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17) 8:13-9:2 슬픔과 공포에 사로잡힌 하나님 - 그 하나님을 공감하는 길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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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특징은 모두가 울고 있다는 점이다.
① 우선 하나님이 울고 계시다.
[렘 8:18]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렘 8:21]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렘 9:1]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 하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우신다.
- 첫째는,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떠나 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에 버려졌기에 기쁨을 잃고 슬픔에서 나을 길이 없으시다.
- 둘째는,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고통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며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그 고통에 공감하여 하나님도 슬픔과 공포에 사로잡히신다.
② 다음으로 이스라엘도 울고 있다.
[렘 8:14] 모두 모여라.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견고한 성읍들을 찾아 들어가서, 죽어도 거기에서 죽자. 우리가 주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여서, 우리를 죽이려 하신다.
[렘 8:16] 적군의 말들이 내는 콧소리가 이미 단에서부터 들려 오고, 그 힘센 말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한다. 적군이 들어와서, 이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을 휩쓸고, 성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다 삼킨다.
[렘 8:19] ・・・・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
- 하나님이 떠나 지켜줄 사람이 없는 이스라엘을 적들이 들어와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조금 덜 비참한 죽음뿐이다.
-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다.
③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도 운다.
-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며 하나님과 공감하여 울고,
- 이스라엘의 멸망을 전하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멸망당하며 운다.
이렇게 본문의 핵심은 슬픔이라는 감정이다.
- 이스라엘에 내려질 멸망 심판도 아니고,
- 멸망 심판의 원인인 이스라엘의 죄도 아니다.
- 그것은 모두 이전 본문에 나왔다.
- 본문은 계속해서 감정에 초점을 둔다.
- 심판과 죄는 감정을 설명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냐?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슬퍼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슬픔에 빠졌고,
- 그 슬픔 때문에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슬픔을 알고, 슬픔에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감할 때에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반대로 말해서, 하나님께 공감하지 못하면, 죄의식은 절대로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죄의식과 회개는 오직 공감을 통해서만 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착각할 때가 있다.
- 죄의식이 죄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죄를 구분 짓는 법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온다고 말이다.
- 죄를 나누는 명확한 법과 기준이 있고,
- 하나님의 법과 기준을 제대로 알고, 내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면, 죄의식을 갖고 회개할 수 있다고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쓴다.
- 즉, 죄의식과 회개를 이성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는 마치 우리에게 법만 주어지면, 자동 반사적으로 그 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았던 것은 법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논리이다.
-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 말씀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을 해야 한다는 법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꼴이다.
- 또 예를 들어, 내가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이유는 단지 상대방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 기준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 법과 기준을 알기만 하면, 말씀 기도도 할 수 있고, 상대방을 기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실상은 법이 있어도 법을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법을 기준으로 상과 벌을 주어도 사람은 절대로 법을 지키지 않는다.
- 법을 지키는 대가로 상을 주면, '그딴 상 따위 필요 없어. 내가 사먹고 말지.'라며 법을 거부하고,
- 법을 지키지 않는 대가로 벌을 주면, '차라리 벌로 때우고 말자.'라며 법을 거부한다.
- 상과 벌은 법을 지키는 동기를 주지 않는다.
- 오히려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명분을 준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보자.
-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상과 벌로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 죄의식을 갖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동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 반대로 회개하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명분만을 만들어준다.
- 우리 마음에, '그따위 구원 필요 없어. 내 구원은 내가 이뤄낼 거야. 아까운 인생 하나님의 법에 매여 사느니, 차라리 내 마음대로 살고 벌로 때우고 말자.'라는 생각만 강화한다.
이것이 이성적인 관점의 한계이다.
- 우리가 우리를 너무 순진하게 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가능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쪽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 동시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용납할 수 있는 한계의 가장 끝까지 게을러진다.
-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에너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사악하다.
따라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동기는 우리 자신뿐이다.
- 하나님의 법 자체를 내가 좋아해야 한다.
-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자체를 내가 싫어해야 한다.
- 그래서 법을 안 지키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에너지를 '덜' 소모하는 쪽으로 사고 방식을 바꿔야 한다.
- 그것만이 우리가 지속적, 자발적으로 법을 지키도록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게 되냐?
-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좋은지 그 참 뜻과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면 된다.
- 그러면 아무리 말려도 지속적, 자발적으로 법을 지킨다.
- 마치 아무도 돈 벌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돈의 가치를 알기에 지속적, 자발적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돈을 버는 과정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이 가진 가치를 온전히 아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뿐이다.
-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장벽은 두 가지가 있다.
- 첫째로, 하나님과 나는 분리된 타인이라는 점이다.
-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인 하나님의 뜻을 전부 알 수 없다.
- 둘째로, 게다가 분리된 정도가 신과 인간이라는 무한대의 크기라는 점이다.
- 사람 사이의 뜻도 알 수 없는데, 어찌 하나님의 깊은 뜻을 사람이 알 수 있겠는가.
따라서 아는 것, 즉 이성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 이성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는 기준을 알아도,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공감'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때 이성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감이다.
- 하나님이 굉장히 괴로워하시네.
- 그러니까 나도 슬프다.
-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내 죄 때문이라네.
- 하나님 슬픔의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더 슬프다.
- 이제라도 나의 슬픔을 덜고 싶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도 슬픔에서 건져드리고 싶다.
- 그래야 나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여기까지가 공감이다.
- 이 과정에서는 논리, 이해, 깨달음은 없다.
- 하나님의 법은 무엇인지, 내가 무슨 법을 어겼는지, 그런 법이 왜 생겼고, 그 법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없다.
- 하나님이 슬프시다는 명백한 감정과 그것에 공감하여 나도 슬프다는 감정만 있다.
- 순수한 감정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엥 운다.
- 그러면 먼저 불편한 감정이 확 다가온다.
- 그 울음의 원인은 무엇인지 따지기 전에, 아이가 불편하다는 격한 감정이 전달되면, 그것에 반응한 감정이 먼저 올라온다.
- 그런 후에야 비로소 불편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 이성이 작동한다.
- 가서 안아줘야 할지, 약을 줘야 할지, 재워줘야 할지, 그냥 무시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만약 아이에게 공감이 안 된다면,
- 그래서 아이의 울음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 그래서 그 감정을 해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 울음의 원인에 대해 고민할 동기가 없을 것이고,
- 그러면 아이의 일상을 관찰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 결국 그 부모는 평생 아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공감의 역할이다.
- 이성을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 반대로 말해서, 감정이 없으면 이성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을 공감할 때에만,
- 그래서 하나님의 슬픔이 나 자신의 슬픔을 유발할 때에만, 사람의 이성이 작동한다.
- 그전까지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죄를 지적하고 돌이킬 것을 권유해도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이성이 작동한다.
- 하나님이 지적하는 죄가 합당하지 않음을,
- 죄가 합당하다 하더라도, 그 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기에 지적이 의미 없음을,
- 죄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조차 일상에 의미가 없음을 총력을 다해 논박한다.
- 그를 통해 하나님의 돌이키라는 권유가 얼마나 부당한지,
-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틀렸는지 증명하려 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공감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 공감하여 죄를 돌이키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하나님께 공감하지 않고 하나님의 논리를 반박하여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적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다.
-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 사람의 뇌는 그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 뇌는 언제나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 가장 일을 덜 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 우리가 강제로 뇌에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슬픔을 반복해서 전하는 것이다.
- 우리 뇌에 하나님의 슬픔을 주입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우리의 감정을 움직여서, 이성이 작동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것을 위한 구절이 9장 1, 2절이다.
[렘 9:1]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 펑펑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누군가가 머리를 물로 채워줬으면 하신다.
- 이를 풀어 말하면, 누군가가 옆에 와서 마음껏 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 이는 하나님의 울고 싶은 심정을 공감 받고 싶다는 강력한 호소이다.
[렘 9:2] 누군가가 저 사막에다가 내가 쉴 나그네의 휴식처를 마련하여, 내가 이 백성을 버리고 백성에게서 멀리 떠나, 그리로 가서 머물 수 있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
- 이스라엘 때문에 너무 지쳐서 누군가가 아무도 없는 사막에 쉴 수 있는 휴식처를 만들어줬으면 하신다.
- 이를 풀어 말하면, 이스라엘 때문에 아픈 마음을 누군가에게 토로하며 회복하고 싶다는 뜻이다.
- 이 역시 아픈 마음을 공감받고 싶다는 절박한 호소이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공감받고 싶어 하실까?
하나님 노릇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 일부 맞지만, 아니다.
관종이라서?
- 역시 일부 맞지만, 아니다.
공감이 하나님 존재의 본질, 본성, 본능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일정 부분 관종일 수 있는 것이고,
- 반드시 양방향이어야 하는 공감의 특성상 바르게 통제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끌어가야 하는 하나님 노릇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본질은 공감이어야 하냐?
논리적으로만 따지면, 공감 때문에 하나님은 홀로 만수무강하지 않으시고, '창조'를 하신 것이다.
-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는 본질적으로 창조가 필요 없다.
- 홀로 만수무강하면 된다.
- 신이라는 완전, 완결, 순결, 순수한 존재에게 뭔가를 더하는 창조는 필연적으로 불순물이다.
-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데, 가장 아름다움에서 뭔가를 추가하는 것은 추함으로의 타락이기 때문이다.
- 마치 피카소의 작품에 점 하나를 더하는 꼴이다.
- 어떤 대가가 와서 아무리 작은 점 하나를 남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오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피카소 자신이 살아 돌아와 자신의 작품을 수정한다면 다를까?
- 그것도 역시 오점이다.
- 만약 수정을 통해 추해졌다면 말할 필요도 없고,
- 반대로 수정을 통해 더 아름다워졌다 해도,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작품, 즉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남긴 피카소의 명성에 오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 그러면 그 순간부터 피카소의 모든 작품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 모든 피카소의 작품을 미완으로 가정하고, 자신의 수정이 더 아름답다며 우겨댈 것이다.
- 이것으로 피카소의 권위는 박살 난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무결, 전지전능은 절대로 창조주의 본질이 될 수 없다.
- 그런 존재는 창조주가 될 자격이 없다.
따라서 창조주의 본질에는 하나님과 구분된 독립 개체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 그것만이 창조주의 창조 행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독립 개체가 하나님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하나여야 한다.
- 그래야만 창조주가 '주인'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독립 개체가 하나님의 통제에서 터럭만큼이라도 벗어난다면, 하나님은 주인의 자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조주'라는 용어에서 <독립 개체의 존재>와 <독립 개체와 하나님의 하나 됨>이 전제된다.
-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고, 논리로만 말해도 말이다.
-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것만이 하나님 존재의 본질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것이 뭐냐? - 공감이다.
독립 개체와 하나 되는 유일한 방법은 공감 또는 사랑 혹은 관계뿐이다.
- 나는 이 세 단어 중에 공감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 사랑은 너무 로맨틱해서 공감의 긍정적인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 관계는 너무 기계적인 의미로 단순히 연결되기만 한 상태를 지나치게 모두 포괄한다.
그런데 공감은 두 개체가 연결되어 나타나는 긍정적, 부정적 현상을 모두 포함하는 동시에,
- 피상적인 연결은 배제하고, 깊고 궁극적인 연결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독립 개체가 서로 공감할 때에만,
- 두 개체의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 동시에 두 개체가 완전히 하나로 연결된다.
- 나의 표현으로, 두 뇌가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의 생각을 함께 하면서,
- 동시에 두 뇌가 각자 주체적, 능동적, 독립적으로 작동한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이 집착과 거래이다.
- 집착은 두 개체가 하나로 연결되는 반면, 둘 중 하나는 수동적, 소극적, 종속적이 된다.
- 반면 거래는 두 개체가 주체적, 능동적, 독립적이기는 하지만, 두 개체가 전혀 연결되지 않은 채 같은 목적을 따라 같은 방향으로 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 본질도 공감이다.
- 여러 번 말했지만,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 완전히 독립된 세 개체이며, 동시에 완전히 하나 된 존재로 말이다.
- 세 독립 개체가 서로 완전히 공감하여 하나 된 상태로 말이다.
- 이렇게 하나님의 본질에 <독립 개체의 존재>와 <독립 개체와 하나님의 하나 됨>이 있었기 때문에 창조주가 되실 수 있었다.
따라서 공감만이 창조주가 창조 행위를 하게 만든 유일한 동기이며,
- 그와 동시에 공감만이 창조주가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유일한 기준이다.
그 기준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공감하길 바라시는 것이고,
- 동시에 사람끼리 서로 공감하길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본질임과 동시에 창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공감받길 바라신 이유이다.
결론 -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냐?
거래했다.
-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같은 것을 느끼려 하지 않았다.
- 자신만의 명확한 계획과 목표가 있었고,
- 그것을 이뤄줄 대상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섬겼다.
따라서 거래 사고 방식은 반드시 우상 숭배를 한다.
[렘 8:19]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 그렇다고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도움 되는 모든 신을 마구 섬겼다.
그렇게 공감하지 못해서 어떻게 됐냐?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에 빠졌다.
- 이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필연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거래 사고 방식을 가지면, 자연히 모든 대상을 거래 대상으로 본다.
- 그런데 거래의 본질은 속임이다.
- 자신의 가치는 실제보다 부풀리고 상대의 가치는 실제보다 깎아 내리는 것이 거래의 실력이다.
- 그래야 거래를 통해 더 많은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모든 대상이 자신을 속이려는 잠재적 사기꾼으로 보인다.
- 동시에 자신은 잠재적 사기꾼 사이에서 위협받고 있는 피해자가 된다.
- 여기서 잠재적 사기꾼에는 하나님도 포함된다.
- 하나님 역시 제사를 통해 돈이나 뜯어먹고 언제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분노를 갖게 된다.
그러니 얼마나 삶에 평안은 없고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겠는가.
- 모든 사람이 그런 두려움과 분노 속에 살기에, 언제나 일촉즉발의 상태이다.
- 그런 상태에서 전쟁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 모두가 전쟁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돌변한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 이것이 공감 없는 사회의 실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처방은 무엇인가?
- 공감을 회복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다.
그 방법은 먼저 거래를 멈추도록 하신다.
- 어떻게?
- 거래 수단인 가치를 모두 없애신다.
- 다른 대상에게 제공할 가치가 없어지면, 거래는 불가능해진다.
- 그래서 첫째 단계가 멸망이다.
다음은 공감할 기회를 만들어주신다.
- 어떻게?
- 자신의 가치를 모두 잃어 불쌍해진 자신과 같은 불쌍함을 가진 다른 사람을 만나게 하신다.
- 그래서 거래는 완전히 불가능하지만, 그래서 서로가 연결될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 오직 불쌍함 하나로만 연결된 관계를 갖게 하신다.
- 서로의 불쌍함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서로의 불쌍함을 해결해주려는 노력을 통해 서로에게 격려가 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거래가 아닌 공감의 기쁨을 느끼고 배우고 연습하게 된다.
-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신 후, 포로로서 함께 묶어두신 것이다.
[렘 8:16] 적군의 말들이 내는 콧소리가 이미 단에서부터 들려 오고, 그 힘센 말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한다. 적군이 들어와서, 이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을 휩쓸고, 성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다 삼킨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도 공감하게 된다.
- 왜냐하면 하나님 역시 자신의 가치를 모두 잃은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존재는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에 종속된다.
- 이스라엘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만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름 불리고 대우받고 존재한다.
-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잃는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데 현재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 하나님 역시 자신의 가치를 모두 잃은 불쌍한 존재가 되었다.
이를 이스라엘은 이전에 몰랐다.
- 관심도 없었다.
- 그런데 멸망하고 불쌍한 존재가 되니까, 하나님도 자신과 똑같다는 것을 그제야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공감도 시작된다.
공감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스라엘은 모든 대상을 등쳐먹으려는 잠재적 사기꾼으로 봤다.
- 하나님조차도 말이다.
- 그래서 우상이라는 안전 장치도 필요했다.
- 그러니 일상이 얼마나 두렵고 화가 나겠는가.
그러나 공감하면 모든 대상을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이것이 심판의 참 의미이다.
벌줘서 무서워 떨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 앞에 말했다시피, 상과 벌은 아무 소용 없다.
거래 사고 방식에 절어있는 우리에게 거래는 막고 공감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 그것을 위해 자신의 가치를 완전히 잃는 경험을 공동체가 함께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포로로 끌려간 것처럼 말이다.
우리 공동체에도 그런 멸망이 있기를.
- 그래서 서로에 대한 깊은 공감이 생기길.
- 그리고 하나님께도 깊이 공감하길.
- 그래서 인류 전체에까지 공감이 확대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