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32) 16:14-21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것을 모르는 예레미야

안승준 2022. 6. 4. 02:0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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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장은 인간의 한계를 가진 예레미야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단락이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비난하면서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했다.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구원이 왜 이렇게 중요했냐면,

-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경험의 한계 때문이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때만 안전과 평안이 보장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그 경험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

 

사람이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 오히려 경험해보지도 않은 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편견'이다.

- 남자는 셀 거야, 여자는 약할 거야, 흑인은 무식할 거야, 황인은 일만 할 거야 등 말이다.

- 하지만 정말 경험해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런 관점에서 경험에 근거해서 판단한 예레미야는 합리적이다.

하지만 판단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경험이 오히려 하나님과 관계에서는 독이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 그대로 '초월자'시기 때문이다.

- 경험의 한계 안과 밖을 넘나드시며, 자유롭게 하나님의 뜻을 펼치시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을 '경험의 한계 안에서' 죽은 채로 놔줘서 뜻을 이루시기도 하고, 

- 죽은 사람을' 경험의 한계 밖에서' 다시 살려서 뜻이 이루시기도 한다.

따라서 초월자이신 하나님께는 변하지 않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 하지만 그 원칙을 이루시는 일관된 원칙은 없다.

-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지만,

- 사랑하는 방식은 사람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전부 다르다.

- 하나님은 이전에 경험했던 방식과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신다.

 

여기에서 예레미야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 주, 엄밀한 번역으로 '야훼'라고 고백했다.

- 이 고백의 함의는 하나님이 창조주, 구원자, 절대자, 주권자, 초월자 등이다.

- 따라서 하나님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자신의 경험으로 한계 지었다.

-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될 때 자신도 구원받으니까,

- 하나님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분으로 한정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한정한 범위를 넘어서려고 하시자,

- 하나님을 저지하려 했고,

- 끝내는 예레미야의 저지를 벗어나시려는 하나님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동시에,

- 경험의 한계를 초월하시려는 하나님을 경험의 한계 속으로 억압하려 했다.

 

누군가는 예레미야의 이중적인 모습을 내적 분열, 내적 갈등으로 미화할 수 있다.

- 모순된 두 고백이 공존하여 고뇌에 빠진 것이라고 순화할 수 있다.

- 인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믿고자 발버둥 치는 신자의 애씀을 강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순하게 '불신'으로 본다.

- 모순된 두 고백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 하나님이 초월자라는 것을 입으로만 내뱉을 뿐, 실제로는 믿지 않는 상태로 말이다.

이는 베드로의 상태와 똑같다.

- 베드로도 누구보다 멋들어지게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다.

[막 8: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런 직후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한다.

[막 8:31~33]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베드로는 고백과 다르게 예수님을 전혀 믿지 않았다.

- 베드로는 내적으로 갈등하며 모순된 두 고백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 단순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였다.

예레미야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나 빈번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주'라고 고백하면서도,

- 간절히 바라며 기도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 하나님께 실망하고, 원망하며, 하나님께 능력이 없다고 비난한다.

이는 전적으로 비-논리적인 태도이다.

- 정말 하나님을 '주'로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모든 일을 참이라고 믿고,

-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 바라며 기도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말이다.

-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만 찬양한다.

- 이러한 찬양은 역으로 하나님이 '주'라는 것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실제 '주'는 누구인가?

- 하나님을 찬양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실질적 '주'이다.

- 개인적인 문제에서는 자신이 '주'가 되고,

- 공동체적인 문제에서는 공동체의 리더인 목사가 '주'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를 통해 실제로는 자신과 목사를 찬양했다.

 

이와 같은 태도를 예레미야도 보여줬다.

- 예레미야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강요하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비난했다.

[렘 14:8~9]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9)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 주님을 '희망', '구원자'라고 부르며 찬양하는 듯 보인다.

- 하지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을 나그네, 행인, 어쩔 줄 모르는 사람, 힘 잃은 용사라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도록 그냥 놔두면, 당신은 하나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말을 또 한다.

[렘 14: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 겉보기에, 주님의 이름,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주님과 맺은 언약을 찬양하는 것처럼 보인다.

- 하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면,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을 먹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로는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상황을 결정하는 '주'는 예레미야이다.

-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백이 갖는 의미를 알지 못했다.

- 즉,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14-16장 단락을 하나님은 이렇게 끝맺으신다.

[렘 16:21]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그들에게 알리겠다. 이번에는 나의 권세와 능력을 그들에게 알려서, 나의 이름이 ‘주’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하겠다.

-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것을 깨닫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현재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끝까지 자기가 '주'인 것처럼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명령'했다.

이스라엘 역시 자기가 섬길 신을 직접 만들었다.

[렘 16:20] 사람이 어찌 자기들이 섬길 신들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어찌 신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 왜 우상을 만드냐면, 겉으로는 우상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상황을 만들어서,

- 실제로는 그 우상을 만든 자신이 세상의 실질적 '주'가 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상 숭배의 실제 숭배 대상은 우상이 아니다.

- 실제 숭배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 우상은 세상에서 사람이 '주'가 되기 위한 도구이다.

- 우상 숭배를 하는 이유는 우상의 '종'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 우상의 '주'가 되어, 우상이 통치하는 세상의 '주'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우상 삼았고, 이스라엘은 우상을 우상 삼은 것이다.

- 똑같은 우상 숭배를 했는데,

- 우상이 달랐던 것뿐이다.

 

우리가 돈을 버는 이유도 우상 숭배와 완전히 같다.

- 돈이 최고고,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굴욕도 참는다.

- 마치 우상을 섬기듯, 돈을 떠받든다.

왜냐? 정말 돈이 그렇게 능력 있다고 믿고, 돈의 위력이 두렵기 때문이냐?

- 말로는 그렇다고 할 테지만,

- 실제로는 돈을 '종' 삼아서, 돈을 소유하고 주무르는 자신이 '주' 되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돈의 위력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돈을 두려워하게 하려는 것이다.

- 돈이 정말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돈을 두려워하고 돈에 굴복해야,

- 돈을 소유한 자신이, 돈을 통해서, 돈의 영향력 아래서 돈에 굴복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은 정말 두려운 대상인가 아닌가?

돈의 영향력은 크다.

- 만약 신앙을 근거로 돈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기만이다.

-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돈의 영향력은 막강하고, 그 영향력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돈의 영향력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면,

- 농업 사회에서 해와 비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 해와 비가 농업의 수확량을 결정했다.

- 그래서 해와 비를 우상 삼으며 숭배했다.

- 성경에서 유명한 '바알'은 비의 신이고, 우리나라에도 '일월성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와 비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다.

-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해와 비를 통제하신다.

[신 11:14~17] 주님께서 당신들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 따라 내려 주셔서, 당신들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거두게 하실 것이며, (15) 들에는 당신들의 가축이 먹을 풀을 자라게 하여 주실 것이며, 그리하여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살 것입니다. ・・・・ (17) 당신들이 다른 신들을 섬기면,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으실 것이며, 당신들은 밭에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

 

그렇다면 누가 두려움의 대상인가?

- 해와 비인가, 하나님인가.

- 해와 비가 하찮고 영향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이 해와 비를 통제하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피부로는 해와 비에게 직접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 해 신과 비 신을 찾아가 우상 숭배를 하고 싶다.

- 그것이 직관적이고 일차원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신앙은 직관적인 두려움에 일차원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 그리고 해와 비가 하나님께 통제받는다는 것을 믿고,

- 두려움을 해결할 실질적 '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 왜냐하면 사람의 직관과 본능을 거스르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해 신과 비 신을 의지하지 않고,

-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주'이심을 믿는다면,

- 오히려 해와 비를 두려워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판단이다.

- 오히려 하나님 대신 해와 비를 두려워하는 것이 비-직관적인 생각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누가 두려움의 대상인가?

- 자신의 직관과 경험을 믿는 사람은 해와 비를 두려워한다.

- 반면에 직관과 경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초월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해와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오직 '주'이신 하나님만 두려워한다.

그래서 경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 대신 이스라엘의 멸망을 더 두려워했다.

- 그래서 하나님께 두려움 없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명령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돈도 마찬가지이다.

- 우리는 돈이 '주'인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자본주의의 뜻이 돈이 '주'라는 뜻이다.

- 해와 비가 농사에 절대적이듯, 돈은 자본주의 사회에 절대적이다.

따라서 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모든 영향력이 돈에서 오는 경험을 매일 쉴 새 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 명백하게 돈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주'이심을 믿는다면,

- 그래서 돈도 하나님의 '종'임을 믿는다면,

-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해와 비를 주시기도 하고 뺏으시기도 하는 것처럼,

- 하나님이 돈도 주시기도 하고 뺏으시기도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 돈이 '주'인 경험의 한계에서 벗어나, 돈이 아닌 하나님만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두려워하고, 돈을 '주'로 삼는 것의 실제 의미는 무엇인가?

우상 숭배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

- 농업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해와 비가 농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 그래서 해와 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 그래서 원하던, 원치 않던, 해 신과 비 신의 도움이 필요하고, 

- 도움을 받기 위해 해 신, 비 신과 같은 우상을 숭배한다.

그런데 우상 숭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 극히 일부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신이 정한 특정한 장소에서, 

- 정화수를 뜨는 것과 같이 자신이 정한 특정한 의식으로,

- 자신이 정한 특정한 대상을 생각하며,

-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는다.

- 종교 지도자들이 정한 특별한 장소에서,

- 그들이 정한 특별한 의식으로,

- 그들이 정한 특별한 대상에게,

- 그들이 정한 대로 뭔가를 요구한다.

대표적인 예가 예루살렘 성전 제사이다.

- 예루살렘 성전에, 양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면, 그들이 모든 것을 처리해준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 제사의 문제가 뭐냐?

- 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권력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점이다.

-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이다.

- 그들은 사람들이 가져온 제물을 제사에 사용하기도 전에 마음대로 가져갔고,

-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다.

[삼상 2:12~2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빴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였다. (13) ・・・・ (15)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아직 기름을 떼내어 태우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의 종이 와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제사장님께 구워 드릴 살코기를 내놓으시오. 그분이 원하는 것은 삶은 고기가 아니라 날고기요!” 하고 말하곤 하였다. (16)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그 종에게 “먼저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원하는 것을 가져 가시오!” 하고 말하면, 그는 “아니오. 당장 내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가져 가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17) 엘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렇듯 심하게 큰 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을 이처럼 함부로 대하였다. ・・・・ (22) 엘리는 매우 늙었다. 그는 자기 아들들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저지른 온갖 잘못을 상세하게 들었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까지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 또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도 있다.

역사적으로 종교 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말할 필요 없다.

 

따라서 우상 숭배가 갖는 실질적인 문제는 '종교 지도자에 의한 착취'이다.

- 우상 숭배가 갖는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그것은 제쳐두고서도,

- 만약 우상 숭배의 목적이 해와 비 우상을 '주'로 잘 섬겨서 농사가 잘되는 것에 있다면, 

- 사회와 개인에게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상 숭배의 실제 목적은 그렇지 않다.

- 우상 숭배의 실질적인 '주'가 우상이 아니라 우상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가 된다.

- 종교 지도자의 권력, 명예, 풍요를 위해 우상 숭배가 사용되고,

- 우상 숭배를 무기 삼아 종교 지도자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 우상 숭배의 실제 목적이다.

역사에서 언제나 우상 숭배와 종교는 이렇게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같은 논리를 다시 돈으로 가져와 보자.

- 돈 역시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 돈 뒤에는 권력 집단이 있고, 

- 권력이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가 돈이다.

그것을 위해 사람들이 돈을 두려워하게 하고, 돈을 '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 돈이 강해 보일수록, 사람들은 돈에 종속되고,

- 사람들이 돈에 종속될수록, 권력 집단은 사람들을 더 쉽게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 집단을 특정해서 음모론을 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 단지 과거 농업 사회에서 우상 숭배의 작동 방식과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작동 방식이 똑같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 차이가 있다면, 과거에는 작동 방식이 간명해서 권력 집단을 분석하고 특정하기 쉽지만,

- 현재는 작동 방식이 복잡해서 권력 집단을 분석하고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것뿐이다.

- 어쩌면 현재의 권력 집단은 과거와 달리 특정한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 돈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권력 집단의 속성을 갖게 되고,

- 돈을 소유하지 않을 때는 착취 대상이 되는 것처럼 가변적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돈이 '주'인 현재 사회가 우상이 '주'였던 과거 사회와 전혀 다르지 않고,

- 돈을 '주'로 삼는 사람은 여지없이 권력 집단에 의해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돈을 '주'로 삼는 것의 실제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에 그토록 분노하시는 것이다.

[렘 16:18] 그들이 시체 같은 우상으로 내 땅을 더럽히고, 내가 그들에게 물려준 땅을 역겨운 우상들로 가득 채워 놓았으니, 나는 이렇게 우선 그들의 죄악과 허물을 갑절로 보복하겠다.

- 하나님만이 권력을 독점하여, 창조주로서 위세를 부리고, 세상을 철저히 자신의 종 삼아, 홀로 자유를 누리시려는 것이 아니다.

- 우상 숭배가 권력을 독점하여 소수가 다수의 사람을 착취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다수의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 우상 숭배가 많은 사람의 고통스러운 부르짖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금지하신 것이다.

-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고,

-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서로 공유하며,

- 혼자만 자유를 누리고, 나머지는 모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 모두가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 외에 다른 누군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신 것이다.

- 사람에게 권력이 모이면, 반드시 독점되기 때문이다.

- 반면에 하나님께 권력이 모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권력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시기 때문이다.

- 삼위일체 속에서 세 분이 공유하던 권력이 종말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우상 삼았다.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주' 삼았다.

-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때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우상의 실제 '주'는 누구냐?

- 종교, 정치 지도자이다.

-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의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 전쟁을 통해,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착취당했다.

- 그러면서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았다.

-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사치스럽고 풍요로워졌다.

만약 그들이 정말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려 했다면,

- 자신들의 재산부터 희생하면서 전쟁을 하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주' 되어, 

- 이스라엘 민족을 희생하여 자신들만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을 우상 삼은 것의 해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우상을 파괴하셔야만 했다.

- 그 우상 때문에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착취당하고 죽임당하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시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우상을 파괴하셔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렘 16:16~17] “내가 많은 어부를 보내서, 이 백성을 고기 잡듯 잡아 내겠다. 나 주의 말이다. 그런 다음에, 많은 사냥꾼을 보내서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을 샅샅이 뒤져서, 그들을 사냥하듯 잡아내겠다. (17) 내가 그들의 모든 행실을 똑똑히 지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내 앞에서 숨을 수가 없고, 그들의 죄악도 내 눈 앞에서 감추어질 수가 없다.

- 단순하게 죄를 범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아니다.

-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우상을 파괴하셔서, 그 우상을 아무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 그래서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도록 말이다.

- 그래야 이스라엘 민족이 서로 착취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모두 똑같이 풍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과정이 현실에서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우상은 여지없이 돈이다.

- 이를 확장하면,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공, 인정, 안정 등 전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우상을 파괴하셨듯, 돈이라는 우상도 파괴하실 것이다.

- 우리의 경험으로는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 같지만,

- 자본주의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

-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을 아무도 사용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이다.

- 현재는 돈을 무기 삼아 기업은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 노동자는 기업에 생명을 바치고, 생명의 가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푼돈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그래서 돈이라는 우상이 파괴되면,

- 인간의 생명과 돈이 교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지금은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 그때가 되면 돈이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을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돈이 사라져도, 다른 것이 새로운 우상으로 대체될 것이다.

- 인류는 종말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낼 것이다.

- 그래서 인류는 또 다시 새로운 우상을 통해 착취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가만히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 계속해서 우상을 파괴해 나가실 것이다.

- 과거에 그러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세상의 전부가 우상이 되고, 세상 전부가 파괴될 것이다.

- 그것이 종말일지, 그 전에 종말이 올지 알 수 없지만,

- 세상은 이런 과정을 거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 반드시 둘 중 하나로 될 것이다.

- 세상의 우상을 '주' 삼고, 착취하며 착취당하며 살다가, 우상과 함께 영원히 파괴되거나,

- 하나님을 '주' 삼고,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며 살게 될 것이다.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만약 둘 중에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중간 지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 예레미야처럼 될 것이다.

-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주' 삼는 삶 말이다.

즉,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 우상을 '주' 삼아, 자신이 '주' 되려는 삶 말이다.

- 그러나 실상은 세상의 '종' 되어 착취당하는 삶 말이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 없이는 자신의 구원도 없다는 착각을 했다.

- 그래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 없는' 예레미야의 구원을 선포하셨다.

- 풀어 말하면, 지금 예레미야의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이지만,

-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고,

- 비록 예레미야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 이스라엘의 본질을 영원토록 보호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과 동시에 회복을 예고하신다.

[렘 16:14~15] 그러므로 보아라, 나 주의 말이다.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조상에게 주었던 고향 땅에 그들을 다시 데려다 놓을 것이다.

- 현재 이스라엘은 멸망하지만,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신다.

굳이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구원 없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예고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 우리는 돈 없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돈 때문에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역시 '돈 없이' 구원하실 것이다.

- 여기서 구원은 영적인 것이 아닌 현실적인 것,

- 즉, 따뜻하고, 배부르고, 편안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인정받는 삶으로 한정해서 생각해보자.

- 왜 이렇게 한정하냐면, 구원을 먼 미래에 있을 막연한 어떤 것이 아니라,

- 현실에서 피부에 와닿는 것으로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 그래서 구원을 행복이라는 말로 바꿔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돈 없이 우리를 어떻게 행복하게 하실 수 있을까?

- 왜 꼭 돈이 강조되냐면, 돈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 우리가 돈을 우상 삼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만약 하나님이 돈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신다면,

- 하나님조차 돈의 위력에 굴복하신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돈이 배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쌀도 살 수 없고, 잠을 잘 집도 얻을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돈 없는 행복이 가능할까?

 

해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존의 최저 수준을 보장해주시는 것이다.

- 맛집은 못 가고, 크고 좋은 집은 못 살고, 명품은 못 입지만,

- 배부르게 먹고, 편안하게 자고, 깨끗한 옷은 주시는 것이다.

- 그래서 돈으로 인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 동시에 돈이 주는 과시적 행복은 제거하시는 것이다.

- 그래야 돈으로만 살 수 있는 현실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 돈에 대한 두려움과 돈에 의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돈이 절대로 줄 수 없지만, 돈이 주는 행복보다 훨씬 큰 행복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다.

- 돈이 주는 과시적 행복을 누릴 수 없어서, 다른 사람에 비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 맛집도 못 가고, 크고 좋은 집도 못 살고, 명품도 못 입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큰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참 행복을 주셔서,

- 과시적 행복의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행복하게 하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관계의 행복이다.

- 다른 사람들은 과시적 행복을 얻기 위해 밤낮없이 일만 하고,

- 그렇게 얻은 돈으로 맛집도 다니고, 메이커 아파트에 살며, 명품을 입지만,

- 실상은 과시적 행복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정작 가족과 할 말이 없다.

- 머리 속에는 오로지 일 뿐인데,

- 일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하기에는 가족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고,

- 일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자니, 생각나는 것이 없다.

그러니 가족 간에 대화는 줄고, 서로 간의 이해도 줄어서, 

- 결국 사랑하는 마음도 차츰 사라진다.

그러면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과시적 행복을 더 추구하고,

- 그러면 돈이 더 필요하고,

- 그러면 시간은 더 없어지고,

- 그러면 가족 간의 관심은 더 없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행복을 위해 시간을 들여서 돈을 얻지만,

- 정작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다.

- 그래서 돈으로 행복해지려는 사람은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

- 행복에 필요한 '시간'은 없어지고, 필요 없는 '돈'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으로 행복해지려는 사람의 인생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과시적 행복에서 벗어나니 돈을 많이 벌 필요가 없고,

- 일을 적게 하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 머리 속에 가족과의 추억이 많이 쌓이니, 가족과 할 이야기가 더 많아지고,

- 더 많이 이야기하니,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 그 사랑이 다른 많은 결핍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행복하게 한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여 충만하니, 과시적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고,

- 그러면 돈이 덜 필요하고,

- 그러면 시간은 더 많아지고,

- 그러면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추억은 더 쌓이는 선순환이 계속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돈 없이' 행복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물론 이 선순환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 먼저 믿음이 필요하다.

- 첫째로, 하나님이 경제적으로 생존의 최저 수준은 보장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고,

-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다른 어떤 행복보다 크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 이 믿음을 통해 다른 사람과 비교될 때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해야 한다.

게다가 하나님께 우리가 사랑을 받아야 한다.

- 가족 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 가능하다.

-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만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할 때만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 하나님께서 믿음을 구하는 사람에게 믿음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 성령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참 행복, 참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차례이다.

- 돈으로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을 '주'로 섬기는 삶과,

- 돈 없이 행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삶 중에서 말이다.

돈을 '주'로 삼으면, 

- 돈은 우리에게 돈 외의 모든 것을 전부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로 삼으면,

-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 외의 모든 것을 전부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