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29) 15:5-14 모든 사람이 다 저주하는 나를 왜 낳으셨습니까?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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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중심은 역시 예레미야의 탄식이다.
- 예레미야는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에게 온 세상이 시비와 싸움을 걸어오는 현실에 강한 불만을 제기한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정밀하게 분석하면, 불만의 대상은 넷이다.
- 첫째로, 세상이다.
-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 둘째로, 자기 자신이다.
-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아도 미움받을 요소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 셋째로, 자신을 그렇게 낳은 어머니이다.
- 어머니가 미움받을 수밖에 없도록 낳았기 때문이다.
- 넷째로, 마지막은 하나님이다.
- 세상, 자신, 어머니를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탄식을 이렇게 시작한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
[렘 15:10, NRSV] Woe is me, my mother, ・・・・
- 먼저 이런 신세에 처한 '자신'을 원망한다.
- 그런 다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머니'를 원망한다.
[렘 15:10] ・・・・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하지만 이런 원망의 마지막 단에는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
- 하나님이 어머니를 만드셨고,
- 하나님이 어머니가 나를 낳도록 하셨으며,
- 하나님이 어머니를 통해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 겉으로 보기에 예레미야는 세상, 자신,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 실제로 칼 끝은 정확하게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런 탄식을 하나님을 향해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왜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는 신세가 되었냐?
역시 하나님 때문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 빚을 지거나 준 일이 없고,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 이스라엘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신들을 저주하고 모독한 사람이다.
- 아무리 그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 말이 옳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예레미야가 더욱 미웠을 것이다.
- 만약 예레미야의 말이 설득력이 없어서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었다면, 개 짖는 소리로 치부하고 무시했을 것이다.
-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이 너무 맞아서 반박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공격한 것이다.
- 마치 '메세지'를 반박할 수 없을 때 '메신저'를 공격하는 정치꾼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처음에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 물론 처음에도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죄에 따른 심판을 예고했을 것이다.
- 하지만 그 심판을 예고하는 예레미야와 심판을 듣는 이스라엘은 갈등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정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단지 돌이키라는 메시지이고, 죄에서 벗어나면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레미야를 포함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멸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지키시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이 영원하듯 이스라엘도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하나님이 멸망하실 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멸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심판 예고를 말하는 예레미야도 편하게 말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도 편하게 심판 들을 수 있었다.
- 당장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냐면,
- 이스라엘 사람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 이스라엘의 멸망을 셀 수 없이 말한 예레미야도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며, 돌이킬 뜻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실 때, 당황해하며 하나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렘 14:21]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우리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 이는 예레미야가 멸망 심판에 대해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멸망 심판 예고가 단순히 회복 권유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상황은 달라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멸망 예고가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실제임을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 그러자 심판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태도가 바뀐다.
먼저 듣는 사람은 이스라엘 멸망 예고를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 방법은 다양하다.
-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라며 심판 메시지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사람,
-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혹은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야.'라며 심판의 주체를 부정하는 사람,
-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가 이상하니까 메시지도 잘못되었다고 메신저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었다.
- 어떻게든 예레미야의 문제를 드러내서 예레미야가 말한 멸망 예고 메시지를 부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 '너는 어렸을 때부터 싹수가 노랬어.', '너 율법 제대로 안 지켰자나.', '너는 출신 혈통이 이상해.', '너 예전에도 실수한 적 있잖아.' 등으로 예레미야를 공격한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 예레미야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고,
- 그래서 심판 예고를 쉽게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 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고,
- 그런데 그 죄가 너무 좋아서 멈추기 싫었기 때문에,
- 예레미야를 부정해서 예레미야 메시지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다.
- 전형적인 자위 행위이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똑같은 반응을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보였다.
-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전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박해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 처음에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에 이스라엘은 아멘으로 화답했을 것이다.
- 심판을 정말 믿어서가 아니라, 전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 마치 요즘 교회에서 그러듯 말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가 실제임이 드러난 순간부터 이스라엘은 돌변한다.
- 예레미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깨지고,
-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향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 멸망 심판을 부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게다가 심판을 예고하는 예레미야도 혼란에 빠진다.
-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레미야가 괴로워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저주 때문인 것 같다.
- 예레미야는 사람들과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싶은데,
- 멸망 예고 때문에 미움받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 특히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평생동안 사역했던 대상이기에 그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훨씬 복잡하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 이는 그가 이미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 그래서 예레미야는 예언자가 되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될 것을 기대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부흥을 바라는 사람이다.
- 그래서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길 기대했다.
- 그래야만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부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즉, 예레미야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부흥을 위한 예언자로 생각했지,
- 멸망을 위한 예언자로 생각하지 못했다.
- 비록 멸망 예언을 선포하는 중에도 말이다.
여기에서 혼란이 시작된다.
- 예레미야는 자신을 하나님의 대언자인 동시에, 이스라엘의 부흥사로 생각했는데,
- 예언 사역을 시작하고 일정 시기까지는 하나님의 대언자와 이스라엘의 부흥사 역할이 충돌하지 않고 일치했다.
-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에 있다고 생각해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나면, 두 역할이 어긋난다.
-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아마도 예레미야가 혼란을 느낀 첫 순간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 아, 하나님도 지금 이스라엘 때문에 많이 괴로우시구나.
- 그래서 저렇게 단호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말씀하시는구나.
- 내가 하나님을 좀 달래드려야지.
- 이스라엘 대신 용서를 구하기도 하고, 언약을 재확인시켜드려서 하나님을 진정시켜드리면, 하나님도 처음 생각, 즉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이라는 것을 인정하실 거야. 라고 말이다.
- 혼란스러운 상황은 일시적이라고 생각했다.
- 여전히 멸망 심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시는 기도도 하지 말라는 단호함을 보이셨다.
- 즉, 하나님의 뜻이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 그래서 하나님의 대언자와 이스라엘의 부흥사 역할이 어긋나게 되고,
- 그래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예레미야를 혼란에 빠뜨렸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 중에 하나라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근원이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민족이기에,
- 이 둘 중의 하나라도 포기하는 것은 결국 둘 다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와 이스라엘의 부흥사 역할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라고 생각했냐?
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오직 이스라엘의 부흥일 것이라고 착각했냐?
- 도대체 예레미야가 무엇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종속되듯 하나님도 이스라엘에 종속된다고 생각했다.
- 물론 이는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하나님도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종속된다.
- 이스라엘이 없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찬양할 대상이 없어지면,
-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고 잊혀지면,
- 결국 하나님도 사라진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한 가지 착각했던 것은,
- 하나님이 종속된 이스라엘을 지금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에만 한정한 것이다.
- 예레미야가 특별히 간과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이스라엘을 또 다시 만드실 수 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사라지면, 이스라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고,
- 그러면 결국 하나님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사라져도 부활시켜서 재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 그래서 예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 즉 이스라엘을 만드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 3: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 즉, 한마디로 예레미야는 '죽은 것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재창조 능력, 회복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몰랐다.
이를 풀어 말하면,
-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스라엘의 부흥이었다.
- 그 뜻은 멸망 심판을 선포하시는 중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흥도 이스라엘의 부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은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정체성을 잃은 이스라엘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 이스라엘은 고쳐서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 완전히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계획하신다.
- 멸망 후 재창조만이 이스라엘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멸망 이후의 회복을 이해하지 못했다.
- 오직 눈 앞의 멸망만을 생각했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면, 다시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결국 하나님의 멸망이라고 생각했다.
- 그래서 더욱 더 당당하게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포기하시자, 더욱 좌절하고 혼란스러워한 것이다.
- 사람들의 저주가 싫은 것은 둘째 문제이고,
- 예레미야의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무너져내렸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멸망인데, 그 결정을 하나님이 단호하게 내리셨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영원무궁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예레미야가 '하나님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신학이 부정되자, 예레미야는 큰 혼란에 빠졌다.
하나님이 자신을 멸망시키기로 하신 결정은 또 예수님을 떠올리게 한다.
- 예수님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다.
- 그러자 제자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 특히 베드로는 그런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하며 결정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막 8:31~33]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죽으신다.
여기서 베드로도 예레미야와 똑같은 상태이다.
- 자신을 멸망시키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예수님께 성질을 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이런 극단적인 감정을 드러내냐?
- 도대체 뭘 몰랐기 때문이냐?
- 죽음 이후의 부활을 몰랐기 때문이다.
- 죽음 이후에만 구원과 회복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 죽은 자도 회복, 부활, 재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11~12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보호하심을 약속하는 것이다.
[렘 15:11~12]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너를 강하게 해주고, 네가 복을 누리게 하겠다. 네 원수가 재앙을 당하여 궁지에 빠질 때에, 그가 너를 찾아와서 간청하게 하겠다.” (12) “누가 쇠 곧 북녘에서 오는 쇠와 놋쇠를 부술 수 있겠느냐?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끝까지 지켜줄 것이란 약속을 하신다.
- 특히 '북녘에서 오는 쇠', 즉 바벨론조차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으니,
- 바벨론에게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왜 이런 위로를 하실까?
- 예레미야는 현재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 첫째로, 삶의 토대인 '세상'을 잃었다.
-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저주하기 때문이다.
- 둘째로, '이스라엘'을 잃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이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 셋째로, '하나님'을 잃었다.
-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하나님도 멸망하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넷째로, '자기 자신'을 잃었다.
- 자신의 정체성의 근간인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전부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보호하심을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보호하심이 예레미야의 바람대로 이스라엘의 보호하심은 아니다.
-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 그러나 예레미야는 살아남고, 예레미야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일부가 살아남는다.
-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재창조되고,
- 재창조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계속된다.
물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 이후의 재창조에 대해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 역시 예수님의 부활 예고를 떠올리게 한다.
- 예수님은 죽지만 부활하실 것이고, 승천을 통해 성령이 내려오실 것이다.
- 그 성령은 제자들이 믿음을 지킬 것이고,
- 그렇게 재창조된 제자 공동체, 즉 교회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지속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도 보고 있는 것이다.
- 물론 예수님이 죽으실 때 제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고,
-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좌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예레미야가 본문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상 우리도 똑같이 혼란스러워한다.
우리에게도 멸망이 선포되었다.
- 예레미야서를 통해 셀 수도 없이,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도 처음에는 예레미야처럼 가볍게 여겼다.
- 단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외침이라고만 생각했다.
- 심판이 선포되었지만, 적어도 나는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물론 지금 이미 구원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심판은 반드시 올 것이고, 누구도 피할 수 없다.
- 구원받은 사람조차 심판받을 것이다.
- 심판을 통해 우리는 멸망할 것이다.
-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 구원받은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것이고,
-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불안, 불만, 원망, 한탄이 지속될 것이다.
또한 멸망이 단순히 죽음 이후에 있을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 멸망 심판을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 특히 부모님 세대에서 그렇다.
- 육체적 건강, 사회적 지위, 정서적 안정,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조금씩 잃어가는 모습을 본다.
- 그래서 불안, 불만, 원망, 한탄이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본다.
- 그런 감정이 조금만 건드려도 왈칵 쏟아져 내린다.
-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없어서 현재의 쾌락과 만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모습을 본다.
- 그런데 원하는 만큼 만족을 얻을 수 없어서 하염없이 불만이 가중되는 모습을 본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잃는 멸망 심판의 서막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심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인생의 어떤 것도 잃지 않고 영원토록 지킬 수 있다고 배웠다.
- 정확하게 이런 문장을 듣지 않았어도, 결국 우리가 배운 구원은 이것과 다르지 않다.
- 원하는 것을 갖고 영원토록 사는 것이 우리가 배운 영생이다.
- 이러한 구원과 영생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이유이다.
- 이것 때문에 예레미야처럼 심판을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이냐?
- 물론 부정직하고 혹은 무식한 목사들 때문이다.
- 그들은 성도를 현혹하기 위해 알고도 잘못 가르쳤고, 또한 무식해서 몰라서 잘못 가르쳤다.
- 하지만 잘못된 구원 메시지를 듣고도 의심하지 않은 우리도 문제이다.
- 왜 의심하지 않았냐면, 우리가 원했던 구원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 쌍방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잘못된 구원 메시지가 전파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도 결국 멸망할 것이다.
- 육체적 건강, 사회적 지위, 정서적 안정,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잃을 것이다.
- 그래서 평생을 투자해서 얻은 성과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비극을 경험할 것이다.
- 마치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비극을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적인 시점에 사람의 진가가 드러난다.
- 하나님의 멸망 심판을 정말로 믿었던 사람과 믿지 않았던 사람이 명확히 구분된다.
예레미야는 멸망 심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 그래서 혼란스러워했다.
- 자신의 평생을 투자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 마치 자기 자신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괴로워했다.
- 그 괴로움 때문에 세상, 부모, 자신,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냈다.
- 이 모습은 마치 우리 부모님 세대와 같다.
- 무너져가는 자신의 인생을 보며 원망을 쏟아내고,
- 잃어버린 인생을 보상받기 위해 더 욕심부리고 완악해지는 모습 말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멸망 심판을 제대로 아셨다.
-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 사랑했던 제자조차 결국 잃어버린 것을 아셨다.
- 그리고 아무런 명예도 없이 수치스럽고 처량하게 죽임당하실 것도 아셨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가르치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 왜냐하면 예수님의 목표는 심판에 의해 멸망할 '성과'가 아니라,
- 심판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될 '사랑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온 인생을 다해 세상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셨다.
-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든 것을 잃은 시점, 즉 죽기 전 마지막 호흡을 내쉬는 순간에도 후회가 아닌 '다 이루었다.'는 만족감을 가지실 수 있었다.
- 예수님은 마음껏 사랑하셨고, 그것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 그 사랑은 영원할 것이고, 그 사랑으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영원토록 믿는 성도와 사랑을 나눌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심판에도 불구하고 다 가진 자였다.
- 이것이 멸망 심판을 알고 살아간 인생의 최후이다.
결론 - 정말 심판을 믿는가?
정말로 지금 내가 이루고 있는 모든 성과가 전부 파괴될 것이라고 믿는가?
- 심판 이후 천국에 간다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을 하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가?
- 지금 내 인생이 아무런 소용 없이 전부 버려지리라는 것을 믿는가?
- 굳이 천국까지 가지 않고 부모님 세대의 모습만 봐도, 과거 인생의 성과를 차츰 잃어버리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가?
그 믿음으로 다시 내 인생을 돌아보자.
- 무엇을 볼 수 있겠는가?
-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멸망 심판으로 전부 타버린 잿더미만 보일 것이다.
그때 우리가 느낄 감정은 딱 하나이다.
- '무력감'이다.
-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아무 소용도 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 그러니 무슨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들어야 한다.
- 도대체 내가 뭘 위해 사는 거지?
-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살지 않고 죽는 것보다 나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 날 낳은 부모를 원망하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과거 인생이 철저히 부정당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 인생이 시작된다.
- 이렇게 과거 인생이 완전히 청산되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비로소 시작된다.
- 만약 과거 인생이 청산되지 않으면, 우리는 도박사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 이미 투자해 놓은 과거 인생이 아까워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지 못하게 된다.
- 백번 천번 시도해서 실패했으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해야하는데,
- 어리석은 도박사 같이, 천 번 실패했으니 이제는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과거가 완전히 부정되면, 그래서 이전의 실패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 그때에야 비로소 가려졌던 눈이 열린다.
- 과거에 왜 실패했는지, 과거의 성과가 왜 결국 파괴될 수밖에 없는지 그제야 알게 된다.
- 그리고 어떤 일이 영원토록 남을 일인지 알게 된다.
그래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정함으로 과거 인생이 철저히 부정되었다.
-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세월조차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마음대로 이용하기 위한 투자였음이 밝혀졌다.
-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작은 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과거 인생 전체를 하나님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탐욕으로 낙인찍었다.
- 그로 인해 베드로는 완전히 멸망당한다.
- 그러나 과거 인생의 어두운 본질을 마주한 이후에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
- 그리고 교회를 처음으로 세우는 반석(베드로)가 된다.
바울도 똑같다.
- 바울이 평생을 헌신했던 신앙이 하나님께 영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박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그렇게 바울의 과거 인생 전체를 부정하고 멸망시켰다.
- 그러나 그 이후에 비로소 바울은 바른 신앙을 알게 된다.
- 그리고 최초의 이방인 전도자로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멸망 심판이 일어날 것이다.
- 과거의 모든 선택과 인생이 나의 행복과 성장과 나됨을 방해하기만 했다는 것을.
-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나를 나됨으로부터, 인간됨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도록 했다는 것을.
- 그래서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과거 인생이 전부 오물이라는 것을.
[빌 3:7~9]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
우리에게도 반드시 멸망 심판이 일어날 것이다.
- 아니, 일어나야 한다.
- 그래서 우리 인생 전체가 부정되어야 한다 .
- 내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인생의 성과가 부끄러워져야 한다.
- 나를 영광스럽게 만든 과거 인생이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 참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게 된다.
- 그래야 사랑의 관계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사랑만이 영원한지 알게 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비로소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인생에서 벗어나 사랑하게 되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이다.
- 우리 모두가 구원받아 영생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