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06) 3:14-4:4 우리가 지금 주님께 돌아옵니다. - 회개의 영광과 대가

안승준 2021. 10. 16. 00:19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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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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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관계와 거래 관계를 비교해보겠다.

먼저 공통점은, 둘 다 유익을 얻기 위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이유도 당장 돈을 쥐고 있는 것보다 필요한 물건을 가지는 것이 더 유익이기 때문이다.

-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도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할 때 가장 큰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앙을 갖는 이유도 그것이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 손해를 감수하는 신앙은 본질적으로 없다.

- 신앙에서 손해를 감수하는 이유는 이후에 손해를 상쇄하고 남을 유익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결국 장사도 신앙도 유익을 얻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차이점은 거래는 제로섬 게임이고, 사랑은 논-제로섬 게임이다.

- 거래 관계에서는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다.

- 공동 소유가 있을 수 없다.

- 하나님처럼 되려면, 이전의 하나님을 몰아내거나 피해 도망가야 한다.

- 그래서 거래 관계로 사고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게 된다.

- 따라서 누군가가 유익을 얻으면 다른 누군가는 빼앗겨야 하는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거래 관계에서는 경쟁, 투쟁,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에서는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있다.

- 한 하늘을 두 태양이 공동 소유할 수 있다.

-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이전의 하나님을 몰아내거나 피해 도망갈 필요가 없다.

- 함께 하나님이 될 수 있다.

-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할 때에만 우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 그래서 사랑의 관계로 사고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관계 맺게 된다.

- 따라서 독점하기보다 공유할 때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는 논-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에서는 협력, 교류, 공감이 일어난다.

 

그런데 사랑과 거래를 반대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 오히려 사랑을 독점하는 관계로 생각해서 제로섬 게임으로 오해하고, 

- 거래는 효율화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에 논-제로섬 게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 '단기적 관점'에서 사랑은 독점하려 한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 믿기를 바라신다.

- 자신 외의 다른 것에 시선을 두고 의지하면, 그것이 배우자, 자식, 부모 등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우상 숭배며 음행으로 간주한다.

- 우리가 주체성을 갖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왕권이 훼손되는 것처럼 말한다.

- 마치 한 하늘에 두 태양이 뜰 수 없는 것처럼.

-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말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다르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점하시는 것은 단기적, 일시적이다.

- 이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려주시려는 것이다.

-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 배우기가 어려워서, 독점적인 관계 안에서 철저히 개인 교습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광야라는 특별한 상황을 만드신 것이다.

- 광야에 묶어놓고 평생토록 비굴한 노예로 부리시려는 것이 아니라, 

- 집중적으로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묶어두신 것이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세상의 비굴한 노예로 살지 않고, 주체적, 자발적으로 하나님처럼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 참 하나님처럼 되어, 우상처럼 섬기던 배우자, 자녀, 부모 등을 바르게 사랑하고, 노예로 지배당했던 세상에서 세상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며 살도록 말이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이다.

- 사람에 끌려다니고, 세상이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능동적, 자발적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다스릴 때 사람이 사람다워질 수 있다.

-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하나님처럼 되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 논-제로섬 게임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장기적' 목적을 위해 '단기적'으로 독점적인 관계를 맺으시려는 것이다.

 

반면에 거래는 '단기적 관점'에서 논-제로섬 게임으로 보인다.

- 거래를 통해 이익을 얻는다고, 나로 인해 실질적인 손해를 본 사람이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풍족한 월급을 받은 것은 내가 없었던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이지 남의 것을 강제로 뺏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나의 노력으로 전체 파이를 키웠고, 커진 파이 중에 일부를 취했기 때문에 나로 인해 누구도 손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호의호식하면서도 돈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먹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 그들의 불행에 우리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거래는 제로섬 게임이다.

- 제로섬 게임의 전제는 재화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지구 재화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 물론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재화가 있고, 기술이 발전하면 숨겨진 재화를 발견해서 재화의 총량이 늘어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 그러나 그것 역시 태초에 만들어진 것의 일부일 뿐이다.

- 더 나아가서 인류의 생활 영역이 우주로 확장된다고 해도, 거기서 얻는 재화 역시 태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 따라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재화는 태초의 피조물이라는 총량으로 제한되어있다.

- 그것을 미리 발견하면 현 세대가 누리는 대신 이후의 세대가 빼앗기는 것이고, 현 세대가 발견하지 못하면 미래의 세대가 대신 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래는 '장기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이러한 개념은 게임 이론에 함축되어 있다.

게임 이론을 단순하게 말하면, 

- 집단 모두가 서로 신뢰할 때, 개인이 최고의 이익을 얻을 수는 없지만, 

- 집단 전체가 얻는 유익의 총량은 가장 크며,

- 그 유익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

- 반면에 집단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신뢰를 깨고 혼자만 최고의 이익을 얻으려 하면,

- 단기적으로 그 개인은 최고의 이익을 얻지만,

- 집단 전체가 얻는 유익의 총량은 급감하고,

- 결국 집단이 와해되어 유익을 얻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정리하면,

- 신뢰하는 사랑은 단기적으로 큰 유익을 얻을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최고의 유익을 보장한다.

- 반면 신뢰하지 않는 거래는 단기적으로 큰 유익을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손해를 끼친다.

 

이것이 우리에게 신앙 생활이 어려운 이유이다.

거래가 주는 단기적 유익의 유혹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이다.

- 반면에 사랑이 주는 장기적 유익은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여기에 덧붙여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해보지도 않고, 그냥 해왔던 대로 혹은 남들이 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손해이며, 인류 전체에도 손해를 끼치는 거래 관계를 반복해서 선택하는 것이다.

- 당장 거래로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법은 뭐냐? 어떻게 해야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가?

단순하다.

- 거래가 주는 단기적 유익은 생각보다 작고, 장기적 손해는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 반대로 사랑이 주는 단기적 손해는 생각보다 작고, 장기적 유익은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 그리고 하던 대로, 남이 하라는 대로, 생각 없이 선택하지 않고, 손익 계산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다.

[눅 14:28~30]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29)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30)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정확하게 계산하고 살아갈 때, 바른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 한번 뿐인 인생을 제대로 계산해보지도 않고 적당히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실수가 어디 있겠는가.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이러한 오해를 밝혀보겠다.

이스라엘 역사의 예를 들면,

- 이스라엘의 지배자는 단기적 관점에서 사치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얻기 위해 세금을 식용 작물이 아닌 환금 작물로 받기 시작한다.

- 그렇게 얻은 돈으로 사치스럽게 궁궐도 짓고, 상아 침대도 사고, 고기도 배불리 먹고, 포도주도 취하도록 마셨다.

- 그러나 그로 인해 백성들은 바로 먹을 수 있는 식용 작물이 아닌, 필요 없는 환금 작물을 경작해야 했다.

- 그래서 수요 공급 법칙에 따라 필요한 식용 작물은 공급이 부족해서 값이 오르고, 직접 경작한 환금 작물은 공급이 많아져 값이 내려갔다.

- 그 결과 백성들은 경작한 환금 작물로 얻을 수 있는 식용 작물의 양이 급격히 줄어든다.

- 즉, 노동의 가치가 급락한다.

- 이러한 악순환은 이스라엘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 그 틈을 파고들어 주변 강대국인 이집트와 앗수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

- 그로 인해 이스라엘의 지배자도 비참하게 죽거나 노예로 끌려간다.

- 이렇게 이스라엘은 단기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선택한 거래 관계로 인해 장기적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반면에 이스라엘 지배자가 사랑을 선택했다면,

- 그래서 단기적인 관점에서 사치를 선택하지 않고, 세금을 백성에게 사용했다면,

- 물가가 안정되고, 그로 인해 백성의 자생력은 더 올라가서,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있게 되고, 결국 국력이 더 강해진다.

- 그러면 자연스럽게 지배자의 생활 수준도 올라간다.

- 그로 인해 전쟁 대응력은 더 올라가고, 어떤 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한 나라가 된다.

- 그러면 주변 국가가 협력을 도모하고, 협력을 통해 나라는 더 강해진다.

- 만약 이렇게 이스라엘이 단기적 유익을 절제하고 장기적 유익을 기대했다면, 나라도 지키고, 풍족한 생활도 누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도 지켰을 것이다.

물론 한 나라의 정치 외교가 이렇게 단순하진 않지만, 지배자의 선택이 나라 전체의 흥망을 결정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음으로, 본문에 나온 우상 숭배의 예를 들면,

-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인 팔레스틴에 정착한다.

- 유목 생활 때는 맛나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도우심으로 생활했다.

- 게다가 계속되는 이동 때문에 잉여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유 욕구 자체가 없었다.

- 그러나 정착한 후에는 눌려 있었던 소유 욕구가 되살아났다.

- 남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는 잉여 생산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그동안 그래왔듯, 하나님이 주신다.

- 그러나 필요한 것 이상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외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 그때 필요한 존재가 우상이다.

아마도 우상은 가나안 토착민과 주변 국가로부터 전해졌을 것이다.

- 특히 우상 중에서도 농사 관련 우상인 해 신, 비 신, 땅 신 등을 받아들였다.

- 그 신들을 통칭해서 '바알'이라고 부른다.

- 성전에서 율법에 따라 드리는 제사는 그것대로 하면서, 보험으로 바알도 동시에 섬겼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우상 숭배 초기에는 효과를 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 그 효과가 실제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플라시보 효과였을 것이다.

- 대부분 종교에 심취하는 경우가 그렇듯, 주변 사람의 권유로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만, 처음에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다.

- 그러나 종교 의식에 참여한 사람 중에 일부에게 때마침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나고,

- 그것이 알려져서 더 많은 사람이 열정적으로 종교 의식에 참여하여,

- 같은 확률의 우연이지만, 모집단이 커지면서 수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기적을 경험한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하나의 종교가 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 처음의 열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든다.

-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되는데,

- 종교에 열정을 들이는 동안 직접적으로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제물로 '투자'한다.

- 이 제물이 열 배, 백 배로 돌아올 것이란 기대로 말이다.

- 동시에 간접적으로는 종교에 소모하는만큼 농사를 소홀히 하게 된다.

-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재산은 축나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남보다 강해지려는 욕망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는 끊어진다.

- 그래서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도움을 주변으로부터 받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긴다.

- 가나안 정착 이후,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해와 비로, 하나님이 주신 필요한 만큼의 소출로 부족함 없이 먹고 살았는데,

- 우상 숭배로 재산 탕진하고, 도움을 받을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모든 것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려진다.

그것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한다.

[렘 3:2~3] ・・・・ 너는 이렇게 네 음행과 악행으로 이 땅을 더럽혀 놓았다. (3) 그러므로 이른 비가 오지 않고, 늦은 비도 내리지 않는데, 너는 창녀처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하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 재산 축적의 욕구 때문에 우상 숭배를 했고, 그로 인해 땅이 더럽혀져서,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이른비와 늦은비조차 내리지 않게 된다.

- 여기서 이른비와 늦은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징한다.

[렘 3:23~24] 옛부터 우리 조상이 애써서 얻은 모든 것을, 그 수치스러운 우상이 삼켜 버렸습니다. 우리 조상이 애써 모은 양 떼와 소 떼와 아들과 딸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 이렇게 단기적 관점에서 재산 축적 욕구로 인해 결국 장기적 관점에서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필요한 것 이상을 얻으려 하지 않고, 대신에 사랑을 선택했다면,

- 하나님으로 인해 필요한 것이 충분한 안정된 삶에 만족했을 것이고,

- 우연히 얻은 잉여 생산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 그것을 축적하여 남보다 더 강해지려 하기보다,

- 사랑하는 이웃과 나누어 모두가 안정된 공동체를 이루었을 것이며,

- 안정된 공동체 속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의 관계는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필요한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이 주신 안정된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며 살았을 것이다.

- 이렇게 단기적 유익을 포기하고 장기적 유익을 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계획하신 인류의 모습이다.

- 또한 종말 이후 살아가게 될 인류의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예를 들면,

- 장기적 관점에서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평가한다면,

- 거래를 잘해서 축적을 잘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겠는가,

- 사랑을 잘해서 나누는 것을 잘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겠는가.

물론 많은 것을 축적해서 더 많은 것을 나누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 이 주장에는 '더 많은' 것을 나누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 이 전제 역시 전형적인 거래의 사고 방식이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예수님 역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 예수님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었다.

- 변변한 제자들을 모으지도 못했고, 책도 가르침도 남기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것은 단 한 순간도 거래하지 않고, 사랑만 하셨던 삶 그 자체이다.

- 아무것도 축적하지 않아서 가지신 것은 몸 밖에 없었지만,

- 하나 남은 몸마저 나누셨던 사랑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겨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 하나라도 더 모으려고, 혹은 지금 가진 것이라도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 거래를 통해 소유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 현재의 축적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많이 모아서 나누겠다는 핑계로 사랑을 무한정 미루고 있다.

이것이 단기적 유익에 매몰되어 장기적으로 치명적인 손해를 입고 있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 이러한 삶의 끝에는 반드시 나라의 멸망과 우상 숭배로 인한 파멸과 같이 비참한 결말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하나님은 돌아오라! 고 애절하게 외치시는 것이다.

[렘 3:14] 나를 배신한 자녀들아,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의 보호자다. 내가 성읍마다 한 사람씩, 가문마다 두 사람씩 택하여, 너희를 시온 산으로 데려오겠다.

[렘 3:22] 너희 변절한 자녀들아, 내가 너희의 변절한 마음을 고쳐 줄 터이니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렘 4:1]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 눈앞의 작은 유익 얻으려고 귀중한 인생 전체를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인생을 되찾아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애절하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 마치 차도로 튕겨 나간 공 하나 주우려고 양옆 전혀 살피지 않고 오로지 공만 보고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애절하게 부르는 부모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

- 첫째로, 14-18절에서 회개하고 돌아올 때 누릴 영광을,

- 둘째로, 3:21-4:4절에서 회개의 대가를 알려준다.

 

첫째로, 회개의 영광은 역시 '관계'이다.

- 회개 이후 '그 때'의 모습이 16, 17, 18절에서 세 가지로 표현한다.

- 첫째로, 언약궤가 사라지고,

- 둘째로, 언약궤를 대체한 예루살렘으로 모든 민족이 모이며,

- 셋째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하나 되는 것이다.

세 가지가 의미하는 바를 정리하면,

- 가장 먼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며, 

- 그 결과 둘 간의 관계도 회복하여 하나 된다.(셋째)

-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상징했던 언약궤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 이스라엘 공동체가 언약궤를 대체한다.(둘째)

- 그렇게 하나 된 이스라엘 공동체는 존재 자체로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고,

- 모든 민족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다.(첫째)

이 예루살렘 공동체가 지금의 교회를 상징한다.

- 교회가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 되면,

- 사람들이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 그 하나님을 잘 알기 위해 교회로 모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회개가 주는 최고의 영광은 관계이다.

- 먼저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관계 회복이고,

- 다음으로는 공동체로 인한 온 인류의 관계 회복이다.

우리의 회개가 그 인류의 관계 회복이라는 영광스러운 사건을 일으킨다.

 

둘째를 해석하기 전에, 21-25절이 아리송하다.

- 이스라엘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정말로 이스라엘이 회개하며 했던 고백으로 보면,

- 4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외침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 이미 돌아온 사람에게 왜 다시 돌아오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21-25절은 이스라엘이 실제로 고백한 것이 아니다.

-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고백한 것으로,

-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의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한 것이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감사와 찬양이 아닌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회개의 대가는 '거래 포기'이다.

- 21-25절에서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상 숭배의 수치과 부끄러움을 지적하고,

- 4:1-4절에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통해 우상 숭배를 포기하라고 경고한다.

그런데 이미 말했다시피, 우상 숭배 문제의 본질은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다.

- 거래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문제이다.

- 그래서 우상 숭배의 문제를 지적할 때 재산의 탕진을 언급한 것이다.

[렘 3:24] 옛부터 우리 조상이 애써서 얻은 모든 것을, 그 수치스러운 우상이 삼켜 버렸습니다. 우리 조상이 애써 모은 양 떼와 소 떼와 아들과 딸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 단지 우상 숭배는 거래 사고 방식이 발생시키는 대표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거래 사고 방식이 재산을 탕진하게 하냐?

- 단기적 관점이 아니라 장기적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 거래 사고 방식 속에서 지배적인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을 욕망하게 되고,

- 욕망을 채우면 채웠기 때문에, 채우지 못하면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거래에 더 빠져든다.

- 그로 인해 사람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끊어지고,

- 결국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던 필요한 것조차 공급받지 못하고 인생을 탕진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래를 포기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 거래 사고 방식을 포기하고, 지배적 위치로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잉여 재산 축적 욕구를 포기하고, 필요한 것 이상을 갖기를 포기하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 그래야 사랑의 관계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 그럴 때 거래 관계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람 중에 하나님이 끼여 계신다.

- 우리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 같은 모습을 하고서 말이다.

[마 25:34~36]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마 25: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상 숭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결론 - 장기적 관점으로 살자.

지금까지 말한 신앙을 한마디로 하면, 장기적 관점으로 살자. 이다.

- 장기적 관점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이다.

- 단기적 관점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 마치 어린 아이가 공을 잡기 위해 차도로 무작정 뛰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 단기적으로 공을 얻기 위해 장기적으로 평생을 내던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장기적 관점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적다.

- 왜냐하면 단기적 유익의 매력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장기적 유익은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쉬운 예로, 야식, 패스트푸드, 인스턴트, 튀김이 안 좋다는 것을 알지만, 먹고,

- 채소 섭취와 운동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하지 않는다.

- 맛있으면 아무거나 먹고 핸드폰 보다가 잔다.

- 우리는 공 잡으러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비웃으면서, 똑같이 살고 있다.

- 아이는 몰라서 그런 것이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안 하니, 더 어리석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 여기서 회개란,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등 복잡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 단지 차분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철저히 이성적으로 내가 유혹에 사로잡힌 단기적 유익이 뭔지, 그로 인해 내가 잃어버린 장기적 유익이 뭔지 구분하는 것이다.

- 이를 통해 한 걸음이라도 단기적 유익을 포기하고, 장기적 유익에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울며불며 하는 감정적 행위가 아니다.

-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이성적 행위이다.

- 엄격하게 계산하는 행위이다.

- 그래서 단기적 유익이 실제로는 얼마나 손해인지, 반대로 장기적 유익이 실제로는 얼마나 큰 유익인지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회개는 이런 것이다.

- 차분히 우리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재설계하는 것이다.

- 그래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거래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럴 때 더 이상 우상 숭배와 같은 헛된 것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에게 참된 유익을 주시한 하나님께 매몰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