하실 수 없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멸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 그것을 하도록 동기 부여하는 것이 성경이다.

- 예레미야의 극단적인 의로움을 통해 예레미야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의 불의함을 드러내고,

-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불의함을 통해 이스라엘처럼 사는 우리의 불의함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 의로움의 주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말이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절대 오물임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 가치임을 인정하도록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 셀 수 없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정죄하며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지만,

- 그 말을 듣고 자기 죄를 인식하고 돌이키는 사람이 예레미야서에 나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멸망한다.

멸망은 단순히 물질적 손해, 정신적 타격, 사회적 명예 실추, 육체적 손상 정도가 아니다.

- 말 그대로 멸망이다.

- 가진 것을 전부 잃고, 정신이 나가고, 세상에서 배제되고, 생명을 빼앗기는 것이다.

- 단순히 지금보다 고통이 조금 더 늘어나는 수준이 아니라,

-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단지 상징이 아니다.

-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하나님은 뭐 하시냐?

하나님은 언제나 같은 것 한 가지만 바라신다.

- 우리가 ‘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길 바라신다.

멸망 이전에는 멸망 경고를 통해 죄를 인식하길 바라시고,

- 멸망 이후에는 멸망을 통해 죄를 인식하길 바라신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멸망 이후 죄를 인식했다.

-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죄 인식하기를 거부했는지 깨닫는다.

- 그 깨달음이 포로기 동안 예레미야서를 기록하도록 한 동기가 된다.

- 예레미야서를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 인식하기를 거부했는지 고발하여,

-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있는 상황에라도 죄를 인식하라고 촉구한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창세부터 종말까지 하실 일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이스라엘도 회복한다.

- 다시 영토로 돌아와, 성전을 세우고, 율법에 따라 제사를 지낸다.

-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들을 이스라엘답게 행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일을 행하실 것이다.

- 멸망을 통해 우리 죄를 인식하도록 하실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도 회복되고, 우리다움도 회복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유일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