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42) 21:11-22:5 이스라엘의 지독한 죄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안승준 2022. 10. 1. 13:5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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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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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a - b - a'의 수미상관 구조이다.

- a(21:11~12)과 a'(22:1-5)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시고,

- b(21:13~14)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신다.

수미상관의 역할은 다양한데,

- 본문에서는 a와 b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하나로 응축하여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a(21:11~12)에서 하나님은 유다 왕실에게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라!'고 명령하신다.

[렘 21:12] 다윗의 왕가는 들어라. 나 주가 말한다. 아침마다 공의로운 판결을 내려라. ・・・・

- a'(22:1-5)에서도 하나님은 유다 왕에게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라!'고 명령하신다.

[렘 22:3]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 

이 명령의 의미는 단순한 명령을 넘어서, 관계로의 '초청'이며, 더 나아가서 돌아오라는 절박한 '부르짖음'이다.

-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자멸해가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외치시는 것이다.

- 더 이상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말고, 바른 결정, 즉 공의롭게 판결해서,

- 스스로를 해치지 말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서 평안하게 살도록 말이다.

그래서 '명령'이기보다 절박한 '초청'이다

 

따라서 공의로우라는 명령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명령이 아니다.

-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로 가라는 하나님의 절박한 사랑이다.

- 마치 유산을 탕진하고 돼지 여물조차 못 먹는 탕자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절규와 같이 말이다.

-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 외교 상황에서 공의로운 선택을 해야만 국가가 유지될 수 있었다.

-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 왜 그런지는 이전 본문에서 충분히 말했기에 생략하겠다.(혹시 이해가 안 되면 다시 물어봐 주길.)

이것이 태초부터 일관성 있게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 명령은 사랑의 절박한 표현이다.

- 이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a와 a'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b(21:13~14)는 이와 연결되면서도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 b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렘 21:14] 나는 너희의 행실에 따라 너희를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바로 예루살렘의 숲에 불을 질러, 그 주변까지 다 태워 버리겠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 하실까?

- a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공의롭게 판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을 반복했으며,

- 그 결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해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 무엇인지는 반복해서 말했는데,

- 집권자가 권력 유지를 위해 국가를 포기했다.

- 원래 집권자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희생을 감수하고 국가를 유지하라는 것인데 말이다.

- 권력을 희생하더라고 국가 유지를 위하는 것이 공의로운 판결이고,

- 공의롭게 판결할 때, 국가가 강해지고, 그에 따라 집권자의 권력도 강해지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집권자는 권력 유지에만 매몰되었고,

- 그래서 일시적으로 권력은 유지했지만, 머지않아 국가는 멸망했고, 국가와 함께 권력도 사라졌다.

- 즉, 집권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결정이 결과적으로 권력을 소멸시키는 원인이었다.

- 이렇게 이스라엘 집권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선택을 반복했고,

- 그 결과 권력과 국가를 비롯하여 모든 것을 잃었다.

 

따라서 b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절박하게 부르짖었다.

- 지금과 같이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 이제부터라도 공의롭게 결정하여 멸망에서 벗어나라고 간절하게 호소하셨다.

하나님의 절박한 호소를 들었다면, 이스라엘은 마땅히 공의롭게 결정해야 했다.

- 그래서 멸망에서 벗어나야 했다.

- 하나님의 명령은 독재 군주처럼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 마치 유산을 탕진해서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사는 탕자에게 아버지가 돌아오라고 부르짖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나방같이 불 속으로 뛰어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생존할 많은 기회를 주셨다.

- 탕자처럼 돌아오기만 하면, 반지와 새 신발을 주고, 잔치를 벌일 것이라고 하셨다.

- 권력 유지에 매몰되지 말고, 공의롭게 국가 유지에 집중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 그러나 어리석게도 같은 결정을 반복한다.

- 그래서 자멸한다.

-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예고와 같이 멸망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멸망 예고는 단순한 예고가 아니다.

-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 회복할 많은 기회를 던져버린 어리석은 말이다.

-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본질에 회복될 수 없는 어리석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 이스라엘은 너무 어리석어서, 본질이 완전히 새롭게 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다른 말로 '죄'가 b에서 드러나는 메시지이다.

 

수미상관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죄'라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메시지를 하나로 엮어서 전하기 위해 사용하는 메시지 전달 방식이다.

-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함께 전해질 때만 진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 두 가지가 하나로 엮이지 않으면, 두 가지 메시지 전부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이다.

- 이 연결을 위해 a와 a' 사이에 b를 끼워 넣은 것이다.

예를 들어,

-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 지극히 본능적이고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아들이 아버지의 두 아들을 눈 앞에서 죽인 군인이었고,

- 그런 원수를 양아들 삼았다는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는 감동을 넘어서 전율을 일으킨다.

또 반대로,

- 패륜아 아들이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사건은 너무 끔찍하지만, 큰 인상을 주지 못한다.

- 적지 않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알고 보니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아들의 범죄를 숨겨주기 위해 부모가 범죄 흔적인 손톱을 삼켰다.

- 이는 영화 '공공의 적'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이다.

- 그렇게 자신을 죽이는 아들조차 끝까지 사랑했던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면, 섬뜩함을 넘어 애잔함까지 느껴진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과 '자녀의 죄'가 하나로 엮일 때만,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와 자녀의 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가 있는 그대로 전달된다.

 

본문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죄'가 엮여서 서로를 부각한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는데, 그 크기가 일상에서의 사랑과 완전히 다르다.

- 일상에서의 사랑은 서로 공감하고 배려하는 상태에서의 사랑이다.

- 부모가 자식에게 100을 주면, 자식도 부모에게 50, 아니면 10, 아니면 1로라도 받은 사랑에 반응한다.

- 받은 만큼 돌려주지 못해도, 받았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사랑이 유지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 하나님이 사랑을 주셨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 마치 탕자가 아버지께 유산을 받은 것에 아무런 감사를 느끼지 않고 떠나버린 것처럼 말이다.

- 아버지 입장에서 유산을 내어주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 유산 안에 죽음을 감수한 사랑이 들어있음에도 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국민, 영토, 주권을 모두 받았다.

-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국민을 주셨고,

- 약속의 땅 가나안이라는 영토를 주셨으며,

- 이집트의 노예였을 때, 출애굽을 통해 주권을 주셨다.

- 이스라엘은 국민, 영토, 주권을 하나님께 받은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민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감사하기는커녕, 국민, 영토, 주권을 강대국에 바쳤다.

- 집권층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권을 강대국에게 이양하고,

- 강대국에게 조공하기 위해 국민을 소진해버렸으며,

- 결국 국토조차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나님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여러 차례 구원해주신다.

- 그러면서 강대국 의지하지 말고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씀하신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강대국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이 돌아오라고 손을 내미신다.

- 이스라엘이 그 손마저 잡지 않을 것을 아셨음에도 말이다.

 

이것이 본문이 드러내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랑할 때가 아니라, 거부할 때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인이었을 때부터 사랑하셨고, 죄를 지을 때도 여전히 사랑하셨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 예수님 역시 사람들에 의해 죽임당하시면서도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신다.

[눅 23: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

동시에 본문은 지극한 사랑에도 변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독한 죄를 드러낸다.

- 이전에도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포위당했을 때 기적적으로 구원하셨다.

-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시리아 군대를 전쟁도 없이 진멸하셨다.

[왕하 19:35] 그 날 밤에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서, 앗시리아 군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죽였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에 그들은 모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이렇게 구원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를 깨닫지 못하고 죄를 반복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인류의 죄를 이렇게 표현한다.

[롬 3:10~12]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통해 드러난 인류의 실체이다.

 

따라서 성경 전체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에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지독한 죄'와

- 인류의 지독한 죄에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부활이 드러내는 메시지 또한 이것과 같다.

- 하나님은 인류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성육신까지 해서 이 땅에서 사랑을 전하셨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끝내 잡아 죽이고야 마는 '인류의 지독한 죄'와

- 인류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고,

- 인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조차 잡아 죽일 것이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하셔서까지 사랑하시고, 

- 죽으신 후에 부활하셔서까지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

 

따라서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만 있을 뿐이다.

첫째 부류는,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 이런 죄인조차 구원하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생을 바치려 하지만, 

-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를 더욱 깨닫고,

- 또 다시 이런 죄인조차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더 감격하고,

- 감격에 겨워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만, 또 실패하여,

-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를 계속 더 깊이 깨달아 가는 선순환 속의 사람이다.

둘째 부류는, 자신이 충분하다는 생각 때문에 죽을 만큼 죄인이라는 정죄를 거부하니,

- 굳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하나님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 하나님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괜한 지적질만 한다는 생각에 하나님이 더욱 필요 없어지고,

-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살려니 더욱 악독해지고 잔인해지지만,

-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만 더욱 강해지고,

-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멀게 느껴지는 악순환 속에 사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첫째 부류와 둘째 부류의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 모두 일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보인다.

- 자기 죄를 깨달은 첫째 부류라고 해서, 이슬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며,

- 때로는 둘째 부류의 사람이 삶에 더욱 열정적이고 진지해 보일 수 있다.

오히려 두 부류의 겉모습에 확연한 차이가 나면 안 된다.

- 그러면 그 겉모습이 신앙의 기준이 되고,

- 유일한 신앙의 기준이셨던 예수님이 배제된다.

- 신앙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뿐이어야 하고,

- 믿음은 겉으로 보이지 않기에, 혹은 보이더라도 일관성이 없기에,

- 두 부류의 겉모습에는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부류의 차이를 밝히자면,

-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를 더욱 알고자 하는 '의지의 유무'이다.

특히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죄에 대한 혐오가 더 명확한 기준이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신앙이 없더라도 누구나 갖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고, 

- 그때 누구나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신앙의 기준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죄의 인식과 죄에 대한 혐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 갖는 특징이다.

-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껴서, 자신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데,

-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죄를 인식하게 되고,

- 죄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죄를 혐오하게 된다.

- 그러면서도 자기 죄 때문에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의 능력을 믿는다.

 

또 다른 차이는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 두 부류 모두 똑같이 세상에서 돈 벌고, 먹고 자며 산다.

- 일상의 모습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을 때 다른 반응을 보인다.

- 첫째 부류는 하나님의 사랑에 매였기에 세상에서 자유롭다.

-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반드시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 사랑 대신 세상을 포기한다.

- 세상을 포기하여 경제적, 사회적, 육체적, 정서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 어떻게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

반면에 둘째 부류는 세상에 매였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볍게 여긴다.

- 세상에서의 삶을 유지해주는 여러 가지 요인 중에 하나로 생각한다.

- 있으면 정말 좋고 없으면 정말 아쉽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려하지는 않는다.

- 오히려 세상에서의 삶은 어떻게든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문제가 생겨서 반드시 뭔가를 포기해야 할 때, 세상 대신 사랑을 포기한다.

- 마치 군인이 전쟁에 나갈 때, 자비심을 버리고 목적 의식으로 무장하여,

- 눈 앞에서 총에 맞아 고통스럽게 죽는 적군을 보며 안타까움이 아닌 성공의 희열을 느끼듯,

- 세상에서의 문제 해결 외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 문제 해결하느라,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공감하지 못한다.

-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끼지 '못한다'.

 

문제에 맞닥뜨려서 문제 해결에 몰입되어 있을 때는 문제 해결이 인생을 해결해 줄 것처럼 느낀다.

-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주변 소중한 사람의 인생까지 해결해줄 것처럼 느낀다.

- 만약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주변 소중한 사람의 인생까지 망칠 것처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 사람이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자신의 부재로 인해 소중한 사람이 고통스러워하지만,

- 문제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자신이 고통을 준 것은 맞지만,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기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고 합리화한다.

 

이러한 합리화가 바로 이스라엘의 집권층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 권력을 잃은 문제 상황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자신과 소중한 사람의 인생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느꼈다.

- 이집트를 의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찾아야 국가도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국제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 그래서 바벨론이 패권을 장악했고, 이집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

- 그래서 이집트가 바벨론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도, 소중한 사람의 인생도, 이스라엘 국가도 전부 파괴되었다.

 

인생은 눈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 반드시 문제는 또 있고, 또 있고, 또 있다.

- 만약 앞으로 남은 수천 번의 문제 중에 한 번이라도 해결하지 못하면, 인생은 망할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수천 번의 문제를 모두 완벽하게 해결했다 해도, 인생은 망할 것이다.

-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하느라, 자신과 소중한 사람의 인생에 신경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부모 세대의 모습이다.

- 수천 번의 문제 중에 몇 번의 실패 때문에 신세를 한탄하며 불행하게 살거나,

-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풍요롭지만, 결국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산다.

 

우리의 인생은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에 달려있다.

- 얼마나 많은 문제를 해결했고, 얼마나 큰 성과를 냈느냐가 아니다.

- 사랑하는 사람과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에 달려있다.

- 그렇게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고,

- 사랑하는 사람이 만족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런다고 이렇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 사랑만 하고 돈을 벌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 돈은 필요하다.

단, 돈과 일에 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 세상의 돈과 일에서 자유로워지라는 뜻이다.

- 그래서 무조건 돈은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주체적,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살라는 것이다.

- 사랑하기 위해 돈을 벌고, 사랑하고 남는 시간에 돈을 벌고, 사랑하느라 시간이 부족하면 돈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돈과 일에 중독되어 있다.

- 돈을 편하게 벌기 위해 사랑하는 척하고, 돈 벌고 남은 시간에 사랑하고, 돈 버느라 시간이 부족하면 사랑을 포기하고 있다.

 

그런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의 치료 시간이 필요하다.

- 돈과 일에서 벗어나, 몸에 남아있는 중독의 찌꺼기를 배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 마약 중독, 도박 중독, 담배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다 그렇다.

- 그래서 이스라엘도 40년 광야 생활, 70년 바벨론 포로 기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 그런 관점에서 퇴사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게다가 퇴사한다고 자동으로 인생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 퇴사는 인생 회복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는 준비 과정일 뿐이다.

- 정말 중요한 것은, 여유 있는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이다.

-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면에 사랑하지 않고 거래하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정말 중요한 고민이다.

-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죄를 깨달을 방법을 아는 것 말이다.

- 이것은 시대, 상황,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게 맞는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답을 부정하고, 우리만을 위한 답을 찾기 위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렇게 자신과 소중한 사람과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고민을 할 때, 인생에 의미가 생긴다.

- 우리가 고민하며 보낸 시간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으로 치환된다.

- 사랑하기 위한 고민 끝에 소중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 우리에게 사랑받은 사람은 평생 우리와 함께하며,

- 우리가 죽어서도 우리를 기억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 고민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한 고민이다.

-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내 물건을 사게 만들까?

- 어떻게 선을 베푸는 척해서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 어떻게 성과를 내서 나를 인정하게 만들까?

이러한 고민을 하며 보낸 시간은 결국 돈, 명예, 인정, 안정으로 치환된다.

- 그런데 이는 우리를 더 가치 있는 이용 대상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 오히려 누군가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가능성을 더 낮춘다.

그런 예로, 부자 부모가 죽은 후 자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재산 분할 갈등이다.

- 돈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더 큰 문제를 만든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한다.

- 사랑이 좋은 건 알겠는데, 꼭 거래를 포기해야 하나?

- 거래를 포기한다고 저절로 사랑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 그럴 바에는 차라리 사랑을 하되, 적절히 거래를 이용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 거래와 사랑이 공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맞다.

- 거래 포기한다고 저절로 사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래를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다.

- 사랑은 상대방'만'을 위한 행동이다.

- 자신에게 유익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 행동이다.

- 상대방에게 유익이 생긴 것 자체가 자신의 기쁨이 되는 행동이다.

 

물론 사랑을 통해 유익이 돌아올 수 있다.

- 그러나 돌아올 유익을 기대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다.

만약 처음부터 자신의 유익을 기대했다면, 

- 그 행동이 겉보기에 아무리 사랑처럼 보여도 결코 사랑이 아니다.

- 자신의 유익을 기대한 행동은 아무리 상대방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했어도 거래이다.

- 대표적인 예가 매춘이다.

- 매춘 과정에서 매춘 대상에게 아무리 큰 쾌락을 제공했어도 매춘 행위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사랑과 거래는 배타적이고, 공존할 수 없다.

-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는 거래를 포기해야 한다.

- 그리고 거래를 포기한다고 자동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 거래를 포기하는 노력과 동시에 사랑하려는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사람에게 거래를 포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 그래서 거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방법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충분히 공감한다.

-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 신앙을 배제하고, 단지 일상의 논리로만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탕자의 예를 들어보겠다.

- 탕자는 유산을 들고 집을 나가서 재산을 탕진하고 굴욕적으로 아버지께 돌아올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 그래서 인생의 멸망을 통해 거래 관계 세계관이 무너지고,

- 아버지의 환대를 통해 새롭게 사랑의 관계 세계관이 생겼다.

- 이렇게 멸망을 통해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 그래서 거래와 사랑이 공존할 수 없고, 

- 멸망을 통해서 거래로부터 벗어나 사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만약 탕자가 유산을 들고 집을 나갔는데,

- 허랑방탕하게 살지 않고, 착실하게 투자해서 재산을 100배로 불렸다면?

- 그렇게 부자로 금의환향하여, 아버지께 받았던 유산 두 배로 돌려드리고, 아버지 집 옆에 새로 집을 지어 아버지와 사이좋게 산다면?

- 굳이 멸망을 경험하지 않아도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 그러면 굳이 거래를 포기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인생 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많이 번 돈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 헌금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 성경 공부, 기도, 전도 열심히 하면,

- 굳이 거래를 포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면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탕자 이야기 안에 있다.

- 바로 탕자 형이다.

- 탕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탕자 형은 거래와 사랑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아버지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

- 동시에 아버지의 유산도 받고, 효자라는 명성도 얻는다.

- 인생의 멸망 없이 아버지와의 관계도 좋고, 돈도 명예도 충분하여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 단, 탕자가 돌아오기 전까지이다.

탕자가 돌아오자 사랑과 거래의 공존이 깨진다.

- 아무런 노력 없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탕자를 보자,

- 아버지의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투자했던 자신의 노력이 헛되 보이고,

- 그 허망함이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표출된다.

마침내 탕자 형의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 그동안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보였던 행동이 알고 보니 전부 거래를 위한 투자였다.

- 아버지에 대한 투자가 정말 사랑이었다면,

- 아무런 보상이 없다고 해도,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모습 자체로 만족했을 것이다.

-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 거래였고, 거래를 위한 투자였기 때문에,

- 투자 없이 보상받는 탕자를 보자, 보상 없이 투자만 했던 자신의 행동이 무가치해 보였고,

- 자신의 인생을 무가치하게 만든 아버지께 분노가 생긴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상상해본다면,

- 아마도 탕자 형은 보상 없이 투자만 하게 만든 아버지께 실망하고,

- 아버지께 유산을 달라고 하여 집을 나갔을 것이다.

- 탕자 형 역시 세상에서 거래 관계 끝에 모든 유산을 탕진한 후에야,

-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이해하고, 아버지께 돌아가게 될 것이다.

- 탕자 형 역시 탕자처럼 망한 후에야 거래에서 벗어나 사랑으로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결코 사랑과 거래는 공존할 수 없고, 망함을 통해서만 거래에서 사랑으로 전환될 수 있다.

 

결론 -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신앙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그러나 이 표현은 이 표현이 가진 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 신앙이 없는 사람도 모두 바라는 바이다.

오히려 이 표현이 더 선명하다.

- 신앙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도 파괴했고, 성전도 파괴했고, 율법도 파괴했고, 예수님의 몸도 파괴했다.

- 이스라엘, 성전, 율법, 예수님의 몸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결정적인 도구였다.

- 하지만 그조차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자, 가차 없이 파괴하셨다.

- 그러니 그 밖의 다른 것은 얼마나 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너무 나이브하다.

- 인류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하는 질문이다.

- 이런 질문으로는 결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외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

- 사랑이 아닌 거래를 인생 전체에서 완전히 내몰 때까지 싸워야 한다.

- 돈, 명예, 안정, 인정을 비롯하여, 직업, 가족, 친구, 취미를 포함하여, 사랑 없는 예배, 전도, 봉사, 구제까지 인생 전체가 파괴되어야 한다.

- 탕자가 전 재산을 탕진하여 돼지 여물조차 먹지 못할 만큼 파괴되었듯이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백지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 그렇게 거래 중독의 찌꺼기까지 완전히 배출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이다.

- 그래야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을 것이다.

- 도대체 그 사랑이 뭔데?

-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에게는 사랑이 뭔지 물을 자격이 없다.

-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 이는 마치 탕자가 집을 나가기 전에, 재산 탕진 후에 맺을 아버지와의 사랑의 관계에 대해 묻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것이다.

- 집을 나가기 전 탕자는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후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

- 멸망 이후에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재산을 탕진하기 전의 탕자와 같다.

- 주머니에는 여전히 돈이 있고, 자신이 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없어서, 아버지에 대한 필요는커녕, 아버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 그런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설명은 우이독경이다.

 

먼저 인생이 망해야 한다.

- 나의 지독한 죄를 알아야 한다.

- 나의 지난 과거가 전부 구역질 나도록 혐오스러워야 한다.

- 탕자가 아버지를 떠올리기 직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인생 전체가 백지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준비가 된다.

- 그래야 사랑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 그전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