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31) 16:1-13 초상집, 잔칫집에도 가지 말아라. - 멸망 심판을 믿는 자의 삶

안승준 2022. 5. 28. 01:13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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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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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예레미야는 구원을 오해했다.

- 이스라엘이 구원받아야 자신도 구원받는다고 착각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을 납득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하나님을 예배할 유일한 민족이 사라지니, 하나님도 멸망하는 것이며,

-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멸망하면 예레미야의 정신적 기반 둘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니, 예레미야 자신도 멸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도 이스라엘의 멸망을 저지해야만 했고,

- 그것을 위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고 거역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구원을 오해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다.

 

같은 오해를 우리도 한다.

-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한다.

- 여기서 구원이란 현실적인 의미로, 삶에서 만족감, 충만함, 행복, 자존감 등을 얻는 것을 말한다.

- 즉, 신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구원은 삶의 만족감, 충만함, 행복, 자존감 등을 얻어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며,

-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반대로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잃으면 구원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돈, 성공, 인정, 안정이 늘어나면,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판단하고,

- 반대로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줄어들면,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을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한다.

-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우고,

-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열심과 신앙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복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독려한다.

그러나 결국 이런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만다.

- 게다가 이러한 거역이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다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참 구원은 무엇이냐?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돈, 성공, 인정, 안정을 모두 잃어도 여전히 구원받는 것이다.

-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음으로 위험하고 불안전한 현실에서도 평안과 안전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하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네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스라엘은 반드시 멸망할 거야.

- 그런데 너는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너도 멸망할 것 같지?

- 그런 두려움 때문에 계속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구하는 거지?

- 절대 그렇지 않아.

- 나는 반드시 너와 함께할 것이고,

- 나와 함께라면 너는 언제나 안전할 거야.

- 그러니 날 믿어. 라고 말이다.

[렘 15:20~21] 내가 너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어서 이 백성과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에게 맞서서 덤벼들겠지만, 너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21) 내가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도 건져내고, 잔악한 사람들의 손에서도 구하여 내겠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과 상관없는 예레미야의 구원이다.

- 하나님께는 아무런 수단과 조건 없이도 예레미야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오히려 수단과 조건이 수반되는 구원은 참된 구원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 돈, 성공, 인정, 안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무런 수단과 조건 없이 주어지는 구원이다.

- 오히려 '거지'가 된 '실패자'가 모두에게 '버림받아' '노숙'을 함에도,

- 그렇게 돈, 성공, 인정, 안정이 모두 사라져도,

-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두려움 없이 완전한 보호하심 속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 단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체념하며, 주어진 상황에 억지로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 기쁨과 평안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해질만큼 충만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돈, 성공, 인정, 안정을 빼앗아 가신다.

- 이런 것이 없어도 오직 하나님만으로 얼마나 충만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별빛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흑암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눈 앞에서 희미하게 비추는 전구 하나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별빛을 모두 가리기 때문이다.

- 전구는 악한 것이 아니다.

- 때로는 전구가 필요하다.

- 그러나 필요에 따라 전구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어야 한다.

- 그래야 밤 하늘의 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돈, 성공, 인정, 안정도 때로는 필요하다.

- 하나님은 그것을 빼앗기도 하시지만, 주기도 하신다.

- 문제는 우리가 그것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가까이 갔다가, 필요 없을 때는 멀어져야 하는데,

- 그래야 자유롭게 오가며, 나다운 선택을 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하는데,

- 우리는 돈과 성공에서 멀어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돈과 성공이 멀어지면 인생이 멸망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그것 때문에 인생의 아름다움을 전부 잃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 마치 눈 앞의 전구 때문에 밤 하늘의 아름다움을 전부 놓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눈 앞의 전구를 치워주시는 것이다.

- 눈 앞의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 그것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매여 참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것 때문에 나 자신을 못 보고, 사랑하는 사람을 못 보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생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 기쁨, 참 평안, 참 구원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불빛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물론 눈 앞에 있던 전구를 치우면, 처음에는 흑암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 전구 때문에 동공이 수축하여, 미세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어둠이 더 두렵고, 두려움을 없앨 새로운 빛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 그런 예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든 사건이다.

- 이집트의 우상을 잃고, 우상처럼 따랐던 모세도 사라지자, 당장의 두려움을 해소할 새로운 우상을 만든다.

그래서 40년의 광야 생활처럼 어둠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 동공이 이완되어 작은 빛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 어둠의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불빛을 찾지 않고,

- 어둠에 적응될 때까지 두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면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경이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 밤 하늘에 그렇게 별이 많은지, 별이 그렇게 밝고 아름다운지, 

-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 돈과 성공을 좇느라 그냥 지나쳤던, 혹은 돈과 성공에 눈이 가려 보지 못했던 인생의 아름다움을 이제야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고,

-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실패, 좌절, 불안, 고통, 상실, 무력감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다.

- 우리 죄에 대해 처벌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없는 흑암 속에서 우리 눈을 여셔서, 작은 빛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실패, 좌절,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인생의 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돈, 성공, 인정, 안정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방해꾼이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이다.

- 마치 작은 전구가 밤 하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어둠이 지속되어야만, 밤 하늘의 찬란함을 감상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를 필두로 이스라엘과 우리는 구원을 왜 이렇게 오해할까?

- 왜 이스라엘의 구원과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우리에게 구원을 준다고 착각할까?

결론부터 말해서, 경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한계 때문이다.

- 풀어 말하면, 당장 돈이 있어야 배고픔이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 당장 성공을 해야 무시당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 인정을 받을 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안정감을 갖는 경험의 한계 때문이다.

- 우리는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얻을 때에만 두려움에서 벗어나 구원을 경험했다.

- 그래서 돈, 성공, 인정, 안정이 구원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 이는 전적으로 경험에서 나온 것이고, 지금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 이러한 경험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이다.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잘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셨고,

- 반면에 이스라엘이 잘 못하면, 하나님께서 떠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것을 경험했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때 예레미야도 보호받았고,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예레미야도 고통받았다.

- 따라서 예레미야의 경험은 이스라엘의 구원만이 자신의 구원이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자신에게 구원을 준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실이 오직 경험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얻지 못해도 우리가 두려움에서 벗어나 구원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고,

- 이스라엘이 멸망해도 예레미야가 보호받는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다.

-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 그래서 내가 교회 식구들의 망함을 위해 기도한다고 했을 때 반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정말 구원을 주냐?

-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얻으면, 정말 두려움에서 벗어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냐?

- 만약 이 사실이 맞다면, 이건희 회장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무런 결핍 없이, 모든 욕구가 완전히 충족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 구역질나는 변태 성욕에 장악되어 있었다.

- 따라서 돈, 성공, 인정, 안정은 구원을 주지 않는다.

- 이 역시 우리는 경험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냐?

방법은 없다.

- 우리의 경험이라는 한계 안에서는 말이다.

- 돈, 성공, 인정, 안정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본 경험이 없다.

- 순간적으로 잊어본 적은 있다.

-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힘들게 결혼해서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 같다.

- 또 너무 큰 두려움 때문에 작은 두려움에서 벗어났다고 느낀 적도 있다.

- 예를 들어, 돈이 부족해서 회사가 위험해질 두려움 때문에 돈 빌려달라고 말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돈을 빌리러 다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두려움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난 경험은 없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이상하게 착각하는 것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났던 경험을 구원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 두려움을 다른 두려움으로 회피했던 경험을 구원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일시적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두려움을 회피하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구원의 방법을 정의할 능력이 없다.

- 구원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 구원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니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정의하겠는가.

- 그래서 이상한 것을 구원으로 착각하며, 허상을 좇으며 사는 것이다.

사람은 마음 속 깊은 두려움을 어떻게든 해소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데,

- 왜곡된 구원이라도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 왜곡된 구원이 거짓인 줄 몰라서가 아니다.

-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여서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 이것이 우리가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추구하며 사는 이유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이 아닌 존재에게 구원의 방법을 물어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묻기 전에 다른 종교에 먼저 물어보면,

- 불교나 이슬람은 구원을 정의하는 방법이 거의 비슷하다.

- 좋은 것은 모두 있고, 나쁜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나 장소이다.

- 불교에서는 해탈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고, 

- 이슬람에서는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 기독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받는 방법이다.

- 불교는 수양을 통해서, 이슬람은 율법을 통해서이다.

- 기본적으로 사람의 노력을 통한 것이다.

- 이는 바리새인, 천주교, 왜곡된 기독교와 똑같다.

이렇게 비슷한 이유는 사람의 경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 성과를 얻으려면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다.

- 따라서 종교적인 성과, 즉 구원도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다.

- 엄밀하게 말해서, 기독교는 구원을 받는 정형화된 방법이 없다.

- 율법도 아니고, 예배 참석도 아니며, 구제, 봉사, 전도, 선교 다 아니다.

- '믿음'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행위나 표현으로 규정할 수 없다.

왜 이러냐?

- 기독교에서 구원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 경험해보지 못한 구원에 경험해보지 못한 방법으로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나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설명을 했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

- 성경에 충분히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눈에 그려지게 이해할 수는 없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기독교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참된 구원은 모든 두려움에서 완전히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것인데,

- 그것은 사람이 결코 경험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참된 구원과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어야 하고,

- 사람이 이해하고, 상상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 반대로 이해하고, 상상하고, 표현할 수 있는 구원은 절대로 구원이 아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돈, 성공, 인정, 안정은 참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냐?

우리는 이미 구원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

- 엄청나게 좋은 것이라는 것 등.

-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전부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쉽게 헷갈리는 것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다.

- 이 두 가지를 헷갈려서,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의 구원으로 착각했고,

- 우리도 돈, 성공, 인정, 안정을 얻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나조차도 여러 차례 듣고 말했지만, 여전히 헷갈린다.

 

첫째로, 현실에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현실에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지키기만 하면, 자신도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그토록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 돈과 성공을 얻으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다.

- 그래서 돈과 성공을 얻으려고 인생을 전부 갈아 넣는다.

- 게다가 돈과 성공을 위해 신앙까지 이용한다.

- 왜 그러냐면, 돈과 성공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아니다.

-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 만약 세상의 모든 소유를 다 가져도, 우리는 여전히 결핍과 결핍으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전지전능, 유아독존, 영원무궁한 신이 된다고 해보자.

- 그렇게 되면 결핍과 두려움이 없어질까?

-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완전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질문으로,

- 과연 하나님은 결핍과 두려움 없이, 구원받았다는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완전한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계실까?

- 굉장히 위험하고,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틀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서 마음껏 답을 해보겠다.

만약 하나님이 결핍과 두려움 없이 완전히 자유로우셨다면,

-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시며, 돌아오라는 애절한 외침이 가능했을까?

- 분노와 애절함이 있다는 것은 결국 결핍과 두려움이 있다는 증거이다.

- 이스라엘에 매여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완전히 자유로우셨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필요 없는 완전한 상태였다면,

- 창조는 퇴행이 된다.

- 창조는 완전한 상태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 완전한 상태를 불완전한 상태로 만든 불순물이 된다.

- 따라서 완전한 자유를 가지신 하나님은 절대 창조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하나님 역시 결핍과 두려움 속에서, 자유가 박탈된 상태로, 구원을 기다리신다.

- 우리처럼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구원받으시냐?

- 종말이다.

-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들과 완전한 관계를 맺을 때이다.

-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역시 사랑의 충만함 속에서 자유를 누리실 것이다.

- 우리가 종말에 그렇게 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한 신이 되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 아니다.

- 현실에서 구원은 불가능하다.

- 신이 된 우리는 너무 완벽해서 삶의 모든 동기를 잃어버리고, 심심해서 죽을 것이다.

- 혹은 자신과 같이 완벽한 존재를 찾을 수 없어, 외로워서 죽을 것이다.

혹시 이러한 논리가 괴변처럼 느껴질지 몰라서, 한마디만 더 하면,

- 완전하지 않은 우리조차 간절히 바랐던 목표를 이루고 나면, 허전함이 밀려온다.

-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가 목표를 이룬 후 목표가 사라졌을 때의 공허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 또한 목표를 이룬 성과가 너무 훌륭해서 많은 사람과 나누며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은데, 목표가 너무 대단한 것이어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의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껴봤을 것이다.

- 따라서 모든 것을 소유한다고 해도, 그래서 신이 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결핍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현실에서는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다.

 

둘째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은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랐던 이유는,

- 그래야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말하면, 

- 이스라엘의 구원 없이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은 것이다.

- 비록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더라고 말이다.

- 즉,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없다면, 하나님도 구원을 이루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말이다.

그런 믿음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거역하며 분노를 표출하게 한 것이다.

- 자신의 구원은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에 달려 있는데,

-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조차 바꾸실 수 없는데,

- 하나님은 속 사정도 모르고, 이스라엘을 멸망한다고 하시니까,

- 예레미야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을 막으시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이 돈과 성공에 달려있다고 믿는다.

-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도록 우리에게 돈과 성공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께 돈과 성공을 달라고 당당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 그 기도가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보다 돈과 성공을 믿고, 

- 하나님은 돈과 성공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 하나님과의 관계는 필요 없다는 고백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 예수님 제대로 믿으면, 돈과 직업 모두 잃고, 선교지 가서 생고생만 하다가, 별 볼 일 없이 죽게 될까 봐 괜한 찝찝함을 갖는 것이다.

- 이 역시 돈과 성공만이 날 구원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데,

- 신앙은 나에게 돈과 성공을 빼앗아 갈 것이고,

- 돈과 성공과 함께 구원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 그러니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 나의 구원은 오직 돈과 성공에 달려 있고,

- 하나님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 하나님 역시 돈과 성공 없이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란 고작 나에게 돈과 성공을 주시는 능력이고,

- 그 방법이 내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거역하며 분노를 표출하게 만든 원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으시다.

- 돈과 성공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거짓인 것처럼,

- 돈과 성공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 역시 거짓이다.

우리 각자에게 구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 좋은 것이 응축되고, 나쁜 것은 없는 상태이다.

- 거기에는 당연히 풍족한 '돈', 원하던 목표의 '성취', 사람들의 환호와 '인정', 그런 것들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안정'이 포함되어 있다.

-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돈과 성공을 구원과 연결 짓는다.

그러나 반대로, 돈, 성공, 인정, 안정이 있으면 두려움 없는 완전한 평안에 이르나?

- 이제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안다.

- 모든 것이 있어도 여전히 두려울 것이고, 결핍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반드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어야 한다.

- 그래야 참 구원자가 된다.

- 반대로 돈과 성공과 같은 수단이 있어야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라면, 참 구원자가 아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우리의 돈과 성공을 빼앗는 것이다.

- 자신이 어떤 수단도 필요 없는 참 구원자이심을 증명해서,

- 우리가 하나님을 참 구원자로 믿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빼앗으신 것이다.

- 제자들이 모두 배신하게 해서 명예도 빼앗고,

- 찍소리도 못하고 무능력하게 죽는 모습을 통해 능력도 빼앗고,

- 공생애 3년 동안 이룬 성과도 빼앗고,

- 마지막 남은 목숨도 빼앗으셨다.

- 제자들을 포함해 모든 사람의 저주 속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께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았다.

그런 후에 그 쓸모없는 예수님을 메시야, 그리스도, 구원자, 하나님으로 재창조하셨다.

- 아무것 없어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말이다.

- 예수님이 돈과 성공 없이 구원받아 그리스도가 되신 것처럼,

- 우리도 돈과 성공 없이 구원받아 천국 백성으로 만드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돈과 성공을 그토록 구하는 것이고,

- 돈과 성공으로 현실에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께 거역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다.

- 참 구원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 구원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다른가?

결혼하지 않고, 자녀를 낳지 않는다.

[렘 16:2] 너는 이 곳에서 아내를 맞거나, 아들이나 딸을 낳거나, 하지 말아라.

초상집에 가지 않는다.

[렘 16:5] 그렇다. 나 주가 말한다. 너는 초상집에 가지 말아라. 가서 곡하지도 말고, 유가족을 위로하여 주지도 말아라. ・・・・

즐겁게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렘 16:8] 너는 사람들이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잔칫집에도 들어가지 말아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세 가지 금지 명령을 하신다.

- 이 명령을 통해 예레미야가 행위 예언을 하게 하시는데,

- 예언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묻도록 만든다.

- 그때 예언자가 그 행동에 빗대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이 행위 예언이다.

따라서 행위 예언은 행위 그 자체보다 행위 예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행위 예언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한마디로,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니, 세상에 소망도 구원도 사라져서, 결혼 출산도, 초상집도, 잔칫집도 필요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 그러니 결혼하여 출산하는 것은 괜히 고통스럽게 죽을 사람만 더 만들어내는 것이고,

-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조차 사치가 될 것이며,

- 그런 비극이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 시대에 이 곳에서' 일어날 것이니 잔칫집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렘 16:9]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흥겨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신랑 신부의 목소리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 시대에 이 곳에서 사라지게 하겠다.

이를 확장하면,

- 세상이 멸망할 것이니, 세상에 소망도 구원도 사라져서, 돈, 성공, 인정, 안정 모두 필요 없는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 돈이 있어도, 모든 가게가 망해서 쓸 곳이 없을 것이고,

- 성공을 해도, 그 성과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없을 것이며,

- 인정을 받아도, 인정해줄 사람들이 전부 죽어 없어질 것이고,

- 안정을 찾아도, 세상과 함께 결국 무너져내릴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는 구원이 없고, 세상은 결국 멸망하여 전부 사라질 것을 믿으며 사는 것이 참 구원을 믿는 사람의 삶이다.

 

세상이 전부 멸망할 것을 믿는데, 

- 예레미야처럼 굳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 우리처럼 돈, 성공, 인정, 안정이 필요하겠는가.

- 세상에 있는 것 중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 어차피 다 사라질 것이고, 어떤 것도 자신을 구원해줄 수 없는데, 왜 필요하겠는가.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져 자포자기하며 사는가?

-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을 포기하는가?

-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없는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구원을 이루시지 않고,

- 세상에 있는 것 없이도 구원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도 세상에 있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조건은 무엇인가?

역시 '관계'이다.

-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관계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관계는 구원의 조건임과 동시에 구원 그 자체이다.

-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고 사랑하는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자체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함께 하심'의 약속을 주신 것이다.

[렘 15:20] ・・・・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어서, 너를 도와주고, 너를 구원하여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 관계가 구원에 이르는 조건임과 동시에 구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 구원을 알고 믿는 사람은 결국 관계를 위해 살아가게 된다.

- 관계만이 영원토록 구원받도록 하는 길이며,

- 관계만이 유일하게 세상에서부터 종말 이후까지 소멸하지 않고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기 위해 살아가며,

- 천국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살아간다.

- 이 관점에서 전도가 의미 있는 것이고,

- 교회 공동체가 가치 있는 것이다.

-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며 관계 맺을 사람을 찾는 것이 전도이고,

-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랑하며 관계 맺을 사람과의 관계를 미리 맺는 것이 교회 공동체이다.

이렇게 관계가 세상의 멸망을 믿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그런 관점에서 직업도 새롭게 봐야 한다.

- 그동안 우리에게 직업은 구원의 수단이었다.

- 우리에게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주고,

-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도구였다.

- 직업은 육체적인 구원과 정신적인 구원을 모두 주었다.

그러나 이제 직업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 오히려 관계의 도구이다.

- 전도와 교회 공동체 모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돈을 구하는 도구이고,

- 전도 대상자를 만나는 창구이다.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언제나 관계보다 뒷전으로 밀린다는 뜻이다.

- 직업은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돈이 있을 때만 이용하는 수단이고,

- 더 이상 관계를 맺는데 돈이 필요 없어지면 바로 버리는 대상일 뿐이다.

- 또 직업이 관계에 방해가 되면 바로 버려지고,

- 관계를 충분하게 맺고 남는 시간에만 직업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직업을 관계의 수단 삼지 못하는가?

왜 직업을 마음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왜 직업에 이용당하기만 하는가?

- 직업에서 구원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 직업이 물질적, 정신적 인정과 안정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업 앞에서 언제나 갑이 아닌 을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직업은 우리 없어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가 되지만,

- 우리는 직업이 없으면 구원을 잃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 언제나 우리가 직업을 더 필요로 하기에, 우리는 직업 앞에서 작아지는 것이다.

직업이 우리를 구원해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태도를 본문이 뭐라고 말하냐?

- 우상 숭배이다.

[렘 16:11] ・・・・ ‘나 주의 말이다. 너희 조상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섬기며 경배하였다. 너희 조상이 나를 버리고 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는 직업을 구원자로 삼았다.

- 돈도 주고, 자아실현도 해주며, 사회적 지위도 주고, 안정감도 줄 것이라고 믿었다.

- 그래서 직장 동료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다.

- 직업이 우리의 전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업을 구원자로 삼는 것의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어지고,

- 우상인 직업에 의해 주입된 대로 고집스럽게 살도록 한다는 것이다.

[렘 16:12] 그런데 너희는 너희 조상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하였다. 너희는 각자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며, 내 명령을 따라 순종하지 않았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뭐냐?

- 우리가 바라는대로 '밤이나 낮이나' 우상 숭배하도록 하신다.

[렘 16:13]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가 알지 못하는 땅, 너희 조상도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거기에서, 낮이나 밤이나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나는 너희에게 다시는 긍휼을 베풀지 않을 것이다.’

이를 풀어 말하면,

- 직업에 완전히 붙잡혀서,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야근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 즉, 정글같이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 내던지셔서,

- 아무런 도움 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밤낮없이 하게 하신다.

- 그 안에서 성공하면, 그 위에 있는 사람과 또 싸우게 하시고,

- 그 안에서 실패해서 낙오하면, 수많은 짐승에 둘러싸여 뼈만 남기고 모두 물어 뜯기게 하신다.

이것이 직업에서 구원을 찾는 사람의 숙명이다.

 

반면 하나님께 구원을 구하는 사람은,

- 남 부럽지 않은 사회적 성취는 얻지 못할 것이다.

- 그들만큼 서슴없이 남을 죽이며 성공을 향해 내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 굳이 나를 지킬 필요도 없고, 나를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일 필요도 없는 안전한 세상에서,

- 사랑할 사람 찾아 다니는 삶이다.

물론 사랑할 사람 찾아 목숨 걸고 사랑하다 보면,

-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실망할 일이 생긴다.

-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보다 먼저 고난받으셔서, 우리의 마음에 공감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회복시켜주신다.

- 그렇게 확인된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새로운 용기를 얻고,

-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대상을 또 다시 찾아 나선다.

이것이 참 구원을 아는 사람의 삶이다.

 

결론 -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짐승처럼 죽고 죽이며 살다가, 세상과 함께 의미 없이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처럼 사랑하며 살다가, 하나님 안에서 천국 백성과 영원토록 사랑할 것인가?

- 어떤 인생이 더 쉽고, 가치 있고, 재밌겠는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한다.

-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 것이다.

- 그래서 세상에서 이룬 성과는 전부 필요 없게 될 것이다.

우리 부모 세대만 봐도 그렇다.

- 그 정도 나이만 되어도,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돈, 성공, 인정, 안정이 그만큼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 돈과 성공이 가치 있으려면, 그것을 자랑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 기력이 없어서, 자랑하려고 사람 만날 힘도 없다.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처럼 보이는가?

- 옆에 와서 사랑해줄 사람이다.

- 뒤치닥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 이미 흘러간 자신의 인생을 공감해주고 인정해주고 지지해줄 사람이다.

왜 그런 사람을 원하냐?

- 앞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미래가 없기 때문에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냐?

- 없다.

- 왜 없냐면, 평생을 돈과 성공만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 돈과 성공을 자신을 공감하고 인정해줄 사람과의 관계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은 없고 돈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돈은 숫자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미래 없는 인생의 과거를 공감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모 세대의 삶이다.

- 그리고 앞으로 있을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우리는 평생을 부모 세대 삶의 방식만 보고 자랐다.

- 돈과 성공을 관계보다 언제나 우선시하는 선택만 봤다.

- 그래서 관계를 우선시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 그래서 웬만한 노력으로는 부모 세대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다.

- 노후를 위해서, 그리고 사후를 위해서 말이다.

- 늙어서도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공감받고 지지받으며 죽기 위해서 말이다.

- 죽은 이후에도 영원토록 사랑하며 사랑받으며 살기 위해서 말이다.

 

큰 노력과 큰 결단이 필요하다.

-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노력을 했건, 어떤 손해를 감수했건, 그 이상의 보상이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투자하는 것은 제한된 인생이지만,

- 우리가 얻을 것은 무한한 영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