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62) 32:1-25 왜 저더러 밭을 사라고 하셨습니까? - 땅 구입의 참뜻

안승준 2023. 6. 16. 22:13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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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 자신이 왜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 땅을 구입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 땅을 구입해도 땅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괜히 돈만 버린다고 생각했다.

[렘 32:25] 주 하나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이 도성이 이미 바빌로니아 군대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증인들을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는 마지못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는 하지만,

- 실상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며, 의심하는 질문을 내뱉는다.

 

게다가 예레미야가 거부감을 가진 것은 경제적 손해만이 아니다.

- 본질적으로 관계적 손해 때문이다.

- 땅을 구입하면 사람들에게 조롱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땅 구입이 갖는 의미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에 갇혀 있다.

[렘 32:2] …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궁의 근위대 뜰 안에 갇혀 있었다.

- 그곳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가 하는 말을 볼 때, 예레미야가 갇힌 이유는 멸망 예언 때문이다.

[렘 32:3] 유다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그 곳에 가두면서 그에게 이렇게 책망하였다. “그대가 어찌하여 이런 예언을 하였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내가 이 도성을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넘겨 주어서, 그가 이 도성을 점령하게 하겠다.

- 이미 알겠지만, 예레미야는 한 번 멸망 예언을 해서 갇힌 것이 아니라,

- 셀 수 없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대상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멸망을 예언했다.

- 그래서 이미 여러 차례 비난 받고, 욕먹고, 고난당했다.

예레미야는 그 비난이 너무 괴로워서 자신의 출생까지 한탄한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예언자의 애환

물론 예레미야는 억울했다.

-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뿐인데,

- 정작 잘못은 예언을 시키신 하나님께 있는데,

- 자신만 욕받이가 되는 것 같아 괴로웠다.

특히 자신도 이스라엘이 정말 멸망하길 원했다면, 그래도 참을 만했을 것이다.

- 욕은 먹지만, 그래도 소망 성취라는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애초부터 이스라엘의 멸망을 원하지 않았다.

- 멸망하지 않고 회복되길 바랐다.

[렘 14:19] 주님은 유다를 완전히 내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진정으로 시온을 미워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낫지도 못하게 이렇게 심하게 치셨습니까? 우리가 기다린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습니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멸망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원하지도 않은 예언을 했다고 욕먹었기 때문에, 더 억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자기 예언이 성취될 조짐이 보였다.

- 예언대로 바벨론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했다.

-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예레미야의 마음을 상상해 보면,

- 이제 좀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 현실적으로, 이전까지 예언 때문에 계속해서 비난받았기에, 어디서든 주눅 들었을 것이다.

- 게다가 본질적으로, 예언이 틀려서 자신의 인생과 신앙이 부정될까 봐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발 뻗고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 드디어 예언이 성취되기 일보 직전이다.

- 이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이었지만,

- 예레미야에게는 축복이었다.

- 단순히 자기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넘어서,

- 모든 사람에게 자기 인생과 신앙이 인정되고 확증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 자신을 비난하던 모든 사람이 다 틀렸고,

- 오직 자신 홀로 옳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깊은 기쁨과 안도감이 차올랐겠는가.

- 평생 받아왔던 정죄, 고난, 박해를 전부 보상받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 그동안 당한 고생이 결실을 본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 예레미야는 처음 예언을 시작한 요시야 왕부터 약 40년 동안 자기 예언이 과연 성취될까 노심초사하며 살았는데,

-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해서 40년 동안 맺힌 한이 이제 막 해소되었다.

- 평생을 잃어버린 명예를 드디어 회복한 바로 그 순간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때 본문의 밭 매매 행위 예언을 명하신다.

[렘 32:7] 너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너에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너더러 사라고 하면서, 그 밭을 유산으로 살 우선권이 너에게 있기 때문에, 네가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 행위 예언의 뜻을 말씀하신다.

[렘 32:15]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 그러니까 결국 이스라엘은 회복되어, 집, 밭, 포도원을 매매하는 일상 생활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 이제부터 그 회복을 예언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것이다.

 

이에 예레미야는 엄청나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

- 40년 동안 잃어버렸던 명예를 이제 막 회복했는데,

- 그 명예를 또다시 버리고 조롱거리가 되라니 말이다.

- 분명히 사람들은 회복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두고 또 비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면,

- 이제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직감했다.

- 당장 멸망해도 이상해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은 멸망을 대비했다.

- 재산을 팔아 현금을 확보했다.

- 자금의 유동성을 높여서,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했다.

-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재산을 들고 가려고 말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런 흐름에 또다시 역행한다.

- 모두가 재산을 하나라도 더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상황인데,

- 예레미야는 반대로 현금을 주고 땅을 산다.

 

40년 전 모두가 평화를 선포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는 혼자 멸망을 예언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혼자서 욕을 먹어야만 했다.

- 때로는 헛소리 한다면서 무시당하고, 때로는 재수 없는 소리 한다면서 비난당했다.

- 멀쩡해 보이는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폭언을 하니, 얼마나 비난받았겠는가.

- 그렇게 힘겹게 세상과 역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홀로 선포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자기 예언이 성취되었다.

-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멸망을 예상하며 멸망에 대비하고 있다.

- 땅을 팔아 재산을 현금화하고 있다.

- 그래야 이스라엘 땅이 망해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도 참 예언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세상과 역행할 것을 명하신다.

- 도대체 무슨 원수를 졌는지,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편하게 있는 꼴을 못 보신다.

- 모든 사람이 팔고 있는 땅을 예레미야가 사라고 하신다.

 

아마도 예레미야 주변 사람들이 전부 한마디씩 했을 것이다.

- ‘네가 신앙은 잘 알겠지만, 경제는 잘 모르는구나.’

- ‘지금 땅을 사는 것은 돈을 길바닥에 뿌리는 것과 같단다.’

- ‘그 돈 나한테 맡기면 책임지고 불려줄게.’라며

- 진심과 사랑을 담아 예레미야에게 조언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레미야가 기필코 땅을 사자, 

- 그 아까운 돈을 왜 버리냐며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 그러면서 ‘쟤는 신앙 말고는 젬병이야.’라며 비웃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얼마나 화나겠는가.

- 40년 동안 비난받으며 고생했는데, 

- 이제 고생 좀 끝나나 했더니, 곧바로 또다시 세상 조롱 속에 빠지라니 말이다.

- 그동안 세상에 역행해서 드디어 40년 만에 인정받는 세상이 왔는데,

- 또다시 세상에 역행하여 안락함을 버리라니 말이다.

그러한 애환이 ‘왜 저더러 돈을 주고 밭을 사라고 하셨습니까?’라는 질문에 담겨있다.

-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 같다.

- ‘고마 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그런데 이것이 예언자의 삶이다.

- 이것이 아니면 예언자라고 할 수 없다.

예언자는 예언하는 사람이고,

- 예언은 언제나 세상보다 한 걸음 앞선다.

- 한 걸음 앞선다는 것은 세상과 역행한다는 것이고,

- 이는 세상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언자는 언제나 세상에서 비난받고 조롱당한다.

이것이 예언자의 애환이자 숙명이다.

 

그렇다면 왜 예언자는 세상과 역행해야 하냐?

예언자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이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 하나님은 예언자 없이 세상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신다.

- 그래서 많은 기회를 주시며 기다리신다.

그런데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 이는 그만큼 세상의 거부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 세상이 자정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예언자가 나서서 하나님의 뜻을 직접 귀에 들리도록 말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 그것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이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 예언자의 예언이 없으면, 그래서 당장 돌이키지 않으면, 곧바로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만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신다.

-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세상과 역행할 수밖에 없고,

- 그래서 비난받고 조롱당하는 버거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예언자의 본질이고,

- 이것이 아니면 예언자가 존재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임과 동시에,

- 세상에서 가장 배척받는 존재이다.

- 예언자는 세상의 길을 완전히 반대로 돌려서 세상을 지키는 역할임과 동시에,

- 세상과 역행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부도덕하고, 불의하며, 유해한 역할이다.

그래서 만약 예언자가 부당한 평가가 싫다고 자기 역할을 포기하면,

- 예언자 한 명 때문에 세상 전체가 멸망할 수밖에 없고,

- 세상과 함께 자신도 멸망하는 것이 예언자의 비극이다.

즉, 예언해도 고난받고, 예언하지 않아도 죽임당한다.

 

여기서 예언자를 부도덕, 불의, 유해하다고 말한 것을 풀어 말하면,

- 예언자는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부정한다.

- 예를 들어, 율법과 성전이다.

- 당시에 율법과 성전은 절대 불변하는 가치였다.

- 누구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준이었다.

- 그런데 예언자는 그것을 부정한다.

- 그 흐름을 역행한다.

우리 시대의 율법과 성전은 대표적으로 법, 돈, 예절이다.

- 그래서 예절에 어긋나는 부도덕,

- 법을 어기는 불의,

- 돈을 잃는 유해가 예언자를 상징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현실에서 부도덕, 불의, 유해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예언자는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 아무리 배척받아도 세상과 등지고 안 보면 편하다.

- 반대로 배척받지 않고 선한 영향력만 미치면 행복하다.

그러나 예언자는 배척받으면서도 세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 그러면서도 세상 속에서 세상에 역행해야 한다.

- 그래서 죽을 만큼 괴롭지만, 죽을 수도 없는 존재가 예언자의 숙명이다.

이것이 예언자의 현실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다.

- 세상이 거부하는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 그 메시지를 가지고 세상 깊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세상의 거부를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언자는 이런 고생을 해야만 하는가?

단호하게 말하는데, 하나님이 시켜서,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예언을 하는 예언자는 없다.

- 예언이라는 행위 자체가 수동적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 적극적, 자발적으로 인생 전부를 다 바쳐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무엇보다 예언 행위를 좋아하고,

- 예언 때문에 받는 박해를 감수할 만큼 예언 행위를 기뻐한다.

- 반대로 말해서, 죽음을 감수할 만큼 예언 행위를 기뻐하는 사람만 예언자가 된다.

 

단지 예언자만 이런 것이 아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도 그렇다.

- 바른 그리스도인 중에 하나님이 시켜서, 억지로,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 신앙이라는 행위 자체가 수동적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

- 적극적, 자발적으로 인생 전부를 다 바쳐야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 신앙 때문에 받는 박해를 감수할 만큼 하나님을 기뻐한다.

- 반대로 말해서, 죽음을 감수할 만큼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만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렇다면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주는가?

- 어떤 기쁨이 있기에, 우리는 죽음을 감수하고 신앙을 갖는가?

만약 우리가 세상의 거부가 싫다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지 않고 외면하면?

- 세상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 어차피 종말에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함께 우리도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 몸도, 마음도, 영도 무너져 내릴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을 지켜야 한다.

-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역행해야 한다.

- 그런데 세상에 역행하면 세상에서 배척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 결국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생명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건은 세상의 배척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느냐에 있다.

-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일정 수준 이하로 관리하며 사느냐가 관건이다.

어차피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는 정해져 있고,

-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몸에든 마음에든 문제가 생긴다.

- 그러면 결국 자기 역할을 지속할 수 없다.

- 그래서 세상의 배척을 받되,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신앙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 신앙이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일이라면, 굳이 왜 신앙을 가져야 하냐,

- 세상에서 받은 스트레스 풀려고 신앙 가졌는데, 신앙이 스트레스를 더 준다는 것이 말이 되냐,

-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는 꼴 아니냐고 말이다.

답은 단순하다.

- 그렇다고 신앙 안 가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가?

- 어차피 뭘 해도 스트레스는 있다.

- 그런데 세상 스트레스는 사라질 가치 때문에 받는 것이고,

- 신앙 스트레스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것이다.

- 이왕 스트레스 받을 거면, 가치 있는 것을 위해 받는 것이 낫다.

게다가 세상 스트레스보다 신앙 스트레스가 더 가볍다.

[마 11:28~30]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세상은 가혹하고 잔인하게 사람을 짓누른다.

- 반면 신앙 스트레스는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과 함께 나눠 진다.

- 예수님과 나누기에 가벼운 것은 물론이고,

-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있기에, 그 자체로 기쁠 수 있다.

따라서 신앙 스트레스는 세상 스트레스에 비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것이다.

- 신앙은 힘들지만, 가치 있고,

- 그 자체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땅을 구입하는 것이 우리에게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땅 구입 행위 예언을 이해할 때 중요한 전제가 있다.

- 당시 상황이 모두가 땅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 전쟁과 같이 불안정한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현금의 가치가 올라가고 부동산의 가치는 떨어진다.

- 그래서 IMF 금융위기 때도 현금을 가진 사람이 큰 소득을 얻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숙부 하나멜이 자기 밭을 판 것도 이런 맥락 안에 있을 것이다.

[렘 32:8]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근위대 뜰 안으로 나를 찾아와서, 내게 부탁하였다. 베냐민 지방의 아나돗에 있는 그의 밭을 나더러 사라고 하였다.

- 만약 땅 구입 행위가 예레미야에게 이익을 가져다줬다면, 

- 예레미야는 땅을 구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 기쁘게 땅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땅을 구입해야 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고,

- 이는 땅 구입이 예레미야에게 아무런 이익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손해를 끼쳤다는 뜻이다.

 

게다가 행위 예언의 중요한 특징은,

- 당시 사람들에게 너무 부자연스러워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행위 예언을 하는 이유가 아무리 말해도 하나님의 뜻을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말을 귀에 ‘쑤셔 넣기’ 위한 것이 행위 예언이다.

그런 점에서 땅 구입 행위는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비정상적인 행위였을 것이고,

-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큰 손해를 입어야만 했다.

 

따라서 땅 구입이 상징하는 것은 첫째로, 세상에 역행하여, 세상의 기준에서 손해가 되는 것이다.

- 특히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심각한 손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세상과 역행하여 손해 보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 만약 그것이 전부라면, 미치광이처럼 가진 돈 전부를 대로변에서 뿌리며,

- 예수님 믿으라고 무모하게 외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 혹은 시간을 의미 없이 낭비하며 게으른 것도 신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

신앙에는 자기 파괴 속성이 있지만, 자기를 파괴한다고 전부 다 신앙은 아니다.

- 자기 파괴는 바른 신앙에 이르는 수단일 뿐이다.

- 목적은 진정한 자기 회복이다.

- 자기 파괴는 자기 회복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을 때만 정당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은 땅 구입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렘 32:15] 참으로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다시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살 것이다.

- 단순히 집, 밭, 포도원을 사는 것을 넘어서,

- 땅을 구입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어, 농사짓고 사는 것뿐만 아니라,

-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움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까지 의미한다.

따라서 땅 구입이 상징하는 것은 둘째로, 자신과 세상의 회복이며,

- 그 회복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있다.

 

정리하면, 땅 구입은 ‘일시적’으로 자기를 파괴한다.

-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며, 비난받는다.

- 세상에서 인정받고 안정되게 살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고 부정해야 한다.

- 세상이 비웃는 자리, 내가 가장 가기 싫은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온갖 저주를 받으며 죽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땅 구입은 ‘장기적’으로 자기를 회복한다.

- 이스라엘이 가장 이스라엘답게 된 것처럼 우리도 가장 우리답게 회복된다.

-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고 안정된다.

- 그리고 그 인정과 안정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인정과 안정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게 된다.

-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 받으시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땅 구입은 우리 인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 일시적으로 자기 파괴이고, 장기적으로 자기 회복이다.

언뜻 들으면, 모순 같지만 그렇지 않다.

- 현재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어떻게 해야 자기다워질 수 있는지 모른 채, 

- 세상의 거짓된 유혹에 속아 헛된 욕망 성취에 매몰되어 있다.

-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살아온 패턴을 파괴하고, 잘못된 패턴으로 얼룩진 자기를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파괴에만 몰입하면 안 된다.

- 자기 파괴를 붙잡은 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 자기를 파괴하는 동시에,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

- 그리고 자기를 찾는 일은 죽을 때까지 멈춤 없이 지속해야 한다.

특히 자기 회복은 노동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땅 구입으로 예언한 것이다.

- 여기서 땅은 ‘자기답게 노동할 수 있는 토대’이다.

 

회복 이전의 노동은 저주였다.

- 먹고 살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노동이었다.

- 노동 덕분에 입에 풀칠하며 생존할 수 있지만,

- 생존의 대가로 자기를 부정하고 죽인다.

- 마치 욕망 성취를 위해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서,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죽은 인생을 살아간 소설 속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반면에 회복 이후의 노동은 축복이다.

-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은 최소한이 되고,

- 자기 회복의 계기가 된다.

- 자기다움을 발산하고, 그와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는 수단이 된다.

- 그래서 자기와 세상을 구원하고, 하나님과 연결된다.

이것이 땅 구입이 상징하는 회복이며,

-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개인적으로 말씀 읽고, 기도해야 하고,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교제해야 한다.

- 이는 너무 당연하고, 너무 많이 말했으니, 말하지 않겠다.

 

둘째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기준과 방식을 부정해야 한다.

- 자기를 파괴해야 한다.

- 왜냐하면 신앙 이전에 삶은 세상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 남 부럽지 않게,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안정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잘못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사소한 취미,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인테리어, 패션 스타일, 미용실 가는 주기 등에도 세상의 거짓된 가치가 스며들어 있다.

- 삶의 전반, 라이프 스타일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 이런 것들이 개성이고 개인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 취향조차 세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 사람의 본질이 세상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취향도 종속되어 있다.

 

물론 사람에게는 선천적인 성향이 있다.

- 유달리 좋아하는 것이 있고, 유달리 싫은 것이 있다.

- 이는 연약함일 수는 있지만, 문제는 아니다.

- 마치 장애인의 장애가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세상에 종속된 상태에서는 무엇이 선천적인지, 세상의 영향인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최종 목적은 선천적인 것과 세상의 영향받은 것을 구분하여,

- 세상의 영향은 제거하고, 선천적인 것은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과 ‘나’가 뒤섞인 상태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

- 그래서 우선 세상과 ‘나’를 전부 버린 후,

- 그래서 세상에서 자유롭게 된 후,

- 그래서 세상과 ‘나’를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 후에만,

- 세상에서 해방된 ‘나’를 되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돈, 집, 차, 취미, 옷, 음식을 다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 단지 그런 사소한 것조차 온전히 ‘나’의 선택이 아니라, 세상의 얼룩이 묻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 내 인생에서 정말 나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하자는 것이다.

- 기호와 취향조차도 말이다.

그렇게 자금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고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 진정한 자기를 찾을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부 도전해 보며 살아야 한다.

- 이전에는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싫어하는 것은 하지 않고 살았다.

- 그런데 이제는 싫어하는 것도 도전해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엉뚱하게 들리는 말을 한 이유는,

-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구분했던 기준 자체가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정말 내가 좋아서 좋아했고 정말 내가 싫어서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 나는 좋아했지만, 세상이 싫어해서 싫어했고,

- 나는 싫어했지만, 세상이 좋아해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내가 좋아한 것 중에 실제로는 싫어하는 것이 있고,

- 내가 싫어한 것 중에 실제로는 좋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도 해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막상 해보면 정말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이 도전을 통해서만 그동안 알 수 없었던 ‘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던 영역의 ‘나’는 이미 발견했을 것이다.

- 발견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했던 영역의 ‘나’이다.

- 이 영역은 세상에 종속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

-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안에서 부정했을 것이다.

결국 정체성 회복은 이 영역을 통해 완성된다.

-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영역의 ‘나’를 발견할 때 말이다.

- 돈도 안 되고, 세상이 무시하고 조롱하여, 명예를 깎아 먹는 분야를 좋아하는 영역의 ‘나’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싫어하는 일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다.

- 그 도전을 통해서만 숨겨져 있던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좋아하는 일만 해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무조건 싫어하는 일만 주야장천 하며 괴롭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 싫어하는 일이 정말 내가 싫어하는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도전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싫어하는 일을 일정 기간 꾸준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하루 이틀 해보고 싫다고 단정하면 안 된다.

-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싫어하는 일이 점점 더 싫어진다면, 그것은 정말 싫어하는 일이기 때문에 할 필요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만 탐구할 수 있는 ‘나’의 영역이 있고,

- 그 영역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다.

그렇게 정체성을 회복할 때, 신앙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그때 인생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된 듯한 쾌감을 느낄 것이다.

 

싫은 일에 도전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세상과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세상이 조롱하고 무시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세상 모두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다.

-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 신앙 없이, 하나님의 지지와 사랑 없이, 평생을 세상에 역행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는 가능하다.

-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주시며, 

-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하며, 길을 여시기도 닫으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함께 그 길을 가는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통해서만 세상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고,

- 그것을 통해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으며,

- 그것을 통해 세상에 역행하며 ‘나’를 표현할 때만 삶의 의미를 찾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세상 짐은 무겁지만,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는 말씀의 뜻이다.

 

결론 - 세상 안에서 세상에 역행하며 살라.

세상 안에서 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은 쉽다.

- 동시에 세상에 역행하며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도 쉽다.

이 두 가지는 너무 쉬워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도 막상 해보면 그렇게 쉽지 않다.

- 세상에 휩쓸려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도 이미 경험했다.

- 반대로 세상과 등지고 자연인으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연인을 보며 동경하지만, 정말 자연인이 되려는 사람은 적다.

 

그런 면에서 ‘세상 안에서’ ‘세상에 역행하며’ 사는 것은 어렵지만 쉽다.

- 세상에 동화되지도, 세상과 분리되지도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 세상에 역행하여 비난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 세상을 피하지 않고 계속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옥 같은 삶이다.

- 죽을 만큼의 고통을 계속 느끼면서도 죽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쉽다.

-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점에서 말이다.

- 세상에서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세상에 휩쓸려 동화되는 것도 막상 해보면 정말 어렵다.

- 세상과 등지고 자연인이 되기도 정말 어렵다.

- 그런 점에서 쉬운 인생은 없다.

- 무엇을 선택해도 다 어렵다.

그러나 신앙을 선택하여, 세상 안에서 세상에 역행하는 삶도 똑같이 어렵지만,

- 하나님이 동행하시며, 함께 짐을 지워주신다는 점에서 세상 어떤 일보다 더 쉽다.

이것이 세상 안에서 세상에 역행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상에 역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말 많이 말했다.

- 완벽하게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는 거의 다 알고 있다.

- 거래와 착취로 얼룩진 세상에서 사랑과 관계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 낯선 것은 ‘세상 안에서’ 사는 것이다.

- 결정적으로, ‘세상 안에서 사는 것’과 ‘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 사이에 차이를 헷갈린다.

 

이러한 혼동은 당연하다.

- 우리가 처음에 거래와 사랑을 배웠을 때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했다.

- 사랑 같은 거래와 거래 같은 사랑의 예를 떠올리며 많은 의문을 가졌다.

-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 구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사는 것과 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도 결국 구분하게 될 것이다.

- 시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가 필요할 뿐이다.

- 인내를 가지고 도전해 보자.

- 머지않아 익숙해질 것이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사는 것과 세상에 휩쓸려 사는 것 사이를 구분하는 것의 특징이 있다.

비교적 실천의 영역이고, 일상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둘 사이를 구분하는 기준점이 옮겨진다.

- 일관된 기준이 없다.

- 단지 큰 원칙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이다.

- 세상에 들어가서 부딪혀 보는 것뿐이다.

- 직접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뿐이다.

세상 안에 한 걸음 들어갔는데, 신앙이 흔들리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 한 걸음 다시 뒤로 물러나, 다시 중심을 잡는 것이다.

- 그런 후 다시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한 걸음 들어갔는데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면,

- 또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 그래서 죽을 때까지 조금씩이라도 세상의 중심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 신앙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예레미야도 결국 왕에게 직접 예언하고, 국가 차원의 박해까지 받게 된 것이다.

- 그만큼 세상에 깊이 들어간 것이다.

- 그런데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다.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며, 세상의 중심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는 것 말이다.

신앙만 굳건히 하는 것과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만 하기는 비교적 쉽다.

- 많은 교회가 이 두 가지만 가르친다.

하지만 진짜 신앙은 이 두 가지는 동시에 하는 것이며,

-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강화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강화되면, 두 가지 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

- 신앙이 강화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가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 그 안에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의 중심에 들어갈수록 박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다.

- 죽을 것 같은 위기가 아니라, 실제로 죽을 위기가 계속될 것이다.

기쁨*과 공포가 팽팽하게 유지되는 것만이 참 신앙이다.

- 죽음 부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신앙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있을 기쁨을 기대하자.

- 상상 이상으로 기쁘게 할 것이다.

동시에 앞으로 있을 박해를 대비하자.

-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고통을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의 죽음 부활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공감하게 될 것이다.

그 공감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할 참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