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36) 18:1-17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안승준 2022. 7. 23. 09:17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고전적이고 진부하지만, 언제나 아리송한 질문을 하나 하겠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 뜻대로 하실 수 있을까?

- 아니면 하나님께도 하나님 뜻대로 하실 수 없는 것이 있을까?

같은 질문을 사람 입장에서 할 수도 있다.

-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인가?

- 아니면 하나님께 거역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오랫동안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으로 회자되었다.

 

이 질문이 오랫동안 회자된 이유는 그만큼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만약 하나님이 창세 이전에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모든 것이 각본대로 흘러간다면,

-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심판하시면 안 된다.

- 인간에게 죄에 대한 동기가 없고, 동기 없는 죄는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엄밀하게 말하면, 죄의 주체는 죄를 예정하신 하나님이다.

- 심판받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격이 없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으셨고, 인류 역사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면,

- 그래서 하나님조차 인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신다면,

-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심판하시는 것은 합당하다.

- 죄에 대한 동기가 정확하게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무능해진다.

- 인간의 삶에 영향력을 줄 능력도 없고, 인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는 '부'전지'부'전능자가 된다.

- 역시 그런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격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살도록' '예정하신 분'이어야 한다.

- 사실상 이러한 표현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을 억지로 엮어서 표현한 말일 뿐이다.

- 이런 억지 표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무책임한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어떻게 엮여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 단순히 표현만 하는 것이 아니라,

- 그 표현에 담겨있는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오답부터 말하면, 

첫째로,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구분하는 입장이 있다.

- 집안일로 예를 들어, 부부가 빨래, 설거지는 한 사람이, 청소, 요리는 다른 한 사람이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 그래서 자신의 영역에서는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과를 책임지지만, 상대방의 영역에서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배, 전도, 믿음과 같이 영적인 영역을 담당하고,

- 사람은 식사 메뉴 결정, 의상 코디 결정, 버스를 탈지 지하철을 탈지 등 일상의 영역을 담당한다는 뜻이다.

- 그래서 영적인 영역과 일상의 영역을 구분하여, 영적인 영역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순종하려 하고, 일상의 영역은 죄 짓는 것만 아니라면 자유롭게 내 뜻대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기도를 하지만, 옷을 고를 때까지 기도하지는 않는다.

- 옷 고를 때는 내 마음대로 내가 보기 좋은 옷을 고른다.

둘째로, 모든 영역을 하나님과 사람이 반반씩 주관한다는 입장이 있다.

- 역시 집안일로 예를 들어, 부부가 빨래, 설거지, 청소, 요리를 모두 함께하는데,

- 비율을 50%씩 나눠서, 한 사람이 그릇을 퐁퐁으로 닦으면, 다른 사람은 헹구고,

- 또는 한 사람이 아침에 설거지를 하면, 다른 사람은 저녁에 설거지를 하고,

- 또는 한 사람이 설거지를 반만 하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반을 하는 등이다.

- 이렇게 모든 일의 책임을 반반씩 갖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이 모든 일에서 반반씩 책임을 갖는 것이다.

- 예배, 전도, 믿음과 같이 영적인 영역도 일상의 영역도 하나님과 사람이 반씩 나눠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이 언제나 적절하게 협력하여,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맡은 바를 열심히 하면 모든 일에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 부탁한다.

-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도 내 일에 최선을 다해주실 것이며,

-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할 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둘이 왜 오답인지 말할 필요도 없다.

- 왜냐하면 부부관계에서조차 집안일을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집안 살림은 유지될 수 없다.

- 만약 부부 중 한 사람이 바빠서 빨래를 못 했는데, 다른 한 사람이 빨래는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한다면?

- 먼저 나 몰라라 한 자기 자신이 피해를 본다.

- 당장 입고갈 옷이 없어서, 더러워진 옷을 입고 나가야 한다.

- 보통 부부관계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빨래 담담이 아닌 사람이 빨래를 한다.

- 즉, 자기 영역이 아닌 것도 자기 영역처럼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책임감을 갖지 않으면, 자기에게 피해가 즉각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부부 중 한 사람이 바빠서, 설거지를 50%만 하고 나머지는 놔뒀다면?

- 역시 자기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 음식을 먹을 그릇은 있을 수 있지만, 숟가락이 없을 수 있다.

- 설거지가 100%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식사할 수 없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 집안일을 영역으로 구분하건, 같은 영역을 비율로 구분하건, 어떻게든 구분할 수는 있고,

- 각각의 일에 역할과 책임감도 구분할 수 있지만,

- 그 일의 영향력까지는 구분할 수 없다.

- 빨래가 아무리 내 책임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빨래가 안 되어 있으면 심각한 영향을 받고,

- 설거지를 아무리 정성껏 50% 다 했어도, 나머지 50%가 안 되어 있으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 즉, 우리는 모든 일에 100%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책임을 50%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하물며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을 하나님과 사람의 영역으로 어떻게 구분 짓겠는가.

- 예배는 하나님의 영역이기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가?

- 반대로 식사 메뉴 결정은 사람의 영역이기에 하나님께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가?

모든 일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100% 영향을 준다.

- 하다못해 식사 메뉴 결정조차 하나님께 영향을 준다.

- 우리가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가 지나치게 비싼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음식을 먹는 것도 하나님은 마음 아파하신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가?

모든 일에 하나님과 사람이 100%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100% 책임져야 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일에 100% 영향을 받는다.

- 하나님 50%, 사람 50%가 아니다. 

- 하나님 100%, 사람 100%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다.

- 논리로만 본다면, 하나님이 100% 선택권을 갖고 100%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면,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0%로 없어야 한다.

-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면, 사람의 자유의지는 없어야 한다.

- 반대로,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예정하실 수 없다.

-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완벽하게 배타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논리적인 설명이 현실을 더욱 잘 해석한다.

- 부부는 반드시 집안일 하나하나 전부에 각각 100%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각각 50%씩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 빨래, 설거지, 청소, 요리 등 모든 일에 부부가 전부 100% 책임감을 가지고 내 일로 삼을 때만,

- 가장 먼저, 내가 깨끗한 옷을 입을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으며, 깨끗한 집에서 편히 쉴 수 있다.

- 가정이 원활하게 돌아간다.

반대로 부부 둘 중 하나가 많은 집안일 중에 딱 하나라도 100%가 아닌 90%의 책임감을 갖는다면,

- 그래서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해주겠지.'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 순간,

- 집에서 옷 입고, 밥 먹고, 편히 쉬는 평온한 일상이 와장창 깨진다.

그런데 그런데도 만약 평온한 일상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면,

-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이 엄청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고,

- 그 희생의 대가는 결국 나 자신에게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다.

- 그때가 되면 부부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의 부모 세대의 부부관계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비-논리적인 설명이 현실을 더욱 잘 해석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똑같다.

-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선택권과 선택에 따른 책임감 그리고 선택의 결과에 대한 영향력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100% 있다.

- 즉,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100% 예정되어 있는 동시에,

- 모든 일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의해 100% 결정된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히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이루신다.

-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다.

- 동시에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 전적으로 사람의 선택에 좌우된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 사람은 아무것도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이다.

- 우리가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은 실제로 하나님이 조정하고 통제하신 일이다.

- 동시에 사람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로, 누구의 간섭과 통제도 받지 않으며, 하나님조차 사람의 의지와 마음을 조정하실 수 없다.

- 하나님께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통제하실 능력이 없다.

이것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자유롭게 살도록 예정하신 분'이라는 표현의 의미이다.

 

물론 이 표현은 모순이다.

- 완전히 배타적이어서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비-논리이다.

- 하나님이 예정하셨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존재할 수 없고,

-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폐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순적인 표현만이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 우리는 오늘 먹은 점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내 돈으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 자유의지로 먹은 것이다.

- 그러나 반대로 내가 복음을 듣고, 그 복음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여, 이전의 삶 전부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죄였음을 인정하며, 이전 삶에서 돌이켜서 앞으로 예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했다면, 이것을 나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하나님이 주신 회개이고 믿음이며,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 나는 오늘 10일을 굶었고, 음식을 구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 10일 밤낮을 먹을 것을 찾기 위해 헤맸지만, 실패했다.

- 그래서 굶어 죽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릎 꿇고 기도했다.

- 그러고 나서 눈을 떴는데, 바로 앞에 토끼 한 마리가 지나가서 잽싸게 잡아서 먹었다고 한다면,

- 이 음식도 역시 내 자유의지로 먹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반대로,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믿음을 고백했는데,

- 나중에 알고 보니 배우자 때문에 억지로 복음을 들은 것이었고,

- 지금은 이혼하여 신앙 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 그 사람의 회개를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구애하기 위해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 그런데 또 만약에 10년 후에 또 다시 소식을 들었더니,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 그 사람의 회개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 우리는 직관적으로 어떤 상황이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인지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인지 판단한다.

- 그러면서 앞뒤 정황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근거 삼은 앞뒤 정황이 굉장히 제한적이고,

- 그래서 시간이 지나서 정황 증거를 더 알게 되면, 판단이 달라진다.

- 자유의지 때문인 줄 알았던 사건이 예정하심으로 바뀌기도 하고,

- 또 그렇게 예정하심 때문인 줄 알았던 같은 사건이 다시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바뀐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냐는 것이다.

- 하나님의 예정이냐, 사람의 자유의지냐?

- 결론적으로, 언제나 하나님 100%, 사람 100%라는 것이다.

- 100%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임과 동시에, 100% 사람의 자유의지로 선택된 것이다.

- 점심 식사는 사람, 회개는 하나님이 아니다.

- 점심 식사도 사람 100%, 하나님 100%, 회개도 사람 100%, 하나님 100%이다.

이렇게 볼 때만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

 

혹시나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

- 우리의 모순과 혼란이 단지 시간 안에서, 제한적인 관점을 가진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는 숙명이고,

- 영생을 얻어, 시간에서 자유케되고, 제한 없는 관점을 가지면, 자유의지인지 예정하심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영생을 얻어서, 천국에 가서도 이러한 모순은 지속된다.

- 이러한 모순은 하나님 존재의 본질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존재의 본질이기도 하며, 종말 이후 천국에서도 모순은 여전히 지속된다.

예를 들어,

- 천국에 가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한다고 하는데,

- 그 찬양의 고백은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인가, 하나님의 예정하심 때문인가?

- 100% 자유의지 때문이고, 100% 예정하심 때문이다.

- 만약 자유의지 때문'만'이라고 한다면, 천국조차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난 공간이 된다.

- 반대로 예정하심 때문'만'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찬양을 듣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100%, 사람 100%의 모순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토기장이 예언'을 보자.

예언의 핵심은 이것이다.

[렘 18:6]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 토기장이가 마음대로 진흙을 무너뜨리고 새로 빚을 수 있듯이,

- 하나님도 마음대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새로 세울 수 있다는 뜻이다.

- 즉, 세상은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토기장이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는 과정이 100% 토기장이의 예정에 달려있지만,

-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악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가는지 아닌지가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이다.

- 진흙에는 자유의지가 전혀 없지만, 이스라엘은 100%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돌아갈지 말지를 선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두 가지 선택지를 준비하셨다.

- 만약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로 죄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거두고 복을 내리시지만,

- 만약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로 죄악으로 돌아가면, 복을 거두고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신다.

[렘 18:7~10]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8)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9) 그러나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10)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

만약 이스라엘에게 자유의지가 0%라면, 선택지는 의미 없다.

- 어차피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될 테니 말이다.

반대로 만약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를 갖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0%라면,

- 선택지는 쓸모없다.

- 어차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 재앙도 복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의 현실은 하나님 100%, 이스라엘 100%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예정하고 계신다.

-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한 후, 다시 회복할 것까지 말이다.

- 동시에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자유의지로 선택한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멸망한 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까지 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만, 성경이 해석된다.

- 만약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이고, 이스라엘의 자유의지는 0%라면,

-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요구, 명령, 간청, 예언은 모두 쓸모없다.

-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될 테니 말이다.

반대로, 만약 100% 이스라엘의 자유의지이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0%라면,

-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예언은 전부 헛소리가 된다.

-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이 예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예언이 맞은 것은 신적 예언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맞은 것뿐이다.

 

그런 예언은 우리도 할 수 있다.

- 만약 우리가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운동 안 하면, 건강을 잃을 것이다. 라는 말을 했는데,

- 정말 누군가가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운동 안 해서 일찍 죽었다면, 

- 그 사람의 죽음을 우리의 예언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우연히 맞은 것뿐이다.

- 이는 단지 '예상'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예언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르다.

 

따라서 하나님 100%, 사람 100%일 때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요구, 명령, 간청, 예언이 의미 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정하셨고, 실제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하고, 결국 멸망한 후, 다시 회복되는 것도 전부 하나님의 예언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라면, 하나님은 왜 예언하는가?

-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동참하길 바라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요구, 명령, 간청하시는 것이다.

- 요구, 명령, 간청은 이스라엘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모두 창조하셨을까?

- 둘 중의 하나가 없었다면, 세상을 더 일관되고 논리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답은 역시 '관계' 때문이다.

- 관계는 두 존재의 100% 자유로운 선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100% 자유롭게 모든 것을 예정하실 수 있고,

- 사람도 100%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때, 

-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혹은 자유의지가 있지만 제한되어 있다면,

- 그런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좋아도, 실상은 억압, 폭력, 굴종뿐이다.

- 그런 관계에서는 누구도 관계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 억압하는 자도, 억압받는 자도 불행하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길을 예정하셨다.

- 이 길은 하나님의 독단적인 선택이지만, 인류에게 최고의 기쁨을 주는 유일한 길이다.

- 그 길의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바르고 깊은 관계,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다.

- 하나님은 그 길을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구, 명령, 간청, 예언하신다.

- 그것이 성경의 핵심이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 하나님의 길을 따를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게다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능력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자유의지로 성경에 동의하지 않는다.

-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거부한다.

- 오로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안위만을 위해 살아간다.

- 그것이 사람됨을 포기하고, 짐승이 되어, 멸망하는 길인지 모르고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대세를 거스르는 소수가 있다.

- 그들은 자유의지로 성경에 동의한다.

- 그래서 본능을 거스르고,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를 인생의 전부로 삼는다.

- 물론 그 선택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 그 선택이 그 사람을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만들어,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할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과 권세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임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만 본능적인 욕구를 거스르며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가?

사람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 그렇지 않다.

- 하나님도 본능을 거스르며, 사람을 향해 나아가신다.

- 대표적인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인류를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사람이 되셨다.

- 그것이 성육신이다.

-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인류를 위한 엄청난 희생이며 헌신이다.

- 마치 개미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약을 먹고 개미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영생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신다.

- 하나님은 인류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나님 존재의 근원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

- 마치 약을 먹고 개미가 된 사람이 개미를 위해 죽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은 마치 예수님께 선택권이란 없는 것과 같았다.

- 자유의지가 없는 노예 같았다.

- 그래서 예수님을 '도살장에 말 없이 끌려가는 양' 같다고 표현했다.

- 이 순간은 예수님의 자유의지는 0%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께 십자가 죽음은 100%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

- 예수님은 100%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인류를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0%로 만드셨다.

이것이 관계의 본질, 사랑의 본질, 하나님의 본질이다.

- 예수님은 이렇게 인류에게 관계, 사랑,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사랑을 선택하셔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셨다.

- 자유의지로 자신의 자유의지를 0%로 희생하셨을 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참 그리스도로 다시 살아나셨다.

-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셨다.

- 그러나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 그런데 사랑을 선택하여 죽음을 감수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이 인류에게 증명되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계, 사랑, 인간의 참 모습을 요구하신다.

- 그래서 우리도 100%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를 0%로 만들라고 말이다.

- 우리도 사랑을 선택하여 죽음을 감수하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시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자유의지를 0%로 만들 때만,

-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100%의 온전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고,

- 그럴 때만 인간의 참 모습을 회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럴 때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성취됨과 동시에, 인간이 가진 잠재력이 전부 발휘되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선택하여 죽음을 감수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본문을 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다.

[렘 18:11] 그러므로 너는 이제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내릴 재앙을 마련하고 있으며, 너희를 칠 계획도 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서, 각기 자신의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너희의 행동과 행실을 고쳐라.

- 하나님은 100% 예정하심으로 이스라엘에게 내릴 재앙을 계획하셨다.

-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로 죄악에서 돌이켜서 재앙에서 벗어나길 명령하셨다.

그런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셨다.

- 12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을 예언하셨고,

[렘 18:12] 네가 이렇게 말하면, 그들은 이르기를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 생각대로 살아가겠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행동하겠다’ 할 것이다.

- 13~17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아, 결국 끔찍한 재앙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다.

[렘 18:17] 내가 그들을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흩어 버리듯 할 것이며, 그들이 재난을 당하는 날, 내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내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셨을까?

- 하나님의 바람은 이스라엘이 재앙을 당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었을까, 

- 아니면 이스라엘이 죄악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이 틀리는 것이었을까?

둘 다 틀리다.

-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있지 않았다.

-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었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참 모습, 즉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었다.

- 그렇게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이스라엘이 기뻐할 수 있고,

- 이스라엘이 기뻐할 때,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알아야 했다.

첫째는, 현재 자신의 상태이다.

- 이스라엘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죄악에 빠져있고,

- 그대로 가면 결국 얼마나 심각한 재앙을 당할 것인지 알려줘야 했다.

- 그것이 바로 예언의 역할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100% 예정하심으로 재앙이 내릴 것을 예언하신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 앞으로 어떻게 해야 죄악에서 돌이켜서 재앙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알려줘야 했다.

- 그것이 바로 명령의 역할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100% 자유의지로 죄악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신 것이다.

-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의 심각성을 경고하기 위해서는 100%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예언하셔야 했고,

- 이스라엘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100% 이스라엘의 자유의지로 돌이키기를 명령하셔야 했다.

그럴 때만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정체성을 찾을 수 있고,

- 그럴 때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으며,

- 그럴 때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가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 - 돈에서 돌이키자.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는 현재 어떤 상태에 있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예언을 하셨으며,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셨는가?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돈에 대해서만 생각해보겠다.

- 현재 우리의 상태는 돈이 점점 더 필요해지는 선택을 하고 있다.

- 집을 늘리고, 차를 키우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계획하고 있다.

- 그것을 위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다고 볼 수 있다.

- 돈 많이 벌기 위한 선택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진짜 문제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한 선택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 외의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 그 외의 것에는 소중한 것이 많지만, 나는 딱 하나만 짚겠다.

- 바로 자기 자신이다.

- 돈을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냐?

- 세상에는 같은 일을 해도, 돈을 잘 버는 직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직업이 있다.

- 똑같이 노력해도 변호사가 버는 돈, 의사가 버는 돈, 회사원이 버는 돈의 한계가 다르다.

- 그래서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돈을 잘 버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돈을 잘 버는 일과 나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점이다.

- 강조해서 말하는데, 돈을 잘 버는 일에 딱 맞는 사람이 실제로 있기는 하다.

- 그러나 정말 극소수이다.

- 대부분은 돈을 잘 버는 일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일정한 간극이 있다.

그때 사람은 선택을 한다.

- 자신을 바꿔서 돈을 잘 버는 일에 자신을 맞추거나,

- 자신은 그대로 두고, 돈은 잘 벌지 못해도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바꾼다.

-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 첫째로, 돈이 너무 좋아서이다.

- 돈이 있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 게다가 둘째로,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돈이라도 많이 벌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돈을 위해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 결국 돈을 위해 정체성을 포기한 사람은 어떻게 되냐?

- 어쩌면 이 문제가 사람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집을 늘리고, 차를 키우고, 생활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

- 그러나 여전히 더 집을 늘리고 싶고, 더 차를 키우고 싶고, 더 생활 수준을 높이고 싶을 것이다.

- 왜냐하면 돈의 기준에서 볼 때,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전보다 돈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질 것이고, 동시에 돈 없음에 대한 갈증과 불만도 더 커질 것이다.

- 그리고 결국 그 갈증과 불만 속에서 처량하게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돈을 포기하고 정체성을 선택한 사람은 다르다.

-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을 것이고, 적게나마 돈을 벌 것이다.

- 게다가 일 자체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며 욕구를 충족하기 때문에, 굳이 돈으로 남과 비교하며 자기 가치를 드러낼 필요가 없어진다.

- 돈의 기준에서는 자기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이 많지만, 

- 자기 정체성의 기준에서는 자신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자연스럽게 돈에 대한 욕구도 줄어들고,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살게 된다.

- 그래서 결국 충만함과 만족 속에서 차분하게 생을 마감한다.

 

물론 내가 말한 대로, 돈을 선택한다고 전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돈을 포기한다고 전부 정체성을 찾는 것도 아니다.

- 단지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돈을 선택한 사람이 정체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 그리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면, 돈으로 자기 가치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 돈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의 발 밑에 있는 불쾌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재 우리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 돈에 빠져, 하나님에게서 돌아섰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예언하신다.

- 돈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 자기 자신을 잃고, 영원한 불만족에 빠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명령하신다.

- 돈에서 돌이키라고.

- 그리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뿐이다.

- 100%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자유의지가 0% 되도록 하는 것이다.

- 쉬운 말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 그럴 때만 우리는 100%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셨을 때, 예수님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회복하셨다.

- 우리도 자신을 포기하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만,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돈에서 돌이켜서 자신에게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