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27) 14:1-16 어찌하여 하나님은 구해 줄 힘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안승준 2022. 4. 30. 09:57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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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장은 하나님의 심정을 초점에 두었다.

- 특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심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

- 혹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심판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죄를 심판하는 일은 하나님을 만족스럽게 할 것 같지만,

- 실상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 하나님은 해산의 고통, 성폭행의 고통처럼 고통스러우셨다.

-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고통당하는 것을 봐야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하나님은 겪으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통을 감수하셨다.

- 그래야만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치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인류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11~13장은 그 사랑을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통해 드러냈다.

 

반면에 14~16장의 주인공은 예레미야이다.

- 예레미야의 역할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연결해주는 중보자(중재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무슨 일을 하냐면,

-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 그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정죄', '심판 선언,' '심판 결과로서 멸망'이었다.

- 그다음 그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한다.

- 그러면 이스라엘은 반응하는데,

- 정죄와 심판을 거부, 반박, 무시하거나, 반대로 수용, 인정, 회개한다.

- 그 반응을 다시 하나님께 전한다.

- 그러면 하나님께서 또 말씀을 주시고 또 전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중재'하였다.

여기서 예레미야가 앵무새처럼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 논리적, 이성적, 합리적, 정서적으로 반응한다.

- 즉, 하나님께 말씀을 받을 때, 그냥 듣고 기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 듣고, 이해하여, 하나님께 공감하고, 만약 공감되지 않는 것은 질문하고 반박하여,

- 하나님과 타협, 조정한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체화한다.

- 그래서 하나님과 완전히 일체화된 상태로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 마치 하나님이 직접 나서신 것처럼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과 상호 교류했을 것이다.

- 질문을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논쟁했으며, 

-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하는 데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 설득하는 데 성공했을 때는 회개했을 것이고, 실패했을 때는 비난받으며 박해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화하는 부분이 13절이다.

- 이스라엘을 전멸시키시겠다는 하나님께 예레미야는 반론을 제기한다.

- 전멸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구원과 평화를 달라고 에둘러서 요청한다.

[렘 14:11~13]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전멸시켜 버리겠다.” (13)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그렇지만 주 하나님, 저 예언자들이 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근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화를 주신다 합니다.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듣고 암기하지 않고,

- 하나님 말씀이 충분히 납득될 때까지 하나님과 논쟁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도 일체화된다.

- 하나님의 멸망 선포를 듣고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에 공감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렘 14:7~9]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 (9) ・・・・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 특히 '우리'라는 주어를 통해 예레미야가 이스라엘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 언뜻 생각하기에, 예레미야는 선지자이고 신앙의 정수에 오른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더 공감하기 쉬울 것 같지만, 애초에 사람이고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이스라엘에 공감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셨고, 

-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원인, 과정, 결론까지 다 알고 있으며,

- 그런 하나님께 완전히 감정 이입을 한 상태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멸망 심판을 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결정에 수긍하지 못하고,

- 예레미야는 멸망을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에 감정 이입하여,

- 하나님이 결정을 바꾸시도록 감정적으로 선처를 구하고, 이성적으로 변론하고 있다.

한마디로, 예레미야는 완전히 반대 입장을 가져, 첨예한 갈등으로, 관계가 단절된 두 대상을 동시에 공감하고 있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동시에 공감하여, 하나님 입장에서 이스라엘을 설득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입장에서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비난받고 있다는 점이다.

- 예레미야의 마음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두를 사랑하여 모두를 공감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 하나님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입장만 대변하는 반역자로 보일 것이고,

- 이스라엘 입장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입장만 대변하는 반역자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 실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두 너무 사랑해서 둘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뿐인데 말이다.

이렇게 양쪽 모두에게 욕 먹는 것은 중보자 혹은 중재자가 처한 비극적인 숙명이다.

 

참고로, 내가 '중보자'와 '중재자'를 함께 쓰고 있는데,

- 그 이유는 '중보자'가 주는 잘못된 어감 때문이다.

- 우리는 '중보'를 하나님께 사람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중보 기도'라고 부른다.

하지만 '중보'의 실제 의미는 '중재'이다.

- 즉, 가운데에서 양쪽의 입장을 중재하고 조정하여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것이다.

- 그 과정에는 당연히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 똑같은 비중으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 설득하여 변화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 그런데 우리는 '중보' 혹은 '중보 기도'라고 하면 하나님께 기도해주는 것으로만 오해하는데,

- 실상은 사람에게 가르치고 설득하여 변화시키는 것도 역시 중보이다.

그래서 중보자보다 중재자가 원래 의미를 잘 전달하기에, 중재자로 용어를 통일하겠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비난받아 고통스러워한다.

[렘 15:10] 아! 어머니 원통합니다.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세상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을 진 일도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저주합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일시되어, 이스라엘을 정죄하며 멸망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 그러니 이스라엘 입장에서 예레미야가 얼마나 밉겠는가.

-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한탄한다.

[렘 15: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

동시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조차 버려질 위기에 있다.

- 이유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용서와 구원을 구했기 때문이다.

- 그에 대해 하나님은 두 번이나 기도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렘 14:11]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렘 15:1]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러한 과정에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편에 너무 치우쳤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다.

[렘 15:19]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

- 그래서 대변자, 즉 선지자의 지위도 위태로운 상태까지 갔다.

- 이스라엘을 중재하여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선지자가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끌려갔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상황이 여기까지 왔을까?

왜 하나님은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까?

-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용서를 구하는 예레미야를 버리기까지 하시면서 왜 반드시 이스라엘을 심판하셔야만 하실까?

하나님께 용서의 능력이 없어서일까?

[렘 14:8~9]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9)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 심판만 선포하고 위기에서 구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사람들은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 같다고 비난했다.

아니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아서 심판하시는 것일까?

[렘 14:19] 주님은 유다를 완전히 내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진정으로 시온을 미워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낫지도 못하게 이렇게 심하게 치셨습니까? 

-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려졌다고 조롱했다.

- 그래서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

 

이렇게 본문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 하나님은 단호하게 멸망 심판을 결정하셨고, 

-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예레미야가 간구한다고 해도 결정을 번복하실 마음이 전혀 없으시다.

-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를 당시 사람들과 예레미야조차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따라서 본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납득시키는 것에 있다.

- 사람들은 하나님이 무능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구원하지 않는다고 오해했다.

- 이스라엘은 회개하면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있다고 생각했다.

-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납득하지 못했다.

- 하나님을 무능하다고 의심할 만큼 말이다.

- 그런 의심을 선지자 예레미야까지 가지고 있을 만큼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납득하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통해, 

- 당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고발하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심판의 의미를 이해하고,

-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본문도 하나님을 납득하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강조한다.

본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① 1~6절: 심각한 가뭄을 통한 이스라엘 멸망 선포

② 7~9절: 예레미야의 반론 -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마땅히 구원하셔야 한다.

③ 10~16절: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반론과 재반론

- a(10절): 하나님의 반론 1 - 이스라엘의 멸망 심판 재확인

- b(11~12절): 하나님의 반론 2 -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요청 금지

- c(13절): 예레미야의 재반론 - 예언자의 평화 예언 선포 언급

- b'(14절): 하나님의 재반론 1 - 평화 선포하는 예언자는 거짓 예언자

- a'(15~16절): 하나님의 재반론 2 - 거짓 예언자와 그 예언을 들은 백성의 멸망 심판 재확인

 

정리하면, 전체 틀은 하나님과 예레미야가 논쟁하는 장면이다.

- 예레미야가 격식을 갖추고 점잖게 말해서 헷갈리지만,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에 반기를 들고 있다.

- 7~9절에서는 하나님을 '나그네', '행인',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힘 잃은 용사'라며,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을 은근히 비난한다.

- 또한 13절에서도 다른 예언자의 평화 선포 예언을 언급하며, 이스라엘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시는 하나님을 비판한다.

[렘 14:13]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그렇지만 주 하나님, 저 예언자들이 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근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화를 주신다’ 합니다.

이렇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맹공을 퍼붓는다.

 

하지만 하나님도 만만치 않으시다.

- 계속해서 이스라엘 편을 들며 구원을 요구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렘 14:11]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 이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뿐만 아니라,

- 심판을 저지하려는 예레미야를 은밀하게 꾸짖는 것이다.

- 그럼에도 계속해서 평화를 구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평화를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멸망 심판을 선포하신다.

[렘 14:15] 주님께서 그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였다. ‘이 땅에는 전쟁과 기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한 예언자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 이는 불특정한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평화를 요구하면, 거짓 예언자로 간주할 것이고,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엄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레미야는 치열하게 논박하며,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대립은 단순히 예레미야만의 문제가 아니다.

-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고,

-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목소리이다.

- 구원의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냐는 것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왜 하나님은 허수아비처럼 가만히 계셨냐는 것이다.

- 구원의 능력을 가지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하나님은 믿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이다.

- 이는 기도로 위장한 하나님에 대한 '협박'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금지한 것이다.

- 그것은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걱정해서가 아니다.

- 우리를 걱정해서이다.

- 우리는 구원받으려고 하나님 믿는데,

-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통해서라도 해결하려고 믿는데,

- 그것을 위해 돈도 쓰고, 시간도 쓰고, 열정을 다하고 있는데,

- 문제 해결 아니라면, 돈, 시간, 열정 쓸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 내가 그동안 투자한 돈, 시간, 열정이 전부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말이다.

- 그래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스라엘처럼 해결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말이다.

- 그래서 그 문제 때문에 내 인생 전체가 소멸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이다.

 

그런 두려움에 빠진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 여전히 인생의 문제에 매여 나와의 관계를 저버린 백성아!

- 여전히 나를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램프 지니로 생각하는 백성아!

- 여전히 나에게 인생의 평화만을 구하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백성아!

- 그런 가르침을 준 목사와 그런 가르침을 따른 백성 모두 심판받아 멸망할 것이다!

- 전쟁과 기근으로 죽고, 아무 데나 버려져 묻히지도 못하며, 너희들의 자녀까지도 그렇게 될 것이다!

[렘 14:15~16] 주님께서 그 예언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였다. ‘이 땅에는 전쟁과 기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말한 예언자들은 전쟁과 기근으로 죽을 것이다. (16) 그 예언을 들은 이 백성도, 기근과 전쟁에 시달리다가 죽어서, 예루살렘 거리에 내던져질 것이며, 그들을 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들과 아들딸들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은 내가 그들 위에 재앙을 퍼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고가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결론 - 우리는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이다.

- 우리는 회복할 수 없는 죄인이고,

- 우리의 죄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하며,

-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는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는데,

- 성경의 구원을 심판받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구원은 심판받은 후 그 상태가 지속되지 않고 회복되는 것이다.

- 반면에 구원받지 못한 이들은 심판받은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된다.

그렇다면 심판은 뭐냐?

- 단순하게 말해서,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 육체적인 생명, 정서적인 안정, 물질적인 재산, 사회적인 지위 등 모든 것이다.

- 그래서 지옥에 가면 죽음, 불안정, 궁핍, 박탈감, 억울함, 두려움, 분노 등에 짓눌린 상태가 지속된다.

 

그러면 반대로 구원은 뭐냐?

- 먼저 심판을 통해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 그런데 그때 모든 것을 빼앗긴 신세를 한탄, 후회, 원망, 불평하며 하나님 탓을 하면, 그 상태가 지속된다.

- 그러나 물론 모든 것을 잃어 속상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 바라보며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회복된다.

- 욥이 그랬던 것처럼 잃었던 것을 되찾고 그 이상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중요한데,

- 회복된 사람은 자신의 소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유권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

- 왜냐하면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도 하나님만으로 이미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 그런 상태에서는 소유를 돌려받았다고 해서 그것에 시선이 가지 않는다.

- 오직 시선은 하나님께만 둔다.

이 상태가 우리가 가게 될 길이다.

- 심판을 통해 모든 것을 잃지만, 모든 것을 잃음으로 하나님을 얻은 상태,

- 그래서 회복되어 모든 것을 얻어도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상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 우리는 모든 소유를 반드시 잃어야만 한다.

-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가 있기 때문이다.

-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판이 임하면, 

- 그래서 모든 소유를 잃으면,

- 그래서 우리가 시선을 둘 대상이 아무것도 없어지면,

- 그제야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둘 수 있는 조건이 생긴다.

그러니까 심판은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둘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는 유일한 기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심판을 예고하시는 것이다.

- 우리에게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당장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는, 

- 우리를 아끼고 사랑해서 심판을 미뤄주시는 것이 아니라,

- 심판이 임해서 모든 것을 잃어도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둘 준비가 아직 안되었기 때문이다.

-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잃으면, 한탄, 후회, 원망, 불평을 영원토록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우리를 조금 더 준비시켜주시기 위해 심판을 미루시는 것이다.

- 물론 언제까지 미뤄주시지는 않는다.

- 지금도 그 시기는 다가오고 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이렇다.

- 하나님은 당면한 심판을 조금이라도 미뤄서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신다.

- 그래서 우리가 심판받을 때,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시선을 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시려고 말이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고군분투하고 계시다.

- 이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 해결, 위기 탈출,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 이 기도를 한마디로 하면, 소유를 지켜달라는 것과 소유를 늘려달라는 것이다.

-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소유에 있다.

- 이스라엘과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고 있다.

- 현실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 뭐가 있겠는가?

- 멸망을 예고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는가?

- 절대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지, 구원이 아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를 잃음이지, 얻음이 아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멸망이지, 회복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심각한 문제에 빠진 것이다.

- 문제 해결이 하나님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 오히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 함께 기도하자.

- 심판, 잃음, 멸망을 달라고.

- 지금은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지만,

-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모든 소유를 하나님이 전부 제거하셔서,

-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해달라고 말이다.

-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니, 

-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셔서,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모든 소유를 없애달라고 말이다.

- 그래서 우리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해달라고 말이다.

-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회복을 구하는 어리석음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