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03) 2:1-19 하나님을 떠난 결과 - 원수의 노예

안승준 2021. 9. 18. 14:21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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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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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 사랑의 관계만 맺고, 거래 관계는 끊어야 하는가?

- 거래가 필요한 사람과는 거래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사람과는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적당히 살면 되는 것 아닌가?

- 극단적으로 양자택일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취사선택하면 안 되는 것인가?

같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 우리는 정말 세상과의 관계는 끊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맺어야 하는가?

- 일상 생활에서는 세상의 원리대로 살고, 신앙 생활에서는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 수는 없는가?

- 양자택일하지 않고, 취사선택하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에 있어서, 융통성 있는 취사선택이 아니라 극단적인 양자택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 신앙 생활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도 오직 하나님의 원리대로 살아야 한다.

- 인생 전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채워져야 한다.

- 마치 배우자와 결혼할 때, 취사선택할 수 없고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만약 배우자를 취사선택하여, 집에서는 A를 선택하고, 회사에서는 B를 선택했다면, 외도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해서 그렇지,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 여기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어렵다.

- 너무 거룩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관계로 바꿔보자.

- 거래 관계와 사랑의 관계도 과연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 신앙 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도 오직 사랑의 관계로만 살아야 하는가?

- 과연 거래 관계를 맺었다면, 그것을 외도로 볼 수 있는가?

- 인생에서 누구와도 거래하면 안 되는 것인가?

- 편의점에 가서도?

이 질문은 우리가 좀 더 편하게 비판할 수 있다.

- 현실과 더 맞닿아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의문과 비판 거리를 생각할 수 있다.

- 편의점에 가서도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원리로, 거래가 아닌 사랑으로 관계 맺어야 하는가?

-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의 비판 때문이다.

- 포인트는 세 가지이다.

- 첫째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다.(4-9절)

- 둘째로, 하나님 대신에 우상 숭배를 했다.(10-13절)

- 셋째로,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냐면, 앗수르와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이다.(14-19절)

이 세 가지는 익숙한 주제이다.

- 그래서 대부분 잘 아는데, 딱 한 가지 낯선 개념이 있다.

- 바로 둘째에서 셋째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 왜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 했다는 이유로, 현실에서 앗수르와 이집트의 노예가 됐냐는 것이다.

- 이 지점에서 종교가 정치로 전환된다.

여기에서 신앙과 일상이 연결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교를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 그래서 신앙과 일상이 연결되지 못하고, 분리된 채 사는 것이다.

- 신앙과 일상이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 그 결과 신앙과 일상이 양자택일로 통합되지 않고, 취사선택 되어 일관성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과 일상의 연결점을 찾으면,

- 그래서 신앙의 원리가 일상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면,

- 우상 숭배가 왜 이스라엘을 노예로 전락시켰는지 알게 되고,

- 또 우리의 일상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게 되며,

- 결국 노골적인 거래의 장인 편의점에 가서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까지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래서 우리 삶이 통합되어, 일관성 있는 원칙으로 살 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네 단락으로 나뉜다.

① 1-3절: 심판의 전제 - 과거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친밀했던 관계 회상

② 4-9절: 심판 선포 -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죄 고발

③ 10-13절: 심판의 원인 - 죄의 원인은 우상 숭배

④ 14-19절: 심판의 결과 - 죄로 인해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노예로 전락

-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친밀했던 관계를 회상하며, 그 관계를 기준 삼는다.

-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제 그때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에서 해방시키셔서,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는 광야에서 돌봐주셨으며,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해주셨음에도 말이다.

- 이스라엘은 어처구니없게도, 헌신적으로 돌봐주셨던 하나님을 떠나서, 신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신, 혹은 전혀 쓸데없는 우상을 숭배한다.

-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자신을 또다시 노예로 전락시킨다.

- 그렇게 이스라엘이 노예가 되어 고통스럽게 될 것이라는 심판 메시지가 예레미야에 임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노예로 전락했는가?

본문은 그 원인을 우상 숭배 딱 하나만 꼽는다.

[렘 2:8] 예언자들도 바알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우상들만 쫓아다녔다.

[렘 2:11]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렘 2:13]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선택한 우상 숭배 때문에 또다시 노예가 되는 재앙을 자청했다고 책망한다.

[렘 2:1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

[렘 2:19]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너 스스로 나에게서 돌아섰으니, 그 배신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고서 깨달아라.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따라서 결국 남은 질문은 하나다.

- 어떻게 우상 숭배 때문에 이스라엘은 노예가 되었을까?

- 어떻게 신앙의 영역에서 생긴 문제가 현실의 문제를 만들었을까?

 

먼저 오답이다.

- 우리가 배워온 답은,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분 나쁘셨고,

- 그래서 현실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으셨고,

- 그래서 강한 나라가 침략해왔고,

- 그 결과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 그러니 우상 숭배 하지 말아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 그래야 현실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 그래야 어디 가서 노예처럼 기죽지 않고, 주인처럼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전형적으로 거래를 기반한다.

- 하나님을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정죄하신 것이다.

- 그들의 행위가 율법을 심각하게 위반했기 때문이 아니다.

-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게 지켰다.

- 그런데 그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서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거래 관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래 관계로 생각할 때 생기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그것이 우상 숭배이다.

도대체 거래 관계와 우상 숭배가 무슨 상관이냐?

- 거래 관계 사고방식은 선택 기준을 유익으로 한다.

- 유익을 주면 좋은 선택이고, 유익을 안 주면 나쁜 선택이다.

- 여기에 더해, 유익을 많이 주면 좋은 선택이고, 유익을 조금 주면 나쁜 선택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고방식으로 종교를 바라보자.

- 도움을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는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신을 최대한 많이 섬기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이겠는가?

- 단순하게 말해서, 10만 원을 하나님 한 분께만 헌금하는 것과 1만 원씩 열 분의 신께 헌금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인가?

- 한마디로, 분산 투자와 집중 투자 중에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이냐는 것이다.

- 당연히 분산 투자이다.

- 그래야 유익을 얻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래 관계 사고방식에서는 필연적으로 우상 숭배를 하게 된다.

- 그것이 투자 대비 수익이 높기 때문이다.

- 같은 헌신으로 인생에서 더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우상 숭배를 한 것이다.

- 이미 알겠지만, 이스라엘은 한 번도 성전 제사를 멈춘 적이 없었다.

- 그들은 언제나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가 우상 숭배를 했다고 정죄했을 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렘 2:23] 네가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고, 바알 신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느냐?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뿐이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 그러나 실상은 '필요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우상을 섬겼다.

- 가뭄이 들 때는 비 신을,

- 전쟁 때는 전쟁 신을,

- 이집트의 지배를 받을 때는 이집트의 신을, 

- 앗수르의 지배를 받을 때는 앗수르의 신을 섬겼다.

- 그것에 마음을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 마치 외도한 것을 들킨 배우자가 몸은 줬어도 마음만은 당신 것이라고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 그것을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거래 관계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재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그 사람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도대체 거래와 노예가 무슨 상관이냐?

- 거래는 재화의 이동으로서, 재화를 기반으로 한다.

- 그런데 재화는 시장에서 가치가 평가된다.

- 그래서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소유한 재화의 가치로 평가한다.

- 그 결과 사람의 가치가 재화를 기준으로 수직 배열된다.

- 따라서 거래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수직 관계를 맺게 된다.

- 여기에서 바로 주인과 노예가 발생한다.

수직 관계에서 폭력과 관계 파괴는 필연적이다.

- 수직 관계의 어느 계층에 있건, 유익을 얻기 위해 아랫 사람을 수탈하고 윗 사람에게 아부한다.

- 동시에 아랫 사람의 아부를 빌미로 더 수탈하고, 윗 사람의 수탈에 저항한다.

이스라엘의 예를 들어보면,

- 이스라엘 상층부는 부를 늘리기 위해 하층부인 농민들을 세금으로 수탈한다.

- 동시에 강대국에 아부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사치품(포도주, 귀금속 등) 생산을 늘린다.

- 이러한 아부를 통해 이스라엘 상층부는 침략당하지 않고 권력을 유지한다.

- 그것을 위해 상층부는 하층민에게 세금을 농작물이 아닌 사치품으로 내도록 한다.

- 그래서 농민들은 농작물 대신 사치품을 생산한다.

- 그 결과 농작물 생산이 줄어 가격이 올라가고, 농민들의 삶은 어려워진다.

- 또 그 결과 농민들의 생산성이 내려가고, 이는 고스란히 이스라엘 상층부의 빈곤으로 이어진다.

- 그래서 강대국에 아부하지 못하게 되어, 강대국의 침략을 당한다.

- 그래서 이스라엘 상층부는 침략을 막기 위해 하층민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한다.

- 그러다가 수탈할 것이 없어지면 전쟁에서 지고, 농토는 황폐해져서 하층민 삶은 더 어려워진다.

- 하지만 상층부는 강대국에 아부해서 어떻게든 삶의 질을 유지한다.

- 그러면서 오히려 상층부는 강대국을 대신해 하층민을 수탈하는 앞잡이가 된다.

그래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렘 2:34~35] 너의 치맛자락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죄없는 피가 묻어 있다. 그들이 담을 뚫고 들어오다가 너에게 붙잡힌 것도 아닌데, 너는 그들을 죽이고서도 (35) '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일은 하지 않았다' 하고 말한다. 네가 이렇게 죄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심판하겠다.

- 실제로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다.

- 죽을 수밖에 없도록 수탈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자신들에게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것이다.

- 수탈했던 것은 단지 침략군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라엘에서도,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에서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일하게 일어난다.

- 일부 부정한 개인 때문에 일어난 문제가 아니다.

- 거래를 통해 수직 관계를 맺으면 일어나는 필연적인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우상 숭배와 노예 발생은 본질적으로 같다.

- 거래 관계 사방식 때문이다.

- 우상 숭배와 노예 발생은 거래 관계가 낳은 쌍둥이 자녀일 뿐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노예로 만들었는가?

이스라엘의 농민을 누가 노예로 삼았는가?

- 이스라엘을 누가 강대국의 노예로 만들었는가?

- 모두 이스라엘 자신이다.

- 유익을 얻기 위해 거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은 노예가 되는 재앙을 이스라엘이 자청한 것이라고 정죄하는 것이다.

[렘 2:16~17] 멤피스와 다바네스의 자손도 너의 머리에 상처를 주었다. (17) 주 너의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여 주는데도, 네가 주를 버리고 떠났으니, 너 스스로 이런 재앙을 자청한 것이 아니냐?

또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그 배신이 너를 징계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렘 2:19] 네가 저지른 악이 너를 벌하고, 너 스스로 나에게서 돌아섰으니, 그 배신이 너를 징계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과 나를 경외하는 마음이 너에게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고통스러운가를, 보고서 깨달아라. 나 만군의 주 하나님의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다.

- 그냥 보고만 계신다.

-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이스라엘은 자신이 자신을 벌한다.

- 자신이 초래한 재앙에 스스로 고통스러워 울부짖는다.

 

결론 - 우리도 노예이다.

만약 우리가 거래하고 있다면, 우리도 분명히 노예이다.

- 단지 노예 생활에 너무 익숙해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 노예 생활 안에서 소소한 재미에 만족할 뿐이다.

- 이렇게 사람은 적응한다.

- 마치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앞에서도 삶의 작은 보람을 느끼며 안주할 수 있듯이 말이다.

우리도, 이스라엘 상층부가 그랬던 것처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 윗 사람의 노예로 아부하고, 아랫 사람의 주인으로 수탈한다.

- 윗 사람의 용변을 처리해주면서도 웃고, 아랫 사람의 피를 손에 묻히면서도 웃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 이 비극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냐?

성경의 가르침이 언제나 그렇듯, 없다. 

-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도우심 뿐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도와주시냐?

먼저 사랑하심으로 사랑의 관계의 참맛을 알게 하신다.

- 마치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로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광야에서 돌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데리고 가셨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거래가 아닌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전인격적인 방법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주변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신다.

- 율법을 주셔서 앞에서 끌어주시듯, 사랑할 수 있는 외적인 상황을 주신다.

- 동시에 성령으로 감동하게 하셔서,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동기를 주신다.

그런데 사랑하는 과정에 문제가 생긴다.

- 게임이론으로 설명했듯, 100명 중의 99명이 사랑해도 단 1명이라도 거래하면, 100명의 공동체는 한순간 깨진다.

- 그래서 세상에는 사랑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게 시도해도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 이렇게 사랑의 관계는 시작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개입하신다.

- 비록 한 명이 배신해서 99명이 심각한 피해를 입어도, 99명을 먹여주시고 입혀주신다.

- 그래서 99명이라도 계속해서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게 보호해주신다.

- 동시에 그 한 명을 정죄하셔서, 죄를 깨닫고 돌이키게 하신다.

- 그러나 돌이키지 않으면, 공동체에서 배제하신다.

그 한 명이 하나님에게 완전히 배제되는지, 아니면 다시 돌아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음으로 계속해서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의 공생애이다.

-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다.

- 제자들에게 각종 기적을 보이셔서, 사랑의 참 기쁨을 알게 하셨다.

- 그래서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했다.

-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사랑을 보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배신자 유다가 나타났다.

- 그로 인해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 그래서 제자들은 모두 배신자로 돌변해서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하셨다.

- 그 결과 심각한 피해를 입으셨다.

- 십자가에 죽으셨다.

- 그러나 죽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하셨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 죽으신 예수님을 살리셨다.

- 그래서 사랑을 지속하게 하셨다.

- 그러자 공동체는 회복되었다.

- 함께 모여 계속해서 사랑했고, 사랑의 공동체는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그렇게 확대된 공동체가 우리 미양 교회이다.

- 2000년 전 사랑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이스라엘에 있었던, 제자 공동체에 있었던 일련의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로 사랑의 공동체가 시작되고, 

- 누군가의 배신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피해가 회복되고,

- 그 결과 공동체가 회복되며, 

- 동시에 공동체가 확대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노예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 우상 숭배를 멈추고 하나님만 믿게 될 것이다.

- 더 이상 거래하지 않고, 사랑으로만 관계 맺을 것이다.

- 그래서 윗 사람에게 아부하지 않고, 아랫 사람을 수탈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상층부로 가면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래서 윗 사람에게 더 납작 업드려서 아부한다.

- 즉, 자유를 얻기 위해 더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꿈인지 안다.

-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고 해도, 여전히 노예에서 해방될 수 없다는 것을.

- 거래를 통한 수직 관계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노예라는 것을.

우리는 뻔히 알면서도 노예가 되는 재앙을 계속해서 '자청'하고 있다.

 

노예에서 해방되어, 재앙에서 벗어날 길은 사랑뿐이다.

- 물론 사랑의 과정에는 죽음까지 이르는 심각한 피해가 기다리고 있다.

-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함께 있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뿐이다.

- 그에게만 노예 해방이라는 구원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그러니 노예 해방의 약속을 믿고 함께 나아가자.

- 함께 끝까지 사랑하자.

- 그렇게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