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67) 35:1-19 신실한 레갑 사람들과 대비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실함 - 신정론

안승준 2023. 9. 9. 10:15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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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메시지는 지극히 단순하다.

- 지난 본문에 나온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다시 강조하는 것뿐이다.

- 지난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근거로 강조했다면,

- 이번 본문에서는 레갑 사람들의 선행을 근거로 강조한다.

 

한마디로, 레갑 사람들은 수백 년 전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령한 것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렘 35:6]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자손도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셀 수 없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조차 거부한다.

[렘 35:14~16]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 이렇게 엄수되고 있다. 그 자손은 조상이 내린 명령에 순종해서, 이 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15) 나는 내 종 예언자들을 모두 너희에게 보내고, 또 거듭하여 보내면서 권고하였다. 각자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행실을 고치고,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쫓아다니지 말라고 하였고, 그래야만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16)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조상이 자기들에게 명령한 분부를 그렇게 엄수하는데, 이 백성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심판받아 멸망하는 것은 마땅하다.

[렘 35:17]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예고한 모든 재앙을 그대로 내리겠다. 내가 그들에게 말을 해도 그들이 듣지 않고, 내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문은 이스라엘을 필두로 인류 전체를 정죄한다.

-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의심조차 할 수 없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고 정죄한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평안하고 행복하도록 하신 말씀을 거부한다고 정죄한다.

- 특히 레갑 사람들을 내세워서,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 농토, 곡식의 씨를 소유하지 않으며, 평생 장막에 사는 등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까지 수백 년 동안 순종했는데,

- 충분히 할 수 있고, 단순하고 쉬우며, 손해는커녕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를 정죄한다.

동시에 본문은 레갑 사람들처럼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 레갑 사람들처럼 하나님 말씀에 신실하게 순종하라고 명령한다.

- 순종을 통해 자기 땅에서 오래오래 살며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레갑 사람들처럼,

-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따를 때만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살 때만 평안하고 충만할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키며,

- 자신, 하나님,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용하여 유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명령의 형태로 주신 것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밥상을 차려놓고 밥 먹으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 형태는 명령이지만, 본질은 사랑이다.

- 자녀가 맛있게 배불리 먹고 건강하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물론 자녀가 맛있게 밥을 먹으면 부모도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얻는다.

- 하지만 부모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녀의 행복에 있다.

- 자녀가 건강하게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도록 하여,

- 무엇보다 자기답게 살도록 하는 것에 있다.

- 자녀가 그렇게 될 때만 부모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헛된 것에 속아서, 자신을 포기하는 선택만 반복하는 것이 현실이다.

- 돈, 명예, 안락함, 인정, 안정 등을 위해 자기 정체성을 지불한다.

- 그래서 많은 것을 얻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을 잃는다.

- 그래서 살아있지만, 실상은 죽은 자로 살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 모습을 보시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워하신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누가 가만히 있겠는가.

- 울며불며 난리 치기도 하고, 화내시기도 하고, 차분하게 설득하시기도 하고,

- 당근으로 이끄시기도 하고, 채찍으로 몰아 기기도 하신다.

- 그래서 어떻게든 우리가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고 사랑하기를 애원하신다.

대표적인 증거가 예수님의 죽음 부활이다.

- 하나님은 우리가 정체성을 회복하고 자신을 사랑하도록 하나님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 아들 예수님, 즉 하나님 자신을 포기하셨다.

-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기를 죽여서라도 우리를 살리려고 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다.

 

신정론 논쟁

본문의 논리 자체는 단순하다.

- 레갑 사람들은 신실하게 순종해서 복을 받았고,

- 이스라엘은 불신실하게 순종하지 않아서 저주받을 것이다.

- 그러니 이스라엘은 이제라도 순종해서 복 받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또 복잡한 신정론 논쟁이 일어난다.

- 레갑 사람들이 순종해서 복을 받았는데,

- 그 복의 근원적인 원인은 누구인가?

-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 하나님인가?

- 아니면 레갑 사람들이 잘해서 받은 복이니, 레갑 사람들인가?

결론적으로, 복의 원인을 누구로 하든 하나님은 부정된다.

- 세상을 설명할 수 없다.

 

첫째로, 레갑 사람들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가정하면?

- 이 가정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전제한다.

- 오직 유일한 선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외에는 어떤 선도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갑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행을 한 것은,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지, 레갑 사람들이 잘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 첫째로, 레갑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받아 천국에 갈 이유가 없다.

- 전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사람은 꼭두각시처럼 움직인 것뿐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레갑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본문이 부정된다.

- 둘째로,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선을 행하시는 불공평하고 불의한 존재가 된다.

-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레갑 사람들에게는 선을, 이스라엘에게는 악을 주셨기 때문이다.

- 그런 점에서 공평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성품이 부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이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만’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 즉, 세상이 하나님 100%로‘만’ 돌아간다는 주장은 틀렸다.

 

둘째로, 레갑 사람들의 선행이 그들의 헌신 때문이라고 가정하면?

- 이 가정은 본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한다.

- 본문은 명백하게 레갑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하기 때문이다.

- 칭찬은 행위의 주체에게만 할 수 있는데, 

- 본문에서 하나님이 레갑 사람들을 칭찬한다는 것은 선행의 주체가 레갑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렘 35:18~19] 그런 다음에,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조상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의 모든 교훈을 엄수하고,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19) 그러므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 가운데서 나를 섬길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레갑 사람들이 선행을 한 것은,

- 전적으로 레갑 사람의 헌신 때문이지, 하나님이 하신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두 가지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된다.

- 첫째로, 하나님이 레갑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한 것이 된다.

- 레갑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무능력했기 때문이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함이 부정된다.

- 둘째로, 하나님 없이도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필요 없어진다.

- 사람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 없이는 사람이 행복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이다.

- 하나님만이 선과 행복의 유일한 기원이기에,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선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 그런데 하나님 없이 레갑 사람들이 선을 행했다는 것은 누구나 하나님 없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고,

- 세상이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 없이 세상 안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하나님은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이 전적으로 사람 때문‘만’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 반과 레갑 사람들의 헌신 반이 합쳐져 선행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 이 가정은 절충안이다.

-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성경 본문을 인정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시도의 취지는 좋지만, 성과는 없다.

- 결국 이 가정은 하나님의 절반을 부정하고, 성경 본문의 절반도 부정한다.

- 하나님의 은혜가 절반만큼 기여했으니, 하나님 존재의 절반은 인정되지만, 나머지 절반은 역시 부정된다.

- 하나님은 사람에게 반 밖에 주도권을 갖지 못하신 분으로 전락한다.

동시에 레갑 사람들을 칭찬하는 본문도 절반만큼 부정한다.

- 레갑 사람들의 기여는 절반밖에 안 되고, 칭찬과 복도 절반만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하나님 반, 사람 반 때문이라는 주장도 옳지 않다.

 

혹시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 선과 악의 근원이 하나님 때문도, 사람 때문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 세상에서 일어난 일의 근원을 하나님과 사람 외에 어디에서 찾겠는가.

정확하게 말해서, 

- 선과 악의 근원이 하나님 때문‘만’도 아니고 사람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 이 ‘만’을 주의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레갑 사람들의 선행이 신정론 논쟁을 일으키는 것인가?

선과 악의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해도, 사람이라고 해도 문제가 되는데,

- 그래서 어떤 논리로 말해도 결국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는데,

-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원인은 ‘소유’ 개념 때문이다.

- 선과 악의 근원이 누군가에게 소유, 종속, 장악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 세상에 선행 혹은 악행이 일어났다면,

- 그 행위는 사람 혹은 하나님이 소유하거나, 

- 그것도 아니면 사람과 하나님이 일정 비율로 나눠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갑 사람들의 선행이 원래는 하나님의 소유였고,

-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꼭두각시 움직이듯 레갑 사람들이 선행을 하도록 하셨거나,

- 반대로 레갑 사람들이 마음 안에 선을 소유하고 있었고,

- 하나님 없이 레갑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선행을 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지만 소유에 기반하여 선과 악의 근원을 설명하면, 

- 어떤 시도를 해도 전부 실패한다.

- 결국 하나님과 성경을 부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성경은 ‘소유’에 기반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소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

-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누군가가 소유하고 있다.

- 살고 있는 집, 집을 나가면 건물, 건물이 있는 땅, 

- 더 넓게는 하늘과 바다까지 전부 소유에 기반한다.

- 소유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그래서 우리는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소유가 당연시되었던 기간은 상대적으로 짧다.

- 멀리 갈 것도 없이 조선시대만 해도 마을에서 벗어난 산과 들에는 소유가 없었다.

- 그래서 다양한 이유로 마을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산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다.

- 화전민이 있었다는 것이 소유주가 없는 땅이 있었다는 증명한다.

더 나아가, 수렵 채집 시대에는 땅과 집뿐만 아니라, 

- 곡식, 열매, 동물 등 식량조차 소유주가 없었다.

- 만약 그들에게 이 땅은 내 소유이니 곡식을 가져가지 말라고 한다면, 

- 그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소유에 기반한 사고방식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소유만을 기반으로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신정론 논쟁을 일으킨 근본 원인이다.

 

그렇다면 선과 악의 근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관계’로만 설명할 수 있다.

- 즉,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로 말이다.

 

레갑 사람들의 선행은 하나님 때문‘만’도 아니고 사람 때문‘만’도 아니다.

- 게다가 하나님 반, 사람 반도 아니다.

100% 하나님 때문이며 동시에 100% 사람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 레갑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셔서,

- 100%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로 레갑 사람들이 선을 행한 것이다.

- 여기에 레갑 사람들의 지분은 없다.

- 오직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도하심만 있고,

- 사람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레갑 사람들이 칭찬받을 이유는 전무하다.

-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만 긍정되고 성경의 칭찬은 부정된다.

그러나 동시에 100% 레갑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선을 행한 것이다.

- 여기에 하나님의 지분은 없다.

- 레갑 사람들의 주체적, 독립적, 능동적 선택만 있고,

- 하나님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레갑 사람들은 칭찬받기 마땅하다.

- 이렇게 성경의 칭찬만 긍정되고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기에, 

- 하나님의 존재도 긍정되고, 동시에 성경의 칭찬도 긍정된다.

 

물론 이러한 설명이 얼마나 낯설고 어색하게 들릴지 이해한다.

- 그러나 반대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설명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랑의 관계가 그렇다.

- A와 B가 사랑하는 관계라면,

- 그 사랑의 관계가 100% A 때문‘만’이거나,

- 100% B 때문‘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 혹은 A가 50%만 노력하고, B도 50%만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 누구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A와 B가 모두 상대방을 위해 100%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 그런 관계만 사랑이라고 말한다.

- 양편 모두가 적극적, 자발적, 능동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쏟는 많은 관계 중에서

- 열정의 크기가 100%인 것만을 따로 사랑이라고 부른다.

- 사랑의 관계는 모든 관계 중에 가장 자발적, 능동적, 적극적이고, 가장 열정적이며, 가장 순수한 것이다

 

반대로 A와 B가 관계를 맺었는데,

- 둘 중에 한 사람‘만’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 대신, 종속, 지배, 집착, 굴종, 추종으로 부른다.

비슷한 반례로, A와 B가 관계를 맺었는데,

- 양편 모두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기는 하지만,

- 관심의 크기가 100%가 아니라 그 이하인 상태를

- 사랑이라는 말 대신, 동료, 친구, 이웃으로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소유’로 설명할 수 없다.

-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유에는 명확한 주인, 원인이 있다.

- 땅과 집에도 주인이 있고,

- 자동차 사고에도 100:0부터 0:100까지 명확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사랑에는 주인이 없다.

- 동시에 반대로 양편 모두 완벽한 주인이다.

- 양편 모두가 자신이 사랑의 관계에 완벽한 주인이라고 인식할 때만 사랑이 유지된다.

- 반대로 양편 중의 하나라도 관계의 주인이 자기‘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종속, 지배, 집착, 굴종, 추종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양편 모두 100%여야만 한다.

- 이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소유와 사랑의 차이

소유와 사랑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해 보겠다.

- 나에게 정말 맛있고 소중한 사탕 열 개가 있다.

- 사탕을 먹으려고 꺼내는 순간 아는 친구가 인사를 한다.

- 그래서 예의상, 호의로 열 개 중의 하나를 건네준다.

- 소중한 사탕 하나를 잃어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 아홉 개가 있으니까 괜찮다.

- 그런데 갑자기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자기도 사탕을 달라고 한다.

- 그렇게 주고 나니까 남은 사탕이 두 개밖에 없다.

- 맛있는 사탕을 두 개밖에 먹지 못하니 아쉽고 속상하다.

이렇게 소유 기반에서는 비율이 중요하다.

- 열 개 중의 아홉 개는 충분하다. 만족스럽다.

- 그러나 열 개 중의 두 개는 부족하다. 아쉽고 속상하다.

 

그러나 사랑 기반에서는 비율이 중요하지 않다.

- 있냐 없느냐로만 나뉜다.

- 열 개 중의 열 개가 있을 때만 있는 것이고,

- 열 개 중의 아홉 개건, 두 개건 똑같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다.

- 그런데 만약 배우자가 십 일 중의 구 일은 집에 들어오는데,

- 십 일 중의 하루는 다른 애인 집에 간다고 해보자.

- 그럼 십 일 중의 구 일이나 함께할 수 있으니까 충분한가? 만족스러운가?

- 반면에 십 일 중의 이 일만 집에 들어오고, 나머지 팔 일은 다른 애인 집에 간다면,

- 아쉽고 속상한가?

사랑은 이렇다.

- 십 일 중의 구 일이 아니라, 십 일을 전부 집에 들어온다고 해도,

- 배우자 마음의 99%가 나를 향한다고 해도,

- 단 1%만이라도 나 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 99% 사랑을 받으니까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즉, 99%의 사랑은 100% 사랑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 0%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는 언제나 100% 아니면 0%이다.

- 그 사이에 1~99%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조차 소유 기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 조금 사랑하고, 덜 사랑하고, 많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 사탕 열 개 중의 아홉 개는 많은 것이고, 두 개는 적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사랑의 관계는 언제나 100%여야 한다.

- 99%도 안 된다.

- 특히 양편이 모두 완벽하게 100%여야 한다.

둘 중의 한 사람이라도 99%가 되는 순간 99%의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의 관계는 박살 난다.

- 마치 배우자가 1%라도 다른 애인에게 마음을 주는 순간 결혼 관계가 깨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 원리를 일상에서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다.

- 이것 때문에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레갑 사람들 선행의 원인도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이다.

- 하나님도 전능하심과 주도권으로 레갑 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치하셨다.

-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하셨다.

- 조금의 오점도 없이 하나님은 완벽하게 하나님다우셨다.

동시에 레갑 사람들도 능동적, 주체적, 적극적으로 선행을 선택했다.

-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하나님의 개입도 없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

- 그랬기 때문에 성경 본문 말씀처럼 레갑 사람들은 칭찬받기 마땅하다.

이렇게 하나님과 레갑 사람들이 서로를 100% 사랑했기에 선행이 일어난 것이다.

- 만약 양 편 중의 하나라도 100%가 아니었다면,

- 하나님과 레갑 사람들의 관계는 종속, 지배, 집착, 굴종, 추종일 뿐이었을 것이다.

-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소위 ‘갑을 관계’라고 부르고, 다른 표현으로 ‘갑질’이 있다.

- 특히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갑을 관계로 착각한다.

 

사랑의 필수 요소 - 독립성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셨다.

- 하나님은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셨고,

- 사람들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길 바라셨다.

-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굴종시켜서, 자신을 추종하기를 거부하셨다.

-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집착하려는 시도를 방해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100%의 열정으로, 능동적, 자발적, 적극적으로 사랑하길 바라셨다.

- 그런데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력을 없애는 것이다.

- 하나님이 사람을 지배하면,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 종속되면,

- 사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람을 독립시켜야 했고,

- 사람의 독립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그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선악과’와 ‘탕자’이다.

- 선악과의 존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거부 가능성을 전제한다.

-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도 뜻한다.

- 만약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부할 능력이 없었다면,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명령조차 내리지 않으셨을 것이다.

- 굳이 명령하지 않아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 마치 완벽하게 설계된 로봇이 있어서 나의 뜻을 전부 안다면, 아무런 명령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뤄주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선악과의 존재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부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 그런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 사람이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 그러니까 하나님은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독립된 존재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 말에는 모순이 숨겨져 있다.

- 사람이 독립된 존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고,

-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완벽하게 표출된 천지창조의 순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설과 모순은 태초부터 시작되었다.

 

탕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 탕자의 존재는 탕자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다.

- 아버지가 얼마나 아버지답지 못했으면, 아들조차 아버지를 부정하고 유산을 달라고 했겠냐는 것이다.

- 당시 이스라엘 전통에서 살아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달라는 것은 부모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틀렸다.

- 탕자의 존재는 탕자 아버지가 탕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 아버지가 얼마나 아버지답게 자녀를 사랑했는지 보여준다.

- 아버지는 탕자를 너무 사랑해서, 지배, 종속, 굴종시키지 않고, 독립시켰다.

- 탕자가 아버지를 짓밟고 올라설 수 있는 길을 열어줬다.

- 당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지배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 아버지는 오히려 아들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이다.

 

물론 그 사랑 때문에 탕자는 허랑방탕한 인생으로 전락했다.

-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한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간다.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탕자가 100%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 의지로 아버지께 돌아가는 점이다.

- 아무런 의무감도 없이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탕자는 아버지와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언뜻 보기에 이 과정은 불필요한 낭비로 보인다.

- 유산이 낭비되었고, 탕자의 인생이 낭비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그렇기 때문에 유산과 인생은 낭비된 것이 아니다.

- 지급된 것이다.

- 사랑의 관계를 얻기 위해 합당하게 지급된 비용이다.

- 게다가 유산과 인생을 지불하고 구입한 사랑은 유산과 인생보다 훨씬 가치 있다.

- 유산과 인생은 유한하지만,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탕자의 선택은 유익하다.

 

이것만이 사랑이다.

-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 독립은 필수적이다.

- 그러나 독립에는 거역이 내포되어 있다.

- 그래서 독립과 동시에 거역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 그렇기 때문에 거역을 통과한 상태에서만 사랑이 가능하다.

- 거역을 방지하고자 독립을 억제하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지배력을 포기하시고 독립을 주신 것이다.

- 물론 그로 인해 죄가 생겼고,

- 죄로 인해 사람에게 수많은 고통이 발생했다.

- 마치 탕자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굶어 죽을 고통을 겪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인류의 고통이 낭비처럼 보인다.

- 하나님이 조금만 노력하셨으면 겪지 않을 고통인데,

- 하나님이 무책임하게 방임하셨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생긴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 인류의 고통은 사랑의 관계를 얻기 위해 합당하게 지급된 비용이다.

- 그리고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한 사랑의 가치는 지급한 비용보다 훨씬 크다.

- 지불한 비용은 유한하지만,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는 유익하다.

 

그래서 ‘관계’의 관점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 말에는 오묘한 부분이 있다.

- 하나님 100% 사람 100% 원리가 논리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 결혼 관계로 보면 이해가 되는듯 하다가도, 신정론 논쟁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이러한 혼동의 원인은 관점의 차이이다.

- 소유의 관점과 사랑의 관점이 우리 안에 혼재하기 때문이다.

- 우리 일상은 전부 소유의 관점으로 작동하고 경험한다.

- 다른 사람의 소유를 얻기 위해 나의 소유를 지불한다.

- 반면에 우리 마음은 사랑의 관점으로 작동한다.

- 우리 마음이 정말 행복하고 충만할 때는 많은 것을 소유할 때가 아니라 사랑할 때이다.

우리가 나도 모르게 두 가지 관점 사이를 오가기 때문에,

- 레갑 사람들의 선행을 보며 혼란스러운 것이다.

- 사랑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레갑 사람들이 서로 많이 사랑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그러나 나도 모르게 관점이 소유로 바뀌면, 선행의 지분이 하나님과 사람 중 누구에게 있는지 헷갈린다.

 

따라서 혼란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유와 사랑의 관점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 상황에 따라 어떤 관점으로 볼지 선택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 그래서 편의점에 가서는 소유의 관점으로 물건을 구입하고,

-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사랑의 관점으로 대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에 더하여, 사랑의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사랑의 관점으로 보는 것을 시작으로,

-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까지 확대하고,

- 더 나아가, 우리 주변 사람까지 확대하며,

- 편의점 주인을 넘어, 인류 전체까지 사랑의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로부터 온 인류까지 사랑의 관계를 확대하셨던 것처럼,

- 베드로가 유대인에서 이방인까지 사랑의 관계를 확대했던 것처럼,

- 바울이 예루살렘을 지나, 안디옥을 넘어, 소아시아를 지난 후 로마, 스페인을 통해 온 유럽까지 확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소유와 사랑을 구분할 때만,

- 레갑 사람들이 왜 칭찬받았고, 이스라엘이 왜 심판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선과 악의 근원과 신정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을 확대해 나아갈 때만,

-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레갑 사람들처럼 순종하라고 하시는지,

-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처럼 불순종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명확하다.

- 그래야 우리가 행복하니까.

-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여 자기다워질 수 있고,

- 자기답게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

-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만 충만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목적이다.

 

결론 - 하나님 100% 사람 100% 원리 적용법

소유의 관점에서 신앙을 보면, 한쪽으로 치우친다.

- 소유에서는 반드시 명확한 주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책임 소재가 분명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100% 사람 100%와 같이 어중간한 상태를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100%라고‘만’ 생각한다.

- 그래서 자신은 죄인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 오직 하나님이 해주실 것만 기대한다.

- 인생을 변화시킬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으며, 변화시켜달라고 기도만 한다.

- 그렇게 변화 없이 기도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

- 그래서 결국 방종에 빠진다.

반대로 사람 100%라고‘만’ 생각한다.

- 하나님은 예수님 죽음 부활을 통해 모든 은혜를 다 베푸셨다며,

- 이제 자신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 자신에게만 집중한 결과 자신의 한계 안에 갇히고,

-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자가 된다.

명확하게 말하지만, 이는 남 일이 아니다.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양쪽을 왔다 갔다 한다.

- 우리도 소유의 관점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의 관점은 언제나 양방향이다.

- 연인 관계, 결혼 관계, 친구 관계 전부 서로가 최선을 다할 때‘만’ 유지된다.

- 한 편이라도 상대방에게 소홀히 하면,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면, 관계는 반드시 깨진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언제나 양방향이다.

- 물론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주셨다.

-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담긴 성경책을 주셨다.

-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사랑을 전하고 계신다.

-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성경에 기록된 과거만도 아니고,

- 막연히 먼 미래에 있을 구원만도 아니다.

-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시고 마구 내뿜으신다.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증거로 그렇게 말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 반대로 내가, 최근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 적어도 미양 교회에서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계의 관점으로 신앙을 바라보면, 

-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 맺기 위해 하신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을 떠올리면,

- 이제 남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애절하게 다가오셨는지 성경에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 게다가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이렇게 하나님은 100% 하고 계신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100%이다.

-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런 반문이 들려오는 것 같다.

- ‘그동안 나도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참석하고 구제 봉사도 했다.

-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하냐?’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 ‘정말 많은 것을 했다.

- 분명히 하나님이 좋아하셨을 것이다.

- 그런데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 많이 하는 것이 아니다.

- 반대로 지금까지 하던 일 중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포기하는 것이다.’

 

풀어 말하면, 

- 대부분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최우선에 둔다.

- 하나님이 절대 가치이며,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믿는다.

-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많은 것을 행한다.

그런데 문제는 1순위이신 하나님 다음에 2순위, 3순위가 있다는 것이다.

- 신앙이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 그다음으로 돈과 명예 그리고 안락함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 가치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지만,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이 절대 오물이라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순한 예로, 이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가 있는데,

- 그다음으로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것과 같다.

- 이런 경우 아무리 배우자를 99%만큼 사랑하고,

- 애인은 단 1%만 사랑한다고 해도,

- 애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배우자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 이는 단지 사람들의 감정 문제를 넘어서, 법이 정하고 있는 바이다.

- 즉, 배우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애인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로 완전히 부정된다.

 

소유의 관점에서 99%는 대부분이다.

- 100%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관점에서 99%는 아무것도 아니다.

- 0%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많이 헌신했다.

- 99%에 가까울 수 있다.

- 소유의 관점에서 우리는 100%에 가깝다.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실상은 0%이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완전히 같다.

- 칭찬은커녕 심판받기 합당하다.

마치 99%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애인에게 1%만 사랑을 줬던 사람이 배우자에게 이혼당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포기’이다.

- 1%의 애인을 버리는 것이다.

- 하나님 외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는 것이다.

물론 포기하는 것은 새롭게 헌신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 마치 애인을 포기하는 것이 배우자에게 명품 선물을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 결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애인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최선의 노력으로 신속하게 해야 할 일이다.

 

그럴 때만 신앙의 기쁨, 인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 마치 애인을 포기하고, 배우자만 바라보고 배우자에게 집중하여 배우자만 사랑할 때만

- 배우자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 배우자를 더욱 사랑하게 되어,

-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고, 그래서 인생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절대 오물로 여기고,

- 그 오물을 실제로 몸에서 닦아 내고 포기해서,

-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만 사랑할 때만

- 하나님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어,

-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 전체가 행복하고 충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