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66) 34:1-22 신실하신 하나님과 대비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실함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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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범한 죄는 명확하다.
- 약속을 어겼다.
- 자신이 동족 노예를 자유인으로 풀어준다고 약속한 후,
- 마음을 바꾸어, 그들을 다시 노예로 삼았다.
[렘 34:10~11] 모든 고관과 모든 백성은 이 계약에 동의하여, 각자 자기의 남종과 여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고, 아무도 다시는 그들을 종으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11) 그러나 그 뒤에 그들은 마음이 바뀌어, 그들이 이미 자유인으로 풀어 준 남녀 종들을 다시 데려다가, 남종과 여종으로 부렸다.
게다가 이 약속은 자발적인 선행이 아니라, 율법이 명하는 바이다.
- 수백 년 전에 제정된 율법이기에, 이들이 약속 여부와 상관 없이 동족 노예는 일정 기간 이후 풀어주어야 했다.
- 그런데 이들은 율법을 무시하고, 동족 노예를 풀어주지 않았다.
[렘 34:13~14]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 곧 그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나올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며, 이렇게 명하였다. (14) ‘동족인 히브리 사람이 너에게 팔려 온 지 칠 년째가 되거든, 그를 풀어 주어라. 그가 육 년 동안 너를 섬기면, 그 다음 해에는 네가 그를 자유인으로 풀어 주어서, 너에게서 떠나게 하여라.’ 그러나 너희 조상은 나의 말을 듣지도 않았으며,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자발적인 약속’을 어긴 것과 ‘율법’을 범한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쁠까?
- 자발적인 약속은 자신에게 근거하고, 율법은 하나님께 근거한다.
- 자기가 맺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나쁠까,
-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어기는 것이 나쁠까?
사람이 모든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지키지 않아도 되는 약속도 있다.
- 강압적으로 맺어진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
- 또 천재지변 때문에 불가피하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책임을 묻지 않는다.
-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 자체로 비난할 수 없다.
- 정황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 언제나 기계적으로 모든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 상황에 따라 율법을 어기는 것이 허용된다.
- 예를 들어, 할례법과 안식일법이 충돌할 때이다.
- 태어난 아기가 할례받는 날이 안식일인 경우, 안식일을 어기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논쟁하실 때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황까지 고려해도, 이스라엘의 죄는 심각하다.
- 이스라엘은 누구의 강압 없이 자발적으로 약속을 맺었다.
- 게다가 그 약속은 수백 년 전에 맺은 율법에 따른 것이었다.
- 그뿐만 아니라 동족을 노예 삼는 반인륜적인 문제이다.
- 즉, 이스라엘은 약속 측면에서, 율법 측면에서, 인류 보편적 정서 측면에서 전부 문제 되는 죄를 범했다.
- 이는 자기 자신과 약속, 하나님과 약속, 인류와 약속을 전부 부정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부정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까지 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임할 심판은 합당하다.
이들은 하나님을 부정했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한다.
- 하나님과 약속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파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게다가 이들은 자기 자신도 부정했다.
- 이들에게 의지할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데, 자기 자신과의 신뢰 관계도 파괴했다.
-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 이들은 자신조차 믿지 못하여,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잃은 이스라엘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고,
-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었다.
그런 이스라엘이 초강대국 바벨론의 공격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처참히 짓밟히는 것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것이다.
[렘 34:22] 보아라, 내가 명령을 내려서,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를 이 도성으로 다시 불러다가, 그들이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하고 불을 지르게 하겠다. 내가 유다의 성읍들을 황무지로 만들어서,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겠다. 나 주의 말이다.
- 본문은 이스라엘의 선택과 상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멸망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심판 결과로만 표현되었다.
이는 당연히 옳다.
-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 세상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오늘 우리가 입은 옷, 먹은 저녁 메뉴까지도 말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으키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하시는 과정 안에는 이스라엘의 주도적인 선택도 있다.
- 이스라엘은 멸망을 자초했다.
- 자신과 약속, 하나님과 약속을 어겼다.
- 한정된 자원을 국력 강화가 아닌 사치와 향락에 낭비했다.
- 이러한 선택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다.
따라서 이스라엘 멸망은 하나님 100%와 사람 100%가 공존한다.
- 이스라엘 멸망은 100% 이스라엘의 선택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주도적으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 동시에 100%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다.
-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바벨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뜻이 아니다.
- 하나님과 사람이 50%씩 기여했다는 뜻이 아니다.
- 하나님 100%, 사람 100%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강조한다.
본문은 다음 두 가지 표현으로 이스라엘 멸망 원인이 이스라엘의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노예에게 거짓으로 ‘자유를 선언’했듯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거짓으로 ‘자유를 선언’하신다.
[렘 34:17]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 이스라엘은 거짓된 자유를 선택해서 동족 노예를 풀어주지 않았다.
- 그런데 그 거짓된 자유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
- 그래서 이스라엘에도 거짓된 자유가 임하여, 전쟁, 염병, 기근에 ‘자유롭게 노출되어’ 죽게 된다.
이렇게 본문은 ‘자유를 선언’이라는 표현으로,
-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멸망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동족을 노예 삼는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둘째로, 이스라엘이 자유를 준 노예를 ‘다시 데려오듯이’, 하나님도 떠난 바벨론 군대를 ‘다시 불러오신다.’
[렘 34:16] 그러나 너희가 또 돌아서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다. 너희가 각자의 남종과 여종들을 풀어 주어, 그들이 마음대로 자유인이 되게 하였으나, 너희는 다시 그들을 데려다가, 너희의 남종과 여종으로 부리고 있다.
[렘 34:22] 보아라, 내가 명령을 내려서,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를 이 도성으로 다시 불러다가, …
- 이스라엘이 ‘또 돌아서서’ 노예를 다시 데려온 선택 때문에,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온다.’
- 이렇게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온’ 바벨론 군대에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이 ‘또 돌아서는’ 선택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택’이다.
- 겉으로 드러난 표현은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라고 말한다.
- 22절에서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에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라고 ‘명령을 내리셨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명령은 이스라엘의 선택에 종속된다.
- 이스라엘이 거짓된 자유를 선언했기 때문이며,
- 이스라엘이 또 돌아서서 동족 노예를 다시 데려왔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선택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내려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본문은 강조한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에 종속된다는 뜻이 아니다.
- 세상은 하나님 100%와 동시에 사람 100%로 움직인다.
- 그런데 성경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람이 하나님께 종속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종속된 것처럼 표현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반대된 표현을 동시에 담고 있냐면,
- 둘 다 진실이기 때문이다.
- 사람이 하나님께 종속된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종속되고,
- 세상은 사람의 주도적인 선택으로 움직임과 동시에,
-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과 사람 중에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 하나님께 치우치면,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가정하면,
-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할 수 없다.
-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없고, 그런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 게다가 세상의 죄는 전부 하나님 때문으로 결론 난다.
- 그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부정되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반면에 사람에게 치우치면, 그래서 모든 것이 사람의 선택이라고 가정하면,
-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 사람이 모든 것을 선택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 100%인 동시에 사람 100%로 움직여야만 한다.
- 절대로 하나님 50%, 사람 50%가 아니다.
- 그래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세상에 죄가 있다는 사실’이 양립할 수 있다.
- 그런데 만약 하나로 치우치면,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되거나, 죄의 존재가 부정된다.
- 이렇게 하나님과 죄 중의 하나가 부정되면, 성경의 세계관이 부정된다.
그래서 하나님 100%, 사람 100%가 중요하다.
- 성경의 세계관을 지탱하는 기초이다.
그런데 본문은 특히 사람 100%, 즉 이스라엘의 선택을 강조한다.
- 이러한 강조점을 바탕으로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본문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강조할까?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 멸망이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일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선택 100%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선택 100%로 일어났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이다.
- 이스라엘의 선택을 강조해서, 부각하려는 것과 은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 그것을 구분할 때 본문의 의도를 알 수 있고,
-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며,
-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서 본문의 의도를 알 때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해서, 성경 해석 없는 성령은 악령이다.
따라서 본문이 부각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하여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다.
-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더욱 부각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을 은폐했다.
- 만약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긴 과정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면,
- 그래서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도 과실이 있다고 하면,
-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 물타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길 때,
- 하나님은 무능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표현했다.
- 실제로 무능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강조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사실이 있다.
- 하나님의 불신실함이다.
-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기고 죄에 빠질 때,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셨나?
- 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막지 못하셨나?
- 하나님께 애초부터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인가,
- 아니면 능력은 있지만, 이스라엘에게 관심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인가?
- 하나님께 능력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 능력이 있는데 쓰지 않으셨다면, 더 큰 문제 아닌가?
- 이스라엘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이고,
-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을 전문 용어로 ‘신정론’이라고 한다.
정말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냐는 논쟁이다.
-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세상 전부를 통치하신다면,
-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 때문이며,
- 반대로, 이스라엘의 죄가 하나님 때문이 아니면,
-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이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쟁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 그리고 지금까지 2000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와 언제나 함께한 논쟁이다.
이는 그만큼 논쟁적이고 풀기 어려우며, 현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라는 뜻이고,
- 동시에 너무 많이 논쟁해서, 더 이상 새로운 논쟁거리가 없는 고리타분한 문제라는 뜻이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죄’이다.
- 인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 그런데 그 죄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냐, 아니면 사람에게 있냐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 있다면,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 죄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할 수 없고,
- 모든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에 죄의 원인이 사람에게 있다면, 역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 물론 죄의 원인인 사람은 심판받아 지옥 가는 것이 정당해진다.
- 그러나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막지 못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다.
- 그러니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죄는 공존할 수 없다.
- 세상에 죄가 실존한다면, 죄를 막지 못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되고,
- 반대로 하나님이 의롭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강조하면 하나님이 죽고,
- 하나님을 강조하면 죄는 무의미해진다.
신정론의 해법
이렇게 논리적 오류에 빠진 이유는 전제 때문이다.
- 죄의 원인이 하나님과 사람 둘 중의 하나여야만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 만약 죄의 원인이 하나님과 사람 모두라면,
- 하나님 50%, 사람 50%로, 총합이 100%여야만 한다는 전제 때문이다.
신정론 논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이 전제를 부정한다.
- 총합이 100%여야만 한다는 전제를 부정한다.
물론 이 전제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이 전제는 순수하게 논리적이다.
- 어떤 결과를 일으킨 여러 가지 원인이 있고,
- 그 원인을 모두 모으면 100%가 된다는 주장에 문제는 없다.
그런데 이 전제가 옳은 제한 조건이 있다.
- 그것이 바로 이성과 경험,
- 그리고 이성과 경험의 근원이 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 안에서만 옳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면, 이 전제는 옳지 않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는 대표적인 존재가 예수님이다.
-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며, 동시에 100% 사람이다.
- 이러한 예수님의 존재가 확립되기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정리하면, 세 가지이다.
① 100%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예수님은 하나님이기에 몸이 있을 수 없다.
- 그래서 예수님의 몸은 환상이었다고 주장한다.
② 100% 사람이지, 하나님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 예수님은 사람 중에 특별한 선지자로,
- 침례를 받을 때 성령이 임하여,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 50% 하나님, 50%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 사실상, 이렇게 주장한 사람은 없다.
- 하나의 존재가 반으로 쪼개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이러한 논쟁 끝에 칼케돈 공의회(AD 451)에서 예수님의 존재가 확립되었다.
[칼케돈 신조] … 그분은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셨다. … 그분이 한 분이시고 동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님, 독생자로서 혼동도 변화도 분할도 분리도 없는 두 본성을 지니셨음을 인정한다. 그분은 결합으로 인하여 두 본성 간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오히려 각 본성의 속성이 보존되고, 함께 유일한 위격과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분은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할되지 않으며, 한 분이며 동일하신 독생자, 성자, 하나님, 말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이러한 설명은 논리를 벗어난다.
- 하나님과 사람은 완전히 배타적인 존재이다. 교집합이 전혀 없다.
- 그래서 하나님이자 사람인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 이는 마치 내가 집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집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예수님이 승천하신 직후부터 약 400년 동안 논쟁하다가 맺어진 결론이고,
- 이후 1600년 동안 비판 없이 받아들여진 명백한 사실이다.
이렇게 인류는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과 경험을 초월했다.
- 이성과 경험으로는 사람이 집 안과 집 밖에 동시에 있을 수 없는 것처럼,
-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일 수 없는데,
- 인류는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자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이성과 초-경험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되었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는 많다.
-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사람이 이루는 것인지,
- 믿음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인지, 사람이 마음을 먹는 것인지,
- 천국은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곳인지, 믿음과 행함으로 사람이 가는 곳인지 등.
분명한 것은 성경이 양편을 다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비롯하여, 구원, 믿음, 천국을 이성과 경험을 벗어나서 이해해야 한다.
- 구원, 믿음, 천국은 모두 하나님 100%인 동시에 사람 100%로 이르는 것이다.
성경은 정확하게 이것을 말한다.
게다가 이러한 초-경험은 과학에서도 많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에서, 이론적으로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이 있고,
- 빛이 물리적 입자와 파동 에너지의 성질을 동시에 갖는다는 ‘빛의 이중성’도 있다.
- 상대성 이론에서는 경험을 근거로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 공간, 물질이 상대적이다.
- 이렇게 현대 물리학은 경험을 벗어난다.
본문 해석
본문 역시 이러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기록되었다.
- 사람이 하나님을 이성과 경험의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8~2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한다.
- 이스라엘은 약속 측면에서, 율법 측면에서, 인류 보편적 정서 측면에서 전부 문제 되는 죄를 범했다.
- 이스라엘이 풀어주기로 약속한 동족 노예를 다시 불러들이는 모습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비판받을만 하다.
특히 본문은 죄의 원인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한 심판조차 이스라엘의 선택임을 강조한다.
[렘 34:17] …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렘 34:22] 보아라, 내가 명령을 내려서,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를 이 도성으로 다시 불러다가, 그들이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하고 불을 지르게 하겠다. …
- 이스라엘이 전쟁, 염병, 기근으로 죽는 것도 동족 노예에게 거짓된 자유를 선언했기 때문이고,
-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이스라엘을 점령하는 것도 동족 노예를 다시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문은 이스라엘 100%를 강조한다.
이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 이스라엘은 심각하게 잘못했고,
-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전부 100% 이스라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지만,
- 이렇게 심각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
이렇게 본문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지를 드러낸다.
- 이것이 본문이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이다.
그런데 본문이 전하는 두 번째 메시지가 있다.
이렇게 이스라엘 100%를 강조하면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사실이 따라온다.
- 이스라엘이 그렇게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 도대체 하나님은 뭐 하셨냐?
- 왜 하나님은 막지 못하셨냐?
- 하나님이 무능하신 것 아니냐?
-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막지 않으신 이유가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 아니냐?
-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것도 문제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문제 아니냐?
이성과 경험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 이스라엘의 죄를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된다.
-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했다.
그래서 본문은 의도적으로 1~7절에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한다.
- 하나님은 시드기야 왕에게 평안한 죽음을 약속하신다.
[렘 34:4~5] 유다 왕 시드기야야, 나 주의 약속을 들어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시드기야야, 너는 칼에 찔려 죽지 않고, (5) 평안히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네 조상 곧 너보다 먼저 살았던 선왕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향불을 피웠던 것처럼, 네 죽음도 슬퍼하여 향불을 피우며 ‘슬픕니다, 임금님’ 하면서, 너를 애도하여 조가를 부를 것이다. 이것은 내가 친히 약속하는 말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
이 약속이 특별한 점은 대상이 시드기야라는 점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박해하고 죽이려 했던 왕,
- 그리고 동족 노예를 풀어준 후 다시 데려온 왕,
-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일으킨 왕,
- 즉, 이스라엘 왕 중에 불의한 왕으로 손꼽힐 만한 왕이기에 약속이 더 특별하다.
시드기야 왕이 참혹하게 죽는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 그에게 평안한 죽음을 누릴 자격은 전혀 없다.
- 평안한 죽음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그가 평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다.
- 100% 하나님 때문이다.
- 하나님이 신실하게도 다윗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 시드기야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렘 33:24~26] 너는 이 백성이 ‘주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래서 사람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고,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25) 나 주가 말한다. 나의 주야의 약정이 흔들릴 수 없고, 하늘과 땅의 법칙들이 무너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6) 야곱의 자손과 나의 종 다윗의 자손도, 내가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통치자들을 다윗의 자손들 가운데서 세우는 나의 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참으로 내가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 가운데서 포로가 된 사람들을 돌아오게 하겠다.
100%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나는 여전히 신실하다고.
- 불의한 왕 시드기야조차 약속대로 평안한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여전히 강하고,
-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 여전히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지키고 있다고.
100%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세상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말이다.
- 그리고 그 장악력을 가지고,
- 끝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할 것이고,
- 반드시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본문의 두 번째 메시지이다.
결론 -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
우리는 의로운가, 죄악된가?
- 예수님 잘 믿으려고 노력하고, 나름 착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가?
- 아니면 여전히 예수님 나 몰라라 하고,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죄악된가?
우리는 죄악되다.
나쁜 행동, 나쁜 생각을 여전히 하며,
- 특히 자기 자신,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까지 사랑하지 않고 혐오한다.
게다가 더 절망적인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혐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벗어나려 발버둥 치지만, 여전히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이렇게 사람 100% 관점에서 보면,
- 우리는 아무런 소망 없는, 오직 절망만 넘치는 죄인일 뿐이다.
이는 단지 우리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 성경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바이다.
[롬 3:10~12]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의롭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도 의롭다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그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 누구에게나 공과 과가 있다.
- 비율 차이만 있을 뿐이다.
- 간디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의인에게도 삶의 내면을 깊숙이 탐구하면, 입에 담지 못할 죄악이 있다.
- 반대로 희대의 살인마조차 삶의 내면을 보면,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있다.
- 공만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과만 있는 사람도 없다.
이렇게 사람 100% 관점에서 모든 사람은 악하다.
-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는 의롭다.
-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
- 현대 과학에서조차 고양이나 개가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 하나님의 관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증거는 딱 하나이다.
-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앞뒤 따지지 않고 의롭게 보신다.
[요 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왜 의로운 것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 하지만 우리의 이해와 상관 없이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 100% 관점에서 우리는 의롭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로운가, 죄악된가?
- 우리는 의롭고 동시에 죄악되다.
- 의롭기만 한 것도 아니고, 죄악되기만 한 것도 아니다.
- 의로움과 죄악됨을 반씩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 어떨 때는 의롭다가 또 어떨 때는 좌악된 것도 아니다.
언제나 항상 동일하게 100% 의롭고 동시에 100% 죄악되다.
-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단순한 문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 즉 ‘언제나 의로운 동시에 죄악되다.’는 이성과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에,
- 현실의 어떤 것에 빗대어 표현할 수도 없고,
- 현실을 유추해서 이해할 수도 없다.
이 문장은 이성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이성 안에 담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해가 안 되니, 그냥 무시하고 포기할 수 있나?
- 예수님 존재의 근원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 예수님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이 초-이성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한다.
- 마치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경험에서 벗어나는 양자역학을 어떻게든 받아들여서, 자기 경험과 직관을 부정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양자역학을 거부하는 것이 물리학 자체를 거부하는 뜻인 것처럼,
- 초-이성을 거부하는 것은 신앙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쉽고 단순한 적용법을 제시하겠다.
- 원리 자체는 지극히 쉽다.
- 관건은 초-이성을 거부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
방법은, 우리가 의롭다고 느낄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되새기고,
- 우리가 죄악되다고 느낄 때,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 크게 피해주지 않고, 계획했던 일이 성취되며, 주변에서 칭찬받고, 기분 좋을 때,
-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며, 하나님도 자신을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한다.
- 물론 이러한 사고 방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모든 사람이 가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 그런데 바로 이때, 자신은 죄인이며, 하나님도 자신을 정죄하실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자기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입고, 계획했던 일이 실패하며, 주변에서 욕을 먹고, 기분이 나쁠 때,
-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며, 하나님도 자신을 정죄하시리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바로 이때, 자신은 의인이며, 하나님도 자신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자신을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의로움과 죄악됨을 동시에 머리에 넣으려고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없다.
-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고 해도, 그 생각을 의식화하는 순간 한 가지씩 차례차례 나온다.
- 무의식에서는 다양한 생각이 동시에 떠돌지만,
-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순간 생각이 선형적으로 단순하게 나열된다.
그런데 감정이 한쪽에 깊이 치우쳐 있어서,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을 때,
- 기분이 너무 좋거나 나빠서 감정에 심취해 있을 때,
- 이성으로, 의지를 가지고, 감정과 반대 생각을 할 때만,
- 의로움과 죄악됨이 공존하는 이상한 상태가 된다.
이 방법만이 의로움과 죄악됨을 동시에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나를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생각한다.
- 교회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의롭다는 감정에 빠져 있을 때는 죄악되다고 정죄하고,
- 또 그러다가 반대로 자신이 죄악되다는 감정에 빠져 자책할 때는 의롭다고 치켜세워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만이 성경 메시지를 바르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의인이라고 자각하는 사람에게는 죄인이라 정죄하고,
- 죄인이라고 자책하는 사람에게는 의인이라고 위로하는 것 말이다.
이것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표 중 하나이다.
- 성경에서도 이러한 예가 많다.
- 대표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서 자신이 의인이라는 것에 빠져 있을 때,
-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지칭하시며 죄악됨을 되새겨 주신다.
이러한 노력으로만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라는 초-이성의 신앙을 체화할 수 있다.
- 머리로 이해할 수 없지만, 몸으로는 느낄 수 있다.
- 이것을 통해서만 자유롭지만 방종하지 않고,
- 엄격하지만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100% 동시에 사람 100%가 예수님 존재의 본질에서부터 매일을 살아가는 현실까지 전부 엄청난 영향을 준다.
초-이성의 신앙이 현실에 영향을 주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① 자기답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 많은 사람은 자기다움이 자신을 무한 긍정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 그래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전부 긍정한다.
- 특히 단점조차 전혀 고칠 필요 없이 당당하게 드러낼 때 자기다울 수 있다고 착각한다.
- 그런데 이는 틀린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살면, 일시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 그래서 잠깐 자유롭게 자기다운 것처럼 느껴지지만,
- 지속되지 않는다.
단점을 드러내면, 현실에서 정죄와 비난이 계속된다.
- 그러면 처음에는 비난을 웃어넘기지만, 시간이 지나고 비난이 축적된다.
- 그래서 소중한 사람이 단점 때문에 자신을 떠나는 경험을 반복한다.
- 그러면 또 다시 자신의 단점을 거부한다.
- 그래서 자기다움을 버리고 단점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
- 결국 단점을 가진 자신을 혐오한다.
따라서 무한 긍정으로는 자기다움을 회복할 수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냐면,
- 자기다움이 무조건 옳다는 착각 때문이다.
- 무작정 자신을 드러내어, 절제 없이 단점이 표출되어도, 사람과 하나님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착각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의 전제는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이다.
- 자신에게 죄악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낼 때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며,
- 비록 상처받아도 상대방의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사람은 죄인이다.
- 죄인인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 사람과 하나님을 이용하고 착취하여 상처를 준다.
- 이것이 모든 사람이 가진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다움은 죄인다움일 뿐이다.
- 그런 점에서 신앙과 상관없는 자기다움은 무절제한 욕망 표출일 뿐이다.
- 대표적인 예가 히피 문화이다.
- 그들은 자기다움을 명분으로, 무절제한 성관계와 약물 중독에 빠졌다.
따라서 ‘진정한’ 자기다움은 반드시 두 가지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
- 첫째로, 우리가 다 알듯이, 숨겨진 보물을 발굴하듯 깊숙이 감춰진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은 두 번째이다.
- 그것은 발굴한 보물을 정련하듯 자신과 분리할 수 없이 뒤엉켜 있는 죄를 제거해야 한다.
땅에서 금을 캐내려면,
- 금이 포함된 광석을 캐내는 것과 그것을 정련하여 순수한 금을 뽑아내는 것이 모두 필요하다.
-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하냐?
-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 둘 중의 하나라도 없으면, 금을 얻을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 숨겨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자신에게 죄를 제거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
- 두 과정을 모두 지나야 진정한 자기다움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의로움과 동시에 죄악됨 원리가 사용된다.
-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믿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애써야 한다.
-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자신을 내면 깊숙한 곳에부터 끌어 올려야 한다.
동시에 순수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지 깨달아야 한다.
- 순수한 자기다움이 사람과 하나님께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주는지 알아야 한다.
- 순수한 자기다움을 혐오하여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의로운 분노에 휩싸여야 한다.
- 그 분노로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 그렇게 참혹하게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이러한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이 공존할 때만 진정한 자기다움이 회복된다.
- 50%의 긍정, 50%의 부정이 아니라,
- 100%의 긍정인 동시에 100%의 부정이 공존할 때 말이다.
- 이것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 초-이성의 신앙을 통해서만 자기다움이 회복된다.
그러나 자기 긍정 혹은 자기 부정에 치우치면, 결국 자기다움을 잃는다.
- 긍정에 치우쳐서 자신이 죄인임을 간과하면, 마구 죄를 내뿜으면서 방종한다.
- 부정에 치우쳐서 자신이 의임임을 간과하면, 낙담하여 절망하거나 율법주의에 빠진다.
② 사랑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 많은 사람이 사랑을 자기 부정만으로 착각한다.
-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상대방만을 위하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 사랑은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방을 긍정하는 것이 맞다.
- 그래서 상대방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상대방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냐?
-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면, 최고의 사랑은 노예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 노예만큼 아무 생각 없이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노예의 행위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어느 때에 사랑을 느끼는가?
-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행할 때가 맞다.
그런데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 부정할 자기 자신이 먼저 있어야 한다.
-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인 자기 자신이 명확하게 있는데,
- 그 자기 자신을 부정할 때만 사랑이다.
- 부정할 자기 자신 없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노예이다.
- 노예의 행위는 사랑이 아니다.
쉬운 예를 들어,
- 백수 친구가 있다.
- 그는 하루 12시간씩 자고, 남은 시간 중 5시간은 티비 보며,
- 남은 7시간은 밥 먹고 멍하니 있다.
- 그 친구가 갑자기 전화해서 같이 놀자고 했다.
반면에 직장인 친구가 있다.
- 그는 하루에 12시간씩 일하고, 남은 시간 중 5시간은 자기 계발하며,
- 남은 7시간을 쪼개서 밥 먹고 씻고 잔다.
- 그 친구가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다.
이 중에 어떤 친구의 전화에서 사랑과 관심을 느끼겠는가.
- 오해하지 말하야 할 것은, 무조건 바쁜 삶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 백수는 사랑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 백수와 직장인은 유치하고 쉬운 예일 뿐이다.
- 핵심은 포기할 자기 자신이 있냐와 없냐이다.
- 백수 중에서 자기 자신을 가진 사람이 있고, 직장인 중에도 자기 자신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다.
아무리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도,
- 포기할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의 행위는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 포기할 자기 자신이 있고, 그 자신을 포기할 때만 사랑으로 느껴진다.
따라서 사랑은 두 가지가 필요하다.
- 첫째로, 자신을 부정하고 상대방을 긍정하여,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 그런데 이와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이 두 번째이다.
- 둘째로, 부정할 자기 자신이 먼저 있어야 한다.
-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인 자신이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만 사랑이다.
바로 여기서 의로움과 동시에 죄악됨 원리가 사용된다.
- 자신은 죄인임을 인정하여, 자기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부정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의인이기에 자신을 긍정해야 한다.
- 자신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이 공존할 때만 사랑할 수 있다.
- 100% 자기 긍정과 100% 자기 부정이 공존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사랑을 느끼는 이유도 이와 같다.
-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완전한 능력을 가지셨고,
- 원하시면 십자가의 못을 뽑고 내려오실 수 있을 만큼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인 분인데,
- 그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다.
- 완벽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에서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자기 긍정 혹은 자기 부정에 치우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 자기 긍정에 치우쳐서 언제나 자기 원하는 대로만 하는 것도,
- 자기 부정에 치우쳐서 언제나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만 하는 것도 절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