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34) 17:13-18 '재앙의 날'이 올 것을 믿게 된 예레미야의 회개

안승준 2022. 7. 8. 00:2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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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지적한 예레미야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 누군가의 구원을 바란다는 것이 문제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조차 여전히 생소하다.

- 구원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을 바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로 예레미야와 하나님은 갈등했다.

-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예레미야는 거부했다.

- 그로 인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는커녕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진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지 않으셨나?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렸나?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뻐하셨나?

아니다.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셨다.

- 그러나 당장의 구원, 일시적, 제한적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바라셨다.

-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멸망시키실 것이지만,

- 그 멸망을 통해 이스라엘을 죄에서 돌이켜 회복하실 계획이셨다.

[렘 16:14~15] 그러므로 보아라,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15) ‘이스라엘 백성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조상에게 주었던 고향 땅에 그들을 다시 데려다 놓을 것이다.

- 멸망 이후의 회복만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왜 이것이 유일한 방법인지는 이전에 많이 말했으니 생략하겠다.

 

이는 내가 우리 교회 사람들이 망하기를 바라는 이유와 똑같다.

-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당장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다.

- 당장의 망함이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당장의 구원을 바랐다.

- 지금 눈앞에서 말을 섞고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길 원했다.

-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 누가 자기가 아는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지 않겠는가.

-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도리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도리가 문제를 일으켰다.

- 여기서 도리란, 사회와 개인에게 너무 당연해서 의문조차 갖지 않고 지키는 규범을 말한다.

- 사람의 도리가 자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일으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 왜냐하면 의문을 갖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믿어버리기 때문이다.

-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그 원인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다.

- 같은 이유로 바리새인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고,

- 베드로도 예수님의 죽음을 저지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웠다.

 

예레미야가 바랐던 것은 단순하다.

- 자신이 속한 사회가 유지되길 바란 것뿐이다.

- 자신의 안전망이며, 정체성의 뿌리가 되는 사회가 무너지길 누가 바라겠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가 무너진다는 것은 

-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사라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이 사라진다는 것이기에,

- 즉, 안정과 인정을 동시에 잃어버린다는 뜻이기에, 

- 개인에게는 죽음과 같은 것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란 것이다.

- 이스라엘의 구원이 자신의 구원을 담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유지되길 바라는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

-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 사회의 웬만한 문제는 고쳐주셨다.

-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사회가 탄생한 직후 광야에 들어간 순간부터 문제가 있었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목마르고, 배고프다고 다시 애굽에 돌아가고 싶다고까지 했다.

- 사사기에서도 12번이나 반복해서 문제가 생기자,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사가 문제를 해결했다.

-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면서부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었는지 말할 필요도 없다.

- 그러나 예레미야가 활동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셨다.

- 하나님도 누구 못지않게 이스라엘 사회가 유지되길 바라셨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 하나님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보다 사회를 무너뜨리기를 선택하셨다.

- '재앙의 날'을 내리시기로 결정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전과 다른 결정을 하셨을까?

일단 너무 궁금한데, 잘 모르겠다.

- 본문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렘 17:15] 백성이 저에게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만 위협하시지, 별 것도 아니지 않으냐! 어디 위협한 대로 되게 해보시지!” 합니다.

- 하나님의 멸망 경고를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 본문에 근거해서 볼 때, 이스라엘은 거짓 예언자의 말을 듣고 평화를 예상했고, 

- 우상 숭배를 통해 평화를 이루려 했을 것이다.

- 그랬기에 하나님의 멸망 경고가 더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했던 이유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창 18:23~32] ・・・・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 (32) 아브라함이 또 아뢰었다. “주님! 노하지 마시고, 제가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게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열 명만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

-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악인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도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의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 악인은 항상 있어왔다.

- 그러나 의인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고 유지될 수 있었다.

- 하지만 이제는 소수의 의인조차 없어져, 사회가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전과 다르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이유이다.

 

예레미야 입장에서도 이스라엘의 멸망이 유리하다.

-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보다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예레미야의 인정과 안정을 지켜준다.

-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었다.

-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신앙을 지키려면, 어차피 사회에서 박해받아 인정과 안정을 잃는다.

- 반대로 인정과 안정을 잃는 것이 두려워 사회에 휩쓸리면, 하나님을 거역하여 영원한 인정과 안정을 잃는다.

- 즉, 사회 전체가 문제일 때 예레미야는 어떤 선택을 하든 안정과 인정을 잃는다.

따라서 얼마 남지 않은 의인인 예레미야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예레미야를 보호하셔야 했다.

- 그것을 위해 예레미야를 위협하는 이스라엘을 무너뜨리셔야만 했다.

- 물론 예레미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자신도 파괴될 것이라는 위협을 느꼈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명시하셨다.

[렘 17:1] 유다의 죄는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 그들의 제단 뿔 위에도 그 죄가 새겨져 있다.

- 이스라엘의 죄는 철필과 금강석(다이아몬드) 촉으로 새기듯 너무 분명해서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에 따라 갈팡질팡하던 예레미야의 마음도 이제 정리되었다.

- 처음에는 자신의 구원이 이스라엘에 달려 있는지, 아니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하나님께 달려 있는지 몰라 방황했다.

- 하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 이면에 사람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자신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상관없이 자신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렘 15:20]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러자 드디어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렘 17:13] 주님, 이스라엘의 희망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버리는 사람마다 수치를 당하고, 주님에게서 떠나간 사람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을 버리고 떠나간 것이므로, 그들은 땅바닥에 쓴 이름처럼 지워지고 맙니다.

- 드디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다.

- 그 하나님이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 사회를 멸망시킨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그래서 눈에 보이는 안정과 인정이 파괴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 이렇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그 자유로 인해 예레미야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다.

- 이전에 믿지 못했던 것을 믿게 되었다.

-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케 되자 비로소 이스라엘의 멸망이 얼마나 합당한지 알게 되었다.

- 따라서 이스라엘에 정말 필요한 것이 구원이 아니라 멸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그에 따라 이스라엘에 '재앙의 날'이 올 것을 믿게 되었다.

그전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장했었다.

[렘 14:19~22] ・・・・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낫지도 못하게 이렇게 심하게 치셨습니까? 우리가 기다린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습니다. (20) 주님, 우리는 우리의 사악함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

그러나 이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받아들인다.

[렘 17:17] 저를 무섭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재앙의 날에 저의 피난처이십니다.

-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자신도 함께 멸망할 것이라며 이스라엘을 믿었지만,

- 이제는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다.

-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구원하실 피난처라는 것을 믿는다.

이것이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예레미야의 전환이다.

- 이스라엘로부터의 자유가 가져온 변혁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전하는 함의는 상당히 크다.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사회가 갖는 의미는 예레미야의 존재 그 자체이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먹고 자고(안정), 그 안에서 정체성을 부여받고, 또 그 안에서 정체성을 드러냈었다(인정).

- 이스라엘 사회는 법, 윤리, 규범, 질서 등으로 예레미야를 보호하기도 하고(안정),

- 동시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회를 예언자로서 보호하기도 한다(인정).

- 또한 오랫동안 내려온 이스라엘 전통을 통해 예레미야의 정체성이 세워진 곳이고,

-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인정).

- 따라서 이스라엘 사회는 예레미야 존재의 기반이고, 존재의 터전이다.

그런 이스라엘의 멸망이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 자신의 기반과 터전의 파괴이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의 파괴이다.

- 그랬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목숨 걸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애썼던 것이다.

- 하나님과의 대결도 불사했던 것이다.

- 예레미야가 어리석고 과민반응 했으며, 경거망동했기 때문이 아니라, 

- 실제로 자신의 전부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자신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목숨 걸고 저지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레미야는 받아들였다.

- 이는 곧 자신의 파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마치 바울이 로마행을 선택하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 원래 초인적인 신앙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가?

- 예레미야가 얼마나 죽기 싫어서 발악했는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얼마나 부르짖었는지, 그래서 하나님께 얼마나 대적했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 예레미야는 원래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 17장을 시점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깨달은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로,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이전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구원이 이스라엘에 달려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아야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예레미야를 구분하셨다.

-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예레미야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렘 15:20]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인정할 수 있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인해 자신의 기반과 터전이 상실되고 파괴되겠지만,

- 그래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겠지만,

- 죽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있어서, 자신을 도와주고,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믿었다.

-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길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 자신의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명확하다는 점이다.

-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다.

- 일어나면 좋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인 일이 아니라,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었다.

-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한 부작용이 생겼다.

- 이스라엘의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죄가 있다는 것에 눈이 가려졌다.

- 이스라엘의 구원이 무조건적이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을 무효로 하는 죄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했다.

-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회개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

- 회개 제사(속죄제)만 절차대로 하면,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 그 근거 없는 믿음 때문에 이스라엘은 죄에 더욱 무감각해졌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자유를 얻고 눈이 열리니, 이스라엘의 죄는 너무 심각했다.

-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 완전한 멸망 후의 재건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도 깨달았다.

- 그 사실을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케 돼서야 비로소 볼 수 있었다.

- 그것에 대한 선포가 17장 1~4절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을 끊을 수 있었다.

-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깨달음으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죽음과 같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스라엘 사회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곳,

-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며, 존재의 터전인 곳,

-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기도 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표출하기도 하는 곳,

- 그곳은 바로 '세상'이다.

즉,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사회는 우리에게 세상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 우리 존재의 기반과 터전인 세상이 멸망하는 것이고,

- 이는 곧 우리 존재 자체가 멸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세상은 말 그대로 세상 전체가 될 수도 있고,

- 범위를 한정하여, 돈의 세계, 직장의 세계, 친구의 세계 등이 될 수도 있다.

- 그래서 돈의 세계가 멸망하여, 우리가 가진 돈,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노력, 돈을 벌어서 하려고 했던 계획 등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이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 우리가 가진 돈, 돈을 벌기 위해 했던 노력, 돈을 벌어서 하려고 했던 계획이 전부 파괴될 것을 믿는가?

- 우리가 세상에서 쌓아온 성과, 경험, 평판 등이 결국 세상과 함께 전부 파괴될 것을 믿는가?

- 평생의 성과, 경험, 평판이 파괴되면서 결국 우리 자신도 죽게 될 것을 믿는가?

-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것처럼,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과 함께 죽임당할 것을 믿는가?

- 그러나 그런 죽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가?

- 하나님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가?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을 받아들인 예레미야의 믿음이었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믿음이 없다.

- 마치 14~16장의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온몸으로 거부한 것처럼 말이다.

- 우리도 세상의 멸망을 거부한다.

- 성경에는 세상의 종말을 너무나 분명하게 예고하고 있지만,

- 그것은 먼 일이라고 생각하며,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오히려 예레미야처럼 세상을 지키려 애쓴다.

- 단지 세속주의자들만이 세상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이다.

- 문제는 교회조차 세상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 교회가 예레미야처럼 세상의 죄를 대신 회개하고, 세상의 문제를 고쳐서, 약자들을 배려하는,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 그렇게 하면 세상의 멸망을 막고 세상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 이미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멸망 선포가 내려진 상황에서 말이다.

- 그렇게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세상을 멸망하겠다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을 한 번도 포기해본 적이 없다.

- 성경에서 예고한 세상의 멸망을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

- 오로지 어떻게든 세상을 변화시켜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여 세상을 지키기 위해 애쓰며,

- 그 세상 안에서, 세상에 존재의 기반과 터전을 두고, 세상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신앙을 갖는다.

- 열심히 신앙 생활 해서 나의 종말을 늦추고,

-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변화시켜서 세상의 종말을 늦추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세상이 구원받는 것을 우리의 구원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이라고 착각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의 구원을 그토록 바라는 것이다.

- 겉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복음 증거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 세상의 타락을 막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내면에는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

세상이 유지되어야, 하나님 없이도 세상 속에서 안정과 인정을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이 없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싫기 때문이다.

-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해 전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와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 역시 두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는, 세상의 구원과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능력이다.

- 우리는 돈이 많고, 안정된 직업이 있으며, 집을 소유하고, 인맥을 쌓으며, 나라의 경제와 정치가 안정되고, 지구 환경이 보존되어야 우리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것이 우리를 영생하도록 하지 못할지언정, 일정 수준의 평안을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것이 영혼의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육체의 구원은 줄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세상의 보호와 구원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어느 정도 우리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매여,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얽혀있다고 생각하면,

- 그 사람은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 왜냐하면 세상의 멸망은 곧 자신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 그러면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세상을 멸망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며,

-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시도록 설득하려 애쓸 것이다.

- 하나님께 세상을 지켜달라고 아우성치며 기도할 것이다.

- 예레미야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 돈이 없어 구질구질해지고, 직업이 없어 불안정하며, 집도 없어 맨날 이사 다니고, 도움을 받을 인맥도 없으며, 나라의 경제와 정치는 불안정하고, 지구가 환경 오염이 되어도, 

- 그래서 생존이 불가능할 만큼 우리의 기반과 터전이 사라져도,

- 그래서 죽음의 위기에 빠져도,

- 우리를 둘러싼 상황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의 길로 가신 것이며,

- 이 믿음 때문에 바울이 죽음의 길인 로마행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무작정 죽자! 가 아니다.

- 죽음도 두렵지 않을 만큼 강한 믿음과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자는 것이다.

- 우리도 예수님과 바울처럼 희생하자! 는 것이 아니라,

- 우리도 예수님과 바울처럼 희생할 만큼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믿음과 평안과 안식을 누리자! 는 것이다.

그 믿음 안에서만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상의 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명확하다는 것이다.

- 사실상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모른다.

- 돈의 유혹에 빠져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모른다.

- 직업에 매여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놓쳤는지 모른다.

왜 모르냐면,

- 세상의 존재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세상에 살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위해서 직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세상, 돈, 직업의 존재를 변하지 않는 상수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돈, 직업 때문에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돈 벌기 위해 가정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세상을 변화시켜서 개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로 인해 세상, 돈, 직업이 갖는 근원적인 죄에 대해 묻지 않는다.

-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조금 고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세상, 돈, 직업에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할 수 없는 문제가 있고,

- 그 문제가 우리에게 생명을 빼앗을 만큼 심각하기 때문에,

- 세상, 돈, 직업은 반드시 멸망하고 파괴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왜 못하냐면,

- 몰라서가 아니다.

-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 그러나 세상에 자신의 구원이 달려있다는 믿음 때문에, 세상의 문제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한다.

- 세상에 문제가 있지만, 고치면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냐면,

- 우선 하나님과 대적하게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하시려는 근원적인 이유는 세상의 죄 때문이 아니다.

-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있든지 없든지 관심 없으시다.

- 하나님의 관심은 오로지 세상에 있는 우리이다.

- 그런데 세상의 죄로 우리가 고통당하기 때문에, 우리를 고통에서 건지시려고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다.

- 세상에 있는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 매여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상을 멸망하시려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살인마로 보인다.

- 세상과 함께 자신도 죽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살인마로 오인하여 파괴하여 죽인다.

-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피난처이신데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멸망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세상의 죄를 알지 못하면, 세상과 함께 죄를 짓고 있는 우리의 죄를 볼 수 없다.

- 누구나 직장 생활을 당연시한다.

- 그래서 직장에 있는 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된 상태를 당연시한다.

- 그로 인해 우리 안에 궁극적 결핍이 생기고,

- 그것을 채우기 위해 헛된 욕망에 빠지게 된다.

- 그러면서도 그 헛된 욕망조차 당연시한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찾고, 자기를 자기답게 만들어갈 수 있는데,

- 직장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단절되어, 자기 자신과 단절되고,

- 자기와의 단절을 해소하기 위해 헛된 욕망을 추구하고,

- 헛된 욕망 추구는 또 다시 자기를 자기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자신을 파괴한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으면,

-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죄에 대해 명확하게 알면,

- 세상으로 인한 자기 파괴에서 벗어날 수 있고,

- 그러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여, 자기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 그렇게 될 때 오히려 세상으로 들어가,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건져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케 하신 궁극적 목적이 이스라엘 사람의 회복이었던 것처럼,

- 우리에게도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하셔서 먼저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신 후,

- 우리를 통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회복케 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드디어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다고 자신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알게 되었고,

- 그 죄에 자신도 동참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회개한다.

[렘 17:14] 주님, 저를 고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나을 것입니다. 저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주님은 제가 찬양할 분이십니다.

- 이스라엘로부터 구분되어, 이스라엘로부터 자유케 되었을 때 비로소 예레미야는 자신을 되찾았고,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하여, 죄를 깨달을 수 있었다.

- 그런 후에 회개를 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게 되자, 이스라엘의 멸망을 담담하게 구하게 되었다.

[렘 17:18] 저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제가 수치를 당하지는 않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무서워 당황하게 하시고, 제가 무서워 당황하지는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제는 그들에게 재앙의 날이 오게 하시며, 갑절의 형벌로 그들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 이제 드디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 이스라엘의 죄를 명확하게 안 이상,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죄에서 돌이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가?

-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아직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분하지 못한다.

- 대표적으로, 나는 누구냐? 를 정의하기 위해, 세상의 스펙으로밖에 자신을 규정하지 못한다.

- 직업, 능력, 재력, 외모, 옷, 자동차, 집 등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이게 왜 더 문제가 되냐면,

-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정체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이다.

-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세상에서 선망받는 대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내가 만약 의사가 좋아 보이면, 실제 나의 본 모습과 상관없이 의사라는 정체성을 자신에게 주입한다.

그러면 결국 세상에서 주입된 정체성과 타고난 정체성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 그중에 어떤 사람은 타고난 정체성을 죽이고 주입된 거짓 정체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여 세상에 속박당해 살거나,

- 또 어떤 사람은 두 정체성 모두 포기하지 못해서 끝까지 갈등한다.

어쨌든 세상에서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면, 자기다운 삶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다.

- 세상 그 자체로 죄악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죄 때문에 우리가 우리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이다.

- 우리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 그런데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다워져야 한다.

- 정체성이 분명해져야 한다.

- 그런데 세상이 그것을 방해한다.

- 그것을 위해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구분하여 인식하도록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우리다워지도록 말이다.

 

결론 - 세상에서 버려질 용기를 갖자!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에 매여 자신을 잃었었다.

- 자신 존재의 근원을 이스라엘에만 한정했다.

- 이스라엘이 주입한 기준에 따라 자신을 규정했다.

- 그러니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못했고,

- 또 이스라엘의 죄에 동참하는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다.

- 그렇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니,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 그러니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연속된 사건이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세상의 기준 안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 특히 세상에서 선망받는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 쉽게 말해서, 돈 많이 벌고, 인기 많은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려 하기 때문이다.

-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지는 관심 갖지 않고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서 경제적 유익과 편의를 얻으려는 욕구에 밀려, 진정한 정체성 찾기에 소홀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우리의 본 모습에 다가설 수 없다.

-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하고,

- 여전히 세상에서 인정과 안정을 얻으려는 탐욕에 쌓여서,

- 세상이 선망하는 정체성을 갖고자 하는 사람은,

- 결코 자신을 찾을 수 없다.

- 그런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용납할 수 없고, 

-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부정한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용기가 필요하다.

- 어떤 용기냐면, 세상의 인정과 안정을 얻지 못할 자신조차 용납할 용기이다.

- 세상은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자신을 용납할 용기가 필요하다.

- 그런 용기가 있을 때만, 비로소 가려졌던 눈이 열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다.

그 용기는 어디서 오냐?

- 첫째로, 세상으로부터 버려져도 하나님은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믿음에서 오고,

- 둘째로, 세상의 인정과 안정이 실제로는 아무 쓸모없는 죄악뿐이라는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스라엘에 대한 불신'을 통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이켰듯이,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대한 불신'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찾고,

- 그를 통해 하나님과 참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언제까지 세상에 의해 규정당하며, 자신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것인가.

- 세상에서 버려질 용기를 갖자.

- 용기 있는 자만이 미남/미녀를 얻을 수 있고,

-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자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 세상에서 버려질 용기를 가진 자만이 세상이 규정할 수 없는, 자기다운 자기, 참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