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예레미야(01) 1:1-3 서론 - 예루살렘 주민이 포로로 잡혀갔다.

안승준 2021. 9. 4. 13:22

<미양교회 팟캐스트 양따양>

미양교회에서 했던 설교를 바탕으로 진솔하게 신앙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팟캐스트도 많이 들어주세요.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0233/

 

어린양을 따르는 어린양

예배 대신 예수님, 설교 대신 성경, 건물 대신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미양교회가 만드는 방송입니다.토끼와 개구리가 진솔하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

www.podbbang.com

 

 

이것이 예레미야서가 쓰인 이유이다.

- 예루살렘 주민이 포로로 잡혀갔다.

-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했다.

[렘 1:3] 시드기야 왕 십일년, 그 해 다섯째 달에 예루살렘 주민이 포로로 잡혀 갔다.

-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만 해도, 남유다가 남아 있었다.

- 그래서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다윗 언약)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었다.

-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

- 영원불변할 것이라고 믿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 이는 당시의 가치관 중에 가장 근원적인 가치관이 파괴된 순간이었다.

- 마치 '사람의 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절대 불변의 가치관이 깨져서, 아무나 죽여도 상관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죽는 아수라장 속에서 모든 사람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는 상황과 같다.

-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파괴를 역사에서 찾자면,

-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될 때,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변화이며,

- 근대에서 현대로 전환될 때,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변화와 같다.

- 가장 근원적인 가치관의 변혁으로, 사고 방식, 생활 방식 등의 인류 문화 전체가 전환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혁 때문에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예레미야서이다.

- 완전히 전환된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도록 하며, 

- 그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하고 다짐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을 위해 단순히,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고, 기도하며, 말씀 보고 예배 드리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아주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차원에서부터,

- 집단적인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 그리고 세계적인 외교적 차원까지 다각도로 접근한다.

그것을 통해 왜 이스라엘이 멸망했는지, 

-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가만히 보고만 계셨는지, 

- 결국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문제, 즉 죄는 무엇이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를 통해 혼란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안정시킨다.

- '지금까지 잘해왔어. 지금은 좀 힘들지만, 앞으로 잘될 거야.'와 같은 헛된 소망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

- 이는 거짓 예언자들이 했던 말이다.

- 예레미야는, 혼란을 야기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를 밝힌 후,

-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멸망 뿐이었음을 설득하고,

-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님은 지금도 이스라엘을 지키시며, 앞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확인한 후,

-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요청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 현실에 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 주어진 현실을 벗어나려고 헛된 힘 쓰지 말고,

-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 그래야만 포로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논리를 일제 식민지 역사에 빗대어 보면,

- 무조건 무장해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극단적 민족주의, 무장투쟁론도 아니고,

- 일본에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식민사관도 아니며,

- 그 중간의 어디쯤도 아니다.

- 즉, 현실에서 분리되는 것도, 현실에 타협하는 것도, 분리와 타협의 중간도 아니다.

-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에 저항해서, 세상을 뒤바꾸려는 노력도 부정한다.

- 동시에 세상에 안주하고 적응해서, 세상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적당히 살려는 노력도 부정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지만,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 바벨론에 끝까지 저항하여 이집트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도 비판하고,

- 평생을 바벨론 사람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포로된 것에 적응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비판한다.

- 바벨론 포로에 순응할 것을 요청하며,

-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날을 소망하라고 요청한다.

- 이는 마치 집 안에 살면서 집 밖에 살라는 말 같이 모순처럼 들인다.

- 그 의미는 알겠으나, 실현은 불가능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결국 또다시 관계이다.

- 하나님은 이 모순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관계를 통해 성취하셨다.

이스라엘은 관계를 저버렸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겼다.

- 또 사람과의 관계도 끊겼기에, 사람이 사람을 지배, 수탈, 도둑질, 매춘을 했다.

- 그렇게 얻은 돈으로 상아 침대에 누워 비싼 포도주를 마시는 사치에 빠졌다.

- 그것을 위해 부정부패와 뇌물이 난무했다.

이러한 악행이 쌓여, 한 국가의 자생력이 떨어지니, 강대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 하지만 강대국은 더 큰 조공을 요구했다.

- 조공을 바치느라 더 큰 수탈을 했다.

- 그래서 백성들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 그러면서도 부자들의 사치는 지속하였다.

- 그 결과 국가는 유지되었지만, 생존력은 더 떨어졌다.

당연하게도 그런 국가는 결국 멸망한다.

-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다.

- 바벨론이 침략한 것은 맞지만, 바벨론 때문에 멸망한 것이 아니다.

- 자멸한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다시 관계를 요청하신다.

- 이스라엘은 나라 찾기 위해 힘 쌓겠다는 핑계로 거래 관계를 지속하려 했다.

- 또다시 이집트에 가서 손을 벌린다.

-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 나라 찾기를 포기하라고 말씀하신다.

- 이집트를 의지하지도 말고, 바벨론에 가서도 반란을 일으킬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 나라 찾기가 하찮기 때문이 아니다.

- 그래야 주변 사람을 나라 찾기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야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람들과 관계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포로 상태, 즉 새로운 광야 생활을 시작하신 것이다.

나라 찾기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을 주신 것이다.

- 그래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했듯이, 바벨론에서 관계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 그러면 광야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듯이, 바벨론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갈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포로라는 특별한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

-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

- 이스라엘은 점차 관계를 회복한다.

- 외부 상황이 어렵기 때문에 내부 사람들끼리 더 힘을 모으고 의지하여 관계를 맺어간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더욱 선명해진다.

- 서로 사랑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된다.

- 반면에 바벨론은 관계를 저버린 채로 살아가다가,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자멸한다.

- 그런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 진다.

- 그렇게 정체성을 회복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 회복된 약속의 땅에서, 회복된 성전을 다시 쌓고,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살 게 된다.

이것이 관계라는 본질이 멸망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순응하면서도 타협하지 않았고, 바벨론의 거래 관계에 저항하면서도 바벨론을 벗어나지 않았다.

- 바벨론 안에서 머물면서도, 바벨론과 구분되어 철저하게 관계로 살았다.

- 이들은 관계를 통해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분되는' 모순을 성취했다.

그렇게 다른 것에 시선을 두지 않고, 독립하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관계에만 집중했을 때, 

- 이스라엘은 정체성도 회복하고, 

- 독립도 했으며, 

- 사람들 간의 유대감도 깊어지고, 

- 국가 자생력도 강해졌으며,

-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도 회복했다.

- 그 결과 포로에서 귀환하여, 고향 땅 예루살렘에서, 재건된 성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리며, 사람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 물론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또 변질되어 다시 성전이 파괴되지만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신다.

 

그렇다면 이 멸망 선포가 왜 예레미야에게 맡겨졌나?

'그는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의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 첫째로, '베냐민 땅 아나돗 마을' 출신은 실로 성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 둘째로, '제사장 출신인 힐기야의 아들'은 북이스라엘 출신임을 뜻한다.

 

실로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성소이다.

-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정복 전쟁을 마친 후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 이곳에서 약 300년간 제사를 지냈다.

[렘 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두었던 실로에 있는 내 처소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내가 그 곳을 어떻게 하였는지 보아라.

그런데 제사장 사무엘이 다스렸던 시기에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난다.

-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온다.

[삼상 4:3] 이스라엘의 패잔병들이 진으로 돌아왔을 때에, 장로들이 말하였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가 블레셋 사람에게 지도록 하신 까닭이 무엇이겠느냐? 실로에 가서 주님의 언약궤를 우리에게로 모셔다가 우리 한가운데에 있게 하여,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하여 주시도록 하자!"

- 이 때 타락한 제사장으로 유명한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진다.

-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지켜주지 않았다.

- 더 심각한 것은, 언약궤도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엘리 제사장도 죽는다.

- 그리고 실로 성소도 파괴된다.

 

이것이 실로 성소가 갖는 의미이다.

- 두 가지 모순된 의미가 있다.

-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정착해서 제사를 드렸던 장소로서, 약속 성취를 의미한다.

- 하지만 동시에 언약궤, 제사장, 성소가 모두 파멸된 장소로서, 약속 파기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심과,

- 동시에 하나님은 관계를 저버린 이들에게 이미 성취된 약속도 파기하신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께 그만큼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실로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이다.

- 한 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본 사람이다.

- 관계가 신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선조들에게 생생하게 전해 들은 사람이다.

- 하나님과의 관계 그 자체가 아닌 하나님의 주변 것을 신앙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유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멸망을 예언할 수 있었다.

- 남유다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제사 의식을 자랑하며 구원의 소망을 품었다.

- 하나님과의 관계는 저버린 채 말이다.

- 하지만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제사에서, 한때는 하나님 약속이 성취되었지만 지금은 파괴되어 사라진 실로와 북이스라엘을 보았다.

- 그래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남유다의 멸망을 예상했다.

 

물론 예레미야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것이다.

-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 그러나 그런 기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는 이미 남유다의 멸망을 알았을 것이다.

- 예레미야가 바른 신앙을 가졌고, 관계가 중요한 것을 알았으며, 남유다의 실상을 알았다면, 멸망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예언은 이런 것이다.

- 말도 안 되고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아무런 원칙 없이 세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폭군이 아니다.

- 하나님은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일관되게 다스리신다.

- 그 원칙은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은 예상할 수 있다.

- 언제나 사랑 없는 관계의 파괴와 사랑의 관계의 재창조를 선포하는 것이다.

- 예레미야의 예언도 이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같다.

따라서 우리도 예언할 수 있다.

-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용하려는지 본다.

- 그들은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켜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실 것이다.

이 예언은 2500년전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도, 2000년전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예언이다.

 

결론 - 모든 현실 문제의 원인도 결국 관계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은 실로,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파괴된 원인과 똑같다.

- 관계 없음이다.

차이가 있다면, 성경에서는 모든 인과 관계 전체를 조망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 관계 없음이 어떻게 멸망으로 이어졌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반면에 우리는 삶을 그렇게 자세히 조망하지 못한다.

- 특별한 계기가 아니고서는, 관계 없음이 어떻게 내 삶에 문제를 일으켰는지 깨닫기 힘들다.

- 마치 이스라엘도 멸망 당시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 그래서 헛된 것 의지하며 허둥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안다. 

- 성경을 통해서 알았다.

- 모든 문제의 원인이 관계 없음이라는 것을.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① 결혼 문제

결혼 생활에 실패하는 이유는 뭐냐?

- 경제적인 문제, 성격 차이, 외도 등 다양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이다.

- 결혼의 결정적인 이유가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 돈, 외모, 성격 등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결혼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 그렇게 처음부터 잘못된 결정을 해놓고, 결혼 중에 문제가 생기면 변심했다는, 속았다느니 상대방 탓만 한다.

- 그러니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힘든 것은 시작부터 자명한 것이다.

따라서 결혼의 이유는 관계여야 한다.

- 상대방이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상대방 그 자체여야 한다.

- 상대방의 어떤 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방의 모든 것을 좋아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 그래야만 시간이 지나 상대방이 변할 때도 여전히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 만물은 변한다.

- 진짜 문제는 그것을 모르고 결혼 결정한 자신의 문제이다.

- 변할 것을 근거로 결혼을 결정한 것부터 문제이다.

- 관계 없이 결혼한 것이 진짜 문제이다.

② 시험 성적

시험 성적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이유도 관계 때문이다.

- 그렇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 첫째로, 공부를 제대로 안 했기 때문이다.

- 둘째로, 실력보다 너무 높은 성적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공부를 제대로 안 했냐?

-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또 그 이유는, 자기가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 또 그 이유는, 자기를 알려면 타인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 또 그렇게 자신을 몰랐기 때문에, 실력보다 너무 높은 성적을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를 맺으면, 자신을 알게 되고,

- 그러면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고,

- 그러면 모르는 것을 없애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 동시에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하여 기대 성적을 낮출 수 있다.

그러면 원하는 시험 성적을 얻을 수 있게 된다.

-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③ 질병 문제

암에 걸리는 이유도 관계 때문이다.

- 자신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욕망 때문이다.

- 자신의 생명보다 욕망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 그 욕망이 훨씬 하찮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암에 걸리면 후회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 죽음 앞에서 자신이 추구해왔던 욕망이 하찮게 보이기 때문이다.

- 인생을 낭비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헛된 욕망보다 관계를 추구하면,

- 우선 자신과 바른 관계를 맺어서 자신을 잘 돌볼 것이다.

- 그리고 바른 관계를 맺은 타인이 자신을 잘 돌봐줄 것이다.

- 그래서 암에 걸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암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후회하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감과 위로 속에서 충만해질 것이다.

- 위로해주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을 잘 보냈다는 만족감을 가질 것이다.

-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고, 후회 없이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문제도 결국 전부 관계 때문이다.

- 단지 복잡한 연결 고리가 드러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 시간, 기회, 기적, 지식, 경험, 인맥 등이 아니다.

- 오직 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과 관계 맺을 때, 우리는 문제로부터 건짐을 받게 될 것이다.

- 그것이 예레미야서가 그리고 성경 전체가 하는 말이다.