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5) 8:48-59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결정적인 이유

안승준 2019. 6. 24. 11:49

지난 본문 설명에서 이런 말을 했다.

- 영생불사, 전지전능, 완전한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은 한없이 만족하실 줄 알았는데, 홀로 계신 하나님은 불만족하실 수도 있겠다.

요점은 영생불사, 전지전능, 완전한 자유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 하나님께 이러한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지고 계신다.

- 다만 '결정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능력을 '항상' 보이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능력을 숨기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 그 의도와 이유는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전지전능하신 능력만을 기대하면, 우리는 반드시 실망하기 마련이다.

-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부지불능 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능력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면 안된다.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 기억하자. 예수님의 모습은 그냥 좀 유별난 아저씨일 뿐이다. 이걸 잊으면 유대 사람 꼴 된다.

이런 오해는 굉장히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하나님 뿐만 아니라 사람을 판단할 때도 동일하다.

- 누군가가 성령 충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도, 우리는 쉽게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 그 사람이 똑똑하고, 전도도 잘하고, 교회 부흥시키고, 교회 일을 잘하면, 성령 충만하여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 물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훌륭한 능력을 가진 경우도 있다. 

-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이다.

- 게다가 능력은 출중해서 교회를 부흥시켰지만, 예수님과 관계 없어 지옥에 떨어질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러한 예는 너무 많아서 언급할 필요도 없다.

- 이런 사람들은 자기도 천국에 못가면서 다른 사람까지 방해하는 사람이다.(눅 11:52)

이렇게 능력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죄인의 본질된 속성이다.

- 왜냐하면 그 능력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이다. 

-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상관 없다. 얼마나 유익이 되느냐만 중요하다.

-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능력'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도 도움이 되면 믿고, 도움이 안되면 버린다.

- 이것이 구약 역사 전체에서 사람이 보여준 라이프 스타일이다. 죄인의 전형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결정적인 이유, 하나님을 판단하는 기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일관성있게 보여주시는 유일한 모습은 뭐냐?

- 짐작했겠지만 '관계'이다.

-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존재, 특히 우리 사람과 관계 맺으려고 하신다. 

- 사람을 절대로 이용하려 하시지 않고, 우리와 그저 함께 하고 싶어하신다.

- 이것이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한,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의 독보적인 속성이다.

- 하나님께 얼마나 관계가 중요한지, 존재의 형태가 삼위일체, 즉 세 분의 '관계'로 존재하시기까지 하신다.

- 이렇게 정의가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20세기 초 칼바르트로 시작된 현대 신학의 흐름 속에 많은 학자들 안에서 논의되고 공감되는 주제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알겠는데, 관계가 하나님을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냐고 말할 수 있다.

- 나 역시 이 질문을 수년 동안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 언젠가 생각이 바뀌어, 관계보다 더 중요한 속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관계의 모델이라고 생각되는 부부 관계, 부모 자식 관계를 경험할수록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이 세상에 관계다운 관계가 얼마나 없는지 더 알게 된다.

- 관계에서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용에 시선이 가면, 얼마나 쉽게 관계가 깨지는지 본다.

- 그리고 부부, 부모 자식 관계라도 참 관계를 맺는 관계는 찾을 수가 없다. 이용 관계 뿐이다.

- 그럴수록 하나님의 본질이 관계라는 것에 더 확신이 생긴다.

물론 그렇다고 어떤 관계에서도 서로를 이용하면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 하나님조차 예수님을 이용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셔서 복음을 전하신다.

- 우리도 하나님을 이용해야만 숨도 쉬고 밥도 먹는다. 우리가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우리가 하나님 이용해서 살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예수님, 하나님-사람, 부-부, 부모-자식, 성도-성도 관계 모두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결국 모두 기브앤테이크 관계이다.

- 단, 무엇을 위한 기브앤테이크냐가 중요하다. 관계를 위해서냐, 유익을 위해서냐.

게다가 이번 본문에서도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 본문은 예수님을 다음 세 가지로 정의한다.

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시는 유일한 분(50, 54)

② 하나님을 아시는 유일한 분(55)

③ 아브라함 이전부터 '내가 곧 나' 즉 하나님이신 분(58)

예수님은 기적의 능력으로도, 지혜로운 가르침으로도, 사람들에 대한 자비로도 설명될 수 없다.

-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훌륭한 성인 중 하나일 뿐이다.

-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설명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친한 분이시다.

- 그래서 하나님께 ①인정과 존중을 받고, ②하나님을 너무 잘 알아서, ③하나님과 구분조차 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것 하나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유일한 이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이유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 대부분 예수님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 죄 용서 능력, 자유케 하시는 능력, 구원의 능력, 부활의 능력, 치유의 능력 등.

물론 예수님은 이런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에게 능력을 발휘하실 것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능력을 숨기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으실 것이다.

- 특히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모든 능력을 숨기셨다.

-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조롱했다.(막 15:32)

우리도 여전히 자신에게 아무 기적도 일으키시지 않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관심도 갖지 않고,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죄, 즉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죄를 드러내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관계가 무엇인지 알려주실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사람과도 참 관계 맺을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 결국 이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 다 구원이고 생명이다.

본문은 계속해서 능력만을 구하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최측근이야.

- 이 설명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 없어.

- 예수님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거야.

- 이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진짜 예수님과 관계 맺는 거야.

그러니 본문을 통해 이용에서 벗어나 관계로 돌이키자.


내용 정리

48절: 당신은 누구시오?① -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사람

지난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셨다.

- 혈통을 기준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는 악마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다.

- 이유는 하나님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며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 이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이는 악마의 자식만 하는 짓이다.

그에 대한 반박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논박하기보다는 인신공격을 한다.

-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사람으로 매도한다.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이라는 주장은 복음서 전체에 나온다.

- 예수님께 신비한 능력만 있었다면, 귀인으로 추앙받았을 것이고, 요상한 말씀만 하셨다면, 정신 병자로 무시당하셨을텐데, 신비한 능력과 요상한 말씀이 결합되어 그런 소문이 났던 것 같다.

또한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한다.

- 그런데 이는 성경에서 이 부분에서만 나오는 것이고, 이렇게 말한 이유 설명이 전혀 없다.

- 그래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고 폄하하려는 의도이다.

그들은 인신공격을 통해 예수님의 저주 말씀을 무시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신공격, 즉 말이 아닌 사람에 초점을 둔 공격을 기회 삼아 예수님은 자기 존재의 본질을 선포하신다.

49-51절: 예수님의 본질① - 나는 아버지를 공경하고, 아버지는 나를 위해 영광을 구해 주신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말하기 방식은 '선포'이다.

- 우리에게는 논증 방식이 더 친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방식은 불편하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리는 논증될 수 없다. 논증될 수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를 '공경'하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모욕', 즉 공경하지 않는다.

-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다른 사람 역시 공경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어서 '영광'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다.

- 처음에 '공경'에서 '영광'으로 키워드가 바뀌어서 이해가 안되었다.

- 해설서에도 적절한 설명이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헤매다가 찾은 것이, 이 두 단어가 한 세트라는 것이다.

[계 4:11]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공경)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많이 쓰이는 단어가 '영광과 존귀'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찬양하신다. 반면 자신 스스로를 찬양하시지 않는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찬양 받도록 하신다. 또한 스스로를 찬양하시지 않는다.

-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은 서로 찬양, 즉 영광과 존귀를 주고 받으시는 기브앤테이크 관계다.

이것이 하나님과 독보적인 관계를 맺고 계신 예수님의 첫 번째 본질이다. - 상호 영광 관계

그리고 같은 말씀을 54절에서도 반복하신다.

-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영광 받으신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께 공경과 영광을 드리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을 주신다.(50)

- 왜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예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 받아 죽어 마땅한 사람에게 죽음을 피할 방법도 제안하신다.

- 그것은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것이다.(51)

51절은 요한복음의 단골 멘트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

[요 5: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요 6:47]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생을 가지고 있다.

- 이로 보아,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 들음, 깨달음에 초점이 있다.

게다가 '지키다'는 번역하면 keep이다.

-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다'는 행위적 의미와 '간직하여 기억하다'는 인지적 의미 둘 다 가능하다.

그런데 지켜야 할 예수님의 말씀은 24, 28절의 '나는 곧 나'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 이는 행위가 아닌 인지적인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인정하는 것이다.

- 예수님의 말,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독보적 관계를 가지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으로 인한 죽음을 겪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52-53절: 당신은 누구시오?② -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사람

유대 사람들은, 항상 그렇듯, 예수님께서 하신 중요한 말씀은 하나도 안듣고 말꼬리만 잡는다.

- 다른 말은 무시하고, '영원히'만 듣는다.

그것을 근거로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인 아브라함, 그리고 예언자보다 위대하냐?고 반문한다.

- 그들조차 다 죽었는데, 감히 당신이 '영원'을 이야기하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알겠다.'고 단정지어 말한다.

그리고 조롱조로 스스로를 누구라고 하는지 묻는다.

- 이 기회를 틈타 예수님은 또 다시 자신의 본질을 밝히신다.

54-56절: 예수님의 본질② - 나는 아버지를 안다.

54절에서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보다 더 위대하다'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님을 밝히신다.

- 자신을 영광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영광되게 높이신다.

- 자신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광되게 하셨기 때문일 뿐이다.

다음으로, 55절 단 한 절에서 '알다'라는 단어가 4회나 나온다.

-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이 자신을 '안다'고 단정한 말에 초점을 두고 반박하신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잘못' 알았다.

- 그런데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다.(8:19)

-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계신다.

- '지킨다'는 의미는 역시 행위가 아니라 믿음, 깨달음에 초점을 둔 단어다.(51, 55)

- 하나님을 아시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도 아신다.

이렇게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 예수님이 독보적으로 가지신 두 번째 본질이다. - 하나님을 앎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하신다.(56)

-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신다.

- 아브라함이 '나의 날'을 보리라고 기대하였고(미래), 보고 기뻐하였다(과거).

아브라함은 미래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대 뿐만 아니라, 이미 오신 예수님에 대한 기쁨까지 있었다.

-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선견지명이 있었는지에 대한 구약의 근거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아버지 아브라함조차도 예수님을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심을 인정하심으로 유대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신다.

57절: 당신은 누구시오?③ - 나이

아브라함보다 자신을 위대하다고 하신 예수님께 유대 사람들은 나이를 가지고 반박한다.

- 아브라함은 2000년 전 사람인데, 50살도 안된 당신이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있냐는 것이다.

- 아마도 50세가 이 당시 최고 연장자를 대표하는 나이였던 것 같다.

58절: 예수님의 본질③ - 나는 곧 나이다.

예수님은 짧지만 강력한 말씀으로 결론을 내신다.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 Before Abraham was, I am.

-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나는 곧 나이다.

-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구로 또 다시 자신을 소개한다.(24, 28)

이것이 예수님의 독보적인 세 번째 본질이다. - 하나님 자신

이 대답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유대 사람들이 나이에 대해 질문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의미도 되며,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 바로 그 분이라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유대 사람들 입장에서 자기 민족의 기원인 아브라함을 모욕하는 동시에 하나님까지 모독하는 최악의 멘트였다.

59절: 결론 - 돌 던짐

예수님에 대한 살의가 점점 더 커진다.

-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기 시작하여(5:18), 은밀한 시도를 하다가(7:1), 본격적으로 체포 영장을 발부하고(7:32),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도 한다(8:6). 

- 그러다가 이제는 정말 죽이려고 돌을 들기까지 한다.

- 12장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러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이다.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의 육체적 혈통과 영적인 상태를 모두 저주했으니, 예수님이 죽임 당하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 누구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주제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하는 본질 세 가지이다.

①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하시는 유일한 분

- 영광이란 말은 존중, 인정의 뜻을 갖는다. 

-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존중, 인정하셔서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뜻이다.

- 예수님은 인류 전체에서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고 계신 유일한 분이시다.

②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분

-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올바로 알고 참으로 인정하신다.

- 이 역시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계신 유일한 분이라는 뜻이다.

③ 하나님 그 자체

-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의 깊이가 깊어서 하나님과 구분할 수조차 없이 완전히 일치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 이 역시 관계다.

이렇게 본문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명에 대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유일하신 분이라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관계 맺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참 관계를 맺은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했다. 

-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수님과 관계 맺은 사람은 곧 하나님과도 관계 맺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다.

-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유일한 중보자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길, 진리, 생명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많은 것을 기대한다.

- 구원, 생명, 천국부터 죄 용서, 자유, 치유, 해방 등.

모두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되서는 안된다.

-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들이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 이런 것에 집중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이다.

예수님이 오신 진짜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이다.

-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서 하나님과 관계 맺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럼 또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다.

- 사람은 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 무엇을 위해 하나님과 관계 맺어야 하는가?

나도 가끔 하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정말 너무 슬픈 질문이다.

- 이는 마치 결혼해서 한참 잘 살고 있는 부부 중 한 사람이 문득 '내가 이 사람이랑 왜 결혼했지?', '무엇을 위해 이 사람이랑 결혼했지?'라고 질문하는 것 같다.

- 이 질문은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할 때 하는 굉장히 슬픈 질문이다.

- 이 질문을 한다는 것은 부부 관계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징조이다.

알겠지만, 이 질문들에 정답은 "없다."이다.

- 결혼한 이유가 없어야 하고, 아무 목적도 없이 결혼해야 한다.

- 그냥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 뿐이다. 

- 결혼의 유일한 이유는 상대에 대한 관심뿐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 맺어야 하는 이유 역시 반드시 없어야 한다.

- 단지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 

- 그냥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피조물임을 잊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 사람의 본능이기도 하고, 사탄 마귀의 영향력 때문이기도 하다.

-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린 것이다.

해법은? 문제의 원인이 나의 본능과 사탄 마귀이니, 나 자신과 싸우고 사탄 마귀와 싸우는 것일까?

- 당연히 아니다.

본문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만 영원히 죽지 않는다.

- 나 자신과 사탄 마귀와 아무리 싸워도 소용 없다.

-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달아 아는 것 뿐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 예수님과 똑같이 된다. 

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②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될 것이다.

③ 우리는 하나님과 구분할 수 없을만큼 하나가 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조금씩 맺어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

그리고 종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게'(엡 4:13)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관계 맺어,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만 관심 갖으며, 하나님으로만 사는 것이다. 

- 이것만이 영생이며 구원이고 생명이다.

- 그래서 나는 천국을 하나님 계신 것 외에는 척박하고 궁핍하고 메마른 곳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하나님 밖에 없으니까.

따라서 천국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 천국 갔는데, 하나님께 관심 없어서 영원토록 지루하고 궁핍하면 그게 더 큰일이다.

그러니 하나님께만 초점을 두고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바라고,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만 초점을 두고 예수님과만 관계 맺기 바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