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56) 29:15-32 평화를 선포하는 거짓 예언자 - 가난한 자‘만’ 복이 있다.

안승준 2023. 3. 24. 13:54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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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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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가 선포한 ‘바벨론 정착 예언’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을 뜻한다.

- 바벨론에 정착하여, 이스라엘로 돌아갈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평생을 바벨론 포로로 살며, ‘포로 귀환’과 ‘국가 재건’ 소망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 ‘70년 후 회복 예언’ 역시 ‘회복’이 아니라 ‘70년 후’에 초점이 있다.

- 70년 전에 회복은 없으며, 지금 살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 정착 예언은 재앙이 맞다.

- 결코 번영과 희망이 아니다.

[렘 29:11]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절망했다.

- 누구도 번영과 희망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바벨론 정착 예언은 번영과 희망이 맞다.

-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것이다.

- 출애굽 후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정체성을 확립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듯이,

-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이스라엘은 무너진 정체성을 회복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시 마련할 것이다.

- 그렇게 70년 동안 정체성을 회복한 후, 포로에서 귀환하여 국가를 재건할 것이다.

- 내부 정체성을 회복한 이스라엘은 외부 영향력까지 확대되어 번영할 것이다.

- 이것이 바벨론 정착 예언을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다.

[렘 29:14] … 내가 너희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 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점에서 바벨론 정착 예언은 번영과 희망이다.

 

혹시나 해서 다시 말하는데,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왜 굳이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바벨론 포로로까지 잡혀가게 하셨냐? 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다.

-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그런 투박한 방법 말고 섬세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멸망하지 않고 회복시키는 방법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 ‘국가 멸망’이라는 재앙 없이 ‘국가 재건’이라는 번영이 있을 수 없냐? 고 반문할 수 있다.

- 굳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워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 의문에 먼저 답해야 할 것은,

- 하나님은 ‘재앙 없는 번영’을 위해 누구보다 바라셨다는 것이다.

- 하나님도 ‘재앙 이후 번영’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다.

- 하지만 ‘재앙 없는 번영’으로는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마지막 방법으로 ‘재앙 이후 번영’을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이코패스, 살인마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멸망하신 것이 아니다.

- 이스라엘은 국가가 형성되기 전 사사기 시절부터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다.

- 그때부터 민족 내부에서 착취하고 우상을 숭배했다.

- 그러한 상태는 사사 시대(BC 1400년)부터 예레미야 시대(BC 600년)까지 800년 동안 계속되었다.

- 그래서 하나님은 기적, 사사, 예언자, 왕 등 셀 수 없는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멸망하지 않고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800년의 반복된 실패 후에 깨달으셨다.

- 표면의 문제만 해결하는 미봉책으로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 그래서 문제의 근원까지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결국 빈대를 완전히 잡으려면, 초가삼간 다 태워버리고 새로 짓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 후에 나온 판단이 ‘재창조’이다.

- 이스라엘이 반복해서 착취와 우상 숭배에 빠져,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파괴하는데,

- 더 이상 자기를 파괴하지 않고, 정체성을 회복하여 이스라엘답게 살기 위해서는

-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하셨다.

- 그것은 이전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제로 베이스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정체성을 둔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멸망이라는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충동적으로 내리신 결정이 아니다.

- 적어도 800년의 시행착오와 고민 끝에 내리신 결정이다.

- 800년을 고민했다는 것은 800년을 미룰 만큼 내리기 싫은 결정이라는 뜻이다.

- 즉, 하나님은 ‘재앙 이후 번영’을 결정하기 싫어서 ‘재앙 없는 번영’을 800년 동안 하신 분이다.

- 그런데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더 미루면 착취와 우상 숭배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이 너무 커서,

- 800년을 미루신 결정을 어쩔 수 없이, 이제야 내리신 것이다.

 

따라서 ‘재앙 이후 번영’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떻게 의문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다.

- 어떻게 ‘재앙 없는 번영’을 주시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 있냐는 것이다.

- 어떻게 이런 이스라엘에게 재앙과 함께 번영을 주신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냐는 것이다.

- 어떻게 하나님께 더 세련된 방법 없냐는 원망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오히려 800년 동안 ‘재앙 없는 번영’을 받고도 계속해서 착취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비난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오히려 800년 동안 착취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재앙으로 제거하시지 않고,

- 재앙과 함께 번영까지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주셨다는 것은 비난받을 수 없다.

- 오히려 재앙만 주신 것이 아니라 번영을 함께 주신 것에 하나님은 칭송받으셔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과 부활의 참뜻이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 사람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존재를 찾기보다, 세상에서 써먹을 수 있는 기능을 쌓으려 한다.

- 왜냐하면 기능만이 덜 굴복하고 더 군림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사람은 덜 착취당하고 더 착취하기 위해 기능을 쌓고, 

-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체성을 부정한다.

- 즉, 다른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과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착취와 우상 숭배에 빠져 정체성을 부정했다.

- 그 결과 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멸망한다.

- 이와 똑같이 모든 사람은 착취하기 위해 정체성을 부정하여,

- 그 결과 멸망한다.

- 여기서 말하는 멸망은 육체의 죽음일 수도 있고,

- 육체가 죽지 않더라도, 존재를 잃고 껍데기 기능만 남아서, 

-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삶일 수도 있다.

이 멸망과 죽음의 과정에서 외부의 개입은 없었다.

- 100% 자신의 선택이다.

- 자기가 직접 자신을 멸망시킨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류의 상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멸망한 인류를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는다.

- 사실 따지고 보면, 착취하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죽음으로 내달리는 인류를 향해 하나님은 분노를 내뿜으셔야 마땅하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파괴한 주범이 인류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인류에게 재앙만 내리셔도 비난받을 수 없다.

- 오히려 세상 만물을 파괴한 인류가 비난받고 재앙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재앙과 함께 부활이라는 번영도 주신다.

- 이스라엘을 제로 베이스에서 재창조하셔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정체성을 둔 새로운 이스라엘로 재창조하시듯,

- 사람도 제로 베이스에서 재창조하셔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정체성을 둔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하신다.

이것이 ‘죽음 이후 부활’의 참뜻이다.

 

이전 이스라엘 vs 새로운 이스라엘

어떤 관점에서 이전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은 아무 상관 없는 완전히 다른 민족이다.

- 70년이라는 시간이 이전 이스라엘과 새로운 이스라엘을 완전히 단절한다.

- 새로운 이스라엘 중에 이전 이스라엘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단, 외형에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내면의 정체성은 완전히 같다.

- 이전 이스라엘의 정체성도, 새로운 이스라엘의 정체성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

- 그런데 이전 이스라엘은 정체성이 발휘되지 못했고, 새로운 이스라엘은 정체성이 발휘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람은 이전 인생과 완전히 단절된다.

-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가치 기준에 따라 산다.

- 이전에는 기능과 거래로 살았지만, 이후에는 존재와 사랑으로 사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과 부활 이전과 이후의 정체성은 똑같다.

- 죽음 부활 이전에도 기능을 쌓았던 이유가 사랑받기 위해서였고,

- 죽음 부활 이후에도 존재로 살려는 이유가 사랑받기 위해서이다.

- 정체성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 차이는 이전에는 정체성이 억눌려서 발휘되지 못했고, 이후에는 정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뿐이다.

- 그래서 이전에는 사랑받기 위해 기능을 쌓아 거래했는데, 이후에는 기능 없이도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

 

이런 점 때문에 죽음 부활 이후 천국에서의 삶을 예상할 수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하다.

- 천국은 아무리 상상해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 너무 아름답고, 너무 완벽해서,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도 지루하지 않고 행복하다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은 예상할 수 있다.

- 완전히 나다울 수 있고, 완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시간이며 장소이다.

- 우리가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정체성 회복과 사랑이 극단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전혀 낯설지 않다.

만약 죽음 부활 이후 천국이 절대로 예상할 수 없는 곳이라면, 

-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 다른 말로, 정신 나간 헛소리이다.

- 천국이 어떤 곳인지도 전혀 모른다면, 어떻게 소망하겠는가.

 

우리가 천국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천국이 ‘인류 보편의 근원 욕구’인 ‘정체성 회복’과 ‘사랑’을 완벽한 형태로 보장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 부활’ 그리고 ‘재앙 이후 번영’이 정체성 회복과 사랑을 약속하기 때문에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죽음과 재앙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다.

- 부활과 번영으로 인한 정체성 회복과 사랑이 ‘인류 보편의 근원 욕구’이기 때문이다.

- 정체성 회복과 사랑이 없으면, 인류 중 단 한 사람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앙 이후 번영’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본문이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이다.

- 그들은 끝까지 ‘재앙 없는 번영’을 예언한다.

[렘 23:16~1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예언을 듣지 말아라. 그들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고 있다. 그들은 나 주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 속에서 나온 환상을 말할 뿐이다. (17) 그들은 나 주의 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사가 형통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한다.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한다.

혹은 완전한 재앙이 아닌 ‘반쪽짜리 재앙 이후 번영’을 말한다.

- 이스라엘이 잠시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진 하지만, 곧바로 돌아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 완전한 멸망이 아니라 불완전한 멸망을 말한다.

[렘 28:1~4] … 기브온 사람 앗술의 아들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그가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온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2)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렸다. (3)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 간 주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친히 이 년 안에 이 곳으로 다시 가져 오겠다. (4)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바빌로니아로 잡혀 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 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반드시 바빌로니아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겠다.

그러면서 ‘재앙 이후 번영’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박해한다.

-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과 도성이 파괴되는 재앙을 예언하는데, 

- 이스라엘 중 특히 성전과 도성의 권력을 쥔 제사장과 예언자는 그 예언을 강하게 거부한다.

- 그래서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한다.

- 이는 예레미야 개인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재앙 이후 번영’에 대한 거부이며,

- 이는 ‘재앙 없는 번영’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렘 26:8~9] 이와 같이 예레미야가 주님의 명대로, 모든 백성에게 주님의 모든 말씀을 선포하니, 제사장들과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너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9) 어찌하여 네가 주님의 이름을 빌려, 이 성전이 실로처럼 되고, 이 도성이 멸망하여 여기에 아무도 살 수 없게 된다고 예언하느냐?” 그러면서 온 백성이, 주님의 성전 안에 있는 예레미야를 치려고, 그 주위로 몰려들었다.

본문에서도 바벨론 정착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않는다고 제사장 스바냐를 비난한다.

[렘 29:27~28] 그런데 지금 제사장님께서는 어찌하여,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가 여러 사람 앞에서 예언자처럼 행세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28) 그는 바빌로니아에 있는 우리에게 아직 때가 멀었다고 하면서, 이 곳에서 정착할 집도 짓고,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도록 과수원도 만들라는 전갈까지 보내 왔습니다.

- 이 역시 ‘재앙 없는 번영’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재앙을 거부할까?

왜 ‘재앙 없는 번영’을 욕망할까?

-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죄 없는 자신에게 재앙이 내려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로,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재앙 때문에 가진 것을 잃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게다가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을 이용하여 거래하고, 사람을 착취하기 위해 기능을 쌓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뿐만 아니라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은 권력과 재산을 축적하기 때문에,

-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 반면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를 인식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기에,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고,

-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다.

[마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착취와 우상 숭배를 범하게 만든다.

- 예레미야 당시에도 이스라엘은 착취와 우상 숭배의 죄가 난무했다.

게다가 착취와 우상 숭배 때문에 이스라엘 측정 집권층은 권력과 재산을 축적했다.

- 그래서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복된 전쟁과 조공으로 나라 재정은 파탄 직전이었다.

- 집권층이 축적한 권력과 재산은 백성을 굶겨 죽이고 국가를 강대국에 팔아서 얻은 것이었다.

- 마치 일제 침략 시대에 일부 특권층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실제로 이스라엘은 빚만 있을 뿐 가진 것은 없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멸망당한다.

- 바벨론에 대항할 무기도 없었고, 무기를 들고 싸울 백성도 없었다.

- 이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가진 것이 없었는지 증명한다.

 

따라서 재앙을 거부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거래,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 그 사고방식은 죄 인식을 방해하고,

- 가진 것이 많다고 착각하게 한다.

- 실상은 죄 많고, 가진 것은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재앙을 부당하다고 여겨 거부하게 한다.

- 그래서 ‘재앙 없는 번영’을 욕망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재앙을 거부하고 거래,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에 안주하면,

- 오히려 더 큰 재앙에 빠져 자멸한다.

- 이스라엘의 집권자는 착취와 우상 숭배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 자신 정체성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잊었다.

- 그래서 자신을 부정했다.

- 물론 자신이 자신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냐?

- 바로 바벨론에 의한 멸망이다.

-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스라엘 멸망 원인은 바벨론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이다.

- 자기가 자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생긴 필연적인 결과이다.

- 자기가 자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이다.

이것이 재앙 없는 번영을 바라는 사람의 숙명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거짓 예언자가 활개 치도록 만든 원인이다.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에 기반하여, 

- 자신을 죄 없다 여기고, 자신에게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에,

- 이스라엘 사회 전체는 재앙 없는 번영을 욕망했다.

 

따라서 거짓 예언자가 출현한 것은, 

- 예언자 개인이 부정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 사회가 ‘재앙 없는 번영’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 그 욕망에 부응하여, 평화와 번영을 선포하며 포로 귀환을 예언하는 예언자가 등장한 것이다.

- 즉, 거짓 예언자 한 사람에 사회 전체가 속은 것이 아니라,

- 사회가 욕망하는 것을 거짓 예언자가 대신 말해준 것뿐이다.

이는 현재 많은 교회가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와 정확하게 똑같다.

- 목사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교회 성도 전체가 ‘재앙 없는 번영’과 기복 신앙을 원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성도의 욕망에 부응하여, 목사는 다 잘될 것이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 해결될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남발하는 것이다.

- 실상은 교회 전체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거짓 예언자를 비판하는데,

- 이는 거짓 예언자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 거짓 예언자를 소환한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썩어있었기 때문에, 

- 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한 것은 당연하고,

- 회복하는데 7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 이전 이스라엘을 완전히 제거한 후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창조해야만 했다.

 

이는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 만약 우리가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살면서,

- 죄 없다, 가진 것이 많다고 여기면,

- 결국 사랑하는 사람조차 착취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서,

- 결국 자기가 자신을 멸망시켜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들 수 있다.

- 그것이 바로 ‘재앙 이후 번영’을 바라는지, ‘재앙 없는 번영’을 바라는지이다.

- 만약 ‘재앙 이후 번영’을 거부하고 ‘재앙 없는 번영’을 바란다면,

- 그것은 거래와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고,

- 죄 없다, 가진 것이 많다고 여길 것이며,

- 사랑하는 사람조차 착취하고, 자신을 잃어버려서,

- 결국 자기가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비극적인 실상을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이것이 현실이다.

-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바리새인과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차이도 이것이다.

- 바리새인과 베드로 모두 사랑하는 사람조차 착취하고 자신을 잃어버렸다.

- 바리새인은 사람들을 착취하여 권력을 얻었고,

- 베드로는 예수님을 착취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을 부정한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착취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러나 바리새인은 깨닫지 못했다.

이 단순한 차이가 천국과 지옥을 가른 것이다.

- 즉,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은 삶이 아니다.

- 사람을 착취했냐 아니냐가 기준이 아니다.

- 모든 사람은 전부 착취한다.

- 바리새인과 베드로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다.

 

기준은 자기 인식이다.

-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착취하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기가 자신을 멸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자기 인식과 회개가 있는 사람만 자기 파괴의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절박한 절규가 나온다.

- 그렇게 절규하는 사람만 예수님께 나아가 죽음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

- 왜냐하면 어차피 자기 파괴 지옥에서 죽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는 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

- 어떻게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부활의 영광이 따라오는데 말이다.

- 반대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자기 파괴 지옥에서 살다가, 죽은 후에 영원히 지옥에 갇혀야 하는데 말이다.

이러한 죽음 부활을 어떻게 감히 헌신이며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은혜이고 구원이지.

 

이것 역시 자신을 판단하는 지표이다.

- 십자가에 동참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 헌신과 희생이라고 생각한다면,

- 여전히 자기 인식과 회개가 없는 사람이다.

- 자신에게 죽어야 할 죄가 없고,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 그런 사람은 현재 아무리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해도,

- 결국 본전 생각에 하나님과 거래하려 할 것이고,

- 거래하지 않는 하나님을 거부하며, 죽이려 들 것이다.

-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본문 설명

본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렘 29:15] 너희는 주님께서는 바빌로니아에서도 우리에게 예언자들을 보내 주시지 않았느냐? 하고 말한다.

- 이 질문은 바벨론 포로로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있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편지로 듣고 한 말이다.

해석하면, 

- (우리가 원하는) ‘재앙 없는 번영’을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가 이미 바벨론에 있는데,

- (우리가 원하지 않는) ‘재앙 이후 번영’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의 말을 왜 들어야 하지? 라며,

- ‘재앙 이후 번영’ 예언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부가 의미라는 것은,

-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 없다,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 여전히 거래,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을 착취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자기 파괴의 지옥에 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광야 생활’이다.

- 기능을 발휘할 수 없어, 거래가 불가능한 광야에 살도록 하신다.

- 그래서 거래, 기능 중심의 사고방식을 억제하신다.

- 그 내용이 이번 본문의 핵심이다.

- 동시에 아무런 기능이 없어도, 누구와 거래하지 않아도, 존재로서 사랑받기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경험하게 하신다.

- 그래서 사랑, 관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도록 하신다.

- 그 내용을 다음 본문 30~33장에서 다룬다.

 

그래서 하나님은 16~19절에서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을 예언하신다.

[렘 29:16~17] 그렇기 때문에 나 주가 지금 다윗의 보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그리고 지금 이 도성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로 잡혀 가지 않은 너희의 친척에게 말한다. (17)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내가 그들에게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보내어, 그들을 아무도 먹을 수 없는 썩은 무화과처럼 만들겠다.

- 예루살렘의 멸망이 의미하는 것은, 한마디로, ‘퇴로 차단’이다.

-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다.

- 그래서 ‘바벨론 정착 예언’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헛된 소망 버리고, 바벨론 정착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중하여, 정체성과 사랑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20~23절은 ‘재앙 없는 번영’이라는 헛된 소망을 갖게 만드는 거짓 예언자를 심판하신다.

- 바벨론 탈출 소망을 갖도록 거짓 예언을 한 아합과 시드기야가 비극적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저주하신다.

[렘 29:21]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지금 나의 이름을 팔아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는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두고 말한다. 내가 그들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어, 너희가 보는 앞에서 그 왕이 그들을 죽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24~32절은 ‘재앙 이후 번영’을 거부하는 사람을 심판하신다.

- 바벨론 정착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스마야가 자손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렘 29:27~28] 그런데 지금 제사장님께서는 어찌하여,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가 여러 사람 앞에서 예언자처럼 행세하는 것을 책망하지 않았습니까? (28) 그는 바빌로니아에 있는 우리에게 아직 때가 멀었다고 하면서, 이 곳에서 정착할 집도 짓고,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도록 과수원도 만들라는 전갈까지 보내 왔습니다.

[렘 29:31] …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스마야가 그들에게 나 주를 거역하게 하는 말을 하였으니, 그는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과 함께 어울려 살 자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 하나이다.

-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 그래서 바벨론 정착 예언을 하는 것이고,

- 헛된 소망을 갖게 하여 바벨론 정착을 방해하는 예루살렘과 거짓 예언자를 멸망시키는 것이며,

- 그런데도 끝까지 ‘재앙 이후 번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은 심판하시는 것이다.

- 바벨론 포로라는 광야 생활을 통해 사랑과 관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져서,

-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재앙 이후 번영’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레미야가 있고, 그의 조력자가 있었다.

- 36장에서 바룩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적고,

- 죽음을 무릅쓰고 그 예언을 유다 왕 여호야김에게 전달한다.

- 그래서 예레미야와 함께 바룩까지 죽을 위기에 몰린다.

- 또 38장에 에벳멜렉은 이스라엘 멸망 예언했다는 이유로 물웅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를 구해준다.

이렇게 예레미야와 함께 ‘재앙 이후 번영’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따를 수 있었을까?

- 우리는 흔히 이들에게 특별함이 있었다고 단정 짓는다.

- 하나님의 환상을 봤다든지, 기적을 경험했다든지, 거룩한 마음을 가졌다든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지극히 평범하다고 말하고 싶다.

- 마치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거지 바디매오, 예수님과 함께 걸린 십자가 죄인 등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이들이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점은 딱 하나이다.

- 마음이 가난했다는 것이다.

- 자신에게 죄가 있으며, 가진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하나님께 번영을 요구할 자격은 없고, 재앙을 피할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 때문에 ‘재앙 이후 번영’을 예언하는 예레미야에게 동참할 수 있었다.

- 이들은 죄 많고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재앙’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 ‘재앙 이후 번영’ 예언에서 앞의 재앙은 너무 당연하니 들리지 않고,

- 뒤의 번영에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저주가 아닌 복음으로 들린 것이다.

- 그랬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들인 것뿐만 아니라,

-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룩처럼 죽음을 감수할 수 있었다.

- 재앙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예레미야의 예언만이 유일한 소망과 생명을 줬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거지 바디매오의 차이도 이것이다.

- 바리새인도 특별히 부정한 삶을 살지 않았고, 바디매오도 특별히 거룩한 삶을 살았지 않았다.

- 겉보기에는 바리새인의 삶이 거룩했고, 바디매오의 삶은 추했다.

똑같은 차이가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에게도 있다.

- 바리새인은 거룩한 종교인의 삶을 살았고, 세리는 부정하게 세금 걷는 삶을 살았다.

- 누가 봐도 바리새인의 삶이 의롭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마음이 풍요로웠다.

- 자신이 죄 없고, 의로움을 많이 가졌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재앙 없는 번영’만을 기대했다.

- 그러니 ‘재앙 이후 번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바디매오와 세리는 마음이 가난했다.

- 자신에게 죄 많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재앙’만을 예상했다.

- 그러니 ‘재앙 이후 번영’ 예언을 듣고,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 기대하지 않았던 번영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재앙 이후 번영’이라는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다.

 

바디매오와 세리에게, 예레미야와 바룩과 에벳멜렉에게 특별한 의로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 단지 이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 자신이 의로운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 이들은 오히려 의로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를 수 있었다.

- 그래서 의로워질 수 있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며, 동시에 성경 전체의 핵심이다.

-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만’ 복이 있는 것이다.

 

결론 - 우리는 마음이 가난한가?

내가 앞에서 자신을 판단하는 지표 두 가지를 제시했다.

- 첫째는, ‘재앙 이후 번영’을 바라는지, ‘재앙 없는 번영’을 바라는지이다.

- 둘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것이 헌신과 희생이라고 생각하는지이다.

- 이는 둘 다 마음이 가난한지를 평가하는 지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 가지를 말씀하셨다.

- ‘재앙 이후 번영’이 그것이다.

-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며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 예수님은 같은 말을 ‘죽음 이후 부활’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말씀에 반응은 두 가지였다.

-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었다고 환호하고,

- 어떤 사람은 저주를 들었다고 혐오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왜 누군가는 재앙과 죽음에 집중하고, 번영과 부활은 들리지 않아서, ‘재앙 이후 번영’을 혐오하고,

- 왜 누군가는 번영과 부활에 집중하고, 재앙과 죽음은 들리지 않아서, ‘재앙 이후 번영’을 환호했을까?

차이는 하나이다.

- 자신을 이미 죄로 인해 죽은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앙과 죽음이 들리지 않는다.

- 이미 죽었고, 이미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마음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 어차피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번영과 부활이 크게 들린다.

- 그래서 재앙과 죽음을 감수하고 번영과 부활에 동참한다.

- 그래서 바디매오, 세리, 예레미야, 바룩, 에벳멜렉이 죽음을 감수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 이들이 특별하고 강단 있어서가 아니라, 

- 가난한 마음 때문에 죽음의 대가는 작게 느껴지고, 부활의 영광은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이들의 동기가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반면에, 자신을 의로우며, 살아있는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번영과 부활이 들리지 않는다.

- 대신 재앙과 죽음이 크게 들린다.

- 재앙과 죽음 때문에 힘겹게 모아놓은 의로움이 파괴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 자신을 죄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재앙과 죽음이 부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레미야를,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이려고 난리 치는 것이다.

- 그래서 본문의 스마야가 그리고 바리새인이 그렇게 살의를 갖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순종하는 것 역시 욕망의 결과이다.

- 천박한 예를 들어, 국가가 전쟁 중에 군인이 부족하여 꾀를 냈다.

- 사형 집행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사형수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나가면, 사면과 함께 국가 요직을 준다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 물론 같은 제안을 권력층의 자녀에게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사형수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죽을 처지라면, 전쟁에 나가는 것이 더 낫다.

- 전쟁에 나가면, 적어도 살아남을 가능성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 살기 위한 욕망 때문에 사형수는 국가의 제안에 순종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순종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 예레미야도 그랬고, 사마리아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 거지 바디매오, 예수님과 함께 걸린 십자가 죄인도 그랬다.

- 그들에게 특별히 거룩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앙 이후 번영’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 살기 위한 욕망 때문에 ‘재앙 이후 번영’을 저주가 아닌 복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자‘만’ 복이 있는 것이다.

 

물론 똑같은 사형수라고 전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다.

- 예수님의 한편에 걸린 죄인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 예수님의 다른 한편에 걸린 죄인은 예수님을 거부했다.

따라서 사형수라는 상황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 마음이 가난한가?

- 자신에게 죄 많고,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기준이며,

-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기준이다.

 

교회는 마음이 가난한 자‘만’을 위한 곳이다.

- 마음이 가난한 자‘만’ 교회에서 복음을 듣는다.

- 마음이 풍요로운 자는 똑같은 교회에서 저주를 듣는다.

- 예수님의 말씀에서 바리새인이 저주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