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69) 36:9-32 멸망 심판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

안승준 2023. 10. 7. 22:48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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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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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죄이다.

- 특히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김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 여호야김 왕의 죄가 명확해야 그에게 내려지는 심판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 그는 죄로 인해 다윗의 왕좌에서 배제되고, 부정하게 죽는 심판을 받는다.

[렘 36:30]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두고서 나 주가 말한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 것이다.

여호야김 왕의 죄는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 이를 보면 그에게 내려진 가혹한 심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렘 36:23] 그런데 여후디가 그 두루마리에서 서너 칸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읽은 부분을 서기관의 칼로 잘라 내어서, 난로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왕은 온 두루마리를 다 난로 불에 태웠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 이스라엘 멸망 원인을 진단하고 회복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예레미야서 전체의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김의 죄를 부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상하다.

- 여호야김 왕의 죄는 23~26절이 전부이다.

- 두루마리를 듣고, 불태워 버린 후, 두루마리를 기록한 바룩과 예레미야를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전부이다.

- 여호야김 왕의 죄를 부각하지 않고, 최대한 요약해서 설명한다.

대신에 다른 것을 부각한다.

- 그것이 9~20절까지이다.

-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야김 왕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부각한다.

- 그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눠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더욱 이상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과정에 누구도 죄를 짓지 않는다.

-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다.

- 그리고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한다.

- 그래서 모두 그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렘 36:16] 그들은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놀라 서로 쳐다보며, 바룩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모두 임금님께 꼭 아뢰어야 하겠소.

 

이것이 본문의 특징이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 특히 이스라엘의 왕 여호야김의 죄를 고발한다.

- 죄 고발을 통해 이스라엘에 내려진 멸망 심판이 얼마나 합당한지 증명한다.

- 그것이 34~36장의 일관된 메시지이다.

그런데 죄를 고발하기 위해 죄를 부각하지 않는다.

- 오히려 죄 자체는 감추고, 그 주변을 부각한다.

-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여 무겁게 여기는 모습을 부각한다.

- 마치 가운데 있는 검은 점을 부각하기 위해 검은 점은 놔두고 주변 배경을 더욱 하얗게 만드는 것과 같다.

이를 통해 여호야김 왕의 죄를 부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돋보이게 만든다.

 

나는 이것을 굉장히 효율적인 문학 기법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기법을 통해 적은 글자로 풍성하고 강력하게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낸다.

풀어 말하면, 

- 여호야김 왕은 명백하고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한다.

- 두루마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린다.

- 이 행위의 의미는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선명하다.

그래서 본문은 행위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 본문은 여호야김 왕의 태도를 설명하지 않는다.

- 여호야김 왕의 행위만 간결하게 효율적으로 설명한다.

 

대신에 여호야김 왕의 주변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 너무 자세해서 이상할 정도이다.

- 나는 처음 본문을 읽을 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 장소가 계속 바뀌고,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알 수 없는 내용이 반복되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장소와 등장인물이 바뀔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점차 여호야김 왕에게 다가간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가 계속 바뀐다.

처음 장소는 ‘성전’이다.

[렘 36:10] 바룩은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모든 백성에게 예레미야가 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낭독하였다. 그가 낭독한 곳은 서기관 사반의 아들 그마랴의 방이었고, 그 방은 주님의 성전 ‘새 대문’ 어귀의 위 뜰에 있었다.

다음 장소는 ‘왕궁’이다.

[렘 36:11~12] 그 때에 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가 두루마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12) 왕궁에 있는 서기관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장소는 ‘왕궁의 뜰’이다.

[렘 36:20] 그리고 고관들은 그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보관하여 두고, 왕궁의 뜰로 들어가서, 왕에게 이르러, 그 말을 모두 왕에게 전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점차 왕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야김 왕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든 등장인물이 나온다.

처음에는 ‘바룩’이다.

[렘 36:10] 바룩은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가서, 모든 백성에게 예레미야가 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낭독하였다.

-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기록한 사람이다.

- 예레미야가 부탁한 대로 성전에서 두루마리를 읽었다.

다음은 ‘미가야’이다.

[렘 36:11] 그 때에 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가 두루마리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렘 36:13] 미가야는, 바룩이 백성에게 책을 낭독하여 들려줄 때에 들은 모든 말을, 그들에게 전달하였다.

- 그는 바룩이 두루마리를 낭독했던 방의 주인인 그마랴의 아들이다.

- 고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다음은 ‘엘리사마, 들라야, 엘라단, 그마랴, 시드기야’이다.

[렘 36:12] 왕궁에 있는 서기관의 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그 곳에는 모든 고관이 모여 있었다. 곧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 등 모든 고관이 앉아 있었다.

[렘 36:16] 그들은 그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놀라 서로 쳐다보며, 바룩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 말씀을 모두 임금님께 꼭 아뢰어야 하겠소.

[렘 36:20] 그리고 고관들은 그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보관하여 두고, 왕궁의 뜰로 들어가서, 왕에게 이르러, 그 말을 모두 왕에게 전하였다.

- 그들은 고관, 즉 왕의 측근으로 왕과 함께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이들이다.

- 두루마리를 듣고 그 말씀을 왕에게 전달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한다.

마지막으로 ‘여후디’이다.

[렘 36:21] 전하는 말을 들은 왕은 여후디를 보내어 그 두루마리를 가져 오게 하였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서 있는 모든 고관들 앞에서 낭독하여 들려주었다.

- 그는 왕실의 관리인으로 왕과 고관의 명령에 따르는 사람이다.

- 드디어 왕에게 두루마리를 읽어 준다.

 

이렇게 본문은 여호야김 왕이 아닌 장소와 등장인물을 부각한다.

- 장소 세 곳과 등장인물 여덟 명이 나온다.

- 하나님의 말씀은 여덟 명의 인물을 통해 세 번의 장소를 바꾸며 왕에게 다가간다.

- 하나님의 말씀이 왕에게 전해지는 것에 사람과 장소가 총동원된다.

- 사람과 장소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딱 하나만 빼고 말이다.

- 바로 여호야김 왕 말이다.

- 여호야김 왕만 그 질서에서 벗어나 멋대로 움직인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데,

- 여호야김 왕만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여 움직인다.

 

이것이 본문의 표현 방식이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 특히 여호야김 왕의 죄를 고발한다.

- 여호야김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는지 보여준다.

그것을 위해 본문은 여호야김 왕 외의 모든 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보여준다.

 

이는 두 가지 상반된 메시지를 동시에 전한다.

- 첫째로, 여호야김 왕을 필두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는지 고발한다.

- 둘째로, 여호야김 왕을 제외한 세상 전체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보여준다.

 

왜 본문은 상반된 두 가지 메시지를 전하는가?

이스라엘의 거부와 세상의 순종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주는가?

 

이유는 두 가지이다.

- 첫 번째 이유는 쉽고 단순하다.

- 이스라엘의 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세상의 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거부를 더욱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설명하고,

-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바벨론 포로로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이는 본문을 읽으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 세상의 순종을 부각했다.

- 그러나 그 외에도 세상의 순종 없이 이스라엘의 죄 자체를 자세하기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여호야김 왕이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리는 행위 설명과 함께,

- 이전부터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했는지와 두루마리를 불태운 후 얼마나 심각한 악행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하는 방법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방법이 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왜일까?

 

바로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죄를 정확하게 알아야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과 멀어졌는지 알 수 있고,

- 그래야 우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경은 많은 부분을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데 할애한다.

- 어떤 면에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죄짓고 실패한 역사이다.

그런데 죄를 고발하는 것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 마치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결국 부모가 비난받는 것과 같다.

- 이스라엘이 그렇게 심각한 죄를 범할 때까지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셨냐며,

-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의 죄를 부각한다.

- 그런데 이스라엘의 죄가 부각되면, 하나님의 능력이 훼손된다.

- 하나님께 정말 전능하신 창조주가 맞냐는 의심이 생긴다.

- 그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다.

즉,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하는데,

- 오히려 죄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다.

 

이 모순이 신정론 논쟁을 일으키는 핵심이다.

- 성경의 하나님이 참되고 바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죄를 부각했는데,

- 결국 죄 때문에 하나님이 부정되는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정론, 즉 성경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맞냐는 논쟁이 생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본문은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부각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죄를 간접적으로 부각한다.

- 이스라엘의 죄보다 세상의 순종을 부각한다.

이 방식의 목적은 명확하다.

- 죄를 부각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 또한 강조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멋대로 행동한다.

- 따라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은 멸망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 그러니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제 안으로 돌아올 때 회복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이 경고에는 이스라엘을 통제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능력이 전제된다.

- 그래서 하나님이 부정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것을 위해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각한다.

- 하나님이 세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지 강조한다.

-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를 전한다.

그것이 바로 9~20절이다.

- 여덟 명이 동원되어, 세 차례나 반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 그만큼 하나님이 세상을 섬세하고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신다.

-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야김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된다.

- 이는 하나님이 얼마나 전능하신지,

-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 하나님의 능력을 총동원하고, 세상의 장소와 인물을 총동원하여,

- 여호야김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신다.

- 그래서 여호야김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완벽하게 행하신다.

[렘 36:3]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이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불태워 버린다.

-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몰라서가 아니라,

- 정확하게 눈과 귀로 듣고 보고서도 거부한다.

그래서 여호야김 왕이 다윗의 왕좌에서 배제되며 부정한 죽음이 예고되고,

- 그 이후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하는 것이다.

[렘 36:30~31]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두고서 나 주가 말한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 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 것이다. (31) 나는 이렇게,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내가 경고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내가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

 

결론 - 하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사랑하신다.

본문은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한다.

- 첫째로,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다.

- 둘째로, 하나님은 죄인조차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많은 사람이 오해한다.

- 단순히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이라고 속단한다.

- 하나님은 죄가 있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속히 죄를 없애버리길 원하시고,

- 죄를 없애기 위해 죄인을 심판하여 제거하신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아니다.

-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지도, 죄를 견딜 수 없지도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죄에 관심이 없다.

 

만약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시고, 죄가 있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면,

-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

- 죄가 하나님께 영향을 줄 만큼 강하다는 뜻이고,

- 하나님이 죄에 영향받을 만큼 약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무 강해서, 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

-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기조차 하지 않는다.

- 하나님은 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 마치 우리가 지나가는 날파리에 관심이 없듯이 말이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관심 갖고 영향받는 대상은 사람이다.

- 하나님은 너무 완전해서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창조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이지만,

- 그래서 세상을 창조할 필요가 없지만,

-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할 사람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사람이고,

- 하나님은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으신다.

사람과 관계 맺고 교제하길 원하시고,

-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관계를 끊으면,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신다.

즉, 하나님의 괴로움 포인트는 죄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이유도 명확하다.

- 죄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다.

- 죄가 싫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 죄인조차 사랑하셔서, 그 죄인을 돌이키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 심판은 죄인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 고백이다.

 

만약 하나님이 정말 죄를 싫어하신다면,

- 본문에 나온 사건은 있을 수 없다.

- 이미 이전에 하나님은 여호야김 왕을 심판하여 제거하셨어야 했다.

- 왜냐하면 이미 이전부터 여호야김 왕은 셀 수 없이 죄를 지어 악한 길에 있었기 때문이다.

[렘 36:3]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길에서 죄를 짓는 여호야김 왕을 제거하지 않으셨다.

- 그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먼저 다가가신다.

- 그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말이다.

- 아직 죄인이 회개도 하지 않은, 말 그대로 죄인인데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

-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다.

하나님은 죄인조차 사랑하신다.

- 그래서 죄인에게 끝까지 다가가시는 것이다.

- 죄인을 악한 길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말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 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 하나님께 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 하나님은 죄인에게 돌진하신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 하나님이 정말 여호야김 왕을 사랑하셨다면, 왜 여호야김 왕을 다윗의 왕좌에서 배제하시고 부정하게 죽게 하시는가?

- 여호야김 왕이 돌아오지 않아도 용서하셔야 하는 것 아닌가?

- 하나님이 정말 사랑이라면, 왜 지옥이 있을까?

- 아무리 죄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죄를 용서하고 천국에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 여호야김 왕이 죄 때문에 부정하게 죽는 심판 예고를 받았어도,

- 만약 그 예고가 성취되어 죽기 전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께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한다면,

- 반드시 심판 예고는 취소되고, 용서받아 천국에 갔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죄인인 여호야김 왕을 사랑해서 돌이키기 위해 두루마리를 보내신 것처럼, 

- 심판 예고 역시 여호야김 왕을 정말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 심판 예고를 듣고서라도 회개하길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심판 예고는 사랑 고백이다.

 

그런데도 여호야김 왕이 심판 예고대로 부정하게 죽는 이유는,

- 무엇보다 여호야김 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 부정한 죽음을 원했다기보다, 하나님을 거역하여 마음껏 죄짓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과 사랑하기보다, 자신이 왕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부정한 죽음은 그 지배욕이 부른 참상이다.

- 지배욕으로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부정하면,

- 다른 사람도 그를 짓누르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 겉으로는 왕 앞에서 순종하는 척하지만,

- 속으로는 왕을 제거하려는 계략을 꾸미는 사람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 속에 있는 여호야김 왕이 비명횡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 즉, 여호야김 왕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기보다, 자신의 선택 때문이다.

- 하나님은 여호야김 왕의 선택으로 인한 뻔한 결과를 내다보신 것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 예고는 하나님이 의지를 드러낸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의지는 여호야김 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다.

- 그런데 여호야김 왕이 계속해서 지배욕을 표출하면,

- 하나님의 의지와 달리 주변 사람에 의해 죽임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죽지 말고 살라고 말이다.

- 지배욕을 버리고 사랑하라고 말이다.

-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부정하지 말고, 존중하고 세우라고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 어떻게든 한 명이라도 사람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애절함이다.

물론 누구나 멸망 심판에서 직관적으로 사랑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 멸망 심판이 주는 거부감이 있다.

- 그래서 멸망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과 구분하는 오해가 생기기 쉽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멸망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연결할 수 있다.

- 멸망 심판 메시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 멸망 심판을 예고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예고가 틀리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 그래서 멸망하지 않고 회복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은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담은 것이다.

-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시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죄인조차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처음부터 용서이고 사랑이었다.

- 심판과 죽음이 아니었다.

[렘 36:3] 내가 유다 백성에게 내리기로 작정한 모든 재앙을 그들이 듣고, 혹시 저마다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면, 나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

 

이것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 포로가 되어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 오히려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한다.

- 그러니 이제라도 돌아와라.

- 이제라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죄와 허물을 용서받는 것은 당연하고,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풍요로움, 충만함, 평안함을 누릴 것이며,

-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

 

만약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처럼 자신이 실패했다고 좌절한 사람이 있다면,

- 그래서 그 실패와 좌절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다면,

- 본문은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패와 좌절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 실패와 좌절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사랑 고백이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오직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 응답하는 것뿐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 모든 것이 박탈된 광야가 사실은 하나님과 밀애를 나누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