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25) 13:1-17 띠처럼 썩어 문드러지는 하나님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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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① 1~7절: 행위 예언 선포 - 썩어서 쓸모없게 된 허리 띠
② 8~11절: 행위 예언 해석 - 띠처럼 썩을 이스라엘과 하나님
③ 12~14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 1 - 분노
④ 15~17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 2 - 슬픔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 따라 허리 띠 행위 예언을 하고,
- 하나님이 행위 예언을 해석하신 다음에,
-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 느끼실 하나님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다.
따라서 본문 해석의 중심은 행위 예언 해석이다.
- 그 해석을 통해 뒤에 나오는 하나님의 분노와 슬픔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분노와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행위 예언이 사용된 것이다.
계속 말했다시피, 11-13장에서 본문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심판이 아니다.
- 심판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다.
이번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 행위 예언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선을 끌지만, 본문의 중심은 아니다.
- 허리 띠가 썩듯 이스라엘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은 이전 내용의 반복일 뿐이다.
- 심판 그 자체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에 있다.
- 이점을 염두에 두면서 행위 예언을 새롭게 보자.
행위 예언 내용을 간략하게 보면,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띠를 사서 허리에 찬다.
- 처음에 띠는 물에 젖은 적이 없는 깨끗한 띠였다.
-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띠를 강가 바위틈에 여러 날 동안 숨겨둔다.
- 아마 그동안 띠는 물에 여러 번 적셔졌을 것이다.
- 그 후에 다시 가서 찾으니, 물에 젖은 띠는 썩어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 처음에 띠는 물에 젖지 않아 깨끗했다.
[렘 13:1]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베로 만든 띠를 사서 너의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하지만 나중에 찾은 띠는 썩어서 쓸모없게 되었다.
[렘 13:7] 그래서 내가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서, 띠를 숨겨 둔 곳을 파고, 거기에서 그 띠를 꺼내 보니, 그 띠는 썩어서 전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행위 예언 해석의 열쇠는 '띠'가 상징하는 대상을 아는 것이다.
- 처음에는 깨끗했다가 나중에는 쓸모 없어질 만큼 썩은 것이 무엇일까?
- 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예언의 해석이 결정된다.
답은 당연히 이스라엘이다.
[렘 13:9~10]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 (10) 이 악한 백성은 나의 말 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고, 다른 신들을 쫓아가서 그것들을 섬기며 경배하므로, 이제 이 백성은 전혀 쓸모가 없는 이 띠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썩어서 쓸모없게 만들겠다는 심판을 선포하신다.
- 이유는 교만, 하나님 거부, 고집, 우상 숭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정당한지는 이미 많이 말했다.
- 이스라엘은 경제, 정치, 외교에서 셀 수 없이 어리석은 선택을 했고,
- 그로 인해 자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 경제적으로는 환금 작물을 지나치게 많이 경작하여 물가가 너무 올랐고,
- 정치적으로는 물가 상승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사회가 분열되었으며,
- 외교적으로는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했다.
그런데 이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근원적인 동기는 교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 하나님 없이 자립하겠다는 교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만든다.
- 그래서 하나님 대신에 이스라엘을 지켜줄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 그 대상은 주변 강대국으로, 이집트와 바벨론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조공을 바치는데,
- 조공물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가치 대비 부피가 작아야 한다.
- 그래서 조공물은 보통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식용 작물인 밀이나 보리 밭을 없애고, 환금 작물인 포도와 올리브 밭을 늘린다.
- 이는 결국 식용 작물의 공급이 줄어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 그 피해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쏠린다.
- 결국 사회의 빈부격차는 커지고, 사회 분열은 심화되어,
- 나라 전체의 군사력과 자립력이 떨어진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은 서서히 자멸해간다.
- 그렇게 이미 자립력이 떨어져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 바벨론에 침략당하자, 바로 멸망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과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첫째로, 가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유는 바벨론 침략이다.
- 둘째로, 하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미 내적으로 자멸해 있었다.
- 셋째로, 그러나 이스라엘을 자멸하게 만든 근원적 동기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멸망 원인은 대등 관계가 아니라 종속 관계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 즉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 나머지 두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부-작용이다.
- 관계 단절 때문에 생긴 필연적 결과이다.
-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은 단 하나, 즉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이스라엘이 멸망 이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한다고 해보자.
- 문제의 원인을 바벨론 침략으로 가정하여, 군사력을 강화한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 아니면 문제의 원인을 사회 분열로 가정하여, 사회 통합을 위해 빈부격차를 해소하면 될까?
- 문제의 원인을 내부 혹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
- 군사력 강화와 사회 통합이 된다고 문제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 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군사력이 강화되고 사회가 통합되었다고 해도 새로운 문제가 나왔을 것이며,
-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한 근원적 두려움이 있는 한, 절대로 사회 통합과 군사력 강화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만이 유일한 답이다.
-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만 두려움이 없어지고,
- 그래야 외세를 의지하지 않을 수 있으며,
- 그래야 조공에 필요한 환금 작물을 지나치게 생산할 필요가 없어지고,
- 그래야 식용 작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하여 빈부격차가 줄어들며,
- 그래야 빈부격차 해소로 인한 사회 통합이 가능하고,
- 그래야 통합된 백성이 힘을 모아 군사력을 강화하며,
- 그래야 외세가 침략했을 때도 적절하게 대응하여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순환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일어난다.
- 반대로 말해서, 아무리 내적, 외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여전히 근원적 두려움이 있으면, 절대로 이스라엘은 유지될 수 없다.
이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 두려움은 의지할 대상을 찾도록 만들고,
- 두려움을 해결하고 안정과 인정을 줄 대상으로 돈, 명예, 직장 등을 삼는다.
- 돈, 명예, 직장의 보호를 받기 위해, 조공을 바치듯 그것에 지나치게 헌신하는데,
- 그래서 돈, 명예, 직장에 인생 전체를 내맡긴다.
- 돈, 명예, 직장이 내 인생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돈, 명예, 직장에 인생 전체를 소모하느라, 정말 인생을 사용해야 할 곳에 사용하지 못한다.
- 대표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이다.
- 그 결과 사랑해야 할 사람을 필요한 만큼 사랑하지 못해서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 또한 자기 자신도 사랑하여 돌보고 성장시켜야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 모든 힘을 돈, 명예, 직장, 인정, 안정에 쏟기 때문이다.
- 자기도 모르게, 모든 힘을 근원적 두려움을 해소하는데 쏟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계가 멀어진다.
-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삶의 이유를 잃고, 인생을 비관하며,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 젊을 때는 정신없이 달리느라 잘 모르지만, 나이가 들면 삶의 비극은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면서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 원인이 돈, 명예, 직장이 없기 때문이라며 신세를 한탄한다.
- 그런 것이 있었다면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며 말이다.
- 마치 이스라엘이 멸망 원인을 바벨론 때문이라고 말하며,
- 바벨론만 없었어도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쓸모없이 한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바벨론과 상관없이, 필연적이었다.
- 바벨론이 공격하기 전에 이미 자멸 상태였다.
-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멸망하는 것 역시, 돈, 명예, 직장 때문이 아니다.
- 정작 본인은 돈, 명예, 직장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 그것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외된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어도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 추상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렇게 느낀다.
-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이 성공한 사람조차 자살하는 것이다.
- 그것이 사람을 두려움에서 건져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한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한다.
- 돈이 많아지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가 좋아지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 자기 정체성을 찾고 나답게 살면 나아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 돈이 많아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며, 자기 정체성을 찾아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 그래도 근원적 두려움은 여전히 있고,
- 그 두려움이 만드는 새로운 원인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소연할 것이다.
게다가 두려움이 있으면 절대로 돈도, 사랑하는 사람도, 자기 정체성도 얻을 수 없다.
- 마치 이스라엘이 두려움 때문에 경제, 정치, 외교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여전히 돈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짧게 설명하면,
- 물에 빠져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
- 자기를 구하러 오는 사람조차 생존 수단으로 삼는다.
- 그래서 숨 한 번 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조차 물 속으로 내리누른다.
- 그 사람이 숨을 쉬는지 쉬지 않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 자신의 호흡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 자신 안에 고립된다.
이렇게 두려움은 사람을 자기 안에 완전히 가둬버린다.
- 그만큼 두려움은 강력하여,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방해한다.
- 이스라엘이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리고 어리석은 선택이 반복되어 결국 멸망했던 것처럼 말이다.
- 이스라엘이 원래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다.
-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다.
- 그렇게 개인도 어리석어진다.
그런데 이 두려움이 왜 생기냐?
표면적인 이유는 많다.
- 돈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권력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등이다.
그러나 근원적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완전하고 영원한 보호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많은 보호 장치를 가졌어도, 하나님만큼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재벌도, 슈퍼스타도, 대통령도, 국회 의원도 자살하는 것이다.
-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완전한 보호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다.
- 그래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 그래야 굳이 돈, 명예, 직장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며,
- 그래야 자기 생존 본능에 매몰되지 않고,
- 나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
- 삶의 이유를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처럼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판받는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띠가 썩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 먼저, 썩게 만드는 주체, 즉 '강물'은 하나님이다.
[렘 13:9]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
- 그리고 썩게 된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띠가 썩는다는 것은 하나님(강물)께서 이스라엘(띠)를 쓸모없도록 멸망시키신다는 뜻이다.
하지만 본문의 행위 예언에서 '띠'가 상징하는 대상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하나님이다.
[렘 13:11] 띠가 사람의 허리에 동여지듯이, 내가 이스라엘의 온 백성과 유다의 온 백성을 나에게 단단히 동여매어서, 그들이 내 백성이 되게 하고, 내 이름을 빛내게 하고, 나를 찬양하게 하고, 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 하나님은 자신을 띠에 비유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단단히 묶었다고 말씀하신다.
-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깊이 맺도록 하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띠로 묶였던 관계는 어떻게 되었냐?
- 썩어버렸다.
-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는 끊어졌다.
그렇다면 띠를 썩게 만든 주체인 '강물'은 무엇인가?
- 바로 이스라엘이다.
[렘 13:11] ・・・・ 그들이 내 백성이 되게 하고, 내 이름을 빛내게 하고, 나를 찬양하게 하고, 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다. 나 주의 말이다.
-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여 관계의 띠를 끊어버렸다.
따라서 띠가 썩는다는 것은 이스라엘(강물)이 하나님과의 관계(띠)를 거부하여 끊었다는 뜻이다.
이를 정리하면, 썩은 띠 행위 예언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 첫째로, 하나님이(주체) 교만한 이스라엘을(대상) 썩어 없어지게 한 것이다.
- 둘째로, 이스라엘이(주체) 하나님을(대상) 거부하여 썩게 만든 것이다.
- 즉, 썩음이라는 행위의 주체와 대상이 뒤바뀐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한다.
그렇다면 남은 물음은 하나이다.
- 도대체 왜 이렇게 복잡하게 메시지를 전하냐?
- 왜 두 가지 메시지를 각각 전하지 않고, 하나로 엮어서 전하냐?
- 두 메시지가 하나로 엮임으로 재창조되는 새로운 메시지는 무엇이냐?
이 물음에 답할 때, 행위 예언의 진정한 뜻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하나님의 복잡한 심정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떠난 이스라엘에 대해 분노하신다.
- 그래서 강물 가의 띠가 썩어버리듯, 이스라엘을 썩어 없어지도록 하신다.
- 하나님은 오랫동안 참으신 분노를 폭발하시며,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것이 행위 예언이 첫 번째로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정을 여기까지만 해석하면 문제가 생긴다.
- 이스라엘의 죄를 엄격하게 심판하시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정의의 신',
- 즉,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 정의가 지켜지지 않을 때 불같이 분노하며,
- 정의를 훼손한 대상에게 가차 없이 심판만을 쏟아놓는 분으로 오해하게 된다.
- 하나님을 전제적 군주, 제왕적 통치자,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뭐든 부숴버리는 폭군으로 오해할 수 있다.
- 정의로운 하나님이 부각되어, 사랑의 하나님은 퇴색된다.
- 이전에 말했듯이, 정의롭기만 한 하나님은 하나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위 예언의 두 번째 메시지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단지 정의를 위해 원칙만을 지키는 매정한 분이 아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셔서 셀 수 없이 손을 내미셨지만,
- 이스라엘은 번번이 하나님을 거부했고,
- 그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기다리셨다.
- 하지만 이스라엘의 거부는 더욱더 심해졌고,
-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 강가의 띠처럼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썩어 문드러진 하나님의 마음에는,
- 마음이 썩어 문드러져 애간장이 다 녹을 때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애절함이 담겨 있다.
- 이를 통해 하나님이 제왕적 통치자가 아니라,
-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구걸하다가 처량하게 버림받은 슬픈 모습이 부각된다.
이렇게 하나님을 '분노한 심판자'의 모습과 '슬픈 사랑 구걸자'의 모습으로 겹쳐서 표현할 때,
- 무자비한 심판과 멸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애처로운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 그렇게 하나님의 애처로운 사랑을 느낄 때만 하나님의 간절한 구애가 스토킹과 같은 폭력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뜻한 애정으로 느껴진다.
- 그럴 때 신앙 생활이 의무감으로 인한 부담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 될 수 있다.
이 복잡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행위 예언은 두 가지 메시지를 엮어서 전한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같은 심정을 가지고 계신다.
- 우리를 바라보실 때, 너무 사랑해서 어떻게든 함께 하고 싶지만,
-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우리를 기다리다 지쳐서,
- 띠가 썩듯, 썩어 문드러진 심정으로 우리에게 호소하고 계시다.
우리를 엄격하게 꾸짖으시며 도끼눈으로 매섭게 째려보시는 제왕적인 모습이 아니라,
- 잔뜩 웅크려진 어깨로, 고개를 푹 숙이신 채, 퉁퉁 부은 눈으로 말씀하신다.
- 제발 돌아와 달라고,
-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널 마음에서 지울 수 없으며,
- 나에게는 네가 전부이고, 너밖에 없다며,
- 죽어도 널 보낼 수 없다고 말이다.
- 너 없는 날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말이다.
- 삼류 발라드 가사 같은 마음으로 울며 호소하신다.
하나님을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표현하는 것이 낯설게 들리지만, 전적으로 성경적이다.
- 애절하다 못해 구차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이다.
- 예수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구질구질함의 연속이었다.
-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부터 발가벗겨진 채로 십자가에 처량하게 죽으신 것까지 모두 구차하게 사랑을 구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 하나님이 그렇게 구차한 처지가 되도록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 앞에서 쿨하거나 결코 점잖지 않으시다.
- 온몸으로 사랑을 발산하신다.
- 다윗이 흥에 겨워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하체가 드러나는 수치까지 감수하듯,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결코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연연하지 않으신다.
- 창조주라는 지위를 버리시고 인간이 되셨으며,
- 발가벗겨져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까지 감수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 그래서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감미로운 사랑 고백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 12-14절에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스라엘을 멸망까지 이르도록 분노하시지만,
[렘 13:14] 그들이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고,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도 서로 부딪쳐서 깨지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으며, 동정도 하지 않으며, 사정없이 멸망시킬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 15-17절에서는 하나님을 거부하여 결국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이 안쓰러워 통곡하신다.
[렘 13:17]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의 교만 때문에 내 심령은 숨어서 울고, 끝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다. 주님의 양 떼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므로, 내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를 것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포도주를 사용했다.
- 성경에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
[렘 25:15] ・・・・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라. 내가 너를 뭇 민족에게 보낼 터이니, 그들 모두에게 그 잔을 마시게 하여라.
[계 16:19] ・・・・ 하나님께서 그 큰 도시 바빌론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독한 포도주의 잔을 그 도시에 내리시니,
따라서 '항아리에 포도주가 가득 찬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찼다는 것을 의미한다.
[렘 13:12]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항아리마다 포도주로 가득 찰 것이다!’ 하면 그들이 너에게 묻기를 ‘항아리에 포도주가 담긴다는 것을 우리가 어찌 모르겠느냐?’ 할 것이다.
- 이 진노의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슬픔은 회개를 촉구한다.
[렘 13:16] 너희는 주님께서 날을 어두워지게 하시기 전에, 너희가 어두운 산 속에서 실족하기 전에, 주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 때에는 너희가 빛을 고대해도, 주님은 빛을 어둠과 흑암으로 바꾸어 놓으실 것이다.
- 아직 '날이 어두워지기 전', '실족하기 전'이기에, 이스라엘에게 아직 기회가 있음을 강조한다.
-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계시기에, 기회가 있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때문에 더욱 슬퍼하신다.
결론 -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참혹하다.
- 사랑은 기쁨이고 행복이어야 하는데, 왜 사랑의 하나님은 분노와 슬픔만을 오가실까?
- 왜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실까?
- 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가장 처참한 순간인 십자가 죽음에서 확증될까?
- 도대체 왜 하나님의 사랑은 불행뿐일까?
그렇다면 참혹하게 사랑하는 모습이 오직 하나님께만 해당하는 것일까?
-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해서 이런 유별난 모습을 갖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 사랑 자체가 구질구질하다.
- 사랑하면 반드시 구질구질해진다.
- 구질구질하지 않고 쿨하고 점잖은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 하나님이 그러셨고, 우리도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최대한 짧게 생각해보면,
- 사랑은 대상을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런데 대상이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소유, 장악, 지배,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 이는 반짝이는 보석이 있으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고 온전히 내 것으로 삼고 싶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욕구가 있다.
- 사랑의 대상이 그 자체로 너무 귀하기 때문에, 절대로 훼손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마음껏 자유롭게 발산하기를 바라는 욕구이다.
- 그래서 보석을 지문 하나 없도록 깨끗하게 닦아서, 먼지가 묻지 않게 보관한다.
이것을 사람에 대입하면,
- 사람을 정말 사랑하면, 그 사람을 소유, 장악, 지배,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품는 동시에,
- 그 사람이 나에게조차 영향을 받아 오염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대표적인 예가 육아이다.
- 부모는 자녀를 너무 사랑해서, 자녀가 부모의 말을 잘 듣기를 바라는 동시에,
- 부모의 잘못된 영향 받지 않고, 자녀 고유의 매력을 마음껏 발산하며 살기를 바란다.
-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말을 안 들을 때도 속상하지만,
- 동시에 부모는 자녀가 너무 말을 잘 들어도 속상하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 대상을 지배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지배하지 않기를 원한다.
- 둘 다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갖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면 애달파진다.
- 대상을 너무 갖고 싶지만, 가지면 안 되기 때문이고,
- 이미 갖고 있지만, 떠나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 아예 갖거나, 아예 떠나보내면 마음이 편한데, 두 마음을 동시에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을 때는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괴롭고, 가지지 못했을 때는 갖고 싶다는 생각에 괴롭다.
- 그래서 하나님도 이스라엘이 거부하자, 갖고 싶다는 생각에 화가 나셨지만,
- 또 막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니까, 가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슬퍼하셨다.
그래서 바른 신앙을 가져 바른 관계 맺고 사랑하면, 애달파진다.
- 애간장이 썩어 문드러진다.
- 우리는 하나님도 지배하고 싶지만, 하나님을 지배하지 않기를 원하고,
- 사랑하는 사람도 지배하고 싶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조차 지배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 자녀가 부모인 자신에게 종속되길 원하면서, 동시에 자유롭게 세상에서 날아오르길 원한다.
- 하나님도 사람도 항상 애달픈 마음으로 바라보며, 마음이 썩어 문드러지게 된다.
그렇다고 반대로 애달픈 마음 싫다고 사랑을 포기하면,
- 그래서 대상을 아예 소유하거나, 아예 떠나보내면 어떻게 되냐?
- 소유해도, 떠나보내도 둘 다 관계를 잃어버린다.
- 관계를 잃어버린 사람은 결코 사람으로 살 수 없다.
-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다.
-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채, 인생의 허망함만 가지고 죽을 것이다.
- 영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외로움과 허무함을 느낀다는 뜻이다.
- 그렇게 늙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가까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구질구질하고 애절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끝나냐?
- 역사의 시간에서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구질구질해지셨다.
- 그러나 종말에 천국에서는 다르다.
천국에는 하나님을 절박하게 사랑하는 사람만 남는다.
-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구질구질해진 사람이다.
- 그들에 의해 구질구질하게 사랑을 구걸하시던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사랑을 받으신다.
- 창세 이전에 삼위일체 속에 갇혀 계셨던 하나님 사랑의 지경은 천국 백성 전체에게로 확장된다.
-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끝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 너무 사랑해서 지배할 수도, 지배하지 않을 수도 없는 사람 때문에 애타고 구질구질해지고 처량해진다.
- 그러나 사랑이 통하여 서로 사랑하게 되면,
-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지만,
- 그 자유를 가지고 서로의 관계를 끊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파고든다.
-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지배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구질구질함에서 벗어난다.
- 이전에는 지배하지도, 지배하지 않지도 못해 구질구질했지만,
- 이제는 서로 지배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지배당하고,
- 서로 지배해도, 각자의 자유가 완전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배와 자유가 아무런 장애 없이 공존하는 상태가 사랑의 끝이다.
- 이것이 참된 구원이고,
- 사람에게 주어진 온전한 형태의 생명이다.
- 이것이 아니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위해 신앙 생활하는 것이다.
-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종말을 이루시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굴욕과 애절함과 구질구질함을 견디신 것이다.
-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그런 사랑 끝에는 찬란한 영광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다.
- 지배와 자유가 공존하여, 자신과 타인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
- 오직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는 참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