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9) 7:1-13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시는 예수님

안승준 2019. 6. 24. 11:48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격렬한 환호를 받았지만, 생명의 빵 말씀을 선포하자 대부분이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났다.

그 연장서 상에서 7장은 예수님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이유로 굴욕을 당하신다.

- 사람들은 "너 같은게 무슨 그리스도냐?"라며 예수님을 의심한다.

게다가 7장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가 계획 단계에서 실행 단계로 바뀐다. 

- 종교 지도자들이 체포 영장을 발부하여 예수님을 잡아 오도록 시킨다.(32)

이렇게 예수님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아가면서 치이는 '동네 북'이 되신다.

그런데, 이렇게 굴욕, 조롱, 수치,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숙명이다.

- 세상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는 태생적으로 굴욕, 조롱, 수치,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 왜냐하면 창조주의 창조 행위 자체부터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신이라면, 그래서 현재 자신의 상태에 뭔가를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존재라면, 창조 행위를 하면 안된다. 불필요하다. 

- 신에게 창조 행위는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① 피카소 작품에 덧칠하듯, 완벽한 상태에 뭔가를 덪붙여서 더럽히는 행위거나, 

② 현재 상태가 뭔가를 덪붙일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상태임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 따라서 신에게 창조란, 자신의 완전함을 부정하고 굴욕, 조롱, 수치, 고난 속으로 스스로를 매몰시키는 행위이다.

- 완전한 신만이 창조 행위를 할 수 있지만, 완전한 신은 창조 행위를 하면 안된다.

하지만 신은 창조 행위를 통해서만 '참 신'이 될 수 있다.

- 창조 이전에 신은 누구에게도 신이라 불리지 못했다.

- 창조 이후에야 비로소 신은 피조물에게 신으로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한다.

- 그리고 종말 이후에는 만물이 신을 신으로 인정한다. '참 신'이 된다.

이렇게 창조 행위는 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 물론 그 과정 속에 굴욕, 조롱, 수치, 고난이 있지만, 그 과정이 지나야 비로소 '참 신'으로 회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예수님의 일생에서도 동일하다.

- 태초 이전부터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었다. 하나님과 동일했다.

- 그러나 완전한 신이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 속에 '더러운 육신'을 입고 매몰되었다. 이것이 성육신이다. 성육신 자체가 신에게는 굴욕이다. 

- 게다가 굴욕은 계속된다. 예수님은 완전한 가르침을 주시지만, 사람들은 조롱한다. 제자들조차 믿지 않는다. 육에게 영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결국 굴욕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다. 죽음조차도 영웅의 죽음처럼 미화되거나 동정받지 못하고 조롱받는다. 

- 이렇게 예수님의 일생은 굴욕으로 시작되어 조롱으로 끝난다.

- 하지만 결국 부활하셨고,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참 신'으로 등극하셨다. 그 동안은 '자칭 신'이었지만, 이제 '타칭 신'이 되신 것이다.

- 이렇게 <성육신 → 죽음 → 부활>의 굴욕을 통해서 예수님의 '참 예수님' 되심이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그리스도인의 일생에서도 역시 동일하다.

-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간다.

-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되면, 내가 나의 주인임을 포가하고 예수님을 주인 삼아 노예로 살게 된다. 이렇게 믿음은 주인이 종 되는 굴욕으로 시작한다.

- 게다가 굴욕은 계속된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종으로 사는 것은 주인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다. 이기기 위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인들과의 경쟁에서 노예는 질 수밖에 없다.

- 물론 굴욕 속에서도 희미한 소망을 본다. 함께 종으로 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위로와 안식을 때때로 느낀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세상에서 배제되는 데다가, 일말의 동정조차도 받지 못한다. 이러한 굴욕은 믿었던 교회 안에서도 일어난다. 그럴 때 특히 더 비극적이다. 이렇게 신자는 세상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 그러나 죽은 이후에는 잃어버렸던 나를 회복된 모습으로 되찾는다. 하나님의 숨결로 창조되기 전 상태인 하나님 품 안으로 돌아가 완전한 나로서,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종말의 과정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 부활의 과정 속에 깃들어 있고, 또 그리스도인의 일생 속에 담겨있다. 

- 굴욕적인 창조의 원리가 예수님과 만물 그리고 우리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 신'이 되는 과정 중에 계신 예수님께 요한복음 7장 같은 굴욕을 당하시는 것이다.

- 이렇게 '창조 행위'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굴욕이 얼마나 필연적이고 가치있는 과정인지 알 수 있다.

- 단지 사람의 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겪으셔야 할 과정이 아니라, 반드시 겪고야만 하는 필수 과정이다.

- 똑같이, 우리 인생에서도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과 똑같은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굴욕 속에서만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도 필수이다.

이러한 우주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사사로운 일상적인 관점에서 이번 본문을 볼 때, 본문의 풍성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7장 전체 내용 정리

1-4장까지의 '가나 사이클'에 이어서, 5-10장까지 '명절 사이클'이 진행되는 중이다.

- 유대 사람의 명절(5:1), 유월절(6:4), 초막절(7:2), 수전절(10:22)이 나온다.

- 이러한 명절 사이클을 통해 뿌리박혀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과 그것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 중 7, 8장은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초막절은 유대인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중 하나이다.

-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다.

- 의미는 출애굽하여 광야의 초막 생활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축제이다. 

- 날짜 상으로 추석과 비슷한 시기이기 때문에, 추수 감사 의미도 담고 있다.

본문과 관련된 초막절의 중요한 특징은 명절에 행하는 두 가지 축제에 있다.

① 물의 축제: 실로암 물을 길어 행진하는 의식으로서,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이 터져나온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이다.(출17)

② 빛의 축제: 등불을 켜 놓고 밤새 찬송과 춤을 추는 의식으로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광야 생활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축제이다.

이러한 축제를 모티브로 예수님께서는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7:37),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이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물과 빛, 즉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한다.

- 특히 7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며 조롱하는 내용으로 채워져있다.

 절

 등장 인물

 내용

 1-13

예수님 / 예수님의 동생들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라는 동생들과 예수님의 논쟁

 14-19

예수님 / 유대 사람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하는 유대 사람들과 예수님의 논쟁

 20-24

예수님 / 무리 

 귀신 들렸다고 의심하는 무리들과 예수님의 논쟁

 25-30

예수님 / 예루살렘 사람들 

 예수님의 출생지에 대해 의심하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예수님의 논쟁

 31-36

 예수님 / 대제사장들, 바리새파 사람들

 정식으로 체포영장이 발부된 예수님

 37-44

예수님 / 무리 

 초막절의 물이신 예수님

 45-53

성전 경비병, 바리새파 사람들, 니고데모 

 예수님을 두고 다양한 사람들이 버리는 논쟁

-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계층적이다.

- 다양한 계층들이 다양한 조롱을 쏟아낸다.

본문은 사람들의 조롱을 통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를 더 구체화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변론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더 구체화한다.


내용 정리

1절: 배경 설명 - 예수님은 유대 지역으로 가지 못하실만큼 살해 위협을 받으신다.

5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 치유하셨다는 이유로 유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 이때부터 예수님은 살해 위협을 받기 시작하신다.

그 뒤에 6장에서 예수님은 살해 위협이 있는 유대 지역을 떠나 갈릴리로 가신다. 그 곳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

- 물론 그마저도 예수님의 말씀 선포 때문에 부정적으로 돌아섰지만.

이렇게 예수님은 함부로 유대 지역으로 가지 못하실만큼 살해 위협을 받고 계셨다.

2-5절: 예수님의 동생들의 조언 - 유대로 가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라!

그런 상황에서 초막절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하지만 여행 준비를 하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동생들은 답답했던 모양이다. 

- 유대로 가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라고 조언을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으니, 유대에 가서 자신을 알리라는 것이다.

- 갈릴리에 계속 숨어 있으면 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동생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믿음 없음 때문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 동생들의 논리를 통해서 믿음 없음의 의미를 밝혀보자.

동생들의 논리는 이렇다.

- 대전제: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 소전제: 예수님은 알려지기를 바란다.

- 결론: 따라서 예수님은 유대에 가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이 논리에서 대전제는 문제가 없다. 당연한 말이다.

문제는 소전제에 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알려지기 바란다고 생각했다. 왜일까?

- 동생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이 충분히 가치있어 보였다.

-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침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목적을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동생들도, 오병이어를 먹었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이용해서 유익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동생들에게 성경은 믿음 없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6-9절: 예수님의 대답 -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예수님의 대답이 알쏭달쏭 복잡하다. 어쨋든 유대로 가라는 동생들의 조언을 거절하는 것인데.

- 하지만 10절에서 예수님은 명절에 유대로 가신다. 오락가락 하셔서 더 아리송하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때'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요한복음에서 '때'라는 단어는 세 가지다.

① 호라(ὥρα, 26회): 숫자와 함께 나올 때는 '제 몇시'를 의미하고, 숫자 없이 나올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라는 신학적 의미를 갖느다.

② 크로노스(χρόνος, 4회): 특정한 시점이 아닌 일정 기간을 의미한다.

③ 카이로스(καιρός, 4회): 특정한 시점을 의미한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따라서 '때'는 신학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때'이다.

- 이렇게 봐야, 7절에 세상에 대해 언급한 것과 연결된다.

- 지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가 아니지만, 동생들은 올라가도 괜찮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7)

- 그렇기 때문에 동생들은 지금 당장 예루살렘에 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미워한다."(7)

-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올라가면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는,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에서 악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3:19-21)

- 예수님은 세상 전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다.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동생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동생들은 세상이 악하다고 증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동생들도 세상과 똑같이 악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동생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유명해지길 바란 것이다.

- 그래야 자신들도 예수님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세상이 악한 줄 모르는 사람은 이와같이 세상에서 유명해져 유익을 얻기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직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8)

- 지금 올라가면 많은 명절 인파 속에서 유명해질 수 있겠지만, 동시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의 목적은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명절이 시작되어도 갈릴리에 머물러 계신다.(9)

10절: 반전 - 예수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올라가셨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떠난 이후 느지막이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10)

- 올라가신 시점은 명절이 절반정도 지난 즈음이다.(14)

-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명절 초반을 피하여 죽음의 위협은 모면하되, 선포해야 할 말씀을 은밀하게 선포하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8절에 명절에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셨다가 10절에 올라가신 이유는, 우왕좌왕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명절 초반을 피하고 중반부터 사역하여 효과적인 사역을 하기 위해서이다.

11-13절: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논쟁

예루살렘 안에서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13) 이들은 명절을 기회 삼아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고 계획한 것 같다.

-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11)

게다가 그 적개심이 얼마나 컸는지 무리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님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말하지도" 못했다.(13)

반면에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었다. 

- '무리'는 유대 사람 뿐만 아니라 갈릴리 사람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모두 포함한다. 그랬기 때문에 유대 지역 사람들보다는 좀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추측컨데,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 사건을 두고 판단했을 것이다.

반면에 미혹한다고 말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신 말씀을 두고 판단했을 것이다.

- 무리들은 비교적 솔찍하게 예수님의 행동을 판단하려 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두려움 때문에 드러내 놓고 말하진 못했다.

- 이는 무리 중에 두려움을 감수하고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 예수님에 대한 호감을 가진 사람은 많아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주제

① 예수님은 굴욕으로 태어나 조롱으로 죽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굴욕과 조롱을 당하시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굴욕이다. 굴욕으로 태어난 조롱으로 죽는 존재이다.

- 예수님께서 굴욕을 피하셨다면, 그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되실 수 없었다.

- 또한, 하나님께서 굴욕을 피하셨다면, 그래서 창조 행위를 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찬양 받을 수 없는 무명의 신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역시 굴욕을 피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죄를 끝까지 숨기고 예수님의 노예 되기를 부정한다면, 단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지 못하고 거짓 인간으로 죽게 될 것이다.

② 믿음 없음의 원인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에 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믿음 없다고 판단한 근거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유익을 얻으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사람에게 얼마나 나쁜냐면,

-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이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용하기 가장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조차 이용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이미 이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게다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관계 맺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용이라는 말 자체에 목적이 상대방이 아니라 상대방을 도구 삼아 유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런 사람은 세상 누구와도 관계 맺지 못한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에게 최악의 고통을 주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 정리하면, <믿음 없음 = 예수님 이용 = 모든 사람 이용 = 누구와도 관계 맺음 없음 = 최악의 고통>

이와 같이 믿음 없음은 사람에게 최악의 고통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통한 관계 회복을 위해 성육신하신 것이다.

- 그것이 인간을 참 회복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③ 예수님은 세상을 완전히 악하다고 하셔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셨다.

예수님의 판단 근거 역시 관계이다.

-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 맺으려 하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한다.

- 또한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 맺으려 하지 않고 이용하려고만 한다.

- 모두가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는 세상은 악과 고통으로 가득찰 수 밖에 없다.

-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는데, 그 이유를 자세히 보면,

- 예수님은 세상 원리를 따라 주시지 않으셨다.

- 세상 원리란,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히 이용 당해주고 또 이용해주는 원리이다.

- 사람들은 자신도 타인을 적당히 이용하고, 타인이 자신을 적당히 이용하는 것을 용인한다.

- 그렇게 상부상조(?) 하며, 아무와도 관계 맺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느 누구를 이용하시지도, 어느 누구에게 이용 당해주시지 않는다.

- 오병이어 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용하여 유익을 얻으려 하자, 예수님은 도망가신다. 이용 당하기를 거절하신다.

-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이 종교적 청결을 주장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조금만 이용 당해주셔서 율법을 부정하지만 않으셨어도,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옹호했을 것이다.

세상 원리를 어기고, 절대 이용 당해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에 미움 받은 것이다.


결론

이렇게 서로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이용 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 예수님처럼 굴욕을 당할 것이다.

- 세상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을 이용하지 않아서 손해를 당할 것이고, 이용 당해주지 않는다고 비난할 것이다.

- 이용하고 이용 당하는 거래를 통해 유익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낙오될 것이다.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참 그리스도인, 참 인간이 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사람을 이용하고 이용 당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 예수님은 누구를 이용하거나 이용 당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에게 다가가 자신을 증거하고 참 관계를 맺으려 하셨다.

- 따라서 우리도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예수님을 증거하고 참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 얼마나 어렵냐면, 그렇게 살다가는 살해 당할 수도 있을만큼 사람들의 적개심을 산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 왜냐하면, 세상은 거래하려고 하지, 관계 맺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자신과 거래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죽더라도 해야 한다.

- 왜냐하면, 관계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기쁨이기 때문이다.

- 그렇게 죽음을 감수하고 살 때에만 사람이 관계를 통해 참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참 관계의 기쁨을 알면, 거래하며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님과 참 관계를 맺고, 다른 사람과 참 관계를 맺을 때에야 비로서 우리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